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밤하늘의 별과 달
“오셨습니까?”
창문 턱에 발이 채 닿기도 전에 그가 나를 받아 안았다. 허리와 허벅지에 팔을 단단히 감곤 제 침실 안으로 끌어들인다.
공중에 발이 뜬 채로 입술이 맞닿았다. 왕이 입은 두꺼운 털가죽 망토가 다리를 간지럽혔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한 것은 나였다. 장갑도 벗지 않은 손이 얇은 옷을 들추고 등허리로 기어들어 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둘 모두 맨몸으로 침구 사이에 뒤엉켜 있었다. 만족감과 안락한 게으름에 취해 늘어져 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인간의 목덜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내 행동이 가벼운 후희인 줄로만 알았는지 나른히 기대 누워있었지만, 입술을 문지르는 대신 코끝을 대자 낮의 흔적을 살피려는 것임을 깨닫고 재빨리 목덜미를 손으로 가렸다. 찔리는 일이 있는 것이다.
가려도 소용없다. 손끝을 포함한 맨살에서는 평소보다 짙은 쇠와 피 냄새, 살기와 죽음의 톡 쏘는 냄새가 났다. 살생을 한 듯했다.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에오네테면 됐지, 다른 도시까지 제 것으로 만들려고? 그는 모두 들켰음을 깨닫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만 날개 한쪽으로 그를 세게 내리치고 말았다.
그는 침대 끝으로 도망가는 대신 오히려 바싹 붙더니 내 몸을 꽉 껴안았다. 뺨이 눌린 채 불만스럽게 쳐다보자 그가 달래듯 턱선을 따라 입을 맞췄다.
“당신에게 무엇을 숨기려고 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별일이 아니었는데…….”
그동안 지켜본 바로, 간신히 죽지만 않으면 다 별일이 아니라고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쳐 온 적이 있던가요.”
내가 한 말을 스스로 깨고 땅에 칠 년을 머물렀다. 지내온 시간에 비하면 순간조차 못 되는데, 어쩐지 꽤 긴 세월처럼 느껴졌다. 육신을 오래 입어 그런 것일까?
내 신전에서든 그의 성에서든, 우리는 거의 모든 밤을 함께 보냈다. 나는 그중 불청객이 들었던 때들을 떠올렸다. 한때 제 것이던 도시를 다시 빼앗아 가고 싶었나 보지.
그들이 보낸 암살자들은 모두 내 손에 죽었다. 시종들이 왕의 침실에서 영문 모를 잿가루를 치우는 일이 몇 번 반복되자, 그들은 더 이상 밤에 무엇을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과 같은 날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요즘 낮 동안 피가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내게 들키는 일이 잦았다.
“모든 것을 당신에게 부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손짓 한 번에 네 적들을 모두 치워버릴 수 있는데.
에오네테의 젊은 정복왕은 스스로 이룬 것이 많은 인간들이 그러하듯 오만한 면이 있어 도움을 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말한 대로 그는 정말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고 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태 보아주는 것이다.
“사일, 제가 당신의 도시를 어떻게 차지했는지 잊으신 건 아닙니까? 깃펜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 배부른 돼지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창칼도 있고 병사들도 있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냐는 소리였다.
“잠든 동안은 신께서 지켜주시니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스스로만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제가 언젠가 손끝이라도 베여 온다면…….”
등 뒤로 돌아가 감긴 팔이 나를 더 당겨 안았다. 인간의 손끝이 허리를 은근히 더듬는다.
“…그때는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으셔도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권력자의 귓가에 밀어를 흘려 넣는 어느 정부처럼 그가 속삭였다. 장난기가 올랐는지 속살거리는 말투를 흉내 내어보겠다고 목소리를 더 낮추는데, 듣고 있자니 나름 그럴듯했다.
“아니면, 낮에도 머물러주세요.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실없는 소리만 하던 도중 이건 진심인 모양이었다. 갑자기 심각한 얼굴이 된 인간이 대뜸 물었다.
