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23. 폭거 >
연옥은 넓다.
단순히 감옥의 건물과 정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원을 벗어나 펼쳐지는 모든 것이 연옥이다.
연옥이란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이자, 죄수들을 가두는 차원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차원에 비해 작지만 엄연히 하나의 차원이다. 드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는 오직 감옥 하나뿐이니, 그 밖의 공지가 얼마나 넓을 지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대충 감이 온다.
일반인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벗어날 수 없다. 구속구가 착용된 용사라면 몇 달도 헤맬 수 있다. 그리고 구속구가 풀려난 10명의 용사들이라면.
···모르겠다.
전원이 구속구가 풀린 채 정원을 벗어난 경우는 처음이었다. 필사적으로 질주하고 있을 테니 속도도 만만치 않을 거다.
“어디로 향했을까.”
연옥이 넓은 것은 김우진에게도 해당이 된다. 강한 것과 작정하고 도망치는 사람을 찾는 것은 또 다른 분야다.
“그만.”
끼잉-
낑-
머리를 박고 있던 다섯 개의 머리가 불쌍한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처음에는 싸우다 진 줄 알았다. 두 마리의 마수에게 열 명의 용사들을 상대로 승리하라는 건 무리라는 것을 알기에 수고 했다고 개껌이나 하나씩 주려고 했다.
하지만 상처 하나 없는 둘의 모습에, 마물의 피 냄새가 지독한 원반을 두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모습에 죄수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파악했다.
“일단은 탈옥수들을 찾는 게 우선이라 여기까지 한다. 덕구, 이리 온.”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짖으며 달려왔다. 김우진이 미리 챙겨온 반쯤 부식된 구속구를 들이밀었다.
“냄새 맡아봐.”
커헝?
코를 가져다 댔던 덕구가 구속구에서 느껴지는 독기에 주춤거렸다.
“어떻게, 쫓을 수 있겠어?”
멍멍멍!
세 개의 머리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기로 인해 코가 마비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역시 마수는 마수였다.
“춘식이는 돌아가. 덕구는 나랑 가자.”
김우진이 덕구 위에 올라탔다.
“탈옥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수많은 마수들 중, 그가 굳이 케르베로스와 오르토스를 키우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 * *
강민식이 나뭇잎을 대충 깐 바닥 위에 몸을 눕혔다. 덮을 건 없었으나 춥지는 않았다.
하늘 위로 별들이 보였다. 다른 세상임에도 밤하늘은 지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정말 나갈 수 있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모든 게 의문스럽기만 하다.
강민식은 딱히 본인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광란의 질주를 벌이던 스포츠카에 치이고 난 다음에야 조금 특별해졌다.
‘···신이라고요?’
‘맞아. 용사가 되어서 위기에 빠진 차원을 구원해주었으면 해.’
운전자가 신이라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하지 않다면 무엇이 특별한가.
‘그런데 왜 트럭이 아니라···?’
‘트럭은 돈 없는 하급 놈들이나 타고 다니지. 대세는 고급 스포츠카야.’
어쨌든 받아들였다. 부지불식간에 환생 스포츠카에 치인 것 자체는 열이 받았지만 용사라는 특별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용사가 되었지만 용사생활은 생각만큼 순탄치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무기의 무자도 모르던 강민식이,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는 세계에서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왕국의 훈련, 몬스터와의 실전은, 미궁과 던전의 함정들은 그를 수 없이 다치게 했다. 생사를 넘나든 게 몇 번인지 샐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결국 용사의 힘으로 부여받은 능력 중 독에 관한 것을 더욱 발전시켜 어떻게든 살아남고, 차원을 위험에 빠트리던 적을 죽이긴 했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모든 힘을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가거나, 연옥으로 가···
“자나?”
데르카인의 목소리에 상념이 끊어졌다.
“아니요.”
“한 시간밖에 못 쉬는데 왜 자지 않고.”
도망치는 와중에 여유롭게 숙면을 취할 시간은 없었다. 최소한의 휴식을 취할 뿐, 휴식 시간은 10분도 남지 않았다.
“그냥 정말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잘 안 오네요.”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뭡니까?”
“구속구 말이네. 독으로 풀었다고 했나?”
“네.”
