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22. 대가 >
“노오오오옴!”
분노한 타르칸이 순식간에 일어나 공간을 도약한다.
아무런 징조 없이 화염이 폭주한다.
허공을 뜨겁게 달구며 폭발하듯, 튀어 오른다.
자신이 만들어낸 붉은 전경을 감상하며, 김우진이 손을 뻗는다.
솟아나는 화염의 검이 붉은 벽을 쪼개며 돌진하는 손톱과 부딪힌다.
─!
충격파가 퍼진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또 다른 손톱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
불의 검이 공간을 크게 가로지른다. 그려진 붉은 궤적이 모든 살기들을 쳐낸다.
궤적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똥을 토해낸다. 화염의 파도가 짐승들을 모조리 튕겨버린다.
그러나 상처 입은 짐승은 없다. 각기 다른 색의 오러들이 은은하게 육신을 감싼다.
수인들의 전투는 단순하다. 오러를 몸에 두르고 힘으로, 속도로, 본능으로 모든 것을 찍어 누른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기에 우스울 수 있지만, 그 한계가 범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라면 결코 가볍지 않다.
적어도 맨 몸으로 불꽃을 뚫고 달려드는 야수들을 목도한 자는 결코 수인들을 무시할 수 없다.
허나, 김우진은 웃었다. 비틀어진 입꼬리는 결코 유쾌하지 않았으나 웃음이 나왔다.
─!
가볍게 발을 구른다.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 불의 파동이 원형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선두의 타르칸이 다시 한 번 오러를 믿고 몸으로 파동을 받아낸다. 하지만 열기를 이겨낸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공간을 가르는 검격이다.
쩌어엉, 오러가 산산이 부서지나 딱 거기까지. 오러를 희생한 타르칸은 김우진을 멈춰 세우는 것을 성공했다.
“나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힘들다면 혼자가 아니게 만들면 된다.
사방에서 김우진의 빈틈을 노리고 달려든다.
콰콰콰콰, 무자비한 손톱 아래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나간다. 허나, 조각난 신체는 불꽃이 되어 허공으로 사그라든다.
어느 틈에? 뒤늦게 분신임을 파악한 수인들이 다급히 김우진을 찾았으나 그가 한 발 빨랐다.
불의 창.
수십 개의 불의 창들이 한 수인의 등을 노리고 날아든다. 포효하며 저항하나 모두 막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상처 입은 짐승 위로 거대한 붉은 검기가 떨어진다. 수직으로 빠르게. 무식한 힘을 싣고.
─────!
이전과는 다른 충격파가 터진다. 허나 붉은 섬광을 받아낸 것은 은빛 털로 완전히 뒤덮인 이족보행 늑대였다.
수인화. 완전한 짐승으로 변한 타르칸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은빛의 오러로 뒤덮인 손톱이 공간을 쇄도한다. 한층 강화된 육신은 힘과 속도 모든 면에서 벽을 돌파한다.
머리를 찢어발기기 직전, 화염의 검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
부딪힌 직후, 충격파를 비집고 또 다른 손이 날아든다. 생성된 불의 방패가 받아낸다.
─!
한 번은 두 번이 되었다. 두 번은 세 번이 되었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세가 이어졌다. 공간이 찢어지고 대지가 박살난다. 그럼에도 야수들은 그대로 짐승으로 변해 참전한다.
그럼에도.
“멍청한 짐승 새끼들.”
손톱과 발톱, 주먹과 발, 오러와 이빨.
그 무엇 하나 김우진의 몸에 닿지 못한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수인의 전투 방식이기에, 변수가 없기에 더 없이 쉽다.
보다 강한 힘과 보다 빠른 속도와 보다 지독한 지구력만 있다면.
쩌엉, 세로로 그어진 참격이 타르칸을 덮친다. 강인한 오러와 가죽이 최악을 막았으나 그 충격파를 온전히 해소하지는 못한다. 그의 신형이 총알보다 빠르게 튕겨져 나간다.
김우진이 한순간에 비어버린 공간을 통해 포위망을 빠져 나간다. 당황하는 수인들을 향해 불꽃을 토해낸다.
불기둥.
대지를 뚫고 솟아난 마그마가 수십 개의 기둥을 형성한다. 아래에서 위로 수인들을 뒤덮는다.
불타는 가죽을 붙잡고 바둥거리는 수인들을 향해 검격이 떨어진다.
“이 개자식이!”
타르칸이 날아오고 돌아가는 그 짧은 시간, 절반의 수인들이 쓰러졌다.
콰앙,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타르칸의 목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는다.
“더 짖어봐.”
성난 황금빛 동공을 내려다보는 김우진의 입가가 더욱 비틀렸다.
“끝장을 봐야지.”
* * *
정문을 지키는 교도관은 둘이다. 그뿐, 아무것도 없다.
평소에는 그랬다. 그래야만 했다.