“왜 밤에만 찾아오십니까? 낮 동안 신전에 계시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자와 함께 있냐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나온다면 입을 틀어막을 작정으로 두고 보던 참이었다. 왕이 말했다.
“햇살에 비친 당신의 얼굴도 보고 싶습니다.”
내가 생각에 잠겨있느라 대답이 없는 동안 그가 황급히 덧붙였다.
“이 시간의 당신은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새벽의 별과 달이 비추어주는 얼굴도 무엇보다 아름답습니다.”
그가 제 풀에 놀라 늘어놓는 단 말들을 가만히 들었다. 비슷한 소리를 요정들이 떠들어댈 때는 거슬리고 시끄럽기만 했는데 어쩐지 지금은 듣기가 좋았다.
“그저… 당신의 모든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 그럽니다.”
품에 안긴 채 눈앞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했다. 생각해 보니 칠 년 동안, 한 번도 햇살 아래서 그를 본 적이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낮의 태양 빛에 비추어 보면 어떨까. 지금보다도 더 보기 좋을까? 떠오르는 아침 해에 또 붉은 석양에……. 하지만.
“스스로 한 말을 두 번씩이나 깨트리란 말이냐?”
툭 던진 말에 질문이 와르르 돌아온다.
“낮에는 땅 위에 머무르지 않기로 누군가와 약속을 하신 겁니까? 누구에게요? 아니, 처음은 무슨 약속이었나요. 어떤 자 때문에 지키지 못하신 겁니까? 인간입니까? 죽었습니까? 아니라면 제가…….”
질문이 너무 많았다. 나는 하나에만 대답해 주었다.
“…다른 신.”
“깨트릴 수 없는 약속입니까?”
내가 깰 수 없는 약속은 없다. 약속을 깨도 내게 돌아올 대가가 없기 때문이었다. 날 벌할 수 있는 존재도, 신뢰를 저버렸다고 비난할 수 있는 존재도 없었다.
“사일…….”
내가 대답하지 않자, 왕은 파고들어 갈 틈을 발견했다고 여겼는지 팔을 더 조이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맨살갗 위에 더운 한숨이 쏟아졌다. 인간의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나는 그만 처량한 척 구는 것에 넘어가 내가 태양과 같은 시간에 땅 위에 머무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뿐이었다. 결국 말해버리고 말았다.
“…가지 않을 테니 그만해.”
그는 내 품 안에 몸을 구겨 넣으려는 것처럼 굴다가 목소리를 듣고는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아침까지 머무르실 겁니까?”
왕은 서글프거나 울적한 표정으로 애원하는 일이 아주 능숙해졌다. 아무래도 버릇을 잘못 들였다.
“응.”
그는 그제서야 한껏 웅크렸던 어깨를 폈다. 나는 그 꼴을 한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늑대가 새끼 개인 척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그런 짓으로 그 커다란 몸을 숨길 수 있다고 믿은 건가? 아니면 내가 넘어가 줄 것을 알고서 시늉이라도 한 건가. 후자일 것이다.
짐승도 나이가 차면 주인의 습관을 배워 아는데, 이자는 이런 헛짓의 대가로 돌아오는 것이 내 용납과 자비임을 지난 칠 년 동안 지나치게 자주 경험했다.
알면서도, 못 이기는 척 넘어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정말 밤중에 떠나가지 않을 것을 깨달은 그는 들떠서 얼굴이 확 피었다. 그가 내 머리를 조심스레 베개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편히 잠들어도 좋습니다. 오늘은 제가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
나는 그가 눕히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서도 눈은 감지 않았다.
“아무리 하늘 위의 신이라도 잠은…….”
왕은 나를 토닥이려는 듯 손을 들었다가 무엇을 깨달은 듯 멈췄다.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그냥 그대로 누운 채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그렇군요…….”
그는 내 눈 속에서 잠기운 비슷한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고 말았다.
“가끔 당신이 나와 다른 존재임을 잊습니다.”