“나도 나름대로 구속구에 대해서 연구를 계속 했었네. 탈옥하고자 한다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게 구속구를 해제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막혔다. 막히고 또 막혔다. 그나마 시에나와 함께 구속구를 해제할 마도구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네 개가 전부였다.
헌데 강민식은 달랐다. 고작 몇 달 만에 손쉽게 모든 구속구를 해제해 버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단순히 운이라고 할 수는 없네.”
“저는 마나에 독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독으로 구속구에 각인된 술식의 취약점들을 찾아 연결점을 끊어냈습니다.”
“취약점이라고 한들 방호 마법진이 그렇게 약하지 않을 텐데?”
약하다면 데르카인은 진즉에 모든 구속구를 끊어냈을 거다.
“무슨 비밀이 있냐고 물으셔도 그냥 제 독에 녹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해보니 됐다라. 그렇군. 대답해줘서 고맙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소장 말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저희들의 탈옥을 막는 걸까요?”
“소장이니까네.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데르카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저희는 죄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소장도 제대로 된 소장이 아닌 무언가가 아닌가 싶어서요.”
“그래봐야 우릴 여기로 보낸 개놈들의 끄나풀에 불과하네.”
“그렇습니까?”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굳이 강민식에게 그런 요구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탈옥하면 차원을 넘어서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 해도 절로 고개가 저어질 만큼 끔찍했다.
“잡설은 그만하고 이제 진짜 여기를 빠져나가 보세.”
남은 10분이 모두 지났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날 때다.
* * *
잠깐의 휴식을 취한 용사들은 체력의 분배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소장이 올 것을 대비해 체력을 분배하기 보다는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소장이 오기 전에 탈출하는 것이 나았다.
“애초에 소장이 우리를 못 찾는다는 생각은 버려야 하네. 이곳에서 몰래라는 건 없어.”
그저 극한의 환경이 펼쳐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늪지에서는 바실리스크들이 석화 브레스를 뿜어냈고 설원에서는 예티들이 마나로 눈을 뭉쳐 던졌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전투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여유가 없는 용사들은 그 흔적은 완벽하게 지울 수 없었다.
소장은 반드시 온다.
쟁점은 연옥을 벗어나기 전에 잡히느냐, 먼저 연옥을 벗어나느냐였다.
끝까지 체력을 보전하고 있어야 하는 건 그란시스 뿐이었기에 그는 여러 드워프들의 손에 번갈아가며 업혔다.
“발이 바닥에 끌리는 것 같습니다.”
“참게.”
체격의 차이로 사소한 문제가 있었으나 작은 해프닝이었다.
사막, 숲, 설원, 늪지, 산, 다시 숲.
그리고 뚝 떨어졌다.
“···이런 건 처음 봅니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어이가 없었네. 연옥이 그냥 평범한 차원에 있는 곳이지, 아예 다른 격리 차원이라는 것을 몰랐거든.”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푸르른 대지도 끝이 있었다.
칼날로 도려낸 듯이 절단되어 버린 균열,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과 심연이었다.
강민식이 그 경계에 섰다. 심연을 마주하자, 끝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샘솟는다.
“허억···!”
울렁거리는 심장과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이게 무슨···!”
“보지 말게. 차원의 경계는 일개 피조물인 우리가 인지하기에는 너무도 고차원적이라 그렇네.”
데르카인이 천천히 절벽을 향해 나아갔다.
“떠, 떨어집니다!”
강민식의 비명에도 데르카인은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
그와 동시에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뒤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알겠나?”
강민식은 그제야 그 존재를 인식했다.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넘어야 할 차원의 방벽이네.”
“···차원의 방벽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가까이 존재하는 겁니까?”
“나야 모르지. 20년 전, 이 빌어먹을 벽 때문에 이곳을 탈출하지 못했네. 마침내 다시 오게 되었군. 그란시스.”
“예.”
다크엘프가 차분히 차원의 방벽 앞에 섰다. 식물원에서 모은 영초의 부산물, 축사장에서 모은 영단의 조각들을 하나로 뒤섞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동안 소장이 오지 않기를 빌어야겠군.”
“오게 되면요?”
“방벽을 뚫을 때까지 버텨야지. 모두 시작하게.”
“예!”
드워프들이 공방에서 챙겨 온 짐들을 모두 내려놨다. 하나둘 꺼내더니 여기저기 설치하기 시작했다.
“대포?”
“마력포네.”
