# < 024. 다른 길 >
불의 해일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이 진격했다.
불합리함의 결정체, 압도적인 폭력. 허나 용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수가 없어서, 더 이상 뒤가 없어서였다.
“모두 버티게!”
데르카인이 온 몸에 오러를 둘렀다. 갈빛의 서기가 거대한 방패를 만들어냈다. 그대로 파도를 받아냈다.
콰콰콰콰-
진짜 해일과는 달랐다. 뜨겁고 더욱 파괴적이다. 강한 충격에 한 줄기 선혈이 데르카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예 버티지 못하겠다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들은 썩어도 용사였기 때문이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정면, 데르카인이 도끼를 겨눴다. 철컥, 도끼자루 윗부분이 열렸다. 망치에서 도끼로 다시 마력포로 변한 무기가 주인의 마나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토해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섬광이 일렁였다. 불의 파도를, 공기를,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갈빛의 선.
콰아아아앙!
그대로 목표물에 당도해 폭발했다. 거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파도가 사그라들었다. 용사들이 간신히 한숨 돌렸다.
“고작 이 정도로 죽을 리 없네. 긴장 놓지 말게.”
“예.”
강민식이 오러를 이용해 몸에 붙은 잔불을 털어냈다. 빌어먹을 불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오러까지 쉽게 뚫어버릴 만큼 뜨거웠다.
“독 말고 다른 장기는 없나?”
“검술?”
“없군.”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연기속에서 불꽃이 폭사되었다.
수 백 개로 갈라진 염화의 창이었다.
“내 뒤로 오게!”
데르카인이 도끼를 조작하자 날이 더욱 커지면서 방패의 형상을 띠었다. 오러를 둘러 한층 강화시키고 그 뒤에 몸을 숨겼다. 다른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콰콰콰-
홍수에 휩쓸리는 바위처럼, 드워프들은 견뎌냈다. 하지만 그건 눈속임이었다. 불꽃 창으로 이루어진 비가 끝나는 순간, 김우진은 어느새 한 드워프의 앞을 점했다.
쩌엉, 불꽃과 뒤섞인 오러의 크기는 5m가 넘어갔다. 그대로 방패를 내리 찍었다.
─!
충격파가 퍼졌다. 부서진 오러의 파편과 불꽃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데르카인이 마력포가 김우진의 배후를 노리지만 다시 한 번 떨어지는 검격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
“커헉···!”
방패가 부서졌다. 드워프가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김우진은 굳이 용사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화려한 불꽃으로 이목을 끌고 드워프들을 한 명, 한 명 정리해 나갔다.
“이놈!”
데르카인이 마력포를 쏘며 그 뒤를 쫓았으나 느렸다.
“제기랄!”
강민식이 김우진을 막아섰으나 그의 독기는 불꽃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게 다섯의 드워프들이 쓰러졌을 때.
────!
오러와 오러가 충돌하는, 불꽃이 폭발하는 것과는 다른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차원의 장벽 쪽이었다. 그란시스가 갑작스레 일어난 스파크와 함께 튕겨져 나갔다.
“그란시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케르베로스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던 드워프들이, 어떻게든 김우진을 붙잡고 있고자 발악하던 드워프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란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다시 장벽으로 달려들었다.
그러길 잠시.
“···빌어먹을.”
욕을 입에 담았다.
“빌어먹을 세계수!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엘프 놈들!”
실패.
분노와 절규는 모두에게 절망을 선사하는 선언이었다.
* * *
차원의 방벽이란 일종의 담이다.
차원이라는 집을 지키기 위해 세운 드높은 벽. 허나, 담이기에 출입구는 존재한다. 열쇠가 없을 뿐.
차원의 방벽을 통과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당당하게 열쇠를 통해 드나들거나.
압도적인 힘으로 담벼락을 무너트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도둑처럼 문을 따고 들어가거나.
차원의 방벽을 열어 재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그란시스 드라막의 선택인 당연히 세 번째였다.
그에게는 열쇠도, 담벼락을 무너트릴 압도적인 힘도 없었다.
연옥에 갇힌 모든 용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파지지직-
눈을 감고 방벽 위에 손을 올렸다. 격렬하게 튀어 오르는 반탄력은 마법진이 빛을 발하면서 차츰 사그라들었다.
