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12. 외출 >
10월 15일. 맑음.
오늘 세계수를 심었다.
마나가 풍족하면 더욱 빠르게 생장한다는 하이엘프의 말을 믿고 29개의 영약을 함께 동봉했다.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10월 17일. 흐림.
고작 이틀이다. 그런데 마음은 온 통 세계수에 가 있다.
기대가 너무 큰 모양이다. 아니, 희망이라고 할까.
하지만 변명 거리는 있다. 여섯 명의 엘프들을 한 번에 치워버릴 수 있는 기회이니 연옥의 소장이라면 누구나 기다릴 수밖에 없다.
흐릿한 게 곧 비가 올 것 같다. 세계수도 나무니까 물주면 잘 자라나?
율리아가 개인 면담을 신청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세계수의 씨앗을 보여달라는 헛소리다. 바로 내쫓았다.
세계수를 심은 곳에 마나를 주입했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앞으로 매일 해야지.
10월 25일. 흐름.
축사장에 간 강민식이 아직까지 사고를 치지 않았다. 아마 때를 기다리는 거겠지.
목적이 뭘까. 대충 짐작은 간다. 마물과 마수의 부산물.
뼈, 이빨, 힘줄, 비늘 그리고 영단.
모든 무기나 장비를 압수당했으니 무엇이든 구해놓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놈의 목적을 더 특정 지을 수 있다.
강민식은 콕 찝어 축사장으로 보내달라고 한 게 아니다. 아무 곳이나 환경 조성반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축사장이든, 원예반이든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축사장과 원예반에서 공통적으로 구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영단 혹은 영약.
넌 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강민식은 이렇게 쉬운데 율리아는 모르겠다. 자꾸 개인 면담을 신청한다. 전부 거절했다.
10월 27일. 강풍.
시에나가 따지고 들었다.
율리아는 소지를 시켜주면서 왜 자기는 안 시켜주냐고.
소지를 시켜줄 테니 출소하라고 하니까 출소하면 어떻게 소지를 하냐고 되물었다.
근데 가능은 하다. 출소를 한다고 바로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보통 사나흘의 텀이 있으니까. 그 시간 동안은 소지가 가능하지 않겠나.
“출소를 결정한 시점에서 이미 죄수가 아닌 것 아니니?”
하지만 이 물음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과연 수 백 년을 산 엘프는 현명하다.
“그래도 바라던 소지는 하실 수 있으니 서로 윈윈 아닙니까?”
“할 말을 잊게 만드는 헛소리구나.”
출소는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다시 엄포를 놓았다. 세계수가 출소하라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
그날이 기대된다.
11월 1일. 단풍.
연옥의 모든 나무들에 단풍이 폈다. 사실 한 달 전부터 하나씩 물들기 시작했는데 11월이 되니 거의 모든 나무들의 색이 변했다.
주황빛, 노랑빛, 그리고 가지각색의 나뭇잎들까지. 꽤나 장관이다.
아예 정원 전체를 나무로 가득 채울까. 그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세계수는 더 장관일 테니 나쁘지 않다.
고생이야 죄수들이 하는 거고.
씨발, 씨발 욕이야 하겠지만 그러면서 출소하겠다고 하면 남는 장사다. 욕한 놈은 징벌방에 넣어도 그만이고.
아니면 드워프들과 관련된 무언가를 만들어주는 것도 좋다. 드워프들에게 엘프들의 세계수에 비견되는 무언가가 없을까?
그걸 알아내고 이용만 할 수 있다면 드워프 열 명의 드워프들을 모조리 내보낼 수 있을 텐데.
율리아가 또 개인 면담을 신청했다. 계속 거절만 할 수는 없어서 만났다. 씨앗을 보여 달라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꺼지라고 내보냈다.
11월 11일. 비.
빼빼로 데이다. 괜히 감상에 젖어 소지에게 빼빼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놈이 크라켄의 다리를 튀겨서 그 위에 초콜릿을 묻혀 왔다.
끔찍한 혼종이다.
열 받아 놈의 입에 쑤셔 넣었더니 맛있게 먹었다. 한 입 먹어 봤더니 생각보다 맛있었다.