나는 순간 예전 빛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인간은 나를 닮았고, 나도 인간을 닮았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낮 동안 잠들어 있던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하며 지내는 것인지, 정말 다른 연인이 있는 것인지 묻고 싶지만…….”
왕은 내 머리칼을 매만지며 혼잣말하듯 했다.
“이제는 압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끼는 것이 나밖에 없다는 것도.”
버릇을 아주 잘못 들이진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다른 것을 묻겠습니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비스듬히 누워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가 잠시 침묵하며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얼마 후 그가 물었다.
“잠들 수 없는 건가요?”
이번엔 내가 생각을 해야 했다. 해가 황급히 물러나면 땅에 내려와 왕과 밤을 보내고, 그가 잠든 모습을 관찰하다가 태양의 신이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들릴 즈음에 땅 위를 떠난다.
다른 신들처럼 구름 위에 앉아 하는 것 없이 아래만 내려다보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인간처럼 피와 살 안에 갇혀 태어난 그들과 달리, 나는 땅을 밟을 때만 육체를 입었다. 나는 빛에게서 난 다른 신들과는 태생이 달랐다.
이 조그만 육체에 내 영혼을 다 구겨 넣는 것은 꽤 불편하고 갑갑한 일이다. 그래서 필요할 때만 가져다 쓰고 낮 동안엔 흩어놓는다. 몸 안에 하룻밤 이상 머무른 적이 없고, 몸이 없는 영혼은 잠들 필요가 없으니 잠들 수 없다기보단…….
“몰라.”
…시도해 본 적 없어 모른다는 편에 더 가까웠다.
내 대답을 듣고 미간을 좁히더니 짐짓 신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당신의 몸이 내 것과 완전히 다르다면 좀 전 같은 일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무슨 일.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보자 그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던 일 말입니다.”
“…….”
왕은 음담도 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이 육신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인간과 흡사했다. 피로를 느끼지 않고 배가 고프거나 갈증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한 대로 쾌락을 느낄 수 있다면 다른 것도 불가능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하는 건데.”
“잠에 드는 것 말입니까?”
나는 그를 가만히 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느리게 깜박이는 눈은 내 얼굴로 향해있는데 묘하게 시선이 비껴간다. 자신이 잠에 드는 과정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저도 예전에는 쉽게 잠에 들지 못해 새벽까지 깨어있다가 다음 날 하루 종일 졸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그날 밤은 초저녁부터 침대에 누워서 빨리 곯아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빨리 일어나 놀아야 했으니까요.”
그는 그때를 회상하는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가 다시 내 옆에 누웠다. 그가 내 몸을 당겼고, 나는 얌전히 품으로 파고들어 베개 대신 단단한 팔뚝에 옆머리를 대고 몸을 늘어트렸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어쩐지 생각이 많아지지 않습니까. 흘러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눈을 내리깔고 속삭이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배에서 닻을 내리는 것처럼 영혼을 단단히 묶고, 아주 깊은 바다에 서서히 가라앉는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그러다가 책에서 읽은 큰 바다의 괴물들이 생각나 오히려 잠이 달아난 적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것들도 당신을 두렵게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왕은 내 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것을 반복하다가 내가 아직도 눈을 뜨고 자신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고개를 내려 가볍게 입 맞췄다. 웃음기가 남아 픽픽 새어 나오는 콧김이 맞닿은 입술 위를 간지럽혔다.
“제가 설명을 크게 잘못했군요. 잠이 들려면 눈부터 감아야 하는데…….”
그건 나도 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계속 보았던 것뿐이다. 입술이 다시 눈가에 와 닿았다.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아야 했다.
영혼을 묶는다. 나는 눈 감은 채 귓가에 맴도는 말들을 생각했다. 내 영혼은 나를 품에 안은 그가 두려워하는 큰 바다만큼이나 커서 오래 가두어놓기가 힘들었다.
