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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5화 (15/150)

# < 014. 대안 >

아무리 완벽한 계획이라고 할지라도 변수는 발생한다.

이번 일의 변수는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하이엘프이기에 당연한 믿음. 누구든지 감히 세계수에 간섭할 수 없을 거라는 시간과 존재가 쌓아온 믿음.

율리아는 스스로가 너무 안일했음을 인정했다.

연옥에 들어온 그녀가 순순히 소장의 말에 따른 것은, 어디까지나 구속구만 풀면 소장이라 한들 자신을 핍박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계획대로 모든 것이 흘러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만용이었다.

어째서 그가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의 소장인지, 조금 더 심오하게 고찰해봤어야 했다.

너무 우습게 보았다.

인정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녀는 갇혔고 연옥에 온 이상 별 다른 대안은 없다.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두 가지.

소장이 어머니 나무에게 해놓은 짓이 아무런 효과가 없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이미 한 번 깨어져버린 신뢰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소장의 자비를 구하거나.

어느 쪽이든 결정을 내리는 건 그녀가 아니었다.

* * *

난장판.

가까이서 본 세계수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뿌리 전체가 연옥을 뒤덮고 있으며 울창한 나무 하나가 옥상에서 우뚝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 연옥의 본래 형태는 사라진지 오래. 오랫동안 방치되어 넝쿨로 뒤덮인 폐교를 보는 것만 같다.

외관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김우진은 우선 세계수가 발아했고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생장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소장님!”

교도소 내부로 복귀하자 우왕좌왕하는 교도관들 사이로 부소장이 달려왔다.

“변종 타르스크가는 처리했어.”

“지금 그따위 도마뱀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수의 뿌리와 가지가 연옥을 감싸버렸습니다. 발아 과정에서 일어난 마나의 폭풍에 휘말린 마도 장비들이 일부 먹통이 되었습니다.”

“일부라면 어느 선까지?”

“다행히 죄수들의 독방 관리 시스템은 유지 중이라 출역 중인 죄수들을 전부 복귀시켰지만 그 외에는···.”

연옥에서 가장 신경을 쓴 게 독방 관리 시스템이다. 마지막까지 버틴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시스템 복구는 얼마나 걸리지?”

“마나 폭풍으로 잠시 먹통이 되었을 뿐, 고장 난 건 아니랍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죄수들 반응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뜬금없이 자라난 세계수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죄수는 없다.

“이걸 기회로 여기고 탈옥을 준비하는 놈이 있을 수도 있어. 평소보다 경계를 늘리도록.”

“예.”

“그리고 1178번도 방으로 돌려보내.”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때는 분명히···예? 뭐라고요?”

얌전히 김우진의 뒤를 따라오며 창밖으로 보이는 세계수의 면면을 살피던 율리아가 흠칫 놀랐다.

“방으로 돌아가라.”

“잠깐만, 잠깐만요. 조금만, 조금만 더 밖에 있으면 안 될까요? 독방에서는 어머니 나무를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말한 시점에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알 텐데.”

“이곳에 어머니 나무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궁금하신 게 있으면 다 말씀드릴게요!”

“궁금한 게 생기면 부르도록 하지.”

“아니, 그래도! 제발! 이건 절 두 번 죽이는 거예요!”

율리아가 감옥 안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김우진은 집무실로 올라가는 대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세계수를 심어두었던 곳으로 향했다.

거대한 줄기가 보였다. 어지간한 장성 수십 명이 강강술래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줄기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흔히들 세계수에 대해 모르는 자들이 하는 착각이 세계수가 오직 하나의 줄기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거다.

틀렸다. 세계수란 거대한 여러 줄기들이 뒤엉키고 얽혀 하나의 나무를 형성한다.

뻗어나간 줄기들은 주변을 완전히 잠식하고 나아가 연옥으로 향했다. 연옥의 벽면을 타고 옥상까지.

줄기를 따라 김우진 또한 옥상 위로 올라왔다. 휘황찬란한 대지나 벽면과는 다르게 옥상에는 그저 큰 나무 하나만 있을 뿐이다.

하나의 줄기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여러 가지들. 수북한 나뭇잎.

풍성한 피톤치드 향은 싱그럽다. 그저 다가가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은은한 마나는 과연 세계수란 감탄이 나오게 한다.

김우진은 세계수의 줄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가만히 서서 마나를 탐닉했다.

세계수란 시간과 비례해 성장하지 않는 신목이자 정령이다.