크라켄 자체에 짭짤한 간을 강하게 해 단짠이 괜찮았다.
확실한 건 크라켄은 내가 먹어본 어떤 문어보다 맛있다는 거다.
덕분에 베르너는 비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 걸 피했다.
11월 15일. 맑음.
세계수를 심은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도 없다. 영약을 그렇게 때려 부었는데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율리아가 또 면담 신청을 했다. 거절했다.
11월 20일. 맑음.
간만에 문제가 생겼다.
연옥은 구조는 단순하다. 연옥의 건물을 중심으로 담이 둘러싸고 있다. 그 내부가 정원이며 외부는 또 다르다.
정원의 외부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다. 마법처럼 사막, 설원, 산, 숲, 호수 등의 공존할 수 없는 여러 환경들이 펼쳐져 있다.
외부에는 몬스터들이 넘쳐난다. 일부러 풀어 적당히 통제하는 놈들이다.
자연스러운 생태계를 형성해주고 죄수들이 탈옥해 정원을 벗어났을 때, 2차 방벽 역할을 해준다.
몬스터들의 관리는 교도관들의 몫인데 최근 놈들 사이에 대규모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놈들끼리 싸우는 거야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지만 한 교도관 말로는 이레귤러가 발생한 것 같기도 하다고 한다.
같으면 같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같기도 하다니.
놈에겐 얼차려를 시켰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으니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12월 1일. 눈.
달력상의 겨울이 되자마자 첫눈이 내렸다.
나쁘지 않다.
죄수들은 최근 들어 무척이나 얌전해졌다. 왜일까. 단순히 내게 당한 게 많다고 조용해지는 건 용사들답지 않았다.
특히, 가장 탈옥에 열성적이었던 데르카인이 얌전한 건 솔직히 폭풍전야와 같았다.
개인 면담으로 한 번 떠보니.
“늙어서 이제 더 할 힘도 없네.”
“그럼 출소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제 와서 말인가?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탈옥을 할 계획은 없고 말이죠?”
“물론이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시죠.”
“발랐네.”
“하려면 잘하셔야 할 겁니다. 이번에 걸리면 그냥 안 넘어갑니다. 못해도 3징벌방, 일주일 이상으로 갈 테니 각오 단단히 하세요.”
“안한다니까. 내가 바본가? 그렇게 실패하고 또 하게?”
전혀 신뢰성이 없었다.
경계심이 한층 올라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데르카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앞으로 쭉 이랬으면 좋겠다. 한 달 후면 간만에 휴가다.
세계수는 여전히 싹을 피우지 않았다.
12월 15일. 눈.
또 눈이 내렸다.
세계수를 심은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아직도 싹을 피우지 않았다.
제기랄. 설마 비료가 너무 많아도 죽을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마나과다 복용으로 뒤진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세계수인데.
* * *
김우진이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메마른 입 안을 적셨다. 쌉싸름한 커피 향이 좋았다.
창밖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지고 있는 노을이 눈에 반사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일견 평화롭다.
적어도 담으로 감싸진, 정원 내부는 그렇다.
“교도관이 당했다고?”
김우진이 일기장을 넘겼다. 놈이 처음 언급된 것은 11월 20일이다.
몬스터들간의 대규모 분쟁, 전투와 포식으로 인한 이레귤러의 탄생.
교도소 밖에는 워낙 몬스터들이 많은 지라 그리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도관이 당했다는 건 놈들의 수준이 김우진의 생각보다 조금 더 위라는 뜻이었다.
“어떤 놈이지?”
“타르스크가(Tarsque)입니다.”
늪지에 서식하는 거대한 악어 괴물이다.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두터운 비늘은 어지간한 오러로도 쉽게 뚫을 수 없을 만큼 두텁다.
엄니는 길고 날카로우며 악어 주제에 땅에서도 무척이나 빠르다. 꼴에 드래곤의 아종이라고 숨결의 권능이 있는데 독무가 토해져 나온다.
타르스크가의 거대한 주둥아리 속으로 교도관 하나가 들어갔다고 한다. 아마 지금쯤 놈의 위장에서 소화가 되도 열 번은 되었을 거다.
