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17. 차별주의자 >
삶은 투쟁이다.
아주 사소한 무언가부터, 대단한 무언가까지.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 쥐어지는 건 없다.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다면 쟁취해야 한다. 싸워고 이겨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울부 짖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타르칸은 최근 자신의 투쟁이 부족하지 않았나 의심이 들었다.
소장의 태도와 귀쟁이, 난쟁이들에 비해 자신들이 가져가는 것이 현저히 적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귀쟁이들에게는 세계수가 생겼고, 난쟁이들에게는 공방이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무언가 쥐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연옥에 수감된 귀쟁이들은 고작 다섯이다. 새롭게 추가된 하이엘프를 붙여봐야 여섯.
난쟁이들은 위대한 무언가도 없고 그냥 여덟.
그에 비해 타르칸의 종족은 무려 열 다섯이다. 이 연옥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소장에게 협조적인데 비해 대우는 가장 나쁘다. 이게 과연 옳게 된 것일까.
틀리다.
강자에게 굴종하고 복종하는 것 또한 투쟁의 한 방식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쪽이다.
“맞은 지 조금 오래 됐지?”
허나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툭툭, 탁자를 두들기며 다른 손으로는 커피 잔을 들어올린다.
한 모금 음미하며 음이라는 한가로운 소리나 낸다.
“나는 위대한 달의 일족이다! 감히 내게···!”
“말투.”
“···그러니까 제 말은 너무하신 것 아니냐는 겁니다.”
타르칸이 목소리를 낮추고 야성을 집어넣었다.
“소장님의 명령을 가장 잘 따르고 협조적인 건 저희들입니다. 그런데 대우가 가장 부족한 건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천대하시는 건 아닌지···.”
“너희들은 이미 다 잡힌 죄수들이야.”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나랑 말장난 하자고?”
“아니, 그게···.”
말장난은 소장님이 먼저 하신 것 아닙니까. 타르칸이 튀어나오려는 변명을 애써 삼켰다.
“수인들의 불만이 큽니다. 저도 면이 서야 무어라 말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불만이 크다면 탈옥이라도 하려고?”
“그게 아니라···.”
김우진은 떠듬 떠듬 변명하는 타르칸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해보나마나한 질문이다. 연옥의 죄수들의 머릿속에서 탈옥이라는 두 단어는 결코 지울 수 없으니.
김우진은 수인들을 싫어했다. 드워프보다 더, 엘프보다도 더.
수인은, 연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죄수들이다.
용사란, 능히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는 자들이기에 보다 재능이 넘쳐나고 전투에 특화된 자들이 용사가 되는 건 당연했다.
싸움에 죽고 싸움에 사는 수인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 또한 그런 관점을 대입해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정답은 그게 아니라는 걸, 김우진은 알고 있었다.
용사의 비중은 인간이 가장 높고 죄수 또한 인간이 가장 많다. 그럼에도 수인들의 비율이 높은 건 그들만큼 힘에 대한 갈망이 큰 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수인은 문명화 된 오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조금 더 문명에 익숙해져 얌전하고 본성을 숨길 수 있을 뿐, 살짝만 건드려도 튀어나오는 야성은 쉽게 억제되지 않는다.
전투의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싸워야지만, 강해야지만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온 그들은 다른 종족에 비해 힘에 대한 갈망과 집착이 더 심했다.
그래서다.
연옥의 역사속에서 엘프도, 드워프도 모두 출소자들이 있다.
하지만 수인은 없다.
목숨과 자유를 잃을지언정 힘을 잃을 수는 없는 종족. 그들은 연옥이 만들어진 이래로 단 한 명도 살아서 출소하지 않았다.
드워프보다도, 엘프보다도 지독한 놈들.
하지만 그렇게 힘에 미쳐있기에 반대로 통제하기는 한결 수월하다.
강함을 숭상하기에 강자를 존중한다. 강자에게 굴종한다. 거기에는 종족도, 성별도 초월한다.
김우진은 모든 수인들보다도 압도적인 강자다. 상담을 통해 확실히 서열을 정리했고 수인들은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헌데 저렇게 다시금 이빨을 치켜드는 걸 보니 최근에 이것저것 일이 많아 너무 풀어주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무얼 원하는데?”
허나 김우진은 다시 기강을 잡는 대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수인들은 머릿속에서 ‘출소’라는 단어를 지우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꽤나 괜찮은 졸들이다.
강함에 대한 숭상이 종족을 따르지 않다보니 자신들을 꺾은 김우진에게 거의 무분별한 충성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이들을 이용해 꽤 재미를 봤었다. 자고로 감옥에 들어왔을 때, 다른 죄수들은 공포의 대상이고 김우진이 원할 때마다 그 역할을 잘 해줘왔으니까.
인간들을 상대로 특히나 효과가 있었다.
“들어주시는 겁니까?”
“들어는 보고.”
타르칸이 반색했다.