나무로서의 정체성이 먼저인지, 정령으로서의 정체성이 먼저인지는 중요치 않다.

적당히 자란 세계수는 자신의 의지를 피력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성장이라면 충분히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정령체로서 현현하는 것도 가능할 터.

“그렇지 않니?”

- 삐이이이이!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진 반투명한 파랑새 한 마리가 김우진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 * *

영약이란 것은 어느 차원에서든 귀하다. 그게 식물에서 비롯되었든, 동물이나 몬스터에서 비롯되었든 그 정순함의 차이가 있을 뿐, 막대한 마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누군가 대신 쌓아준, 단숨에 경지를 올릴 수 있는 귀중한 물건.

당연히 귀중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철저해?’

영단의 갈취.

강민식이 축사장 혹은 원예반에 나가고자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억압된 마나를 대체할 에너지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축사장이었기에 영단이라 불리는 것이었고 축사장의 수많은 몬스터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을 도축하고자 두 달 동안 노력했으나 강민식은 여전히 자격을 얻지 못했다.

이유는 많았다.

아직은 신참이기 때문에, 영단은 귀중히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는 영단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아주 사소한 양을 조금씩 긁어내 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근처에도 못 가게 하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영단에 문제가 생기면 소장이 난리를 치기 때문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조금 과하다. 어쩌면 저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행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시에나 올름. 축사장의 죄수들을 관리하는 그녀가 거슬린다.

어쨌든 무의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변이 발생했다.

연옥을 혼돈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나무.

‘저건 또 뭐지.’

엘프와 하이엘프들이 세계수의 전언이라며 강민식을 돕기는 했지만 세계수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연옥을 뒤덮은 나무가 세계수라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저 세계수가 평범한 나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저것이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무척이나 긍정적이었다.

‘마나가 풍부해.’

강민식이 교도관 몰래 숨겨온 나뭇잎 여러 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무가 순식간에 성장하면서 낙엽들이 생겨났다. 일개 나뭇잎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풍부한 마나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두 달이 넘게 축사장에 출역을 나가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영단을 빼돌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주변을 확인하고 끼익, 배급구를 닫았다. 주변의 소음과 마나가 모두 차단되었다.

한 손에는 나뭇잎을 하나 쥐고 다른 손으로는 구속구를 잡았다.

마나가 부족해 제대로 된 시도는 해보지 못했지만 술식을 파훼하기위한 조사는 매일 같이 행했다.

이제는 더 없이 익숙해진 마법진과 술식.

여러 가지 이론들을 만들어냈으니 이제는 실험을 해볼 시간이다.

강민식이 간섭을 시작했다.

* * *

하늘이 우중충하게 물들고 비와 낙뢰가 떨어지기만 해도 변하는 게 감옥의 일정이다.

세계수의 갑작스러운 발아는 연옥의 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정이 사라졌다. 정신교육도, 출역도 모두 없어졌다. 죄수들은 모두 자신의 방에 갇혀 지루한 나날들을 보냈으며 음식 배달 또한 소지가 아닌 교도관들이 직접 했다.

죄수들간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행태는 누가 봐도 세계수에 대해 의견을 교류하는 것조차 원천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 행태가 오히려 일부 죄수들에게는 희망으로 다가왔다.

늙은 대장장이, 데르카인이 그러했고, 감옥 생활에 지친 엘프, 시에나가 그러했다.

[세계수. 결계. 영향.]

몰래 숨겨둔 통신기에 적힌 단편적인 정보에 데르카인은 자신의 가정에 확신을 더했다.

죄수들을 의도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율리아. 의도?]

데르카인이 응답했다. 교도관과 소장의 눈을 피해 간신히 만들어낸 통신기는 마나를 극도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 구형적인 체계를, 아주 단편적인 메시지만을 보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용중에는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흩뿌려 평소에는 잘 사용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주 유용하다.

세계수의 마나가 요동치는 판에 이런 티끌만한 마나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니.

그가 보낸 메시지는 오직 하나뿐인 통신기의 짝을 찾아 갔다. 그리고 다시 응답이 왔다.

[확실.]

통신기의 다른 주인은 시에나다. 같은 엘프로서 그녀는 율리아가 의도적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소장에게 넘겼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탈옥?]

[불확실.]

하지만 왜일까. 그 목적이 탈옥인지는 불분명하다 여긴다. 죄수의 최우선 목적이 탈옥이 아니면 무엇일까.

[이유.]

[어머니. 이런.]