일개 교도관이라고 하나 연옥을 관리하는 자들이다. 그 무력은 결코 타르스크가 따위에게 한 입에 삼켜질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건 놈이 정말로 이레귤러라 상정 이상의 힘을 가졌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런 놈은 바로 정리해 주지 않으면 기껏 조성해 놓은 외부의 생태계가 개판이 된다.
그리고 생태계가 망가지면 먹잇감을 잃어버린 놈들의 광기가 교도소로 향하게 된다. 오래 전에 한 번 그랬던 적이 있다고 들었다.
“제가 가서 처리합니까?”
“아니, 내가 직접 가지.”
큰 이유는 없다. 연옥에서 가장 한가로운 자를 꼽자면 소장인 그였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세계수. 만약 그가 변종 타르스크가를 처리하러 갔을 때, 세계수가 발아한다면?
율리아를 두고 가기에는 꺼림칙하기 그지없다.
구속구를 찬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보여줬다 시피 작정한다면 교도관들을 요리조리 피해 목적지까지 도주할 수는 있다.
당도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교감이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교도관들을 더 붙이면 되긴 하겠지만 만약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한다.
“데려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아.”
율리아가 가진 꿍꿍이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모든 죄수들에게는 탈옥이라는 공통된 목적이 존재하고 세계수로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는 뻔하니까.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가 세계수에 대해 알고 있는 단편적인 것들 보다 모르는 것들이 더 많을 거다.
이번 기회에 겸사겸사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1178번을 불러.”
잠시 후, 율리아가 올라왔다.
“드디어 저에게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보여줄 마음이 생기신 건가요?”
“질리지도 않는군.”
“그럴 리가요.”
“몬스터를 잡으러 갈 거다. 너도 동행해야 하고.”
“제가 왜요?”
“소지는 교도관들이 하는 일을 대신해주는 죄수다.”
“이해했어요. 소장님이 나설 정도면 꽤나 대단한 놈인가 봐요? 드래곤이라도 나왔나요?”
어차피 직접 보게 될 텐데 말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
“드래곤의 아종이다. 타르스크가. 알지?”
“연옥이라서 그런지 밖에 있는 몬스터도 흔하지 않은 놈이네요. 근데 소장님이 직접 나설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포식을 통해 변종이 됐어.”
“아하.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죠.”
율리아는 쉽게 납득했다. 이레귤러라는 게 쉽게 나타나는 종은 아니지만 용사들의 감옥이 있다는 것보다 놀라울까.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정확히 뭔가요?”
“그냥 잘 따라오기만 하면 돼.”
“그건 딱히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요.”
“의문을 가지지 마.”
“제가 잡으면 씨앗을 보여주시면 안 되요?”
“출발은 내일 오전이다.”
“씨앗을···.”
“데리고 가.”
“예.”
율리아가 사라졌다.
30분 뒤, 베르너가 저녁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
“율리아가 말했나?”
“극상의 진미를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베르너가 자신했다.
“타르스크가의 외피는 어지간한 몬스터들을 다 씹어 먹을 정도로 단단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속살은 부드럽고 달콤하기 그지없죠. 몬스터들 중에서도 극상의 진미에 꼽히는 재료입니다.”
그런데 그 몬스터가 변종이 되었다. 최상품 위에 극상품이 나타났으니 베르너로서는 반드시 잡고 싶었다.
“싫어.”
하지만 김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데려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반대로 말하면 굳이 데려갈 이유도 없다.
하이엘프에 대해 집중하고 싶은 상황에서 신경 써야 할 짐 덩어리가 하나 더 느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하, 하지만···!”
“시체는 최대한 챙겨서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소장님이 사냥하면 살이 다 망가지지 않습니까!”
“그럼 네가 소장 하던가.”
독도 버려 버리고! 타르스크가는 독이 생명인데!
탁-
문이 닫혔다.
교도관들의 손에 붙들려 질질 끌려 나가는 베르너의 아련한 절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김우진이 쟁반을 열었다. 따끈한 국밥이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독도 챙겨 오실 겁니까?”
“대답해야 되나?”
다데기를 풀고 밥을 말았다.
지구에서 먹어본 어떤 국밥보다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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