“저희들이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귀쟁이들이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세계수를 얻었고, 난쟁이들이 평생의 보금자리인 공방을 얻었듯, 저희 또한 고향 같은 곳을 얻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면 축사장으로 보내주면 되나?”
엘프들을 원예반으로 보내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수인들 또한 축사장으로 보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저들이 절대 출소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20년쯤 해보니 전혀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지만.
“가끔가다 투기장도 열어주고.”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그래, 알았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출소할 생각은?”
“없습니다!”
히죽이죽 웃으며 해맑게 대꾸하는 모습이 상당히 짜증났다.
빠악, 갑작스레 얼굴을 얻어맞은 타르칸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원위치 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냥 짜증이 나서. 나가봐.”
“예, 감사합니다! 연옥 복구 작업에 더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 해놓겠습니다!”
죄수번호 1100번, 타르칸 톨리스가 나갔다. 잠시 후, 부소장이 들어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세계수 사태 이후로 감옥이 예전보다 어수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저것 바꾸다가 저것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아무것도 안할 거라는 걸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김우진은 그 꽃밭과도 같은 희망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데르카인과 시에나, 타르칸을 유심히 살펴. 탈옥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셋이 중심이 될 테니.”
“예.”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십니까?”
“옥상.”
* * *
원예반에 온 이후, 율리아는 매일 매일을 불안감과 초조함 속에서 살았다.
“괜찮니?”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어느 식물을 보든 세계수가 떠올랐다. 세계수에 무슨 짓이든 하고 있을 소장의 모습이 상상되자 참을 수 없었다.
“나갈 수 없다.”
“제발, 제발요!”
“죄수번호 1178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어머니 나무가 절 부르고 있어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허나 김우진은 결코 율리아가 세계수와 만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난동부리지 마. 너만 손해야. 징벌방에 가고 싶니?”
옆에서 적절히 말려주는 시에나 올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즉에 사고를 쳐도 백 번은 쳤을 거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약이라고 그녀는 조금씩 차분해졌다.
이미 너무 적나라하다.
그녀가 꿍꿍이를 가지고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다는 걸, 소장도 알고 죄수들도 안다.
비록 그 꿍꿍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를지라도 그런 상황에서 순순히 세계수를 보게 해주는 것은 미련한 곰이라도 하지 않을 짓이다.
하지만 율리아는 반드시 세계수를 봐야 한다. 그리고 세계수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소장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마찬가지.
방법이 무엇일까.
사방이 꽉 막힌 곳에서 없는 해결책을 억지로 만들어 내야하는 만큼, 떠올리기는 그리 쉽지 않다.
먼저 구원의 손길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평생을 가도 ‘모든 속셈을 말하고 구차하게 빈다.’ 외의 선택지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1178번. 넌 오늘 출역 끝이다. 나와라, 소장님 호출이다.”
엘프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주저하지 않고 곧장 뒤따랐다. 무조건 간다. 가서 무릎을 꿇든, 그냥 빌든 세계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허나 소장실로 향할 줄 알았던 발걸음이 더 위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짐작이 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면 알 거다.”
도착하지 않아도 안다. 점점 더 진하게 풍겨오는 세계수의 기운에 맞춰 그녀의 박동도 더욱 빨라졌다.
저곳에 있다. 만날 수 있다. 확인할 수 있다.
기대와 동시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어째서 소장이 순순히 자신을 세계수의 곁으로 인도하는가.
왜 갑자기? 이제까지 통제하던 과거들은 무엇일까.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복도와 계단을 걸으며 그녀의 머리는 터져버릴 것만 같이 맹렬히 회전했다.
최선과 최악을 가정했다.
최선은 이대로 세계수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최악은 옥상의 문 앞에서 세계수의 향만 맡게 하고 다시 독방으로 돌려보내는 거다.
진짜로 그렇게 악독할까 싶으면서도 그녀를 괴롭히기에는 가장 적절한 방법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렇기에 율리아는 간절히 빌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앞에 섰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그녀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뭐하는 거지?”
그 자리에 서서 호흡을 골랐다.
소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이 많아서 조금 힘드네요.”
“하이엘프가 말이지?”
“하이엘프라고 체력이 무한은 아니잖아요.”
율리아가 태연히 심장을 다독였다.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줄곧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 나무시여.”
세계수는 거대한 나무다. 통틀어 하나의 신목이라고 말하지만 수많은 갈래의 가지들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잔가지가 있으면 보다 중요한 줄기가 있다. 율리아는 옥상에 우뚝 선 줄기야말로 세계수의 중심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 까끌거리는 나무를 어루만졌다.
김우진은 그녀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조용히 눈짓 해 교도관을 내보냈다. 넓은 옥상 위에는 한 명의 사람과 한 명의 하이엘프 그리고 한 그루의 나무만이 남았다.
“네가 보기에 세계수의 상태는 어때?”
“과생장을 한 터라 무언가 불안정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건강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을 텐데 눈에 띄는 이상한 점도 없고요.
율리아가 마지막 말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대놓고 할 말은 아니었다. 특히나 그 상대가 그녀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하지만 김우진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눈치 챘다. 애초에 그녀를 불러온 것 또한 비슷한 의도였다.
