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 영원
“썩어 없어질 피와 살에서 그들을 건지시고, 마른 땅에 버려두지 않기를. 검은 강물이 그들의 고통을 씻기고 상처를 잊게 할 것입니다. 우리를 떠난 자들이 영원히 사는 신들의 품에서 편히 쉬게 하십시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기도문의 마지막 문장이 조용히 울렸다. 하지만 제단 앞에 무릎 꿇은 기사는 아직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흰 뼈만 남기고 모두 탄 제물을 바라보던 그가 기도문에 없던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들에게 안식을.”
깊은 한숨을 쉰 르리긴은 결국 몸을 일으키려 굽혔던 무릎을 폈다. 그는 늘 입던 제복과 갑옷이 아닌 무늬 없는 사복 차림이었다. 그 위에 걸친 털가죽은 겨울 여행자나 입을 만한 것이다.
“직위를 박탈했지, 집과 재물을 압류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제 옛 기사를 내려다보던 어린 신이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사치스럽지 않은 것도 불만인가. 제가 잘라놓고서는.
“꼴을 좀 보라고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네가 보고 있는지 몰라.”
황제가 별궁을 떠난 직후, 근위대를 설득해 이틀간의 감옥행을 면한 르리긴은 그들을 데리고 사냥터로 왔다.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직위가 해제된 근위대장을 믿고 그를 따라온 기사들은 숲의 한가운데, 늙은 나무 아래 희게 쌓인 눈이 두 사람분의 피로 붉게 물든 것을 발견했다. 칼날이 부러진 단검도.
“우리가 죽은 줄 아니까.”
선황제와 그의 숨겨진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수도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누구의 시신도 없는 칠 일 동안의 국장이 끝난 지 일 년이 넘었다.
“…나도 안다.”
내 신전에는 여전히 신상이 없었다. 제국의 수도에 자리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속한 곳 없는 자유 기사 에드워드 르리긴은 신의 조각상 대신 흰 천이 내걸린 높은 창문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제사를 도운 신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망자의 집을 나섰다.
신전의 앞뜰에는 검은 말이 매여있었다. 얌전히 기다리던 키슈의 갈기를 쓰다듬은 르리긴은 말 등에 오르지 않고 고삐를 잡은 채 신전을 나섰다.
그는 말을 끌고 번화하고 활기찬 도심의 큰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젊은 황제를 잃은 제국은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그런 일들은 귀족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했다.
칠 일간의 애도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건물마다 걸렸던 흰 천이 사라질 즈음엔 백성들도 황가의 비극을 거의 잊고 제 삶들을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가 바뀐 지금, 이제 겉보기에 망자의 평안을 비는 곳은 죽음의 신전뿐이었다.
“어디로 갈까…….”
“혼잣말하는 습관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키슈,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키슈가 뭘 안다고.”
카샤는 르리긴에게 들리지도 않을 시비를 걸고 있었다. 안 그런 척해도 그를 그렇게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미안한 모양이다.
세계도, 무엇도 필요 없다. 나만 있으면 된다고. 꿈속에 갇힌 그는 내게 그렇게 말했지만, 완전히 사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때 인간이었다. 어느 면으로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신들과 같을 수 없다.
예전 같았으면 나만 원하지 않는다 화를 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관대한 신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대가로 오랫동안 인간처럼 살며 그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조금 우울해 보이는 르리긴이 불쌍하기도 했고.
“이곳에는 지긋지긋한 원로원 늙은이들뿐이고. 에오네테는…….”
그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키슈만 토닥였다. 근위대장은 죽은 황제의 오랜 친우이자 최측근이었다. 어린 황녀에게 황위가 넘어가는 혼란스러운 시점에 그가 권력을 잡고자 마음먹었다면, 그대로 황제 다음가는 위치에 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해임되었다는 사실도 숨기려면 숨길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는 권력은커녕, 세상을 떠난 옛 주인이 죽기 직전 그에게 명령한 대로 순순히 자리를 내려놓고 수도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어린 새 황제가 무사히 자리를 잡게 도운 후였다.
“미련하기는.”
정작 그 옛 주군이 하늘 위에서 제 행태를 향해 혀를 차는 줄도 모르고, 르리긴은 성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 비스듬히 누운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쓸 때가 온 것 같았다. 구름 밖 허공에 한 발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너는 여기 있어.”
“…같이 가, 사샤.”
