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0화 (10/150)

# < 009. 계획 >

“아.”

율리아는 직감했다. 소장이 정확히 어떤 수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성공했다는 것을.

세계수의 씨앗에 간섭했고 성공했다.

씨앗이 누군가에게 저런 호감을 드러내다니. 하이엘프를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한 거죠?”

세계수의 씨앗이다. 비록 성체에 비하면 미약할지라도 존재 자체만은 완벽에 가깝다. 그러한 씨앗에 간섭하고 조작하다니.

그런 게 가능할 거란 상상은 살면서 해본 적이 없었다.

연옥에 들어온 이후, 율리아는 지금처럼 당황한 적이 없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김우진이다.”

그녀를 경악하게 만든 인간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지구의 인간이고.”

마치 당연한 걸 해냈다는 듯이.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 연옥의 소장이지.”

담담하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너는 내가 관리해야하는 죄수번호 1178번이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점심시간이 코앞인데 소지의 임무를 다하지 않은 죄. 교도관들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교도소를 활보한 죄. 그리고 감히 소장의 방에 무력으로 침입하려고 한 죄까지. 벌점 10만점.”

선고를 내렸다.

“이지만 1178번의 행동에는 나름의 납득이 가는 타당한 이유가 있음으로 8만점 삭감.”

“2징벌방 이틀 형에 처한다.”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시선이 더욱 가까워졌다.

김우진이 하이엘프의 기다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드디어 그 태연한 얼굴에 금이 갔군. 아주 보기 좋아.”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란 것, 알잖아요.”

“내가 거기에 대답해 줄 의무가 없다는 것도 알 텐데.”

조금의 타협점도 없는 단호한 눈빛에 율리아가 화제를 돌렸다.

“···1177번 죄수가 말하길, 할 만하다고 하는데 저도 그럴까요?”

“예외는 한 번으로 족할 것 같은데. 뭐. 직접 해봐야 알겠지.”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 되겠죠?”

“감옥에 왔으면 감옥의 규칙을 따라야지. 소지가 하고 싶다고 해서 시켰는데 이러면 곤란하잖아?”

“그럼 나왔을 때 씨앗에 어떤 짓을 하신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내가 무슨 대답을 할 것 같아?”

“어떻게 하신 건지도요?”

“원한다면 난 네가 궁금해 하는 것 전부다 말해줄 수 있어. 기브 앤 테이크라고 대가가 따를 뿐이지.”

“···그냥 끌고 가세요.”

“끌고 가.”

율리아가 축 늘어진 낙지처럼 힘없이 교도관들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부소장이 중얼거렸다.

“···하이엘프가 저 정도로 격렬한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무언가 되긴 된 거군요.”

“아마도. 그러니까 이렇게 아양을 떨겠지.”

김우진이 제 손바닥 위에서 미약하게 진동하는 씨앗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직접 하시고 확신은 없는 겁니까?”

“씨앗이라도 세계수는 세계수인지 생각보다 더 단단해. 원하는 바를 완전히 이루지 못했어.”

“그럼 실패 아닙니까?”

“실패는 실패지. 하지만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고.”

“성과라면?”

“호감.”

아주 작은 호감.

“세계수가 좋아할만한 점을 부각시켜서 나에 대한 친근함을 새겨줬지. 그렇게 호감을 얻었어.”

“그것만으로 이런 반응을 일으킨다는 겁니까?”

“아마 하이엘프에게도 똑같이 할 걸.”

율리아가 나타났을 때, 씨앗의 진동은 보다 커졌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지자 다시 미약해졌다.

“그럼 부족한 것 아닙니까?”

“부족하지. 원래 목적을 생각해보면 한참이나.”

그래도 그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아예 아무 것도 못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야.”

적어도 출발선은 같아졌다.

물론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세계수가 발아하고 난 뒤에나 확인이 가능하겠지만.

김우진은 조금이라도 친근감을 더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나를 주입했다.

* * *

“사기꾼.”

언제나와 같이 배급을 받았다. 그런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함께 딸려 들어왔다.

강민식이 배급구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할 만하다면서요. 익숙해진다면서요.”

“···아. 2징벌방에 이틀 동안 들어가셨었죠?”

“당신, 혹시 변태에요?”

“예?”

“고통을 즐긴다거나, 고통을 성적 흥분으로 여긴다거나, 고통을···.”

“그만! 저 진짜 그런 놈 아닙니다.”

“글쎄요.”

그가 억울함을 토로해도 율리아의 눈빛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할 만 했기에, 익숙해지기에 그런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게 말이 안 되던데요.”

고작 이틀이었으나 율리아는 어째서 죄수들이 징벌방을 싫어하고 강민식을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이해했다.

징벌방은 단순한 물리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마나로 이루어지는 통각 자극.

육체에 존재하는 모든 통각들을 건드리고 자극한다. 익숙해졌다 싶으면 더 많은, 강한 마나를 퍼붓는다.

거기에 ‘익숙’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저는 진짜 그랬습니다.”

“음, 선천적으로 통각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멀쩡합니···아악!”

“멀쩡하네요.”

“···그렇다고 꼬집으실 것까지야.”

강민식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카메라는 어떻게 잘 찍고 계십니까?”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틀 동안 징벌방에 들어가 있어서 찍을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도 다행인건 부셔지진 않았네요.”

징벌방은 본래의 독방을 일시적으로 변형시킴으로서 만들어진다. 벽이 좁혀지고 구조가 변해 잘 숨겨놓은 카메라가 휩쓸려 망가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방이 복구 되었을 때 그 자리에 그 대로 있었다.

“단순한 물리적 변형이 아니라 마법을 이용한 공간의 비틀림이라는 뜻이죠.”