“빌어먹을···.”
정문을 코앞에 둔 용사들이 주춤거렸다. 거대한 짐승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뭐라고요?”
“덕구와 춘식이네.”
“···아무리 봐도 덕구나 춘식이의 비쥬얼이 아닌데 말이죠.”
세 개의 머리와 두 개의 머리가, 여섯 개의 붉은 눈동자와 네 개의 푸른 눈동자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강민식은 지구의 인간들이 저것들을 무어라 부르는지 알았다.
“···케로베로스와 오르토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
뿌득, 이를 갈았다. 용사들을 가두는 연옥의 짐승들이 평범할 리가 없다는 것을 짐작했어야 했다.
느껴지는 기세는 결코 쉽지 않았다. 구속구에서 해방 되었음에도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고민할 시간 없네. 소장이 나섰어.”
정문까지 나왔음에도 굉음과 열기가 느껴진다. 소장이 나섰다. 수인들이 싸우고 있다.
데르카인은 수인들이 그리 긴 시간을 끌어주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제가 나서서 시선을 끌겠습니다. 그때 빈틈을 노려서···.”
데르카인이 챙겨 왔던 마도구 하나를 던졌다. 검은빛으로 물든 작은 원반이었다. 그것은 드워프의 손을 벗어난 순간부터 점점 커졌다.
약 10m의 지름으로 커진 원반은 케로베로스와 오르토스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그 순간, 두 짐승이 등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
“가지.”
“···뭡니까?”
“마물이라고 한들 사람의 손을 탄 개네. 개의 본성은 언제나 같지.”
“이런 미친 아무리 그래도 마물인데···.”
“혹시 몰라 만들어두기를 잘했군. 놈들이 좋아하는 마물의 피로 도배를 해놨으니 환장할 수밖에 없지.”
“저건 어디까지 날아가는 겁니까?”
“그전에 잡히지만 않는다면 마력을 전부 소모할 때까지 쭉 갈 거네. 적어도 5분 정도는 끌어줄 걸세.”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정문을 벗어날 수 있을 테니.
“···어.”
“순순히 비켜주겠나? 아니면 기절하고 비켜주겠나?”
두 짐승을 믿고 의기양양하던 교도관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채 꺼지지 않은 잔불들이 타닥 타닥 타오른다.
잘 관리된 잔디는 그 빛을 잃고 잿더미로 변한다. 용사에서 다시 죄수의 신분으로 되돌아온 자들의 육신이 그 위로 쓰러졌다.
철컥-
마지막으로 구속구가 채워진 짐승은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다. 가장 저항이 거셌던, 유일하게 그의 육신에 상처를 낸 수인족의 귀족.
“···괴, 괴물···!”
오만한 지배자였던 눈빛이 겁쟁이처럼 흔들린다.
반쯤 타오른 털은 은빛의 찬란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김우진은 말없이 그를 내던졌다. 열다섯 구의 죄수의 산 위에 늑대 하나가 더해졌다.
손을 타고 흐르는 피를 털어냈다. 팔을 따라 길게 찢어진 다섯 갈래의 상흔은 곧 재생되어 사라졌다.
“네놈이 그렇게 증오하는 윗놈들에게 감사하는 게 좋을 거다. 아니면 오늘 내 손에 다 뒤졌을 테니까.”
김우진이 치솟는 살심을 애써 억눌렀다.
상부는 죄수들의 죽음을 원치 않는다. 그것이 짐승들과 거인의 목숨을 살렸다.
아직 잡지 못한 죄수들이 남아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이미 잡힌 물고기는 그렇지 않은 것들에 비해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소장.”
“예!”
난장판 속에서도 용케 잘 피해 다녔던 부소장이 힘차게 대답했다.
“교도관들 더 불러서 이것들 모조리 다시 감옥에 넣어놔.”
“죄송합니다만, 교도관들은 전부 죽거나 기절했습니다.”
“그럼 혼자 해. 구속구까지 채웠는데 감당 못해?”
“4층 감옥을 이용합니까?”
“감방들이 전부 박살났다고 했었지. 그렇게 해.”
죄수들을 수감하고 있던 독방은 전부 3층이었다. 하지만 연옥은 애초에 크게 지어졌고 4층 또한 독방임에도 전부 비어있었다.
“나머지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짐작 가나?”
“아까 싸우시는 와중에 정문에서 무전이 왔습니다. 정문에서 마주쳤다는 말을 끝으로 후속보고가 오지 않는 걸 보면 뚫린 것 같습니다.”
“덕구랑 춘식이는? 사이렌 울렸으니까 정문으로 갔을 텐데?”
죄수들은 두 괴수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들이 각각 서쪽과 동쪽을 지킨다는 것도.
열에 아홉은 그들을 피해 상대적으로 약한 정문으로 향한다. 그 점을 이용해 사이렌이 울리면 정문으로 향하도록 훈련을 시켜놨다.