키슈는 목적지를 모르는 여정을 나서는 것치고는 가벼운 짐만 지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 다 지나지 않았고, 저러고 다니다 길이라도 잃었다간 얼어 죽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도 완전히 멍청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여행자를 위한 음식을 파는 거리의 가판대 앞에서 멈춰 섰다. 굶어 죽겠단 작정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르리긴은 제가 먹을 단단한 빵과 육포, 말린 과일 같은 것들을 잔뜩 사서 말 등에 올린 다음 주인장에게 말먹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건초 한 더미의 값을 추가로 지불하고 그것을 줄로 묶어 안장에 매달았을 때였다.
날개 아래에 바람이 뭉치고, 발끝이 땅에 닿았다. 옛 기억 속에서 한참을 헤맸던 탓인지 인간의 땅 위에서 두 발로 걸었던 것이 아주 오래전 같았다. 사실은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짐승의 까맣고 둥근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검은 말 키슈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눈을 껌벅이며 제자리에 발굽을 굴렀다. 나는 손에 든 각설탕을 흔들어 보였다.
“키슈, 이리 와.”
인간은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듣지 못할 것을 들은 키슈는 당장에 바닥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땅에 서있던 르리긴은 그 바람에 느슨히 쥐었던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멈춰……!”
하지만 곧이어 땅에 내려와 내 뒤에 선 제 주인까지 발견한 키슈가 르리긴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완전히 신이 난 키슈가 겅중겅중 뛰며 우리를 향해 달렸다.
거리를 다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덩치 큰 군마를 피해 길의 가장자리로 물러섰다. 과일들이 바닥을 구르고, 행인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저 말을 좀 잡아주십시오!”
그 와중에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운 르리긴이 고함쳤지만, 신이 나서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키슈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말을 잘 다루는 자는 르리긴 자신을 제외하면 지금 이 길거리에 아무도 없었다.
환장하겠다는 듯 하늘을 한번 쳐다본 르리긴이 키슈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카샤나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는데, 하필이면 지금 우리 둘은 하늘 위에 없지 않은가. 나는 모습을 숨기고 키슈를 계속 이끌었다.
달음박질하며 키슈를 쫓던 르리긴은 말이 점점 외벽의 성문에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오히려 안심한 듯했다. 그곳에는 달리는 말의 고삐를 잡아챌 수 있을 만한 자들, 그러니까 성문을 지키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었다.
“르리긴 경……!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그 말을 잡아! 선황 폐하의 군마다!”
멀리서 달려오는 전 근위대장의 얼굴을 알아본 기사 하나가 소리쳐 물었고, 곧 상황을 이해한 그들이 성문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대로 상황이 끝나게 둘 수는 없었다.
밝은 한낮, 해가 지지 않은 땅 위에 내려선 새벽과 달의 신이 인간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그리고 말고삐를 막 잡아채려던 기사를 손끝으로 툭 밀쳤다.
그는 뒤로 밀려 넘어지며 놀라 다른 기사 하나를 붙들었다. 얼결에 팔이 잡힌 기사는 동료를 붙잡으려 했지만 카샤는 그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이마가 밀린 기사가 영문도 모르고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들은 저들끼리 잡아당기고 밀치며 우르르 널브러지고 말았다. 모습을 숨긴 어린 신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신이 되더니 묘하게 천진해졌다……. 어쩔 때면 예전 사 황자 시절보다도 더 어리게 느껴졌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키슈는 활짝 열린 성문을 통과해 밖으로 달려 나가버렸다. 이를 악문 르리긴도 쓸모없이 넘어져 버린 기사들을 쌩 지나쳐 달렸다.
그의 등 뒤로 보고 없이 자리를 이탈할 수 없어 도울 수 없다 죄송하다 어쩐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르리긴은 대답도 하지 않고 키슈만 쫓아 달렸다.
드디어 막힌 것 없는 평지 위에 선 말은 몸을 세게 흔들어 제 몸 위의 짐들을 다 떨쳐냈다. 식량이 든 주머니, 수통, 침낭과 건초 더미까지 모두 흙바닥을 굴렀다. 잘 훈련받은 군마가 할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르리긴은 떨어진 짐들은 상관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착하지. 거기 가만히 있거라.”
그는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며 말을 달래려 애썼다. 말이 방심한 틈을 타 고삐를 잡으려는 것 같았다.
“널 잃어버리면 내가 면목이 없단 말이다…….”