만약 이 육신이 정말 왕의 것과, 그러니까 인간의 것과 같았다면… 얼마 못 가 조각조각 부서졌겠지. 손바닥에 들어차는 조그만 유리병에 바닷물을 죄다 담고 입구를 틀어막으려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을 일은 없으니 이런 상상도 쓸모없었다.
지금의 몸은 내가 자리하던 어둠 속으로 흘러든 별들의 시신으로 빚었다. 영혼을 오래 담았던 적은 없어도 곧바로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닐 것이다. 문제가 생긴다면 허물고 다시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잠들지 못해도 왕에 곁에 계속 머무를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무언가가 슬금슬금 밀려와 발끝을 적셨다. 몸에서 힘이 점차 빠져나갔다. 나는 처음 겪는 졸음이 생경해 오히려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왕은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연인의 눈동자를 뒤덮은 수마의 휘장을 발견했다. 가물가물 감기는 눈으로 미소가 보였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흐릿한 정신은 부드럽고 얇은 천 같은 달램에 휘감겨 자꾸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가 꺼트린 촛불처럼 의식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사일.”
깊은 잠에서 강제로 끌어 올려졌다. 무언가 자꾸 내 몸을 흔들었다. 잠결에 손을 휘둘러 쳐냈지만 방해는 멈추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졸음으로 겹겹이 쌓인 의식에 제대로 닿질 못했다. 다시 잠에 빠져들려던 찰나, 그가 비명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사일!”
느리게 눈꺼풀을 올렸다. 침실 안은 아직 어둑했다. 밖에서 드는 흐린 빛에 잠긴 왕의 얼굴이 어쩐지 창백했다. 그가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을 뻗었고 그는 다급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순순히 나를 안아 올렸다.
왕은 내 몸을 안고 창가로 걸었다. 졸음이 가시지 않아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려 했지만 자꾸 이름을 불러 깨웠다. 나는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짜증이 묻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밖을 보세요.”
그의 말대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태양이 막 떠오른 창밖은 고요했고 별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불퉁한 눈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결국 입을 뗐다.
“이레를 내리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셨습니까?”
나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몰랐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인간에게는 오래인지 몰라도 그 정도면 내게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다.
육체를 입고 맛본 수면은 만족스러웠다.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진작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신들조차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는데 나 혼자서만 이 즐거움을 모르고 있었다. 다시 자고 싶었다. 내가 잠들 수 있도록 어서 그가 달콤한 노랫말을 속삭여 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당신이 머물렀던 그 칠 일 동안, 일식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먼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해가 검게 가려진 것은 좀 전에 이미 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뭐 어쨌다고.
“…사일, 당신이 한 일입니까?”
“아니.”
왕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걸음을 옮겨 날 다시 침대에 앉혔다. 그러곤 자신은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사일.”
나도 모르게 간절히 올려다보는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추궁당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가 먼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검은 태양이 오늘로 일곱 번째 떠올랐습니다.”
좀 전에도 말했잖아. 인간들이 천체 하나에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는지 지켜보다 보면 우스울 때가 있었다.
“어느 학자도 예고하지 않은 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첫날에는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습니다. 일식이 일어날 때면 항상 하던 것처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달래고 태양신의 신전에 제물을 바쳤습니다.”
나는 그냥 다시 자고 싶어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들이밀었지만 이번에는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가 내 양어깨를 잡아 몸을 제대로 세우게 했다. 억지로 눈을 마주치려 들었다. 오늘의 그는 좀 이상했다. 나는 그때부터 조금씩 심기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다시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처음 떠올랐던 모습 그대로 해가 졌습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그다음 날도… 해는 드러나지 않고 당신은 깨어나지 않더군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태양신이 혼자서 겁먹고 저렇게 구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에오네테는 원래 가장 추울 때조차도 얼음이 얼지 않는데, 강의 끝자락부터 서서히 얼어붙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겨울 작물을 기르던 농부들도 모두 겁에 질렸습니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의 눈 속에는 어떤 비난도,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나를 탓하는 것처럼 들렸다.
