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2화 (12/150)

# < 011. 가정 >

“소지 일은 할만 하고?”

“네. 적어도 나무를 벌목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괜찮네요.”

“축사장에 가는 것보다도 괜찮을 걸.”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동족애가 강하며 하이엘프는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율리아 카르센이 어느 날 뚝 떨어진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한들, 엘프 다섯 명의 무리에 섞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짜 궁금한데 대체 어떻게 소장을 구워삶았니?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거래를 했어요.”

“거래?”

잠시 머뭇거리던 시에나가 재차 물었다.

“혹시 그 거래의 품목이 세계수와 관련된 건 아니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소장의 집무실에서 비롯되었던 숲의 마나를 느끼지 못한 엘프는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더 없이 친근하고 그리운 숲의 정기.

그렇기에 의문이 생겼다. 어째서 그 마나가 소장의 방에서 느껴졌는가. 왜 그날 율리아는 2징벌방에 들어갔는가.

시에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애써 부정했다.

모든 종족이 세계수를 특별하게 여긴다. 하지만 다른 종족이 가지는 특별함과 엘프가 가지는 특별함은 또 다르다.

엘프에게 있어 세계수는 신성한 나무, 그 이상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이엘프라는 존재가 세계수와 연관된 무언가를 거래의 대가로 여겨 스스로 소장에게 바쳤다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겠죠. 맞아요. 세계수와 연관이 있어요.”

“···나뭇잎이지?”

여지없이 깨지는 믿음. 하지만 아직 비빌 언덕은 남아있다.

나뭇잎일 거다. 세계수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 중에 그나마 가장 흔하고 덜 중요한.

하지만 그 장엄한 마나가 고작 나뭇잎 정도로 가능할까?

곧장 나오지 않는 대답은 그녀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나뭇잎이라고 말해. 나뭇잎이어야만 해. 나뭇잎일 수밖에 없어.”

“···짐작하고 계시잖아요.”

“···정말로?”

시에나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이 간신히 ‘흐그르’ 수준에서 그쳤다.

“씨앗? 열매?”

세계수의 씨앗, 세계수의 열매. 크게 보면 같다. 씨앗은 결국 열매 속에 있으니.

하지만 엘프들이 말하는 씨앗은 다르다. 맺힌 열매를 건드리지 않고 백년을 놔두면 씨앗이 과실을 모두 흡수하고 하나의 형태가 된다. 그게 온전한 세계수의 씨앗이다.

“씨앗이요.”

“돌았니···!”

“거기, 경고다. 잡담 그만하고 얌전히 보도록.”

교도관의 지적에 시에나가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광활하게 펼쳐진 숲과 동족들의 영상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낮게 속삭였다.

“너 미쳤니?”

“미치진 않았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하이엘프가 세계수의 씨앗을 인간에게 넘겨? 그것도 고작 소지가 되려고?”

세계수가 어떤 존재인가. 하이엘프가 어떤 존재인가.

시에나는 격렬한 혼동을 느꼈다.

다른 차원의 엘프는, 하이엘프는 원래 이런 건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연옥에는 그녀까지 다섯 명의 엘프들이 있고 모두 각기 다른 차원에서 왔으나 성향과 종족적 특성은 같았다.

그녀가 결론을 내렸다.

그냥 죄수번호 1178번, 율리아 카르센이 미친 거다.

그것도 아니면 무언가 꿍꿍이가 있거나.

그녀는 후자에 더욱 무게를 실었다.

딱히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전자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서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응?”

시에나의 물음에 율리아는 고민했다.

솔직하게 답해야 할까? 그래도 같은 엘프이니 비밀을 지켜주지 않을까. 어쩌면 도와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게 아니라면?

모든 인간이 신용이 있고 착한 게 아니듯, 엘프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 달 남짓은 타차원의 엘프를 알아가기에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쭉 함께 있지 못하고 간간히 출역 때 만나기만 한 걸로는 더욱 더.

“어머니 나무께 맹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세계수에 대한 것은 모든 엘프가 같다. 그렇기에 믿을 수 있다.

“어머니 나무에 맹세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 되니?”

“거기에 이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추가하면요.”

“어머니 나무께 맹세하는데 네가 하는 말을 절대 누구에게도 퍼트리지 않고 그걸 이용해 무언가를 하려고도 하지 않을게.”

은은한 제약이 시에나의 심장을 옥죄었다. 엘프들에게 있어 세계수의 맹세는 결코 말뿐인 허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신중해야 하며, 더욱 신성하고, 신뢰가 있다.

“소장은 어떤 사람인가요? 사람은 맞나요?”