지금부터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나를 흘려보냈다. 견고한 방벽의 틈새를 파고드는 건 쉽지 않았다. 막대한 마나가 필요했고 영초와 마물의 부산물로 그린 마법진이 부족함을 보태주었다.
“···아직 멀었소?!”
고통스러운 비명이 귓가를 스쳤다. 전투나 얼마나 고된지는 짐작이 가지만 재촉한다고 해서 빨리 되는 게 아니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변수를 줄이고 성공하는 것 뿐이다.
‘찾았다.’
마나는 차분히 벽면을 훑었다. 드넓은 벽에서 좁은 문 하나를 찾는 건 그리 쉽지 않았으나 아예 못할 일도 아니었다.
방벽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틈새. 문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것이 방벽의 문이다.
열쇠 구멍은 따로 없다. 편의상 열쇠라고 표현했지만 그 정확한 형태는 그란시스도 알지 못했다.
허나, 흐름이라는 게 있다. 방벽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딱딱한 고체가 아니다. 유유히 흐르는 마나의 흐름이자 집약체다.
그 속에서 잠금 장치처럼 보이는 것을 찾았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란시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잠금 장치에 개입해 차원이 새겨놓은 법칙을 일그러트리고 방벽의 문을 열어야한다.
의지가 발하자 마법진이 더욱 빛을 발했다. 막대한 마나가 그의 몸을 통해 차원의 방벽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담을 지나 문으로. 문을 지나 잠금 장치로.
복잡하게 꼬인 우주의 법칙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완전히 해제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일개 피조물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비틀림이면 된다.
─!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접근에 방벽의 저항이 느껴졌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압박감에 그란시스가 신음을 삼켰다.
그의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허나, 웃었다.
되고 있다. 죽을 만큼 힘들지만 그가 15년 간 해온 연구가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
그의 신형이 튕겨져 나갔다. 진탕된 마나 로드가 대차게 꼬였다. 시커먼 피가 왈칵 토해졌다.
“그란시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동료 용사들의 걱정스러운 외침이 귓가를 스쳤지만 거기에 일일이 대꾸해줄 여유는 없었다.
“대체 어디서 다른 마나가···!”
잠금장치가 거의 다 해제되고 문을 조금이나마 열려는 순간, 또 다른 마나가 개입해 방벽을 뒤틀어 버렸다.
문은 다시 닫혔고 반탄력이 그를 밀어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급하게 방벽 앞에 섰다. 얼마 남지 않은 마법진의 마나를 이용해 다시 진입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말도 안 돼.”
잠금장치를 구성하고 있던 흐름이 변했다. 보다 강화되었다.
그란시스의 마법을 어그러트렸던 마나의 짓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개입한 마나에서.
은은한 숲의 향내가 났다.
* * *
- 삐?
홀로 남은 릴리가 자신의 이파리를 야금야금 뜯었다.
‘이파리 좀 그만 뜯어 먹어.’
‘아니지, 인간이 손톱 뜯어 먹는 거랑 비슷한 건가?’
‘오구오구, 많이 먹어. 어차피 네 나뭇잎이야.’
평소 같았으면 바로 날아왔을 잔소리가 오늘은 없었다.
- 삐이?
태어난지 고작 몇 달이 지났지만 릴리는 그 몇 달 동안 혼자 남겨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김우진이 찾아와 주었고 간혹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잠깐이었다. 김우진이 없으면 교도관이라는 존재들이 찾아와 그녀를 보살폈다.
릴리는 처음으로 무료함과 허전함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이파리를 뜯고, 벌레를 잡아먹고, 숲을 보살피고, 뿌리를 더 넓게, 깊게 퍼트리고.
‘얼씨구, 샌드웜을 가지로 꿰어 왔네?’
‘삐!’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그래, 못했다고 그러면 서운하니까 잘했다.’
그렇게 많은 일도 아니었다. 힘든 일도 아니었다. 그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일들이었다.
그 자연스러움에 녹아 옆에서 항상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마디씩 해주던 김우진의 부재는 제법 크게 다가왔다.
어째서인지 더 없이 친숙하던 하이엘프도 찾아오지 않았다.
김우진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아직 어린 세계수인 릴리는 본체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었다. 조금 더 자라난다면 모를까.
그래도 하이엘프의 기운은 건물 안에서 느껴졌다. 그녀를 찾아가 볼까 고민하던 그때, 릴리의 감각에 무언가 툭 걸렸다.
- 삐?