“신의 눈에는 모두 같은 인간일지 몰라도, 저는 이곳의 왕입니다. 내 도시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다시 물었다. 내 손을 단단히 쥔 채였다.
“태양이 가려진 것이 정말 당신과 관련 없는 일인가요?”
왕은 지금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내 확답이 필요한 것이지.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돌아가라는 말이냐?”
그는 난처해 보였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말을 고르는 것부터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까지. 나는 한 번도 이런 골칫덩어리 취급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고작 인간에게.
“사일, 지금은…….”
돌아가라고?
“네가…….”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자고, 머무르라고 애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깟 태양 때문에.
“…네가 머무르라고 했잖아.”
인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뒤늦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이미 기분이 완전히 상한 뒤였다. 잠기운은 죄다 달아났다. 그냥 그를 두고 뒤돌아섰다. 날개가 솟자 그가 창가에 다가선 나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붙잡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품에 안고, 그리고 스스로의 말을 부정하려고? 이 조그만 도시와 그 안의 인간들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고 속삭이기라도 하려고?
나는 그만 다가오는 손을 쳐내고 왕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말았다. 명백한 위협에 그가 뒷걸음질 쳤다.
창틀에 올라섰다. 나는 더 끌지 않고 발을 뗐다. 그는 나를 부르지 않았고 나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계속 높은 곳으로 날았다. 발밑으로 태양이 조금씩 금빛 얼굴을 내보이고 있었다.
곧장 몸을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다.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
나는 신들이 앉은 곳으로 쳐들어가 죄 없는 태양신을 걷어차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도 왕이라고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던 꼴을 보니 날 등 떠밀어 쫓아낸 인간의 왕이 생각나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화를 삭이느라 식식거리던 사이 신들은 죄다 흩어지고 눈치를 보던 태양신은 결국 몸을 빼 도망쳐버렸다.
나는 고요해진 회장의 빈자리에 올라앉았다.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잠을 오래 자면, 그러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졸음이 오는 일은 없었다. 기분이 더 나빠질 뿐이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짜증이 나서 육신을 그대로 흩어버렸다.
인간의 눈이 닿지 못하는 곳, 달 뒤편에 진 그림자 안으로 돌아갔다. 이곳에 홀로 있으면 누구도, 무엇도, 끝없는 시간조차 날 괴롭힐 수 없었다.
하지만 원하는 것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형체 없이 일렁거리고만 있으니 오히려 생각이 자꾸 땅으로 향했다.
해가 뜨지 않은 것도 아니고, 좀 가렸다고 곧바로 날 돌려보내? 뭐, 내 모든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 그가 나에게 무슨 이름을 가져다 붙였는지 생각하면 더 화가 났다.
다 거짓말이었다. 그런 뻔한 입발림에 속고 말았다. 왕의 머릿속에는 제 도시밖에 없는 것이다. 백 년도 못 다스릴 그 땅을……. 백 년?
백 년. 어쩌면 더 짧은 시간. 인간의 수명이 얼마나 짧았는지 떠올리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내게는 짧은 상념 한 번에 사라질 순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 허공으로 흩어질 것만 같았다.
인간은 그렇게 오랜 일식은 본 적이 없다니 무섭고 두려울 수도 있었겠지. 내가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분노와 짜증은 온데간데없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향한 애틋함 비슷한 것이 차올랐다. 흩어진 육신을 다시 모아 입었다. 영혼도 몸도 서로를 밀어내며 압박감을 호소했지만 매번 있는 일이었다.
알아서 적응하도록 두고 곧바로 운명의 신전으로 향했다. 빛은 어쩐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 보여도 속으로는 여린 구석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자식 중 하나인데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세요. 답지 않게 기가 죽어있으니 보기 좋지 않습니다.”
얼마 전 누굴 걷어찬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식이 궁지의 몰린 태양신의 마지막 선택지였다는 것도, 칠 일 동안 해를 아주 땅 밑에 숨겨놓는 것보단 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가려 내보내지 않았다면 차게 식은 것을 버리고 새 태양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의미 없는 화풀이였다.