“저건 부비트랩입니까?”
“비슷하네. 건드리면 내재된 마력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지.”
“몇 개나 있는 겁니까?”
“지난 번 검방 때 대부분 빼앗기고 5개 밖에 없네.”
하지만 다섯 개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소장에게 제대로 통할 것 같지는 않지만 단 1초라도 시간을 끌어준다면 제 역할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트랩들은 빠르게 설치가 완료 되었고 용사들은 잠시의 여유를 가졌다.
“그런데 탈옥하면 원하는 차원으로 갈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가능할거네.”
“아마도?”
“그란시스가 그랬거든. 연옥은 차원의 교차 틈새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차원이로든 갈 수 있다고. 해당 차원과의 연결점들이 있다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네.”
아마도가 붙는 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탈출하게 된다면 그 망할 놈들에게 큰 엿을 선사하는 거네. 일그러질 얼굴들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한이군.”
확실히, 가두어놓았던 용사들이 전부 풀려난다면 좋아하지는 않을 거다.
적어도 김우진은.
“그렇게 되면 소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자의 미래야 뻔하지 않은가.”
“만약에 말입니다. 탈옥한 뒤에 신들이 추격대를 보내면 어떡합니까?”
“그건···.”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마력 폭발이 주변을 휩쓸었다.
* * *
“같잖은 짓을 해놨네.”
크르르르-
세 개의 머리가 연달아 화염을 토해냈다. 쏘아진 붉은 염화가 마력 트랩과 반응하여 거대 폭발을 일으켰다.
덕구는 그대로 화염속으로 몸을 던졌다. 치솟는 연기를 뚫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열 명의 죄수들.
김우진이 찾아올 것에 대비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던 죄수들이 생각보다 더 빠른 그의 등장에 당황했다.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케로베로스의 후각은 한 번 맡은 냄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미약한 잔향만으로도 충분히 추적한다.
하물며 연옥은 드넓을지언정 한정된 공간이다. 탈옥수들을 잡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란 뜻이다.
“···소장.”
“죄수번호 1077번. 멋진 도끼군요.”
여덟 명의 난쟁이들과 한 명의 인간이 침중한 표정으로 그를 반겼다.
“저는 그런 걸 구해다준 기억이 없는데 말이죠.”
“드워프들은 원래 자급자족을 잘하네.”
“저 놈은 인간입니다만?”
“하는 김에 친구 것도 하나 만들어주는 건 일도 아니지. 드워프들은 의리가 있거든.”
모두의 손에는 각자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드워프제다.
그들의 뒤에는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다크엘프가 보였다. 그란시스 드라막. 공간마법이 특기인 그가 하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는 굳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여길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수인들은 어떻게 되었나?”
“같이 가서 확인해보시면 될 겁니다.”
김우진이 케르베로스에서 내렸다.
“덕구야. 다크엘프를 물어. 팔다리 정도는 떨어져도 상관없어. 살아만 있다면.”
멍-
덕구가 숲 사이로 들어가 숨었다. 노련한 사냥꾼인 덕구는 기회를 틈 타 다크엘프의 마법을 방해할 거다.
데르카인이 신중하게 드워프 둘에게 눈짓했다. 어떻게든 케르베로스를 막아보라는 신호였다. 그게 별 의미 없는 짓이라는 것을 저들은 곧 알게 될 거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향해 투기를 드러내는 죄수들을 살피던 김우진의 고개가 강민식에서 멈췄다.
“해제된 모든 구속구에 독기가 섞여 있었지. 의도적으로 술식을 부식시켜서 약화시켰어.”
그리고 죄수들 중 독이 특기인 자는 한 명 뿐이다.
하지만 단순히 독이 있다고 가능할까?
아니다. 그렇게 쉬웠다면 죄수들은 진즉에 구속구를 풀었을 터. 용사의 힘이라고 한들 만능인 것도 아니다.
강민식에게는 무언가 있다. 그가 모르는, 무척이나 꺼림칙한.
“너한테도 궁금한 게 아주 많아.”
김우진이 살기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기랄, 검을 잡은 강민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 * *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강민식이었다.
나가고 싶어 나간 것은 아니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살기를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죽을 것 같아서.
보랏빛의 마나가 뒤얽혀 검을 타고 올라간다.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오러가 적을 향해 적의를 드러낸다.
