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15. 기름 >
똑딱 똑딱-
방 한 칸에 놓인 괘종시계의 추가 흔들린다.
탁탁-
잔잔한 소음은 김우진이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과 어우러진다.
세상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무엇이든 좋기만 한 건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 이면에는 정체를 모를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있었을 거다.
지금의 상황 또한 그렇다.
연옥은 튼튼하다.
용사들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감옥인 만큼, 외벽부터 내부의 시설들 하나하나 단단하지 않은 것이 없다.
지구의 기술력으로 만든 방공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격의 주체가 세계수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세계수. 연옥을 감싼 신목은 그 과분한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가지와 뿌리가 연옥을 옥죄었고 외벽은 물론 내부까지 일부 손상되었다. 마나의 파동은 연옥의 관리 시스템에 과부하를 일으켜 거의 마비 상태로 만들었다.
다행이라면 최후의 최후인 독방 관리 시스템까지는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
추가로 무언가 더 일을 낼 조짐은 없다는 것.
그렇다고 무너진 일부를 다시 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김우진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죄수들을 이용하면 역시 문제가 생기겠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겠지요.”
연옥은 외벽에도 마법진이 도배되어 있는 특수 감옥이다.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 없고 술식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
복구 작업에 죄수들을 동원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들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잡일만 시키고 중요한 부분에서 배제한다고 해도 용사들인 만큼 최악을 가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죄수들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연옥의 수복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특별하게 지어진만큼 수복할 때도 그만한 시간과 노고가 필요하다.
용사 드워프라는 고급 인력들이 추가되고 추가되지 않고의 차이는 꽤나 많은 시간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만 하는 건 옳지 않은 것이 부서진 부분들은 결국 탈옥을 용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 빠르게 수복하느냐, 천천히 수복하고 그 동안 위험을 감수하느냐다.
역시 일장일단이다.
“죄수들을 이용하지 않고 독방에만 가두어두는 게 가장 확실합니다.”
“그리고 영초들도 다 죽겠네.”
먹이만 제때 주면 나름 괜찮은 축사장의 괴물들과는 달리 원예반의 식물들은 하나 같이 섬세하다. 제대로 된 관리가 되지 않으면 개복치마냥 죽어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영초라는 게 괜히 기르기 힘든 게 아니다.
교도관들은 불가능하다. 저들은 영초를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다.
“···좋아, 결정했어.”
그러길 한참. 장고 끝에 김우진이 결론을 내렸다.
* * *
“오늘부터 출역을 다시 시작한다.”
교도소 1층의 로비는 죄수들이 올 날이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입소한 첫 날, 호송대에 이끌려 교도관들에게 인계되는 날이 전부다.
그 외에 출역을 나가거나 할 때, 죄수들은 1층의 정문이 아닌 뒤의 후문이나 쪽문을 통해 나간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죄수들은 이유를 모른다. 그냥 그러려니 할 뿐.
하지만 그렇기에 평소 모이지 않던 로비에서 모인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일개 교도관이 아닌 부소장이 직접 나와 통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죄수들은 무언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죄수번호 1088번, 1099번, 1152번, 1169번, 1191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1178번, 앞으로.”
여섯 개의 번호가 호령되었다. 모두 귀가 뾰족한 엘프들이었다.
“너희들은 전원 원예반으로 간다. 질문 있나?”
“우리한테 원예반을 맡기겠다고?”
시에나 올름의 물음에 부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띠는 성과가 있다면 충분히 포상하시겠다는 소장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저는 소지인데요.”
“죄수번호 1178번, 율리아 카르센. 당분간 소지 업무는 중지다. 원예반으로 출역하도록.”
“그건 납득 못하겠는데요.”
율리아는 소지가 되기 위해 세계수의 씨앗을 바쳤다. 비록 그게 계획의 일부였다고 한들, 씨앗의 가치 자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런 씨앗의 가치를 벌써 끝내버리는 건 불합리한 폭리였다.
“당분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건 네 납득을 바라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감옥이란 게 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행되는 곳이며 소장의 말이 곧 법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부서진 감옥의 수복 작업에 투입된다. 따라오도록.”
33명의 죄수들 중, 하이엘프와 엘프 6명을 제외한 27명의 죄수들이 부소장과 교도관들을 따라갔다.
위가 잘려나간 나무 밑동. 한 쪽에 쌓인 거대한 나무들.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파헤쳐진 구덩이와 평탄화가 이루어진 땅.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곳은 데르카인을 비롯한 죄수들이 수도 없이 출역을 나왔던 곳이었다.
“···이게 다 뭡니까?”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벌목을 마친 곳은 땅을 파헤쳐 밑동을 뽑고 평탄화 작업을 한다. 때문 텅 빈 벌판이 된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그곳에,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광석, 나무, 시약 등이 어우러져 이루고 있는 재료의 산.
그리고 그 정상에는 그들을 이곳으로 부른 장본인이 앉아 있었다. 어깨 위로 파랑새 한 마리를 대동한 채.
“재료다.”
탁, 김우진이 가볍게 착지했다.
죄수들의 시선이 재료의 산에서 김우진으로 옮겨갔다.
“너희들은 이것으로 공방을 만들어라. 재료들을 다듬고 나아가 연옥을 수리해라.”
“···우리보고 연옥을 수리하라는 건가?”
“그래.”
“농담하는 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데르카인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하라면 한다.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징벌방에 들어가고 싶지도, 그렇다고 용사의 힘을 잃고 출소하고 싶지도 않으니 소장이 하라면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출역과 연옥의 수리는 엄연히 다르다. 제대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뛰어난 장인이자 마도공학자다. 연옥이 어떤 구조인지, 얼마나 복잡한 체계로 얽혀 있는지는 대충 감이 온다.