누구에게 면목이 없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당사자들이 정작 이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
르리긴에겐 미안하게도, 끝이 아니었다. 아직 저지를 짓이 남았다. 얌전히 선 검은 말에게 르리긴보다 먼저 다가간 카샤가 말의 탄탄하고 긴 목에 손을 올렸다. 훌륭한 군마는 주인 앞에서 어린 짐승이 되어 코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새벽과 달의 신은 마치 인간 황자 시절처럼 옅은 미소를 짓더니, 키슈의 귓가에 입술을 가깝게 대고 짧은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제 까만 망아지의 얼굴에서 그를 구속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손수 매듭을 잡아 벌리고 고리의 이음새를 열었다.
“…….”
굴레와 고삐, 안장까지. 모든 마구가 저절로 풀려 흘러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그대로 목격한 르리긴이 입을 벌렸다.
굳어 선 채 멍청한 표정이 되어있는 그를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두고, 키슈가 침 묻은 재갈을 퉤 뱉었다. 떨어져 땅을 구르는 쇠 막대는 그를 묶어두던 마지막 물건이었다. 이제 검은 말은 어미에게서 처음 났을 때처럼 완전한 맨몸이었다.
고삐를 채우지 않은 말은 야생마나 다름없다. 말이 마음만 먹고 도망치거나 난동을 부린다면 웬만해선 제압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넋 놓고 서있던 르리긴은 키슈가 푸르릉― 하며 고개를 흔들고 갈기를 털 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쉰 르리긴이 허리를 숙였다.
“알겠다. 네가 짊어지기 싫다 이거지. 내가 다 들 테니까… 혼자 가지만 말거라.”
완전히 포기한 말투로 중얼거린 그는 떨어진 짐들을 줍기 시작했다. 침낭과 건초는 등에 메고, 식량과 수통은 검과 함께 허리에 묶었다.
완벽한 방랑 기사 차림이 된 그가 마지막으로 고삐와 굴레를 집어 들자 키슈가 게걸음으로 그에게서 조금 더 떨어졌다. 그 꼴을 본 르리긴이 보란 듯 손에 든 것을 등 뒤 침낭 뭉치 속에 쑤셔 넣었다.
“안 채워. 됐느냐?”
르리긴과 키슈는 서로에게서 열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길을 걸었다. 정확히 하자면 르리긴이 일방적으로 키슈를 따라다니는 꼴이었다. 죽은 주군 겸 친구가 남기고 간 말을 차마 버리고 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키슈가 갑자기 왜 반항을 하고 멋대로 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입으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두 발은 군인답게 착실히 움직여 키슈가 가는 길을 얌전히 따라 걸었다.
고삐를 채울까 경계하는 키슈에게 끼니때마다 건초를 몇 움큼씩 던져주고, 물가가 나오면 나란히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시고 수통을 채웠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르리긴은 제게 고삐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것 같았다.
그 후로 그들은 낮 동안 함께 발을 맞추어 걷고, 밤이 되면 서로에게 기댄 채 체온을 나누며 모닥불 앞에서 쪽잠을 잤다.
작은 마을이나 여관이 나오면 그날은 둘 모두가 푹 쉬는 날이었다. 인간은 낡은 침대에서, 말은 허름한 마구간에서 꿀보다 단 잠을 자고 다음 날 식량을 보충해 다시 길을 나섰다.
그의 신발 밑창이 꽤 얇아졌을 때쯤, 키슈의 짐꾼이 되어 무작정 고된 행군을 하던 르리긴은 어느새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아는 곳에 도착하고 말았다. 우리가, 그리고 키슈가 원한 대로였다.
소금 냄새가 가득한 항구 도시에 선 에오네테 출신의 기사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어쩌다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잠시 멍청하게 서있었다. 제국 남부, 귀족들의 휴양지. 펠리서스였다.
에오네테는 눈과 얼음이 없다고 했던가. 대양을 앞에 둔 펠리서스에는 겨울 자체가 없었다. 태양이 환하게 내리쬐며 공기를 가을 날씨처럼 따듯하게 덥히고 있었다.
“…하필.”
수도에서 펠리서스까지, 말을 타고 달려왔으면 일주일이 걸릴 거리를 말에게 끌려오느라 한 달이 걸렸던 것이다.
키슈는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빙빙 돌았다. 그래서 르리긴은 그들이 펠리서스로 향하고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르리긴이 조용한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키슈가 또 느닷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를 낀 흰 벽돌 도로 위로 신난 말의 발굽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옛 생각에 잠겨있던 기사는 우울해질 시간도 없이 말을 쫓아 달려야만 했다.
“거기 서지 못해?!”