저 뻔뻔한 얼굴을 마주하려고 이곳에 다시 온 것이 아니다.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왕의 수명을 말해.”
“어느 왕을 말하시는 건가요?”
나는 이를 갈았다. 이미 머리가 떨어져 나가 있던 신상에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으시군요. 제가 잘못했으니 그건 그대로 둬주세요. 신관들이 고생합니다.”
“그가 언제 죽는지, 말해.”
“하지만… 한낱 인간 하나의 숨이 끊기는 시간을 알아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시나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신 적 없지 않으십니까.”
뱀처럼 사특한 혀가 속내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십 년이나 백 년 후라면 어떻고, 영원히 죽지 않게 된다면 어떤가요. 그때까지 제 세계를 살려두실 건가요? 그럼 제가 그의 운명을 끊고 영원히 땅에 묶어놓아도 되겠습니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이 되기는 하겠습니다만, 겉모습만 그대로라면 당신의 애착도 그대로일까요. 아니면 설마 그 영혼까지 사랑하셨습니까?”
“…닥쳐.”
“제가 그날이 오늘이라고 한다면…….”
그는 끝내 입을 닫지 않았다. 결국 신상은 발치부터 잘린 목까지 모두 무너져내려 흩어졌다.
“그와 함께 제 세계를 죽이실 건가요… 어린 밤이시여.”
늘 달고 있던 미소조차 지운 빛을 등 뒤에 두고 신전에서 다급하게 나가야 했다. 운명이 사실을 말한 것일까? 날 겁주려고 헛말을 지껄인 것일까? 새벽바람이 이렇게 거슬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빠르게 날아 그의 성에 가까워질수록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나는 곧바로 그의 침실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왕은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둑한 곳에 멍청히 서있었다. 정신이 불안에 축축하게 젖어 무거웠다. 어느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찾으면 되는데, 찾을 수 있는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미 죽었으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지?
그때, 그가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죽어가는 자의 목소리처럼 아주 작고 미약한 속삭임이었다. 분명히 그였다.
돌처럼 굳어있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날아올랐다. 아주 높이, 성의 모든 곳이 한눈에 보일 수 있는 곳까지.
정원 한구석에 그가 있었다. 망설임 없이 공중에서 날개를 접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땅으로, 아주 작게 보이는 몸을 향해 추락했다. 그리고 손끝에 왕의 몸이 닿았을 것만 같을 때, 등 뒤에 한껏 붙였던 두 날개를 크게 펼쳤다. 그 아래 짓눌린 새벽 공기가 깃을 부풀렸다.
떨어져 내리는 것에 가깝던 속도가 한번에 줄었다. 나는 땅에 쓰러진 그를 품에 끌어안은 채였다. 보호하듯 둥글게 말린 날개깃의 그림자 안에서 그를 살폈다. 옷 위로 스며 나온 피가 손에 묻어났다.
고개를 들었다. 그를 죽이려 한 것들이 있었다. 그들은 손에 날붙이를 들고 놀라 서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곤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죽음은 곧바로 그들을 덮치지 않았다. 내 발치에서부터, 날개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스며 나갔다. 정원의 푸른 풀이, 잎사귀가 떨어진 겨울나무가, 나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 허공에 흩어졌다.
도망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 잿빛에 발끝이라도 닿은 자들은 모두 그대로 무너져 같은 운명이 되었다.
내게서 멀어지려 필사적으로 발을 구르던 마지막 암살자까지 재로 변해 육신이 사라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산불이 지나간 것처럼 모두 재로 뒤덮인 땅이 점차 영역을 넓혔다. 둥글게 번져 나가는 죽음이 주위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이제 왕을 지키던 부하들까지 위협을 느끼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에 꽂혀있었다. 육신을 잃고 비명을 지르는 인간들, 그것들의 영혼까지 흩어버리고 싶었다.