“내가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말씀해주시는 건가요?”
“네가 그랬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왜 세계수의 씨앗을 내게 줬지?”
“말씀해주실 건가요?”
“두 번은 안 통하네. 좋아. 네가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면 나도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줄게.”
“어머니 나무에게 맹세하건데 진실만을 이야기 하겠어요.”
바로 옆에 세계수가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가슴을 옥죄는 제약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당신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준 건 당신이 씨앗을 심길 바랐기 때문이에요.”
“목적은?”
“전 이미 한 가지를 말했어요.”
“정보에도 질이 있고 등급이 있지. 내가 가진 게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아?”
“죄수들을 탈옥시키기 위해서예요.”
김우진이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동시에 예상하지 못했기도 했다.
“죄수들이라는 것에 너는 포함되지 않은 것 같은데.”
“두 가지 모두 됐어요.”
이제는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라고, 율리아는 눈빛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지.”
김우진이 픽 웃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실, 율리아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이기도 했다.
세계수는 태어난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막 지났다.
과도한 영약으로 인해 벌써부터 성체에 가깝게 자라나고, 정령체로서 현신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속은 갓 태어난 아이와 다를 게 없다.
그리고 김우진이 생각하기에 아이는 단순하다. 지극히 단순하기에 어렵기도 하지만 반대로 쉽기도 하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신호를 받아들인 파랑새 한 마리가 그들의 사이로 툭 떨어졌다.
“···어머니 나무의 정령? 어떻게 벌써···?”
“보통 나무 크기가 이 정도쯤 되면 나오는 게 정상 아닌가?”
“그거야 일반적인 경우죠. 어머니 나무께서는 이제 고작 두 달이 조금 넘었는데···!”
“손을 뻗고 세계수를 불러라.”
“뭐라고요?”
“지금 세계수는 딱 너와 나 사이에 있다. 나와 하이엘프인 너. 누구의 부름에 반응할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인간과 하이엘프. 고민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김우진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찮은 장난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한 가지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점을 깨달았다.
김우진은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답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대답 대신 세계수의 정령을 불러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하고자 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할까.
‘어머니 나무가 내가 아닌 자신을 고를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그럴 리가. 율리아는 부정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상식은 그러했다.
하이엘프와 세계수 간의 관계는 일개 인간 따위에게 쉽사리 끊어질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좋아요. 한 번 해보죠.”
그렇기에 은근한 불안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도전을 받아들였다.
“어머니 나무시여. 제게 와 주시겠습니까?”
손을 뻗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삐익, 삑. 파랑새의 형태를 한 정령체가 날개를 퍼덕이며 반가운 소리를 냈다.
정령체가 율리아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자, 릴리야. 이쪽으로 와.”
김우진이 다정하게 정령체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삐익? 정령체가 주춤거렸다. 김우진과 율리아를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릴리? 이름까지 지어줬어요?”
“당연하지.”
“어머니 나무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건 옳지 않아요!”
“그러면 그냥 계속 세계수라고 부르라고? 너도 율리아가 아니라 하이엘프라고 부르면 되겠군.”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율리아는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당황시키는 건 그 이름 자체가 아니라 정령체가 릴리라는 이름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무에 이름···?’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 번도 본적도 없다. 어머니 나무는 그냥 어머니 나무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엘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릴리야. 이리 온.”
삐익-
그리고 그녀가 혼동하는 사이, 연이은 부름을 견디지 못한 정령체는 갈 곳을 정했다.
김우진의 손가락 위에 앉아 뺨에 얼굴을 부빈다.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낸다.
“아···.”
그 모습에 율리아가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처음 경험했다. 거기에는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세계수, 맙소사.”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기에 그녀는 현실을 부정했다.
“이, 인간 따위한테 밀리다니!”
“그거 종족차별적인 발언이야. 뻑킹 레이시스트 같으니.”
“인종이 아니라 종족이 다르잖아요! 전 하이엘프라고요! 아무리 정령술사라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요···!”
“그렇게 소문이 났나? 내가 정령술사라고?”
“아니라는 건가요?”
“아니, 맞다. 틀린 말은 아니지.”
세계수가 나를 고른 것도 맞는 현실이고.
“흠, 확실해졌으니 굳이 더 미룰 필요는 없겠지.”
“무엇을 말이죠?”
“율리아 카르센, 너는 세계수가 뿌리 채 뽑히는 것을 바라지는 않겠지?”
“···어머니 나무를 뿌리 채 뽑아버리겠다는 건가요?”
릴리라는 이름까지 지어주고? 율리아가 경멸의 시선을 담아 김우진을 노려보았다.
작은 오해였으나 김우진은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그가 뽑든, 윗놈들이 뽑든 결국 뽑히는 건 똑같으니까.
그저 담담하게 재차 말했다.
“세계수를 옮길 방법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뿌리 채 뽑아버릴 테니까.”
뒷말이 조금 달라졌지만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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