하지만 이번은 우리가 한 짓이 아니었다. 나와 내 어린 신은 이미 땅을 떠나 한참 위에서 구경 중이었기 때문이다.
르리긴은 방심한 사이 말과의 거리가 저만치 멀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그가 신나게 흔들리는 말 꼬랑지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달리지 않기로 합의했잖아! 네가 그러고도 점심 먹을 자격이 있는 군마란 말이냐! 네 각설탕을 죄다 바다에 던질 줄 알아라! 키슈! 키슈! 키……!”
그때, 항구에 정착한 크고 작은 선박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가볍게 말 등 위에 뛰어올라 갈기를 잡았다. 안장도 올리지 않은 키슈 위에 완벽한 자세로 앉은 그는 무슨 수를 썼는지 고삐 없이도 말 머리를 돌리게 하는 데 성공했다.
키슈는 순식간에 얌전해져서 르리긴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검은 말이 르리긴의 코앞에 멈춰 섰다. 그 위에 탄 사람은 허리까지 늘어트린 긴 머리가 검고 키가 큰 여자였다. 그의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역광에 얼굴에 그늘이 진 채였다.
르리긴은 숨 쉬는 것도 잊고 잘 보이지도 않는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한낮의 태양 때문에 눈이 아픈 것은 상관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안녕.”
여자의 까만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휙 들렸다가 가라앉았을 때, 르리긴은 그의 푸른 눈을 볼 수 있었다.
“키슈를 굶기려고?”
* * *
“…황후?”
“그렇대, 빛이.”
신들은 빛의 진짜 정체를 모르면서도 그 앞에 서면 알 수 없는 위압감과 묘한 어려움을 느껴 고작 하찮은 운명의 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쩔쩔매곤 했다. 저 자신들의 근원임을 저도 모르게 알아본 것일까.
하지만 새로 태어난 어린 달은 이 세계의 다른 신들과 다르게 그의 자식이 아니었고, 나를 등에 업고는―중의적인 의미로― 그가 듣고 있을 것이 분명한 험한 욕설들을 일부러 줄줄 뱉어놓고는 했다.
물론 인간 시절까지 따지면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그의 영혼을 빛이 지었으니 말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카샤는 예전의 일들로 그를 극도로 혐오했다. 빛이 근처에 지나다니거나 그에 대한 말을 들을 때마다 누구 하나 죽일 듯 인상을 찌푸리니 말 다 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만은 예외인 모양이었다. 빛이 알려주었다는 내 말을 듣고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미처 기분이 상하지 못한 것이다. 잠시 무엇을 가늠하는 듯 눈을 깜빡이던 그가 말했다.
“설마, 미르카엘이 에드를…….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구나.”
그의 인간 조카는 겉보기에는 완전한 성인이어도 나이를 따져보면 여덟 살을 겨우 넘겼다. 그렇게 생각하면 새벽과 달의 신이 당장 하늘에서 돌이라도 던져 제 옛 기사의 머리를 맞추고 싶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에드워드 르리긴의 운명이 묶인 황족은 어린 황제가 아니었다.
“그 황녀가 아닌데.”
나는 그의 착각을 정정해 주기로 했다. 카샤가 미간을 좁혔다.
“엔릴 이사르가 살아있어.”
* * *
“이 황녀 전하……?”
르리긴이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 작았고, 말발굽 소리에 가려 키슈 위에 탄 사람에게 닿지 못했다.
곧 말에서 내린 그가 키슈의 목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말의 주인이 감사 인사도 없이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보는 탓에 그도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여자는 분위기가 이상해진 이유가 제가 그에게 건넨 첫마디 때문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내 인사가 너무 친밀했군요. 무례하게 굴려던 것은 아닌데, 낯이 익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여자는 그래도 르리긴이 말을 잃고 서있자 의아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옷감은 무늬가 단순했지만 구깃구깃한 것 빼고는 질이 좋았고, 망토 아래에는 기사들이나 찰 만한 검이 숨겨져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귀족임을 눈치챈 그가 고개를 조금 숙여 다시 사과했다.
“귀하신 분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저를.”
르리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하지만 정작 이 황녀를 닮은 여자는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예…….”
그들은 여관 방 안에 어색하게 마주 앉아 있었다. 여자가 항해 사이마다 머물던 곳이었다.
“내가 팔 년 전 신들과의 전쟁에서 죽은 이 황녀 엔릴 이사르다?”
“예.”
