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18. 기회 >
“···어머니 나무를 옮길 방법이요?”
확실히 연옥을 뒤덮어버린 세계수의 모습은 그리 정상적이지 않다. 허나 율리아가 가진 의문은 그걸 왜 본인에게 물어보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 나무께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릴리라는 이름도 지었고 저보다 소장님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말이죠.”
“질투하나?”
“질투요? 누가요? 제가요?”
율리아가 코웃음쳤다. 그러는 사이에도 릴리는 김우진의 뺨에 부리를 비비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당신의 정신계 마법에 말려들어 진실을 보지 못하고 계시지만 어머니 나무께서는 언제고 제게 돌아오실 거예요.”
“그래, 그렇다고 해줄게.”
“그렇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거예요!”
“어쨌든, 나도 직접 이야기하고 싶지만 보다시피 단순한 대화로는 아직 고차원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지가 않아서 말이지.”
딱 이리와, 저리가 같은 간단한 수준인 전부다.
세계수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고 말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아무리 성체에 가깝게 자라났다고 한들 실질적으로 세계수는 발아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때문에 어린아이라기보다는 갓난아기와 같았다.
“내가 알기로 하이엘프들은 세계수와 소통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하던데.”
“그건 또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들었다.”
“누구한테요?”
“그것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고.”
“···가능은 해요. 그런데 제가 왜 그런 걸 해야 하죠?”
“말했잖아. 세계수를 숨기지 않고 이대로 방치하면 뿌리 채 뽑힌다. 세계수가 여기 있는 걸 원치 않는 놈들이 있거든.”
원치 않는 놈들.
율리아가 마른 침을 삼켰다.
엘프들 중에서도 고귀하게 태어난 하이엘프는 많은 것을 보고 들어왔다.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것을 느꼈다.
목적이 있어 연옥에 들어왔고, 하잘 것 없는 직책을 위해 거래를 명목으로 소장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다. 세계수는 뿌리를 내리고 발아했으며 지금의 상황까지 왔다.
하지만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김우진은 그녀를 의심하고 있고 세계수는 생각보다 김우진을 좋아하게 되었다.
틀어진 계획은 더 이상 혼자 진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틀어진 계획은 조력자가 필요했고 내부자일수록 좋았다.
소장 김우진은 거기에 더 없이 최적화된 인물이며 자신의 직책에 그렇게까지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선뜻 손을 내밀고 씨앗을 넘긴 목적을 밝히기에는 아직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율리아는 결론을 내렸다.
“소장인 당신이 허락했는데 대체 누구에 의해서요?”
대충 짐작이 가지만 묻고.
“그것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다.”
“거짓말은 아닌가요?”
마지막까지 한 번 의심한다.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저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일부러 가상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거라면요?”
“네가 세계수와 대화를 나누도록 허용해서 말이지? 그거 참 멍청한 계획이군.”
“···좋아요. 어머니 나무와 대화를 해보겠어요. 저도 어머니 나무가 뽑히는 건 결코 바라지 않으니까요.”
아직은 유보하기로.
진실을 이야기하는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 될 것이다.
* * *
강민식은 자신의 손 위에 놓인 작은 구슬 하나를 바라보았다.
한 드워프를 통해 전달 받은 마력 증폭기다.
기껏해야 은행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아주 작은 크기. 그럼에도 거기에 집약된 마도 공학은 놀라운 수준이다.
‘역시 드워프.’
아니, 이건 그냥 데르카인이 대단한 거다. 그 또한 용사로서 살아가면서 수많은 드워프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 정도의 기술력은 보지 못했으니.
그것을 강민식은 자신의 이빨 안쪽에 넣었다. 본래는 비장의 독단을 숨겨 놓던 장소다. 연옥에는 불시 검방이라는 성가신 것이 있으니 잘 숨겨놓으라는 드워프의 말이 있었다.
이곳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다.
이빨 속에 잘 안착한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세계수의 나뭇잎을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구속구를 잡았다.
우우웅-
마나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뭇잎의 마나들이 그의 육신으로 들어온다. 마나로드를 타고 지나가 증폭기를 만난다. 그리고 한층 강화되어 전신을 노닌다.
증폭기의 확실한 성능에 강민식은 감탄했다. 그가 봐온 그 어떤 증폭기보다 작으면서 성능은 가장 뛰어났다.