뿌리쪽이었으나 직접적인 접촉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릴리의 뿌리가 파고든 이 세계의 심처다.
차원을 보호하고 있는 방벽. 그곳에 침입자가 생겼다. 억지로 문을 열려고 한다.
- 삐이?
어떻게 해야 할까? 뿌리가 닿아 있어 조금 간섭할 수는 있지만 방벽의 주인은 릴리가 아니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간섭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 삐삐.
주인의 전언이 있었다.
‘문이 열릴 것 같으면 다시 닫아줘. 할 수 있어?’
릴리가 생각하기에 이곳의 주인은 김우진이었다.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근원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 김우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침입자들이 억지로 문을 열려고 한다.
김우진의 당부는 필시 지금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것일 터.
릴리가 뿌리를 더욱 뻗었다. 반쯤 열릴 기미가 보이던 문을 다시 닫고 더욱 강하게 옭아매었다.
- 삐이이이.
그 과정에서 막대한 힘이 소모한 릴리가 힘없이 가지 위로 떨어졌다. 나뭇잎 하나를 떨어트려 몸을 덮었다.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하이엘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삐···.
‘릴리가 그걸 막았다고? 잘했어, 너무 잘했어! 어유, 내 새끼.’
‘뭐 먹고 싶어? 영약 한 뿌리 줄까? 두 뿌리? 당연히 되지.’
영약을 양껏 먹는 행복한 단꿈에 빠져들었다.
* * *
“···세계수라고?”
짧은 몇 마디 외침이었으나 데르카인은 그 인과관계와 결과를 예측했다.
“···실패했나?”
“죄송합니다. 설마 세계수가 개입할 줄은···.”
“하하···.”
말도 안 돼.
실패라고?
그럼 우리는 왜···!
세계수? 그 망할 귀쟁이놈들이 통수를!
간신히 버티고 있던 드워프들이 허탈한 탄식을 내뱉었다.
‘미친, 실패라고? 세계수의 개입?’
강민식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언제나 확률이 존재한다.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단순히 능력 부족이나 준비 부족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수라는 돌발 변수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준 것이 제대로 작용할까?
의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 또한 세계수를 염두에 두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전제 자체가 흔들렸다.
‘아니야, 의심하지 말자.’
강민식의 시선이 빠르게 방벽을 훑었다. 방벽으로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고. 손을 대고 몸을 밀어 넣으면 된다고 했다.
눈치를 보며 한 걸음,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건 최후의 방법이었다.
보다 많은 죄수들과 함께 나가기 위해서 그들의 계획에 탑승했으나 모두 어그러졌다. 그러니 그건 폐기다.
‘지금 나가지 못하면 앞으로 평생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
경험을 쌓겠다는 안일한 생각은 진즉에 버렸다. 소장은 괴물이다. 세계수라는 돌발 변수로 인해 운 좋게 여기까지 왔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발생할 일은 없을 거다.
소장은 결코 두 번 당해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나가려면 지금이다. 붙잡힌다면 더 이상의 희망은 없을 지도 모른다.
콰아앙!
그란시스가 실패했든, 성공했든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소장의 관심이 드워프들에게 쏠린 지금이 기회였다.
강민식이 방벽을 향해 내달렸다. 이왕이면 그란시스의 마법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약해진 쪽으로.
“어디가.”
섬뜩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허공을 갈랐다. 다시 방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방벽과 그 사이에는 김우진이라는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어떻게?”
분명 드워프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어째서 방벽으로 달려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은 꽤나 꺼림칙해.”
2징벌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부터, 놈들의 권능이 들어간 구속구를 쉽게 해제하는 것까지.
“널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거든.”
“아니, 나는 그냥···!”
“그냥 닥치고 얌전히 쓰러져 있어.”
불길이 그의 입을 막았다.
거대한 참격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발악하듯 퍼부은 독기는 순식간에 잡아먹혔다.
“···씨발.”
강민식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 * *
“하하···.”
실패 사실이 알려진 뒤, 용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차라리 김우진이 애매하게 강했더라면, 더욱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을 거다. 김우진이라면 반드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김우진은 너무 강했다. 1 대 7임에도 일곱 명의 용사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작정하고 하나하나 격파를 시작하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길 수 없다는 공포와 희망이 없다는 절망이 그들을 엄습한 순간, 싸움은 이미 끝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 당신 하나 남았군요.”