“당신 말이 맞다면, 부모 형제 모두 죽고 없고 혈육이라고는 조카 하나 남은 것이 되는 그 이 황녀?”
“…예.”
“아하.”
“…죄송합니다.”
기억을 모두 잃었다는 이 황녀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르리긴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뭘 잘못했길래?”
“선황 폐하를, 전하의 막냇동생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당신께 맹세했는데…….”
“선황은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던데.”
르리긴은 이번엔 대답하지 못했다. 창칼도 아닌 것을 기사가 무슨 수로 막냐고 황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 덧붙였다. 그 꼴을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던 선황, 카샤가 헛소리를 했다.
“사랑이 역병보다 무섭긴 하지. 사샤, 그렇지 않느냐?”
“…….”
입 맞추려 드는 그의 얼굴을 꾹꾹 눌러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지치지도 않고 들러붙었다. 일단 둘을 만나게 했으니 이제부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나는 그냥 그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게 두고 팔을 베고 엎드린 채 다시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구경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황녀는 팔 년 전, 펠리서스와 가까운 얕은 바다를 항해하던 무역선의 선원들에게 발견된 것 이전에는 아무 기억이 없다고 다시 말해야 했다.
그들은 저들 먹을 물고기를 잡으려다가 바다에서 의식 없이 떠다니던 황녀를 얼결에 그물로 건졌다. 물고기 대신 걸린 사람은 피를 많이 흘리고 상처가 커서 의식이 없었지만, 거친 뱃사람들이 살뜰하게 돌보아 결국 살려냈던 것이다.
“그럼 키슈의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근방 선원이라면 이제 그 잘생긴 친구의 이름을 못 들은 사람이 없을 텐데.”
그렇게 고함을 질러놓고도 키슈의 이름을 모르기를 바라는 것이 이상했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르리긴이 이마를 짚었다.
제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마구간 짚 더미 위에서 신나게 뒹구는 검은 말에게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옷자락 밑으로 들어와 등허리를 만지던 손길이 뚝 멈췄다. 그를 돌아보자 심기가 제대로 틀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맨살을 주물러대는데도 반응을 해주지 않아 애처럼 토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다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 그래도 기분이 오락가락하던 어린 신은 완전히 삐쳐서 몸을 일으키더니 어딘가로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나는 다시 생각을 이었다.
그때, 위험을 직감한 황녀는 아무 대책 없이 수도로 향하지 않았다. 제 기사단으로는 동생을 지키고 자기 자신은 스스로 지킬 수 있게 해둔 것이다.
에오네테를 떠난 당시의 이 황녀는 수도로 곧장 가는 대신 펠리서스에 들러 기사단에게 말을 전하고,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을 꿰어두었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리고 생명이 위급한 탓에 술식이 꼬여 마법이 어그러졌다.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파편에게서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든 것일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펠리서스의 제 저택에 나타났어야 할 그는 바다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라진 기억은 잘못 쓴 마법의 부작용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배 위였고, 그다음부터는 그냥 선원으로 살았지.”
어느새 이 황녀는 자연스레 말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해서, 수도에서 온 귀족 출신 기사와 항구 막내 선원의 기묘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대체……. 당신의 도시에서 칠 년을 지내시면서 어떻게 황족을 알아볼 만한 자들만 모두 골라 피해 다니실 수가 있습니까. 저택 근처에만 가셨어도 전하의 얼굴을 아는 자가 하나라도 있었을 겁니다.”
“배만 타느라…….”
“마법은 두었다 뭘 하셨습니까!”
“내가 마법사라고?”
“…….”
“이런……. 진작 알았으면 놀고먹었을 텐데.”
르리긴은 펠리서스로 오는 길 위에서는 잠시 잊을 수 있었던 편두통이 다시 도진 듯했다. 그가 눈을 질끈 감고 관자놀이를 눌러댔다. 황녀는 묘한 얼굴로 눈앞의 기사를 관찰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르리긴이 말했다.
“일단 수도로 가셔야 합니다.”
나는 선위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집무실 한구석에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물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한때 양측의 주장이 팽팽했지만 이제는 승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권력은 별로 필요 없다고 하자,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핑계를 대자, 수도의 정치를 잘 아는 르리긴 경이 옆에서 잘 도울 거라고 받아쳤다. 물론 르리긴의 동의는 받지 않았지만.
수도로 오는 길에 기억이 반쯤 돌아온 이 황녀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고모에게 어린 황제가 마지막 수를 꽂아 넣었다. 겨우 여덟 살 조카에게 이런 책임과 의무를 떠맡기고 싶으냐고 말해버린 것이다.
