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10. 상상 >
“아니라면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나온 즉답. 율리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세계수에 걸고 맹세할 수 있나?”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어쩌면 내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나.”
“1177번에게는 확실한 단서를 가지고 와야지만 협조해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세계수를 통한 간섭은 더 없이 확실하지. 자네는 이미 충분해.”
“탈옥이 하고 싶으세요?”
“굳이 대답이 필요한가?”
“아니에요.”
뜬금없는 말. 데르카인은 그게 처음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라고?”
“네.”
율리아가 등을 돌렸다.
“이만 가볼게요. 교도관들이 눈치를 너무 주고 있어서요.”
“아닌데 맹세하지는 않는군.”
“어머니 나무에 대한 맹세를 그렇게 남발하는 건 옳지 않으니까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한 면피성으로 들리는 건 왜 일까.
“내가 알고 있네. 그런데 그걸 소장이라고 모를까?”
“알 수도, 모를 수도 있겠죠.”
대충 알고 있다는 것 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씨앗에 그렇게 환호했으면서 아직까지 심지 않았다는 것이, 씨앗에 간섭해 무슨 짓을 벌였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하긴, 그녀가 생각해도 그녀의 행동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신물이 그 모든 의심을 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소장이 세계수에 무슨 짓을 했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는 거죠. 율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카트를 끌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데르카인이 배급구로 고개를 내밀었다.
양쪽의 배급구는 닫혀 있다. 교관들은 거리가 멀다. 아무도 이 대화를 듣지 못했다.
율리아가 오기 전에 이미 확인했지만 다시 한 번 안도한 그가 벽에 등을 기댔다.
“고작 죄수 둘이 더 들어왔을 뿐인데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나겠군.”
징벌방의 고통을 견디는 놈과 탈옥을 위해 세계수의 씨앗을 바쳐버린 하이엘프.
두 개의 거대한 태풍 같았다.
그 태풍이 절정에 달할 때, 교도소는 한차례 파란을 맞이할 거다.
그리고 그 난장판은 그와 다른 죄수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할 거다.
반드시.
그의 눈이 빛났다.
* * *
마력을 제어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 다수의 방법 중, 강민식의 목에 감긴 구속구는 더 없이 집요하고 지독했으며 복잡했다.
‘술식이 복잡하게 꼬여 있어. 그러면서도 유기적이고.’
방어 체계도 단단하다. 적어도 지금과 같이 마력을 제어 당하는 상황에서는 절대 풀 수 없다.
하지만 강민식은 낙담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어려움은 이미 예상했다. 그리고 인간은 본디 도구를 사용하는 종이다.
마력이 부족하다면 마력을 보조해줄 무언가를 찾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감옥에는 그런 시설이 있었다.
‘원예반.’
식물을 길러내는 곳. 그곳에는 다수의 영약들 또한 있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데르카인이 그랬으니 틀리진 않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곳으로 가느냐다. 연옥에 갇힌 지 벌써 달이 넘어가고 있었고 그 동안 나간 출역은 모두 환경 조성반이었다.
되도 않는, 의미 없는 벌목. 그가 베어 넘긴 나무가 몇 그루인지 샐 수도 없이 많다.
생각의 흐름이 막혔다. 강민식은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 위에 누웠다. 이제는 익숙해진 검은 천장이 보였다.
그냥 힘들다고, 바꿔달라고 하면 바꿔줄까?
아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소장의 성격은 대충 감을 잡았다. 놈은 청개구리다. 죄수들이 원하는 것은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
반대로 한 번 꼬아서 이야기한다고 순순히 속아줄 만큼 어수룩하지도 않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였다. 소지가 된 조력자가 떠올랐다.
죄수번호 1178번, 율리아 카르센.
모두가 부정적이었던 두 번째 소지 자리를 꿰찬 엘프.
뽑을 이유가 없다면 만들어주면 된다고 했던 그녀라면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거래를 하면 되요.”
“거래 말입니까?”
“네.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소장님이 혹할만한 걸 주면 되죠.”
“하지만 제가 줄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카메라라는 거 신기하던데 소장님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요? 기능 자체는 기록구와 같지만 마나가 필요 없는데 작동하는 건 처음 봐요.”
“아니, 그게···.”
율리아나 근현대 문명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나 신기할 뿐이다. 특히 소장은 그와 같은 지구, 한국 출신.
