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08. 씨앗 >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목숨의 위협을 받아도 아무것도 불지 않는 교도관으로부터,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료가 된 엘프에게 몰래 반입해 온 카메라를 넘겼다.
더 이상 무언가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껏해야 다른 죄수들과 접촉하여 감옥에 대해 알아보고, 일과를 따르면서 감옥의 모습을 직접 확인해보고, 소지가 된 엘프가 찍어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뿐.
제대로 된 탈옥 계획은 그 이후가 될 거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으니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날뛰는 건 미련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1177번 나와라. 정신교육 시간이다.”
죄수들의 아침의 시작은 정신교육이다.
군대에서 지겹게 들었던 기상나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소지가, 아니 소지들이 식사를 배급해준다.
강민식이 생각하기에 이 감옥에서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식사였다.
감옥임에도, 죄수들을 혹사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또 실천하고 있음에도 식사만큼은 지구에서 먹었던 그 어떤 것보다 맛이 있었다.
음식이라는 건 큰 위안이 되기도,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식사 시간이 죄수들이 더 없이 기다리는 시간임을, 출소를 선택하지 않고 더 버틸 힘을 준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어쨌든, 그의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교도관의 인도에 따라 정신교육실로 들어간다.
정신교육이라고 명명했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체들의 접촉.
돌아가면서 죄수들의 고향 행성의 전경을 보여준다. 어디는 중세고 어디는 늪이며 어디는 정글과 초원이다. 그리고 어떨 때는 한국의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한다.
강민식은 그것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무미건조한 감옥 생활에서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면서도, 저 당연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지금의 처지가 비관적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소장의 의도는 반쯤 성공했다.
절반은 오히려 탈옥에 대한 열망을 더욱 크게 만들어 줬으니.
2징벌방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 대부분의 죄수들은 강민식과 거리를 두었다.
이해는 한다. 그의 돌발행동으로 인한 불똥들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멍청이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저들의 겁이 저들을 평생 이곳에서 썩게 만들 거다.
“잘 잤나?”
“예.”
그나마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옆방의 드워프 한 명 뿐이었다.
“이틀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네.”
“징벌방 말입니까?”
“그래.”
정신교육 시간에는 죄수들을 크게 터치하지 않았기에 마침 강민식도 기다리던 주제였다.
“저도 묻고 싶었습니다. 2징벌방을 할 만하다고 한 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대단하네. 자네가 2징벌방에서 있을 때, 어땠나?”
“처음에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런 통증을 어떻게 열흘이나 버틸까 앞이 막막하더군요.”
“그게 일반적이지.”
“하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지더군요.”
“익숙해져?”
“예, 원래 맞는 것도 계속 맞다보면 단련이 되어 익숙해지지 않습니까?”
“흠.”
데르카인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강민식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곧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지난번에 저에게 그러셨죠. 무분별하게 일을 벌이는 건 멍청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맞네.”
“2징벌방에서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확실히 저는 감옥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행동을 해 소장의 분노를 샀죠. 그래서 당분간은 좀 얌전히 있을 생각입니다.”
“당분간이라는 건 탈옥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는 거군.”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응원하겠네.”
“좀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함께 준비해서 함께 나가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이미 준비하고 있는 게 있으신 겁니까?”
“알고 있나? 여기 죄수들 중에서 탈옥을 가장 많이 시도해 본 게 나네.”
데르카인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쳤고 그래서 이제는 불확실한 계획에 움직이고 싶지 않아. 자네에게는 징벌방이 할만 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니까.”
“그 말씀은 확실하기만 하다면 협조해주시겠다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나가는 걸 싫어하는 죄수는 없다고.”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어졌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정신교육을 계속되고 있었다. 초원과 정글, 날뛰는 몬스터들. 초원을 달리며 그들과 투쟁하는 수인들.
오늘 정신교육의 타겟은 수인족이었다.
흥분과 그리움으로 가늘게 떠는 수인족들을 뒤로 한 채, 교육은 한 시간 후에 끝났다.
“모두 나와라.”
죄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때?”
강민식이 먼저 빠져나갔다. 데르카인은 나가는 인파의 뒤쪽에 붙었다. 시에나가 작게 속삭였다.
“여전히 탈옥에 대한 의지가 충만하네. 그래도 당분간은 얌전히 상황을 보겠다는군.”
“컨트롤이 조금 된다면 끌어들여도 되지 않겠어?”
“단순히 그렇다기에는 조금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서 말이네.”
“석연치 않은 점?”
“2징벌방. 시간이 지나니 2징벌방에 익숙해졌다는군.”
“그게 말이 돼?”
“안 되네.”
징벌방의 고통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죄수의 한계를 파악하고 익숙해질 만하면 그 이상으로 통증을 주니까.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걸 당당하게 행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당신은 뭐라고 생각하는데?”
“징벌방의 고통을 임의대로 통제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네.”
“소장의 끄나풀이라고? 갑자기 왜?”
시에나가 의문을 표했다. 그간 잘 지내던 소장이 갑자기 죄수를 끄나풀로 심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왜겠나.”
데르카인이 입술을 씹었다.
“어디선가 세어나간 거겠지.”
“···그건 말도 안 돼.”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아주 천천히 준비했다. 탈이 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소장이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적어도 시에나의 생각은 그랬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알아차린 건 아니네. 단순한 짐작이겠지. 확실한 증좌가 있었다면 소장이 끄나풀을 심었겠나?”
“그냥 죄다 징벌방에 쳐 넣었겠지.”
시에나가 동의했다.