어머니는 어머니 나무. 이런은 이런 일이다. 어머니 나무를 이런 일에 쉽게 소비하는 건 하이엘프 답지 않다는 뜻.

나름 납득이 가면서도 가지 않는다. 드워프이기에 하이엘프와 세계수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에, 탈옥보다 중요한 건 그가 생각하기에는 없기에.

일을 벌인 상대의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건 꽤나 큰 문제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해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목적이 비슷하기만 하더라도 서로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에나는 율리아의 의도가 불분명하다고 했지만 데르카인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세계수는 발아했고 연옥은 스톱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다르게 말하면 자라난 세계수가 결코 연옥에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롭게 작용했다면 스톱될 리가 없으니.

“···때가 다가오고 있다.”

탈옥의 때가.

데르카인은 그 때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 * *

소장실 구석에는 반투명한 수정하나가 놓여 있다.

김우진의 얼굴만 한 수정은 평소에는 거의 쓸 일이 없다. 방치된 채 먼지만 쌓여간다.

하지만 가끔, 수정이 제 역할을 할 때가 있다. 마나를 받아들이고 빛을 발하며 작동한다. 그리고 차원 너머 누군가의 통신을 받아들인다.

수정구가 일 할 때는 정해져 있다.

새로운 죄수의 입소를 알리거나, 연옥에 문제가 생겼을 때다.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는 김우진이 결코 달가워 할 일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소장님.”

빛을 발하며 미약한 진동을 발하는 숙정구를 그대로 둔 지도 10분이 지났다. 그 동안 수정구에 도달한 통신은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탁탁, 가볍게 탁자를 두들기던 손가락이 결국 수정구로 향한다. 김우진의 마나에 반응하며 보다 격렬한 빛을 발한다.

[늦게도 받는군.]

[아아, 들리나?]

다소 경박한 어투의 목소리가 통신구를 통해 새어나왔다.

김우진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남자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연옥의 차원 결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건 우리 쪽에서 의도한 게 아니야. 그렇다는 건 네가 원인이라는 건데. 무슨 짓을 한 거지?]

“할 일이 더럽게 없나 보군.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것을 보니?”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불의의 변수는 딱히 선호하지 않아서 말이지. 나도, 다른 놈들도.]

[제대로 묻지. 연옥에 문제가 생겼나?]

“연옥은 언제나와 같다. 평화롭고 죄수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쓰고 있지. 문제는 없다.”

[그렇다면 연옥의 결계에 이변이 일어난 원인은?]

“글쎄. 명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다. 이쪽에서도 파악 중이다.”

[김우진.]

수정구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우리는 널 신뢰하고 있다. 네 능력, 네 성향, 그리고 네가 보여준 성과까지. 연옥의 소장으로서 너보다 적합한 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설이 길군.”

[하지만 그래서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으려는 자들이 넘쳐나지.]

[연옥의 결계에 이변이 발생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김우진에게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들이었다. 그 끝에 다가올 말이 무엇인지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거다.]

그래, 언제나와 같다.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연락이 온다. 하지만 뚜렷한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경고다. 지켜보고 있으니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잘하라는.

[죄수들만 잘 출소시켜준다면 다른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네가 문제가 없다고 했으니 믿겠다.]

[사실 결계에 해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유의미한 사태로 번지지 않는 이상, 사소한 것들은 전부 넘길 수 있다.]

“고맙다고 해야 되나?”

하지만 그건 김우진에 대한 호의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좋은 건 이쪽이기에 그런 것뿐이다. 그게 너와 우리의 계약이니까.]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하기 위해, 걷잡을 수 있는 문제가 일어나기를 바라며 방관하고 있을 뿐.

[그럼 행운을 빌지. 부디 오래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끔찍한 소리하지 마.”

툭, 연락이 끊어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저놈들은 멍청한 선택을 했어.”

세계수로 인해 엘프들이 모두 자발적 출소를 선택해도 태연할 수 있을까?

그때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용사들의 출소를 바라면서도 김우진과의 계약으로 인해 또 너무 많이 나가는 것은 바라지 않는 모순적인 놈들이니.

“하지만 세계수가 자라난 것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결계에도 유의미한 변질이 일어났다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는 게 좋을 텐데 왜 가만히 그냥 넘기는 걸까요?”

“두 가지 중 하나겠지.”

정말 사소하다고 생각하거나.

“또 다른 대안이 있거나.”

김우진은 후자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두었다. 저 음흉한 놈들의 말은 그대로 믿을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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