놀라긴 커녕 코웃음치며 불법 반입으로 징벌방에 넣지 않을까. 징벌방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다른 건 어때요? 카메라라는 걸 숨겨 들어오신 걸 보면 다른 것도 더 있을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그 중에 과연 소장을 만족시킬만한 게 있을까?
“그럼 저는 이만 잘게요. 죄송해요. 오늘 유난히 피곤하네요.”
“아닙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끼익, 옆방의 배급구가 닫혔다. 강민식 또한 배급구를 닫았다.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하나가 있긴 한데.’
하나를 챙겨주긴 했지만 하나로는 부족하다. 한 번에 해제된다면 다행이지만 강민식은 자신의 실력을 잘 알았다.
이 복잡한 술식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해제하기 위해서는 수차례의 도전이 필요하고 당연히 필요한 마나도, 영약도 늘어난다.
‘소장이 혹할 만한 것.’
한국의 드라마를 구해서 정신교육 시간에 틀어줄 정도라면 지구의 문물을 구하지 못하는 건 아닐 거다.
애초에 죄수도 아닌 소장이 감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강민식의 고민이 깊어졌다.
* * *
“그러니까 나랑 거래를 하고 싶다?”
“예.”
탁탁, 김우진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어느새 강민식이 연옥에 온지 한 달이 넘어갔고 그의 개인면담 시간이 되었다.
김우진의 첫 질문은 ‘출소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냐?’였고 그의 대답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였다.
앞뒤가 맞지 않다. 질문에 전혀 다른 대답이 왔다.
“무슨 거래?”
“환경 조성반은 질렸습니다. 다른 곳으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요구는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최근 죄수들에게 너무 관대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물렀거나.
어쩌면 하이엘프를 너무 풀어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네가 보내달라고 하면 내가 보내줘야 하나?”
“아니라는 것 압니다. 그래서 거래를 말씀드린 겁니다.”
“거래? 죄수인 네가 나와 거래를 할 만한 요소가 있나?”
“있습니다.”
“무언가를 반입해 온 건가?”
강민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대답이 되었다.
“···호송대가 요즘 일을 개판으로 하는군.”
율리아도 그렇고 어떻게 자꾸 물건을 숨겨 들어오는 걸까. 김우진이 푹 한숨을 쉬었다.
“엄밀히 따지면 반입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지?”
“용사들이라고 다 같은 용사가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그래서?”
“같은 한국인이니 게임으로 비유하겠습니다. 직업으로 따지면 저는 도적입니다. 은신에 특화되어 있으며 빠르고 함정 같은 것도 잘 다루죠.”
“그래서?”
“하지만 도적하면 빠질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독.”
독과 도적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다.
“제 능력 중 하나가 피를 독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 피를 드리겠습니다. 어지간한 독은 전부 뛰어넘을 극독입니다.”
강민식이 스스로 손가락을 깨물었다. 모든 커피를 마시고 텅 비어버린 컵에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극독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 다 좋아. 피를 다 빼고 가져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 반입도 안 했고, 네 피가 독인 것도 좋고, 독을 거래 물품으로 삼은 것도 좋은데 여기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있어.”
김우진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이걸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해?”
독이란 건 그다지 쓸모 있는 물건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닙니까? 듣기로는 독을 좋아하신다고···.”
“누가? 내가?”
“크라켄의 독을 제거하지 않고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누가 알려줬는지는 알겠네.”
김우진이 콧노래를 불렀다. 검붉은 피가 가득한 찻잔을 들어 부소장에게 넘겼다.
“이거 유리병에 잘 보관해둬. 1176번에게 먹여야 하니까.”
“예.”
“좋아. 1177번. 일단 물건을 받았으니 네 요구는 들어주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넌 축사장으로 가게 될 거야.”
“···아.”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닙니다. 좋습니다.”
“데리고 가.”
“예.”
강민식이 사라졌다. 독을 챙긴 부소장이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탈옥을 위한 단초를 잡았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라고 보낸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징벌방.”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2징벌방을 버틴 건 꽤나 놀라운 일이다.
김우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감옥에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가 있다는 게.
자신이 정해놓은 선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놀려고 한다는 게.
“쇠뿔도 단숨에 빼라는 말이 있어. 굳이 시간 끌 것 없이 빨리 잘못하게 만들고 빨리 3징벌방으로 보내버리려고.”
강민식이 3징벌방까지 버틸 수 있을까? 버텨내지 못한다면 거기서 끝이다. 조금 특이한 죄수일 뿐.
하지만 만약 버텨낸다고 하더라도 이게 맞다. 어차피 결과 값은 예정되어 있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걸 빨리 확인하고 안도하고, 발생한다면 빨리 조치를 취하는 거다.