“그렇군요.”

“한 번 노력해 볼게요.”

“부탁드립니다.”

“당신은요?”

“혼자보단 둘이 더 낫고, 둘 보단 셋이 더 낫습니다. 그래서 다른 죄수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오랫동안 시달리고 실패했다면 그럴만도 하죠. 천천히 가요.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급할 필요 없잖아요?”

율리아가 카트를 끌고 사라졌다. 저 멀리서 교도관들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시간이 많다고?”

홀로 남은 강민식이 헛웃음을 지었다.

누구한테? 자신한테? 아니면 엘프한테?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

엘프들이 태평한 건 어느 차원이든 종특인가보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인간은 짧은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체감도 다르다. 비록 용사가 되어 수명이 아득히 늘어났다고 해도 몇 년을 우습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다른 죄수들을 설득해야 해···.”

지난 일주일간 꾸준히 무언가를 알아보고 해보려고 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폭동을 일으켜 아예 감옥 자체를 마비시키는 것. 탈옥을 막을 수 없게 하는 것.

30명이 조금 넘는 죄수들 중 누군가 탈옥을 한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다.

All or Nothing. 연옥의 탈옥은 둘 중 하나다.

‘소장이 걸리긴 하지만···.’

아직도 그날, 정신교육 시간에 본 영상이 떠오른다.

홀로 죄수들을 막아서던 모습. 그리고 최종 승자가 되어 오만하게 죄수들을 내려다보던 그 눈빛.

물론 여러 가지 사족은 있다. 데르카인은 죄수들의 몸 상태가 최고가 아니라고 했고 영상 속의 죄수들은 열 명 남짓이었다.

지금은 무려 30명이 넘어가고.

차이가 크다. 만전의 상태에서 그들이 모두 구속구를 풀고 한 번에 덤빈다면 아무리 소장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거다.

용사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한 세상을 구해낸 업적과 경험이, 그로 인해 축적된 힘이 있기에.

‘그러니까 설득만 하면 돼.’

데르카인은 말했다.

확실한 가능성을 제공한다면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그리고 강민식은 데르카인을 비롯한 죄수들을 설득할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의 손이 목을 옥죄고 있는 검은 초크에 향했다.

움직임 자체나 착용감에는 전혀 거부감이 없지만 마나 자체를 제어하고 있는 빌어먹을 물건.

“이것만 무리 없이 풀 수 있다면.”

죄수들은 기꺼이 탈옥을 선택하리라.

그가 내민 손을 잡으리라, 확신했다.

* * *

곤란해.

강민식에게는 여유롭게 말하긴 했지만 율리아는 처음으로 초조함을 느꼈다.

소장이 세계수 씨앗에 간섭하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애초에 염두에 두는 게 이상한 거다.

씨앗이 어떻게 변했는지, 소장이 어떤 짓을 해버린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장이 확인시켜줄리는 만무했다. 그녀가 출소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은.

드르륵-

그녀가 복도를 따라 카트를 밀었다.

“오늘 저녁은 모듬 초밥이에요.”

“궁금한 게 있네.”

방긋 웃으며 자리를 뜨려는데 진중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길을 잡았다. 고개를 숙였다.

“뭔가요?”

죄수번호, 1077이 물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파동, 자네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아마 짐작하고 계신 게 맞을 거예요.”

“세계수의 씨앗인가?”

“민감하시네요.”

“내가 민감하기보다는 세계수가 가지는 마나가 워낙 특별한 거네.”

이해할 수가 없군. 데르카인이 중얼거렸다.

“하이엘프가 소장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다고? 고작 소지가 되기 위해서?”

“고작은 아니에요. 단 두 명뿐인 소지죠.”

“나는 드워프지만 세계수에 대해 나름 알고 있다고 자부하네.”

하이엘프가 듣기에 좋은 의미는 아니다. 세계수를 벌목하여 무구를 만들면 어떨까 연구했었던 거니까.

“그런데요?”

“세계수는 정령이자 신목이네. 신목이기에 자아가 생기고 정령이 되었는지, 정령이 깃든 나무이기에 신목이 되었는지 선후는 중요치 않네.”

중요한 건 세계수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

“모든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세계수도 마찬가지지만 일반적인 나무와는 조금 다르네. 세계수의 뿌리는 깊게, 아주 깊게 파고드니까.”

너무 깊은 나머지 그 일부는 공간을 비틀어 차원의 핵에까지 도달한다.

“차원의 핵에 간섭하고 관여하며 놀라운 일들을 해내지.”

그것이 세계수가 신목이라 불리는, 엘프들이 세계수를 신성시 여기는 이유다.

차원의 핵에까지 뿌리가 닿은, 감응하고 그 힘의 일부에 관여할 수 있게 된 세계수는 반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으니까.

“이런, 생각해보니 하이엘프인 자네 앞에서 세계수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해버렸군. 이거 부끄러워.”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이 뭔가요?”

“소장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주었다는 건, 씨앗을 심기를 바란다는 뜻이겠지. 심은 세계수는 땅속 깊숙이 들어가 이 차원의 핵에 도달하겠지.”

그러면 아주 작지만 세계수는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물론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다. 그랬다면 신목이 아니라 그냥 신이라고 불렸겠지.

이제 씨앗인만큼 그 힘은 더욱 약하다.

하지만.

“이 감옥을 감싸고 있는 힘에 간섭해 탈옥을 돕게 하려는 것 아닌가? 그 정도의 일이 아니라면 하이엘프가 고작 소지 자리를 위해 타인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길 리가 없지. 내 말이 틀렸나?”

수백 년을 갇혀 있던 노괴의 눈은 확신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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