모든 용사들이 쓰러졌다.
일곱 명의 드워프들도, 구속구를 모두 해제해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만들어준 강민식도, 뜻을 이루기 직전, 세계수가 개입했다며 패전보를 알린 그란시스도.
오직 한 명, 데르카인만이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서 있었다.
“···대체,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왜 여기에 갇혔는지는 자네도 알 것 아닌가! 죄가 없기에 나가려고 하는 게 그렇게 문제란 말인가!”
“그게 그렇게 억울하십니까?”
“그렇게 억울하냐고?”
크흐흐, 데르카인이 광인과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거대한 도끼가 화광에 반사되면서 빛을 발했다.
“자네는 모르겠지. 처음부터 용사가 되고 싶어서 용사가 된 자는 없네.”
용사란, 그저 재능이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재능이 뛰어나 신들의 눈에 띄어 소환된다.
“평소처럼 도끼로 미노타우르스의 대가리를 쪼개던 날이었지. 갑자기 하늘이 검게 변했네. 세상이 뒤집어졌지. 그리고 눈을 뜨니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더군.”
그를 소환한 신이 말했다.
재능이 뛰어나니 용사가 되어 이 세계를 구원해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고 세계가 멸망한다고.
“웃기는 소리지.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생판 모르는 차원 같은 거 알 게 무엇인가!”
하지만 거기에 데르카인의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말투만 사근사근할 뿐, 강압이고 강제였어! 난 살기 위해 싸웠네! 모르는 세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내 목숨을 걸었어!”
“모든 용사가 그럽니다.”
“그러니까!”
데르카인이 눈을 부릅떴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분노가 세어 나왔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어째서 우리는 용사가 되어 싸워야 하는 건가!”
“그건 저한테 따져봐야 해결책이 없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군.”
그럼에도 데르카인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모든 게 낯설고 원치 않는 용사행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라면 있었네. 동료가 생겼다는 것.”
그들은 험난한 여정 내내 큰 위안이, 힘이 되어주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낯선 이세계 생활도 할만 했다.
“···하지만.”
데르카인이 눈물을 흘렸다.
“내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네. 고생 끝에 마왕을 죽이면, 세상을 구하면 뭐하는가. 날 지지해주고 지켜주던 이들이 모두 죽어버렸는데. 난 또 다시 혼자가 되었는데!”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돌아가고자 했다. 자신의 세계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신에게 부탁했다. 세상을 구했으니 돌려보내 달라고.
“그랬더니 뭐라는지 아는가?”
“힘을 포기하라고 했을 테죠.”
“맞네.”
거부했다. 거부했더니 연옥에 가뒀다.
“그놈들은! 내게 남은 유일한 것을 가져가려고 했어!”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낯선 차원에서 그가 있었다는 증거였다. 동료들과 함께 쌓아올린 추억이었다.
“말해보게!”
그가 울분을 토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우리는 대체 무엇인지!”
핏발 선 눈으로 소리치고 절규했다. 오랜 세월 쌓인 분노는 활화산과 같았다.
“내가! 대체! 왜! 갇혀 있어야 하냔 말이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크흐흐, 힘, 힘. 그놈의 빌어먹을 힘.”
데르카인이 웃었다. 거의 울먹이다 시피하는 광소였다.
“용사들이 힘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것들이 신이라고 뻗대는 꼴이라니.”
“넋두리는 여기까지입니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정이 없는 자는 없다. 연옥의 죄수들에게도, 소장인 그에게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있다.
천천히 검을 겨눴다.
“당신의 사정을 일일이 다 봐주기에는 내 사정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당신들을 내보내면 상당히 곤란해지거든요.”
“이미 탈옥은 그른 것이겠지···?”
데르카인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셨습니까?”
“설마 세계수가 작용해서 차원 결계가 더 강화되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빌어먹을 귀쟁이놈들이 이래서 포기했었군.”
그렇다고 배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만약 세계수 때문에 안 된다고 말렸다고 한들, 들었을 데르카인도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입니까?”
“이대로 잡히면 어떻게 되나?”
“당연히 3징벌방에 갇히게 되실 겁니다.”
“그렇군.”
절로 상상되는 끔찍한 징벌방의 모습에 늙은 난쟁이는 진저리쳤다.
결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끔찍함을 견뎌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렇다면 나는 출소하겠네.”
“···예?”
또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아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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