“…사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멍멍한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를 품에 가만히 안고, 눈으로는 도망치는 영혼들을 좇았다. 그들과 나 사이에 무엇이 있든 상관하지 않고 죽이고 무너트렸다.
“사일, 그만해도 됩니다…….”
이제 잿빛 융단은 왕의 성 밖으로 뻗어 나가기 직전이었다. 몸속이 뜨겁고 뻐근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멀리, 조금만 더 빠르게 가면 모두 없애버릴 수 있어. 다 찢어놓을 거야. 결국 내 힘이 영혼 하나에 닿았을 때였다.
“제발, 사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깨어난 그가 내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만하거라…….”
지금 날 뭐라고 불렀지? 상처를 한 손으로 틀어막은 그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내 어깨를 단단히 잡고는 눈을 맞춘다. 밤공기에 차게 식은 손이 내 입가에 흐른 핏줄기를 문질러 닦았다.
“사샤……. 이곳에서 나가자, 응……?”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자가 아닌 것 같았다. 같은 얼굴이지만 눈빛이 다르고, 같은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내가 모르는 이름으로 날 부른다.
그는 스스로 잠기운을 쫓으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잇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깨어나지… 못, 해도…….”
날 잡아 흔들던 손길이 점차 멎었다. 내게 전하려던 말은 흰 입김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 흐려져 가는 것이 보였다.
느리게 눈을 깜박인 후에는 그도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일?”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는 곳에 붉은 일출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떠나야 했다. 그를 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지 마세요…….”
거짓말이잖아. 또 해가 가리면 날 치워버리고 싶어 할 거잖아. 나는 그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옷자락을 잡은 손이 떨어져 나갔다.
곧 발끝이 땅에서 떨어졌다.
구름 위에 앉아 해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석양이 점차 가시고 해를 끄는 태양신의 금빛 옷자락이 남김없이 지평선 밑으로 사라질 때까지 땅에 내려가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전에는 태양이 나를 두려워해 피했는데, 이제는 내가 태양을 피해 숨어들어야 했다.
무력했다. 사랑에 빠졌다.
누군가 발목에 줄을 매달아 잡아끄는 것처럼 천천히 날았다. 스스로 덫에 걸린 것을 알아 괜히 성 위를 빙빙 맴돌았다. 결국 한참 후에나 내려앉았다.
창문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활짝 열려있었다. 침실 안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하 몇이 침대 위에 앉은 그를 도와 상처를 감싼 붕대를 갈고 있었다. 흰 천이 복부를 가로질러 죄이자 그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왕은 고개를 숙이고 가쁜 숨을 고르다가 가만히 선 나를 발견했다.
그가 입술 새로 내 이름을 속삭였다. 왕이 한참 한곳을 바라보는 바람에 그를 침대에 바로 눕혀 쉬게 하려던 자들도 나를 보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을 두고 황급하게 밖으로 도망쳤다. 오늘 새벽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목격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달려나간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왕이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어내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그가 침대 밖으로 발을 딛게 두었다간 그대로 넘어질 것 같아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주었다. 손끝만 겨우 닿을 거리였다.
그는 반쯤 누운 채로 내 옷을 움켜쥐더니 나를 세게 잡아당겼다. 힘을 쓰는 것이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침대 바로 앞에 서고 말았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상체만 간신히 돌린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배에 얼굴을 묻은 그가 울음을 터트리고 만 것이다.
나는 전에 그가 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죽을 뻔한 일로 크게 놀란 것일까? 아니면 내가 한 짓 때문에?
그는 무엇이 서러운지 한참을 울었다. 그가 결국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다시 그를 조심히 밀어 침대 위에 눕혔다. 손을 놓지 않으려 해서 나도 침대 위에 올라야 했다.
그의 곁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가까이서 내려다본 얼굴은 고통과 울음의 흔적으로 아직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눈물에 젖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원래 있던 곳에. 내가 낮 동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생각하던 중에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
“한 달 동안 에오네테를 다 뒤졌습니다. 숲도, 신전도…….”
