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16. 이유 >
구속구란 죄수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복잡하게 꼬여있는 술식과 마법진은 착용자의 마나를 제한한다. 흐름을 막고 마나 자체를 통제한다.
죄수들에게 있어 더 없이 짜증나고 걸리적거리는, 당장 부숴버리고 싶은 1순위의 물건.
강민식은 다시 한 번 그 물건을 붙잡았다.
마나가 흐른다. 구속구를 넘어 새겨진 술식과 마법진 사이를 파고든다.
파지직-
“크으윽···!”
신음을 삼켰다. 손과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프다. 미친 듯이 아프다.
몇 번째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처음에 주워온 세계수의 나뭇잎은 진즉에 동이 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출역을 나갈 때마다 나뭇잎들이 추가 된다는 것.
어째서인지 교도관들은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찮은 일반 나무들과는 엄연히 다름에도.
어쩌면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고작 그 정도의 마나를 모아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는 자신감. 아니, 맞을 거다. 그 거지 같은 소장의 얼굴을 떠오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파삭-
새로운 나뭇잎을 하나 쥐고 마법을 발현시켰다. 제약된 마나 속에 서도 빛을 발하는 마나가 화상처럼 일그러진 상처들을 치유한다.
후우, 강민식이 비틀 거리며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힘들다, 미친 듯이 힘들다.
마나가 제약된 상태에서 외부의 마나를 끌어와 술식을 해제하는 과정이다. 쉽지 않다. 결코 쉬울 수가 없다.
하지만 희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강민식이 연옥의 죄수가 아닌 용사일 때, 그는 상대적으로 강한 무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용사이니 강하지만 아무리 적들은 더 강했다. 아무리 노력하고 훈련해도 점차 올라가는 적들의 수준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포기는 곧 죽음이었기에, 포기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안 되기에 다른 길을 찾았다.
검을 버리지는 않았다. 마법을 버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더 강한 검술, 더 강한 마법을 찾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는 부족하다. 가진 것도 온전히 소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니 가진 것이라도 잘하자. 편법을 쓰자.
검술과 마법에 대한 재능 자체는 부족했을지언정, 마력 조작 능력과 감응력 만큼은 압도적이었다.
세세한 마력 조작으로 효율과 속도를, 그리고 정밀함을 높였다.
하지만 부족했다. 그의 실력은 한 단계 진보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독이었다.
용사가 되면서 얻은 수많은 능력 중 하나였으나 비겁하다고 여겨 외면했던 능력.
잘 닫아 구석에 처박아둔 상자를 다시 열었고 그게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용사로 있던 차원, 아탈로스에서도, 이곳 연옥에서도.
구속구는 마력을 제어할지언정, 독을 제어하지 못한다.
구속구는 모든 마력을 완전 차폐시키는 게 아니다.
강민식이 가진 용사의 힘은 독을 마나 속에 섞을 수 있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찾았다.”
필요한 건 오직 두 가지다.
더 많은 마나와 더 많은 실험.
용사란 언제나 고난이 따른다. 아주 어렵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협이 한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강민식은 모두 해쳐 나왔고 세상을 구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성공할 것이다. 반드시.
* * *
“···옳은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부소장의 걱정을 김우진은 단순하게 일축했다.
쓸데없는 기우는 아니다. 분명히 리스크가 있는 행동이었으나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옥은 독립된 공간이다. 그런 연옥에 무언가를 들어오려면 반드시 상부를 거쳐야만 한다.
그들은 김우진이 무엇을 하든, 쉽사리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감시의 눈길을 거둔다는 뜻은 아니다.
무언가를 주문하면 모두 군말 없이 주지만 그 정보는 모두 상부의 눈과 귀로 들어간다. 자연스레 김우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감옥이 부셔진 게 문제가 아니야.”
사실 연옥이 부셔진 게 처음은 아니다. 김우진에 의해 무너지고 수복한 적이 있다.
“세계수지.”
세계수는 평범한 나무가 아니다. 신목이자 왕에 필적하는 정령이다.
저들은 김우진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세계수와 그가 함께 있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보다 쉽고 빠른 방법이 있음에도 죄수들을 동원하는 길을 택했다.
연옥을 수리하기 위해 반쯤 완성된 제품들이 아닌 기초적인 재료들을 마구잡이로 주문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 이런 저런 재료가 뒤섞여 있으면 저들은 언제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데르카인을 비롯한 드워프들이 있기에 가능한 선택지였다.
“랜드마크를 바라신다더니?”
“말이 그렇지. 말이.”
“하지만 결국 잠깐의 유예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면 필연적으로 들킬 수밖에 없습니다.”
호송대는 상부의 앞잡이다. 세계수를 아예 뽑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들은 세계수를 발견할 것이고 보고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안도 일단 생각 중이야.”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일단 릴리와 더 친해지는 거야.”
부소장은 릴리라는 이름이 과거에 김우진이 키우던 고양이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태클 걸지 않았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확실히 친해졌다는 확신이 생기면 하이엘프를 부르는 거지.”
그 다음은 더 단순하다. 묻는 거다.
너도 세계수가 뽑혀나가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 아니냐고, 세계수를 감출 방법이 있으면 불라고.
그러면 불거다. 율리아의 목적이 무엇이든 세계수가 산 채로 뽑혀나가는 건 계획에 없을 테니.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합니까?”