겉보기에는 열여덟도 넘어 보이는 황제가 그런 소리를 하자 좀 우스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의 고모는 안 그래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길었던 제 방랑벽도 끝을 맞이했음을 직감한 엔릴 이사르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예전에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이 황녀, 엔릴은 조카를 위해 애써 웃는 얼굴을 하고는 있으면서도 난감하다는 듯 눈가를 좁혔다. 그는 지금의 어린 황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실종되었으니 기억이 모두 있다 한들 그가 한 말을 들었을 리가 없었다.
“운명에게 저항할 수 있다면 그가 정해놓은 삶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고 한 것 말입니다.”
하지만 황제는 그의 고모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르리긴의 어깨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신이 손을 댄 적 있는 그의 영혼은 남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님께서는 제 아버님께서 생전에 그림과 악기를 좋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도해 보았더니 재능이 있는 것 같더군요.”
외양만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황녀는 그의 동생, 순하기 그지없었던 삼 황자를 회상하는 듯 그 딸에게 기특하단 표정을 지어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즐겁기도 했고요.”
무심하고 기계적으로 보이던 어린 황녀의 깊은 곳에 누구보다 섬세한 예술성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피는 어디 가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까.
“실내에 들어앉아 예술가들이나 후원하며 살면 신의 뜻에서 많이 벗어나는 길이겠습니까? 그러면 좋겠는데.”
나는 그만 작게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주 많이 벗어나는 길이다.
살아 돌아온 이 황녀는 결국 황제가 되기는 하지만, 원래라면 황위 계승 서열의 원칙을 깨게 되어있었다. 앞으로 생길지 모를 제 자식 대신 이미 장성한 비범한 조카가 다시 황위를 물려받도록 후계자 자리를 억지로 고정해 놓는 것이다.
빛은 이 어린 황제의 업적을 벌써부터 가득 구상해 놓았다. 그가 죽기 전까지 해내야 할 일들을 종이 위에 적었다면 끝도 없이 이어질 테다. 하지만… 애가 싫다잖아.
나는 어린 황제, 곧 선황도 방계의 황녀도 아닌 애매한 자리로 되돌아갈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흰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네 마음대로 해.”
어린 밤의 축복이었다. 운명, 그러니까 빛과는 아주 다른 신. 그의 반대편. 그가 미리 정한 네 앞길을 마구 흐트러트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내가 허락해 줄 테니 그 통제광의 계획을 완전히 망쳐놔.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빛은 제가 촘촘히 짠 미래를 적어놓은 종이들을 스스로 불에 태워야 할 것이다.
영민한 황제는 제가 내게서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곧바로 이해했다. 의자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던 그가 옅게 미소 지었다. 황녀 시절을 포함해서 그가 웃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르리긴이 놀라 입을 조금 벌렸다.
“…사샤.”
돌아보니 어느새 내려온 그가 내 뒤에서 불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부터 허리를 감아쥔 팔이 나를 제 품 안으로 당겨 끌어 들였다. 이번에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카샤는 내 입술이 닿았던 조카의 이마를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이제 가자.”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기대기가 무섭게 시야가 휙 돌아갔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침대 위에 함께 쓰러졌다. 태양신에게서 빼앗은 구름 위 그의 집이었다.
까만 머리칼이 흩어진 뒷덜미를 만지작대며 생각했다. 힘을 잃은 쌍생신은 윤회에 집어넣었고, 가여운 르리긴에게는 짝을 찾아주었고, 마음에 걸리던 아이는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제 남은 일이 없었다. 그를 달래줄 시간은 충분하단 뜻이었다.
마주 보고 누운 얼굴은 아직 기분이 다 풀리지 않았다는 듯 미간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결국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의 위로 기어올라 커다란 몸을 두 팔 사이에 가뒀다. 고개를 숙여 이마 위에 입술을 내렸다. 눈가에도, 흰 뺨에도, 그리고 매끈한 콧날을 지나 아래로……. 굳게 닫힌 입술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다물린 틈새를 핥았을 때에는 이미 그에게서도 더운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하지도 않을 일들이었다. 무엇도 질투할 필요 없는데. 그만이 나를 세계와 묶어놓는 유일한 끈이었다.
낮과 밤을 잇는 새벽. 어린 밤에게서 태양을 가려 지키는 달. 내 어린 신.
이제 우리 둘만 있을 수 있어.
(네프라타스의 저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