“어쩌면 비약일 수도 있네. 단순히 그동안 너무 풀어줬으니 혹시 몰라 대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
“진짜로 특이한 체질일 수도 있지.”
우주는 넓고 차원은 많다. 특이한 돌연변이들도 넘쳐나는 세상. 강민식이 특별하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단지 지금은 소장의 끄나풀이라는 생각에 더욱 확신이 가는 상황일 뿐.
“속단하긴 일러. 일단은 지켜봐야지.”
“당분간 준비를 멈추고 다 숨기라고 해야겠네.”
“그래야지. 아직 완벽하지 않으니.”
지금 시점에서 섣불리 실행하는 것은 최악의 수였다.
* * *
김우진이 세계수의 씨앗을 어루만졌다.
하이엘프의 속셈을 알고 나니 들끓던 열정이 팍 식었다.
세계수를 만개시켜 연옥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싶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하이엘프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려면 두 가지, 그에게 선택지가 존재했다.
하나는 하이엘프가 출소하거나 늙어죽은 뒤에 세계수의 씨앗을 심는다.
“소장님이 늙어 돌아가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부소장의 진실된 충언에 김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용사야. 인간의 수명 따위는 한참 전에 뛰어 넘었다고.”
“저쪽은 하이엘프에 용사입니다.”
“빌어먹을.”
그도 안다. 그래서 하이엘프가 싫다.
그렇지 않아도 긴 세월을 살아가는 하이엘프가 용사까지 되었으니 그 끝이 과연 어디일까.
“죽여 버릴까?”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운영에서는 더 없이 자유롭지만 용사의 죽음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부소장.”
“예.”
“세계수가 무엇인지 알아?”
“엘프들이 신성시 여기는 신목 아닙니까?”
“나는 그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야.”
세계수는 나무다. 하지만 단순한 나무라면 엘프들이 그렇게 신성시 여길 이유가 없다.
생명력을 퍼트리고 순수한 마나를 품고 있을 리도 없다.
“잘 모르겠습니다.”
“세계수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 엘프들의 섬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 또한 당연하게 여기지.”
이 또한 평범한 나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의지를 가진 나무.”
“정기를 가진 것들이 의지를 가지면 그걸 뭐라고 하지?”
“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부소장이 탄성을 내질렀다.
“정령!”
“그래, 맞아. 세계수는 정령이야.”
평범한 정령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위대한 정령.
정령계의 정령들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
“그리고 정령은 세뇌가 가능하지.”
이론적으로 의지를 가진 생명체라면 마법으로 세뇌가 가능하다.
“세계수의 정령이 일반적인 정령과 같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야 당연하지.”
“하이엘프는 세계수의 씨앗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근데 그걸 세뇌시키겠다고요?”
“응.”
“······.”
“······.”
잠깐의 침묵. 부소장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해보셨습니까?”
“당연한 질문을.”
“만약 잘못 건드리면···.”
“기껏해야 폭주하기밖에 더 하겠어? 그래도 성체라면 모를까 아직 씨앗이니까 가능성은 있을 거야.”
“일단 하이엘프에게 물어보고 하는 게···.”
“당연히 말리겠지.”
김우진이 씨앗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허락받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파지직-
마나가 움직였다. 외부의 침입에 씨앗이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 *
용사는 강자다.
그리고 하이엘프는 더 없이 마나에 민감하다.
구속구로 인해 힘의 일부가 제한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폭발하듯 요동치는 세계수의 정기를 느끼지 못하는 하이엘프는 없었다.
“아.”
율리아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감옥에 당도한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세계수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무엇에?
광폭한 마나였다. 뜨거운 열기는 세계수의 씨앗을 강압적으로 간섭하고자 하고 있었다.
“···안 돼.”
세계수는 완전에 가까운 존재다.
세계수가 엘프들의 섬김을 받는 것은 그만한 힘을 가진,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위대한 정령이고 성체의 힘은 왕에 필적한다. 그리고 왕은 결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비록 덜 자랐다고 해서 그 본질이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세계수는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 공생하며 의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만약 잘못 건드린다면 세계수의 분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리라.
“어? 어디 갑니까!”
양파를 썰던 율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1178번! 지금 뭐하는 거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교도관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율리아는 저들과 자신의 격차를 가늠했다.
구속구를 찬 상태에서는 둘이나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도망치는 건 가능하다. 그들을 뛰어넘었다. 아슬아슬한 손길이 그녀의 몸을 스쳤다.
“죄송해요!”
사과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1178번이 도주한다!”
“잡아!”
교도관들은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애애애앵,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그녀의 탈옥을 알렸다.
결국 그녀는 붙잡히고 말았다. 소장실의 코앞에서.
쿵-
교도관들의 손에 붙잡힌 율리아의 육신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픈 통증에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1178번. 이게 무슨 짓이지?”
“감히 탈옥을 하려고 하다니!”
분노한 교도관들의 음성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눈에 집중되어 있었고 시선은 굳게 닫힌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만 놔주시면 안 될까요? 확인할 게 있어요.”
“개소리하지 마라.”
격렬하던 마나의 파동은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문제는 이미 발생했다.
“진짜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요.”
“소장님께 보고를···.”
끼익-
그때, 문이 열렸다.
“무슨 소란이지?”
소장이 나왔다.
율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조금, 그녀의 시선이 내려갔다.
소장의 손바닥 위.
우우웅-
씨앗은 그곳에 있었다.
스스로를 작게 진동시키며 마나를 퍼트리며, 소장의 마나와 공명시키며.
“말도 안 돼···.”
마치 애교라도 부리려는 듯이.
감옥에 당도한 이후, 처음으로 율리아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