“몰라.”
“모른다고요?”
“설마 이런 식으로 자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나마 최후의 방안이라면 드워프들한테 요구하면 좀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만들어 줄지도.”
드워프 장인들의 마공학물품은 어지간하게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 장인이 어느 차원에 내놔도 꿀리지 않으며, 용사라는 특수한 힘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못한다고 하면 다시 공방을 폐쇄해버리면 되는 거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방을 얻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내놔야만 하는 법이다.
* * *
하이엘프로서 수많은 숲들을 거닐어 보았다.
숲의 축복을 받으며 숲의 정기 또한 받았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바쳐진 영약들도 적지 않았다.
하물며 용사로서 영약을 받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율리아 카르센도 이렇게나 많은 영초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뭐긴, 원예반이지.”
시에나 올름의 가벼운 대답은 율리아의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다.
“저는 그냥 평범한 식물들을 기르는 곳인 줄 알았어요.”
“용사들이 평범한 식물들을 기를 리가 없잖니. 이것들은 모두 납품이 될 거란다.”
“납품이요?”
“용사가 되는 자에게.”
“설마 그 영약들이?”
“전부 여기서 재배되는 거란다. 신이라는 놈들한테 보내지고 필요한 용사들에게 전달되지.”
정확히 신은 아니지만.
“잡담은 거기까지다. 영초들을 돌봐라. 하이엘프이니 굳이 업무까지 설명해줄 필요는 없겠지.”
상황설명까지는 용인하고 있던 교도관들의 타박에 엘프들이 원예반 전체로 흩어졌다.
율리아는 아주 작게 싹이 올라온 식물 앞으로 갔다.
‘만드레이크?’
영초들 중의 영초라고 불리는 최상급의 영초였다. 키우기 어렵고 재배하기는 더 어려운, 하지만 그만큼 풍부하고 순수한 마나를 얻을 수 있는 영초였다.
- 가면 놀랄 일이 꽤나 있을 거다. 전부 다 설명해주는 것보다 가서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더 낫겠지.
- 너무 다 알아가면 그것 또한 수상하니 말이다.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간다. 이런 곳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미리 알고 있었다고, 수상하다고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찬찬히 만드라고라를 보듬고 있으니 시에나가 교도관들의 눈치를 보며 접근했다.
“알고 있니? 소장은 의도적으로 우리 엘프들만 배제했어.”
그 의도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뻔하다.
엘프와 세계수. 그 당연한 관계가 접촉할 수 없도록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대화해도 되요?”
“옆에 식물에 나란히 작업하는 건 흔한 일이란다. 작업하면서 사소한 잡담 정도는 그냥 넘어가주고. 다시 본론으로. 네가 준 씨앗이지?”
“네.”
“네가 씨앗을 주고 어머니 나무가 자라나기까지 고작 두 달이야. 어떻게 두 달 만에 어머니 나무가 발아하고 과생장한 거니?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데 대체 무슨 짓을?”
“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정확히는 소장이 했다.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심을 때 영약 29개를 함께 넣었다고 하더라고요.”
“···미쳤네.”
시에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연옥의 소장이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을, 할 수도 없는 발상이었다.
“29개면 재고를 모조리 갖다 박은 건데. 그래서 겸사겸사 우리를 여기에 넣은 건가?”
빈 곳간은 채워야 한다. 소장이 어째서 엘프를 원예반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철칙을 깼는지 이해가 갔다.
“목적은 탈옥?”
당연하다면 당연한 물음이나 시에나의 표정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 봐요? 탈옥하고 싶지 않으세요?”
“하고 싶지. 여기 죄수들한테 물어보렴. 백이면 백 같은 대답을 할 테니.”
연옥의 죄수들에게 있어 가장 첫 번째 소망은 탈옥이다. 그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시에나는 엘프였다. 비록 하이엘프에 비해 세계수와의 교감이 떨어진다고 하나 그게 세계수에 대한 존귀함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고작 탈옥에 어머니 나무를 태우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어머니 나무를 불태운다니. 전 태우지 않았어요.”
“아, 이건 그냥 소장이 보여준 영화 때문에 입에 붙은 거란다. 맥락은 이해했잖니?”
이해했다. 그래서 고민했다.
시에나의 말이 맞다. 세계수는 신성하다. 단순히 탈옥을 위해 한 번 쓰고 버릴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 엘프는, 하이엘프는 없다. 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다른 죄수들은 몰라도 엘프들은 안다. 세계수가 단순히 탈옥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씨앗을 주고 연옥에서 자라나게 했다면 무언가 더 큰 목적이 있음을.
하지만 연옥에서 탈옥보다 중요한 목적이 있을 수 있을까?
시에나를 비롯한 엘프들이 가지는 의문은 그것이었다. 답이 없는데 답을 찾아야 한다.
혼동이 오고 율리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말씀드리면 절대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해주세요.”
“아무한테도?”
“아무한테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시에나는 괜히 발을 담구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들으면 돌이킬 수 없는 느낌. 허나 세계수가 관련되어 있기에 그녀는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어머니 나무께 맹세해.”
굳게 다짐했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기다림,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에나님의 말대로예요. 전 탈옥을 하려고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준 게 아니에요.”
시에나는 역시라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천천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연옥을 부수려고 주었죠.”
“···어?”
하지만 역시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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