그곳에 새겨준 술식과 마법진 하나하나가 연옥을 지탱하고 죄수들을 압박하며 교도관들을 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부서진 연옥을 수리하는 일은 그 술식들에 접근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대놓고 중요한 부분을 죄수들에게 맡기지는 않겠지만 모두가 한 세상을 구한 경험이 있는 용사들이다. 슬쩍 보기만 해도 나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자들이다.
“왜, 하기 싫은가?”
되돌아오는 반문에 데르카인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개인면담에서는 나름의 예의를 차려주지만 모두가 함께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반말을 툭툭 내뱉는 건방진 놈.
죄수들이 탈옥을 하는 건 끔찍이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심지어 공방도 만들고?”
“제대로 수리를 하려면 공방을 만들어야한다고 알고 있다만.”
“틀린 말은 아니네. 확실히 공방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네. 특히 연옥이라면 공방이 없으면 그냥 망가진 집에 진흙을 바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제대로 된 시설의 존재 유무는 크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나?”
다르게 말하면 공방은 연옥이 아니라 다른 상급 장비들을 만들 때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드워프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것을 알기에 공방을 짓지 못하게 막아왔던 소장이었다.
“그래도 된다. 소장인 내가 허락하겠다는데 토를 달 놈은 없어.”
김우진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공방을 만들어라. 재료는 충분하고도 남을 거다. 대신 설계도를 비롯한 모든 제작에 교도관들을 포함시키고 보고해가며 하도록.”
“명심하지.”
“분명히 말하는데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무언가를 만들게 되었다고 해서 쉽게 나갈 수 있을 만큼, 연옥과 내가 만만하지는 않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김우진이 사라졌다.
“1077번. 네가 작업반장이다. 죄수들을 이끌고 공방을 먼저 제작하도록. 필요하면 교도관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좋다. 단, 모든 것들은 제대로 보고가 올라가야 한다.”
“그러겠네.”
데르카인이 커다란 종이를 하나를 들고 드워프들을 불러 모았다.
“일단 설계도부터 만들도록 하겠네. 이유야 어쨌든 기회가 왔으니 잡아야지. 공방이 하나 쯤 있었으면 싶겠다고 모두 생각하지 않았나?”
“예.”
“물론입니다.”
“최대한 크고 넓고 좋게. 재료는 어차피 충분한 것 같으니.”
“예.”
데르카인이 교도관들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기회네. 공방이 있고 없고는 우리들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어.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경거망동하지는 말게. 어쩌면 일부러 파놓는 함정일 수도 있으니.”
“···소장이 저희들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겁니까?”
“모르네. 하지만 조심해서 좋을 건 없지 않나.”
일단은 조심하는 게 옳다.
* * *
땅땅땅-
망치와 쇠가 부딪히면 불꽃이 튀고 충격을 발산한다.
한 번, 한 번이 쌓여 수십 번이 되고 그 수십 번이 쌓여 일정한 흐름이 된다.
일종의 박자감이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분노하며.
망치는 대장장이의 감정을 담는다. 그렇기에 아름답고, 그렇기에 일생이 담겨 있다.
땅-
데르카인의 망치질은 녹슬었다. 망치를 마지막으로 잡아본 게 언제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는 잊었을지언정 몸은 기억하고 있다. 평생을 해온 일을, 업으로 삼아왔던 일을 쉽게 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움직임은 어느새 능숙하게 변했다. 불협화음처럼 끼긱 거리던 소음도 웅장한 악장이 되었다.
화로의 뜨거운 열기, 흐르는 땀과 어우러지면 데르카인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다시는 망치를 잡지 못할 줄 알았다. 다시는 공방에 돌아가지 못할 줄 알았다.
어찌 잊고 살았을까. 이 즐거움을.
어찌 무시하고 살았을까. 육체의 비명을.
애써 외면하고 밀어두었던 욕망들이 팔팔 끓어올랐다.
공방의 일을 잠시 쉰 대장장이는 있어도 아예 끊어버린 대장장이는 없다.
드워프란 족속들이 그렇다. 한 번 망치를 잡으면 죽을 때까지 놓을 수 없다. 죽기 직전까지 공방에 출입하며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즐기는 난쟁이들이다.
데르카인은 자신이 그런 흔하디 흔한 드워프 중 하나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것이었나.’
그러고 있으니 소장이 노리던 게 무엇인지 감이 왔다.
마약. 드워프에게 있어 공방의 일은 마약과도 같다. 간신히 외면한 기억을 다시 끄집어냈으니 드워프들은 본래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다.
성급한 일반화라고 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데르카인은 그랬다.
‘탈옥.’
언제든 하고자 했다. 때를 기다리며 차분히 준비했다.
20년 전 그날. 연옥이 불타던 그날로부터, 지금의 소장을 처음 만난 순간으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짓밟힌 희망에 절망했고 정신을 차리는데 5년이 걸렸다. 그리고 15년을 준비했다. 천천히, 성급하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몇 가지 도구만 만들면 보다 확실해진다.’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없이 높다.
하지만 꺼져가던 심장에서 간신히 살아 오른 불씨는 다시 꺼지면 더 이상 타오르지 못한다.
소장이 노린 것이 이것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그에게 남은 미래는 그리 길지 않다.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데르카인님. 혹시 마력증폭기를 만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때 말씀하신 확실한 방법을 거의 찾은 것 같습니다.”
그의 불안감을 사던 신참 인간 죄수와의 만남은 그의 불꽃에 더욱 기름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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