마나가 구속구를 향해 몰려간다. 그의 마나에 뒤섞인 독기가 함께다.
파직-
치이이익-
미약한 스파크, 올라오는 연기.
연기는 지독한 독기였으나 이미 독인에 가까운 강민식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한다.
구속구의 방어 체계가 발동했고 그의 독기와 어우러진 세계수의 마나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강민식이 신음을 삼켰다.
아프다.
그가 소환되었던 차원, 크라프트를 마침내 구해냈을 때만 해도 더 이상 이런 고통을 겪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도 없이 돌아다녔다. 노숙은 일상이고 비박도 서슴지 않았다.
춥고, 덥고, 벌레에 물리고, 몬스터들과 싸우고, 상처입고, 동료를 잃고.
괴로웠다. 죽을 만큼 괴로웠다. 그럼에도 견뎌낸 것은 지구에 있는 가족을 보기 위해서였다.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였다.
일상이 그립다. 바깥이 그립다.
평범하게 자고, 평범하게 일어나고, 평범하게 식사를 하는 그런 삶.
하루 종일 컴퓨터도 해보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밤새 술을 마시는 그런 삶.
당연했으나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된 일상.
눈을 떴다. 통증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나간다.’
그가 겪어왔던 고통에 비하면, 나간 뒤의 자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반드시 나간다.’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 모든 게 해결 된다고 그들이 말했다.
탈옥하고 지구로 돌아가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구속구가.
치이이익-
“······!”
그의 욕망에 응답했다.
* * *
드드드-
연옥이 진동한다.
대지가 진동한다.
카가각-
연옥의 외벽이 부서지고 파편들이 떨어진다.
우우웅-
뒤따르는 소음이 고막을 때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나의 파동이 주변을 어지럽힌다.
그것은 세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나무가 만들어내는 현상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른데.”
김우진이 신음을 삼켰다. 세계수는 그의 부탁에 응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북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다만, 느리다. 무척이나 느리고 시끄러우며 움직일 때마다 일으키는 미세한 마나의 파동은 주변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무엇을 생각하셨는지 모르지만 이게 당연한 거예요.”
이 사태를 만들어놓은 하이엘프는 담담히 대꾸했다.
“어머니 나무가 근본이 정령이냐, 나무냐 말은 많지만 결국 그 몸체가 나무라는 것은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나무가 이동하는 게 빠를 리가 없죠.”
일반적인 나무를 옮기는 것에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헌데 세계수다. 무려 세계를 지탱한다는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
“발아할 때는 엄청 빨랐잖아?”
“소장님이 29개나 되는 영약을 심어놨으니까요.”
그 모든 영약을 씨앗은 흡수했다. 그리고 발아라는 일생일대의 진화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일반적으로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자라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돼요. 그 많은 영약들을 모두 소진했으니 이 정도가 된 거죠.”
이전의 모습들이 비정상적일 뿐, 지금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특히나 지금의 어머니 나무는 무척이나 어려요. 원래라면 지금의 반에 반에 반도 안 됐을 거예요.”
아니, 애초에 발아조차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본체를 옮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원래는 안 되나?”
“어느 정도 성숙한 어머니 나무나 가능한 일이죠. 나무를 옮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면 대충 얼마나 걸리지?”
“북쪽 숲까지의 거리를 고려해 봤을 때, 대충 나흘에서 닷새? 그쯤 걸릴 것 같네요.”
“계속 이 상태로?”
“네.”
“좋지 않은데.”
“뭐가요?”
김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뭇잎들이 천천히 이동한다.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햇빛이 차츰차츰 영역을 넓혀 나간다.
햇빛이 적당한, 당분간은 적당할 자리.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톡톡, 손잡이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긴다.
- 삐이?
예상외의 반응에 릴리가 불안하게 그의 앞을 서성인다.
“이리 온.”
- 삐익.
손잡이에 앉은 릴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얼굴을 비비는 애교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가서 부소장 불러와.”
나직한 목소리. 대화라기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깝다. 그러나 문 밖의 교도관은 즉시 알아듣고 사라진다.
잠시 후, 부소장이 나타난다.
“부소장.”
“예, 소장님.”
“뭐가 문제인지 알겠나?”
부소장이 주변을 확인한다. 미미하게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가지와 뿌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다.