“내가 질문을 한 걸로 아는데.”

“결과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일단은 그렇단다.”

“일단은?”

“근본이 인간이라는 건 맞지. 지구라는 고향 차원도 명확하게 있고.”

그렇다고 그를 단순한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나는 살면서 저 인간보다 강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단다.”

소장은 인간을 초월했다.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었다. 인간의 탈을 쓴 무언가라면 모를까.

“강한 건 알아요. 그런 것 말고, 조금 더 근본적인?”

“과거나 그런 걸 이야기 하는 거니?”

“비슷하겠죠?”

“몰라.”

“몰라요?”

“소장이 처음 연옥에 온 건 20년 전이란다. 그런데 그 20년 동안 소장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애초에 하는 게 더 이상하다. 소장이 죄수에게 과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무도 그가 과거에 어떤 인간이었는지, 무엇을 하다왔고 어떻게 연옥의 소장이 되었는지 모른단다. 우리를 여기로 보낸 개새끼들과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긴 하는데 추정은 추정일 뿐이지.”

“그렇다면 세계수의 씨앗에 간섭을 성공하려면 어떤 능력을 가져야 할까요?”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들으신 그대로가 맞아요.”

“농담하는 거지?”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잠깐의 침묵. 시에나는 애써 할 말을 찾았다.

“···그게 가능하다고?”

“저도 불가능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날 이전까지는요.”

“어머니 나무에 맹세하고 진실이야?”

“맹세하고 진실이에요.”

맙소사, 그게 그 파동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격렬했구나.

시에나가 얼굴을 쓸었다. 이제야 모든 전말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래서 더 놀라웠다.

그녀가 알기로 씨앗이라 한들 감히 세계수에 간섭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 딴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저도 이해할 수 없어서 묻는 거예요.”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알아?”

“몰라요.”

“이후에 반응은? 세계수의 반응 같은 것.”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소장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마치 저를 대하는 것처럼.”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간섭을 통해 인간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그것도 하이엘프에 준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백 번 양보해서 가능성을 찾아보자면 아예 제로에 수렴하는 건 또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미 결과가 나왔으니 끼어 맞추는 수준이었지만.

“율리아, 넌 연옥의 교도관들에 대해서 얼마나 아니?”

“교도관이라는 것?”

“그리고?”

“좀 친근하다는 거요.”

“그거 아니? 모든 엘프들이 그렇게 느낀단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마치 정령 같죠.”

엘프들에게는 더 없이 친숙한 친구들. 교도관들에게서는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정순한 마나가 느껴졌다. 하지만 일반적인 정령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확신을 내리지는 못했다.

“맞아. 정령이니까.”

“정령이라고요?”

“일반적인 정령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본질은 정령이 맞단다. 확실해. 아마 너도 조금 더 오래 감옥에 있다 보면 깨닫게 될 거란다.”

“잠깐만요. 간수들이 정령이면 소장은···.”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겠지.”

정령술사. 한 가지 가정이 율리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다면 어째서 호감을 샀는지도 이해가 갔다.

정령술사란 정령친화력이 뛰어난 자들. 태생적으로 정령의 호감을 사는 자들.

그리고 정령이 먼저인지, 신목이 먼저인지 선후에 대한 의견이 갈리지만 그 본질이 나무이자 정령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령술사라고 씨앗에 간섭할 수 있는 건···.”

“그러니까 가정이라고 했잖니. 결과가 나왔으니 가장 그럴듯하게 과정을 끼워 맞추는 가정.”

시에나도 율리아도 그 가정에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엘프와 하이엘프는 왠지 모르게 그 가정이 맞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김우진이 둥글게 깎은 돌을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고 있던 게 얼마나 되었다고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역시 일반적인 돌은 씨앗의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착 감기는 느낌부터 촉감, 충만한 마나와 은은한 피톤치드 향과 숲에 온 듯한 느낌을 일개 돌이 따라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일반적인 돌은 아니고 마정석입니다.”

“세계수의 씨앗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이의 차이인 건 맞아.”

“그거야 비교 대상이 너무 대단하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부소장의 정론에 김우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강민식은?”

“아직까지는 무난히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끝?”

“특이사항으로는 생각보다 아주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인이랬지.”

그렇다면 마물을 기르고 잡아먹는다는 거부감이 적은 게 이해가 간다.

“그런데 괜찮은 겁니까?”

“뭐가?”

“이제 남은 영약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원예반에서 재배를 한다고 해도 영약이란 건 온전히 길러내기도, 수확하기도 힘든 물건이다.