뒤섞인 독기는 한 번만 스쳐도 모든 것을 썩어버리게 만든다.
“독기가 뒤섞인 오러라.”
허나, 상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빈손에 붉은 화염의 검이 생성된다.
───!
충격파가 튀었다. 절로 신음이 나오는 충격에 강민식은 이를 악물었다.
치이이익-
뜨거운 열기가 독기를 불태운다. 타버린 독기는 연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만 열기는 그마저도 삼켜버린다.
‘크윽!’
이미 상담을 빙자한 첫 만남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상성이 최악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엔 혼자서 괴물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후우웅-
강맹한 파공음과 함께 도끼가 소장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쩌엉, 불의 검이 김우진과 도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강민식과 부딪히는 것과는 다른 검이었다. 어느새 김우진의 두 손에는 쌍검이 들려 있었다.
“손이 두 개라 검도 두 개인가. 그렇다면 다른 건 어찌할 텐가.”
도끼의 주인, 데르카인이 물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아니었다. 단지, 대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이렇게.”
그리고 김우진은 그 장단에 맞춰주었다.
짧은 대답과 동시에 단순히 버티고 있던 검에 힘이 들어갔다.
카가각, 도끼가 튕겨졌다. 독을 머금은 대검이 비껴졌다. 일순간 자유로워진 두 자루의 검이 춤을 추었다. 김우진의 빈틈을 노리던 모든 무기들이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검이 그린 궤적은 상흔을 남긴다. 공간을 좀 먹으며 타닥 타닥, 타오른 불꽃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크아아악!
피해!
튀어 오르는 불길들은 쇄도하던 모든 용사들을 날려버렸다. 열화의 열기는 오러까지도 일부 녹여버릴 만큼 뜨거웠다.
용사들이 고통과 신음을 삼키며 오러를 키워 불길을 꺼트렸다.
김우진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고고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20년 전에 그렇게 겪고 또 다시 탈옥을 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낮게 속삭이는 듯한 말이었으나 모두의 귀에 뚜렷이 박혔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옥상으로 따라와.”
“여기 옥상이 어디···.”
풉-
* * *
“···죄송합니다.”
싸늘한 시선에 강민식이 고개를 숙였다.
방심했다.
설마 김우진이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저런 드립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같은 지구, 한국 출신이기에 강민식만이 알아듣고 웃을 수 있었다.
허나 웃음이 끝난 뒤에는 서늘함만이 남았다.
일곱 명의 용사를 눈앞에 두고도 저 따위 농담이 나올 정도로 여유롭다는 뜻이 아닌가.
정말로 수인들을 뚫고 왔을 때부터 감이 잡히지 않긴 했지만 대체 김우진이라는 자는 얼마만큼의 괴물인 걸까.
‘데르카인님이 맞았어.’
김우진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된다. 피하고 도망치며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지금에 와서는 모두 무의미한 가정이 되었지만. 어쨌든 만났고 싸우게 되었다. 적어도 차원의 방벽이 열리는 그 순간까지는 버티고 또 버텨야만 했다.
‘버틸 수 있어.’
혼자라면 어림도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자신까지 포함해 일곱 명의 용사들이 있다.
수인들과 거인으로 이루어진 16명의 용사들도 뚫고 온 김우진이었으나 그들과 자신들은 달랐다.
‘다르지. 그놈들은 소장의 역량도 제대로 파악 못한 머저리들이고 데르카인님과 드워프들은 적어도 역량 파악은 제대로 하고 있으니.’
상대의 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스스로의 주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래, 그러니 희망이 있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애초에 이기는 게 아니라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잡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크허허헝-
모두의 시선이 김우진에게 쏠린 틈을 타, 기회를 노리던 노련한 사냥꾼이 달려들었다.
세 개의 머리에서 일제히 불길을 뿜어냈다. 거대한 육신이 벼락처럼 대지를 박찼다.
주인에 이어 개까지 불을 다룬다니. 세상 말세다.
“막아!”
두 명의 드워프 용사가 재빠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허나, 그 짧은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이번엔 김우진이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불바다.
거대한 마나가 뒤틀렸다.
그건 거대한 파도였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들끓는 지옥의 해일.
“하하···. 씨발.”
할 만하기는, 버티기만 하면 되기는 개뿔.
불합리한 힘의 폭거 앞에.
강민식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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