“뜻하는 바를 이루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세계수가 움직임으로서 일어나는 소음과 진동,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연옥의 손상.”
“그걸 그대로 죄수들의 방식으로 읊으면?”
“‘기다리던 때가 왔다.’입니다.”
하나만 있어도 민감한 감옥에 네 가지 문제가 한 번에 들이닥쳤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승냥이들이 기다리던 탈옥의 순간이다.
“때요? 무슨 때요?”
눈치 없는 하이엘프가 끼어들었으나 무시당했다.
“오늘 저녁에 바로 불시 검방 실시해.”
“예.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방에 숨겨놓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공방에도.”
“상관없어.”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 역할만 해도 충분하다.
저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상황이라는 건, 모두에게 공평하다. 저들에게 기회는 연옥의 교도관들에게 위기며 보다 경각심을 가지게 만든다.
“당분간 모든 일정 취소시키고 방에서 꼼짝 못하게 해. 한 닷새 정도.”
“예.”
그리고 죄수로서 할 수 있는 것보다 소장으로서, 교도관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
움직인다면 지금이다.
허나, 그래봐야 그의 손바닥 안이다.
“어쩌면 드디어 강민식을 3징벌방에 넣고 실험해볼 수 있겠군.”
김우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삐이이이.
차가운 기세에 파랑새가 몸을 떨었다.
“미안해, 릴리. 나도 모르게 힘에 손이 들어갔구나.”
파랑새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 삐이?
아무것도 모른 채, 세계수는 해맑게 웃었다.
* * *
쿠구구구-
미약한 진동은 곧 거대한 떨림이 된다. 촉수처럼 퍼져나간 가지와 뿌리들이 하나, 둘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이게 무슨?”
“지진이다! 지진이 일어났어!”
“모두 대피해!”
“지진이 아니야! 세계수가 움직인다!”
세계수의 준동은 정원의 대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자연스레 그 위에서 각자의 업무를 하고 있던 죄수들 또한 이변을 눈치 챘다.
“살다 살다 세계수가 이동하는 걸 볼 줄은 몰랐군.”
흔들리는 대지에 연금술을 멈춘 데르카인이 밖으로 나왔다.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세계수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 하이엘프가 연관되어 있겠죠?”
“무조건이네.”
동료 드워프의 물음에 데르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과 거래를 통해 세계수의 씨앗을 준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협조를 하다니.”
세계수의 발아 이후, 하이엘프가 소장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본인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새로운 소지를 임명한 적이 없는 소장이 그녀를 소지로 임명한 점,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자가 하이엘프말고 또 없다는 점에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진실이었다.
“생각이 다 있겠지.”
“물론 저희야 솔직히 어떻게 복구하나 걱정이었는데 한시름 놓기는 했습니다만.”
세계수의 뿌리는 연옥을 완전히 옥죄고 있었다. 부서진 부위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그 부분을 뒤덮은 뿌리와 가지를 제거해야 하는데 보통 나무가 아니라 세계수다.
드워프들 입장에서는 곤란하던 차였다.
우지직-
콰아앙!
그때, 뿌리와 가지가 건드린 연옥의 균열들이 더욱 커졌다. 떨어져나간 파편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고쳐야 할 게 많아지겠군.”
“그런데 생각보다 느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군. 무척이나 느리네.”
이 정도면 건물에서 뿌리가 완전히 걷히는데만 이틀이 꼬박 소요되겠군.
데르카인의 말이 천천히 느려졌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강민식에게 증폭기는 전달했나?”
주변을 살피고 동료 드워프를 공방 안으로 잡아끌며 목소리를 낮췄다.
세계수의 신비는 죄수들에게만 신기한 게 아니었다. 교도관들의 정신도 모두 다른 곳으로 팔려 있었다.
“예. 전달해줬습니다. 조만간 성과가 나올 거라고 자신했습니다.”
“조만간이 아니라 당장 필요하다고 전하게.”
“네?”
“아직도 모르겠나?”
진동은 신경을 분산시킨다.
소음은 모든 것을 잡음을 묻어버린다.
균열은 빠져나갈 구멍을 늘어나게 한다.
그리고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은 사소한 마나의 흐름 같은 것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진동과 소음 속에 행동을 숨기고.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 속에 미약한 마나의 흐름을 숨긴다.
“지금이 기회네.”
데르카인은 깨달았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때라고.”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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