“그러면 그냥 징벌방에 넣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잘못을 해야 벌점을 주고 벌점을 받아야 징벌방으로 보내지.”
마음대로 하고자 한다면 마음대로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줘야지.”
저들은 진짜 죄인이 아니니까.
김우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어, 그러니까.”
‘여기가 축사장이라는 겁니까?’ 강민식이 마지막 말을 삼켰다.
그가 생각한 축사장은 지구의 것이었다. 소와 돼지, 닭 등을 기르고 잡는 곳.
죄수들이 먹는 음식이 나오는 곳인 줄 알았다.
물론 죄수들이 먹는 고기가 나오는 곳은 맞았다. 그런데 지구의 것은 아니었다.
“축사장에 처음 오는 것들은 다 그렇게 놀란단다. 그리고 토를 하지.”
“···그럴 만도 하네요.”
축사장은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물이며 하나는 땅이다.
그리고 그 위를 살아가는 것은 동물이 아닌 괴물이었다.
해상의 몬스터들, 그리고 지상의 몬스터들.
자신들이 지금까지 먹어왔던 것이 짐승이 아니라 몬스터라는 것을 알아버린 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넌 의외로 침착하구나?”
“독성을 기르기 위해 독충이나 독이 많은 몬스터들을 먹기도 했습니다.”
“포식을 통해 능력이 올라가는 타입이구나. 그럼 비위는 좋겠네.”
“상대적으로 괜찮긴 합니다.”
“축사장에서 일할 때 가장 곤란한 게 비위가 약한 자들이란다. 온갖 해악들을 죽여 왔을 텐데 이거는 또 다르다고 얼마나 호들갑들을 떨던지.”
엘프, 시에나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쳤다.
그녀는 축사장의 반장으로서 신입인 강민식을 안내했다.
“적어도 넌 짐은 되지 않겠어.”
“그런데 시에나님. 환경 조성반 아니셨습니까?”
“원래는 여기란다. 숲을 벌목하는 게 내게 더 괴로울 거라 생각한 소장이 임시로 옮겨놓은 거고.”
하지만 이번에 강민식과 함께 다시 원상복귀 되었다. 아마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해서겠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기에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로 2징벌방이 견딜만 했니?”
“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과연, 데르카인의 말이 맞았구나.”
“네?”
“아무것도 아니란다.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라 모두 신기해서 그런 것이니.”
“네.”
엘프와 인간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럴수록 더욱 강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민식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가 원하는 건 원예반이었다. 축사장은 단순히 동물들을 잡는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온갖 영약들을 길러내는 게 원예반이면 축사장도 특별한 게 당연한데.
‘몬스터뿐만 아니라 영물들도 있어.’
그리고 적당한 수준 이상의 몬스터는, 영물에게는.
‘내단이 있다.’
혹은 핵이.
비록 식물에서 나오는 영약에 비해 순도가 떨어지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커버가 가능했다.
강민식이 눈을 빛냈다.
* * *
김우진은 빈 정원에 섰다.
죄수들이 벌목을 하는 곳과는 정반대이며 교도소 건물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 주변에는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하다.
처음에는 정원을 벗어나 떨어진 곳에 심으려 했지만 가까이서 보살피며 호감을 가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손가락을 튕기자 땅의 일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생겨난 구덩이는 대략 5m 정도.
김우진이 세계수의 씨앗을 꺼냈다. 여전히 그의 마나와 공명하며 아양을 떨고 있었다.
씨앗을 넣고 원예반에서 챙겨온 잉여 영약 29개도 함께 넣었다.
한 달에 10개라는 납품 양을 맞추는 것은 어렵다. 잉여 생산물이 남는 건 더욱 더.
20년간 모아온 영약이 전부 합쳐 29개뿐이라는 게 그것을 대변한다. 이로서 그가 소장이 된 이후 모아온 모든 영약이 소진되었다.
굳이 영약을 넣지 않아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지만 김우진은 인간이었다. 하이엘프처럼 시간의 여유를 즐길 마음은 없었다.
흙을 덮고 가볍게 다졌다.
“모든 엘프들이 추앙하는 존재로 자라나라. 너의 말이라면 모두 복종하도록.”
그리고 출소를 명하는 거다.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으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엘프가 6명이니 다 나가면···.”
골칫덩어리 엘프들을 치워버리는 상상은 즐거웠다. 흐릿하게 보이는 희망에 김우진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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