“뚫린 것 같습니다.”
“하긴, 아무리 그놈들이라도 용사가 16명인데.”
멍청한 수인과 거인들이 만용을 부렸지만 아직 그보다 많은 탈옥수들이 남았다. 구속구가 전부 해제되는 건 상정하지 못한 변수였고, 온전한 용사들에게 마수 두 마리 따위는 그렇게까지 큰 벽이 아니었다.
“16명이 아니라 10명입니다. 1176번은 예상하신 대로 참여를 안 한 게 맞고 엘프들은 같이 탈옥한 게 아니라 식물원에 있다고 합니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에 김우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죄수들을 전부 풀어주고, 교도관들도 때려눕혀놓고 다시 식물원으로 돌아갔다고?”
“예. 싸우실 때, 식물원을 관리하던 교도관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이 자수를 했다고···.”
“나를 호구등신으로 보네. 정상참작이라도 해달라는 거야?”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랬다는 것 자체가 김우진을 우습게 본다는 반증이었다.
너무 풀어줬다. 너무 친근하게 대해줬다. 김우진은 스스로의 안일함을 반성했다.
“구속구 점검하고 다 독방에 쳐 넣어. 반항하면 사지를 부러트려.”
“예.”
“다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일단은 다른 탈옥수들을 잡는 게 우선이다.
김우진이 정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정문을 벗어나면 끝없는 사막이 펼쳐진다.
열기를 흡수하고 더 뜨겁게 달구어 발산하는 붉은 모래는 결코 인간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곳을 헤매다 죽는다. 운이 좋으면 기절해 교도관들에게 구조되거나.
허나, 어디까지나 일반인, 혹은 구속구를 착용한 인간의 경우였다. 완전히 자유가 된 용사들은 빠르게 사막을 주파했다.
특수한 붉은 모래의 열기는 감히 그들의 신체를 침범하지 못했다.
사막이 끝나자 숲이 펼쳐졌다. 숲이 끝나자 눈 덮인 설원이 나왔다.
간간히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은 용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기랄, 베르너놈의 음식이 그리워.”
“꼭꼭 씹어서 먹게. 하루이틀만에 끝나지는 않을 테니.”
데르카인의 말에 용사들이 독기가 가득한 몬스터들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연옥은 넓다. 보통은 한 채의 건물과 정원까지만 생각하지만 정원 밖의 자연까지도 전부 연옥의 일부라는 것을 데르카인은 잘 알고 있었다.
용사라고 한들 하루 이틀 만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그건 용사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천혜의 감옥이었다.
허나, 모든 영역을 뚫고 간다고 해도 문제다.
“그란시스.”
“예.”
“몸은 괜찮나?”
“나쁘지 않습니다. 백 년만에 힘이 돌아오니 너무 좋군요.”
데르카인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연옥의 유일한 다크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것 같나?”
“시에나님이 건네주신 마력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론대로만 된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역시 직접 부딪혀봐야 알겠지요. 그래도 15년 간 연구를 하며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믿고 있겠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맛이 없군요.”
그란시스가 질겅이던 마수의 조각을 뱉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강민식이 데르카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화의 흐름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 혼자 동 떨어진 것 같았다.
“뭘 하려는 겁니까?”
“탈옥이네. 이 거지 같은 영역들을 벗어난다고 해도 아직 넘어야 할 벽이 하나 남아 있거든.”
“감옥을 진즉에 벗어났는데 뭐가 또 있다는 겁니까?”
“자네는 연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감옥이라는 거? 용사들을 가둔다는 것 정도죠. 아, 소장이 지랄 맞다는 것도.”
“탈옥을 위해서 연옥의 죄수들이 넘어야 할 벽은 총 네 개네.”
첫 번째, 죄수를 가두는 독방.
두 번째,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
세 번째, 하나하나가 살아남기 힘든 극한의 환경.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차원의 방벽이네.”
“차원의 방벽이라면 차원을 함부로 넘을 수 없게 하는 벽 아닙니까?”
“정확히는 차원이 스스로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 체계라고 보면 되네.”
허나, 그 방어 체계는 워낙 굳건해 들어오는 것 뿐 아니라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방벽을 유일하게 열었다 닫을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용사들을 간택한 신이었다.
“자네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연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차원이네.”
연옥은 차원과 차원들 사이에 끼여 있는 틈새의 공간이다. 독립된 차원이며, 제대로 된 차원들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차원인 만큼 당연히 방벽 또한 존재한다.
완전한 탈옥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방벽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가야만 했다.
“···미친. 그게 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평생 연옥에서 살 텐가?”
“······.”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뒤가 없네.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봤으니 남은 건 믿는 수밖에.”
그리고 너무 걱정 말게.
“다크엘프들은 공간 마법의 대가들이니.”
차원 마법은 결국 공간 마법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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