특히나 그것들을 엘프가 아닌 수인들이 수확하면서 더욱 더.

한 달에 10개라는 분량은 결코 적지 않았다. 가끔 잉여 생산량이 남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부족하기도 하다.

그래서 잉여 생산물들을 창고에 잘 보관해두는 것 아닌가. 그런데 김우진이 모든 잉여물들을 써버렸다. 만약 10개를 채우지 못한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한 번쯤은 괜찮아.”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인들이 원예반을 맡기 시작한 초창기, 영약의 수확률이 급속도로 떨어졌었다.

“그 대신 출소자들이 많아졌지. 영약?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죄수들이 전부 출소하는 거야.”

그렇기에 윗놈들은 어지간해서 김우진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는다. 결과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기에.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벼르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런 거 무서우면 이 일 못하지.”

김우진이 코웃음쳤다. 물론 그렇다고 가볍게 넘기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똑똑-

“소장님, 점심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소지가 들어왔다. 김우진이 돌을 던지고 받는 걸 멈췄다.

“부소장.”

“예.”

“내가 잘 보관해두라고 한 것, 어디있지?”

“선반 위에 있습니다.”

“가지고 와.”

“···소장님?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점심이 너무 반가워서. 부소장, 문 닫아.”

“예.”

끼익-

문이 닫혔다.

* * *

“···그러니까 제가 이놈을 도축해야 한다는 겁니까?”

강민식이 칼을 들고 섰다.

“맞아.”

저 멀리 마력 증폭기로 증폭시킨 대답이 들려온다. 축사장의 책임자, 시에나다.

“이걸 도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잡아서 족치면 도축이지.”

“마나가 제약되어 있는 상태에서 혼자 말이죠?”

“그게 소장이 바라는 거란다.”

“그러다 죽으면요?”

“죽진 않는단다. 위험하다 싶으면 교도관들이 널 도와줄 테니까.”

죽을 만큼 괴롭힌다. 하지만 죽이진 않는다. 그게 연옥의 법칙이었다.

“독살해도 됩니까?”

“소장을?”

“아뇨. 저놈이요.”

“해도 된단다. 베르너가 좋아하겠네. 베르너만. 넌 징벌방에 들어가고.”

후우. 강민식이 호흡을 골랐다.

놈을 바라보자 고르곤(Gorgon)도 하나 뿐인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전체적인 외형은 소와 비슷하나 5m가 넘어가는 거구. 비늘은 잘 단련된 강철보다도 단단하고 발톱과 뿔은 어느 명검보다 날카롭다.

꼬리는 살아있는 뱀이며 지독한 독을 가지고 있다.

아무 차원에나 던져놔도 파란이 일어날 정도의 괴물이었다.

“고르곤도 먹을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운동을 많이 한 소라 질기긴 하지만 소지가 적당히 쫄깃하게 만들어줘. 비늘은 여러 가지 가공을 거치면 육포처럼 은근한 맛이 있지.”

“맛있다면 농약도 삼킬 인간들···.”

“미안하지만 난 엘프란다.”

강민식이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마나는 더디지만 흐른다. 구속구는 마나를 제한하는 것이지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아니기에.

미약한 오러가 검을 감싸고 있다. 육체는 무겁지만 납덩이같지는 않다.

이길 수 있을까?

이겨야만 한다. 여기까지 와서 소장이 바라는대로 손바닥 위에서 놀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죽이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독을 쓰지 않고?”

“그래, 딱히 영단이 있는 괴물은 아니니까.”

“영단이 있는 괴물과도 싸우게 됩니까?”

“아직은 꿈도 꾸지 말렴. 네가 조금 더 능숙해진다면 모를까. 이곳에서도 영약은 하나하나가 귀하거든.”

강민식은 희망을 보았다. 결국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기회가 온다는 뜻이었다.

온전히 하나를 홈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싸우는 도중 영단에 손상이 가해져 파편이 일부 쪼개지고 소실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두드드드-

그때, 고르곤이 거칠게 투레질하며 대지를 박찼다.

가로, 세로 100m의 도축장이 진동한다. 도축장보다는 하나의 경기장에 더 가까운 곳.

시에나는 실제로 도축장에서 경기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무슨 경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딱히 좋은 건 아닐 거다.

그 베베 꼬인 소장이 죄수들에게 좋은 일을 해줄리는 없으니.

강민식이 마주 달렸다.

콰아아아아!

전투는 한 시간을 이어졌다. 지루한 승부 끝에 강민식은 결국 피 몇 방울을 떨어트렸고 고르곤은 쓰러졌다.

그리고 2징벌방 이틀형에 처해졌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