땅에서 한 달이 지난 줄은 몰랐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겠다 헤맸을 것이 안타까웠다.
“오늘 새벽에 겨우 다시 보았는데……. 당신이 그렇게 가버려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네가 검은 해를 싫어하니까. 그게 뭐라고 그러나 싶어도 굳이 싫어하는 짓을 해 돌아가란 말을 다시 듣고 싶진 않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가시면 안 됩니다.”
숨에서 쓴 풀과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아무래도 고통을 줄여주는 약을 마신 듯했다. 횡설수설하는 데다 잘 울고 잘 투정 부렸다. 약에 취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는구나. 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나와 함께 가자.”
인간이 늙어 죽지만은 않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했다. 내가 없는 사이 네가 죽게 둘 수도, 그렇다고 곧 무너질 세계에 너를 남겨둘 수도 없다. 너는 내가 이 세계에서 건져낼 유일한 전리품이 될 것이다.
“좋습니다.”
망설임이 묻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대답을 듣고 싶어 약 기운에 취해 맹목적으로 구는 틈을 탄 것인데도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되묻고 말았다.
“어디든?”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눈이 반쯤 풀려서는 순순히 올려다보는 꼴이 더 거슬렸다. 거부하면 들어줄 마음이 생길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물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맹세해.”
같이 이 세계를 떠나겠다고. 나와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약속해.
왕은 졸음 묻은 목소리로 약속의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뺨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그는 내게 눈물을 보이고 어리광을 부렸던 것을 부끄러워했지만, 온몸에 약 섞인 피가 도는 것은 좀 전과 마찬가지라 어딘지 몽롱하고 천진해 보였다.
“함께 갈 곳이 어디인가요? 상처가 다 나으면 가겠습니다. 이렇게 다쳤으니 요양 삼아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크게 혼나지는 않을 겁니다.”
맹세까지 해놓고선 어딜 가느냐고 이제 물어 무슨 소용인가. 대책도 없어 보이는 인간을 지켜보면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잠시 갈 것이 아니었다. 영원히 머물 곳이다. 하지만 그런 말로 미리 겁을 줄 필요는 없었다. 조금만 지내다 보면 땅 위에서의 생은 모두 잊고 그곳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곳은… 까맣고 고요하다. 상처 입는 일도, 병들 일도, 죽을 일도 없다. 나는 한참을 고민한 후에 설명할 말을 고를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
“신들이 사는 하늘 위 말입니까?”
“아냐.”
“하지만 전 사람입니다. 어떻게…….”
“내가 데려가 줄 수 있어.”
“낮 동안 그곳에서 지내셨던 것이라면 저도 당신과 태양 아래에 함께 설 수 있나요?”
그놈의 태양. 제정신이었다면 내 앞에서 다시 꺼내지 못할 주제였다. 겨우 옷자락 좀 잡고 있다고 내가 떨쳐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인간에게 불퉁한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약에 취한 주제에 나를 너무 쉽게 읽었다. 그가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태양이 없습니까……?”
고개를 저었다. 태양신은 감히 근처도 올 수 없는 곳이다.
“별과 달만 뜨는 세계라니.”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왕은 조금 아쉬워할 뿐, 불안하거나 두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가 멋대로 생각하도록 두었다. 왕은 혼자 무엇을 상상하는지 꿈꾸는 듯한 말투로 속삭였다.
“아름답겠군요…….”
그는 제 옆에 무릎 꿇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상체를 숙이자 그가 곧 눈을 감았기 때문에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기 쉬웠다. 가만히 입술을 맞댔다.
귓가에 아우성치는 망자들의 비명은 모조리 무시했다. 곧 마른 모래처럼 흩어질 것들. 내게는 아무 상관 없어. 이미 강의 흐름을 끊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신이 아니었다.
왕이시여!
왜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자들이 영원히 버려지도록 이대로 두고 보실 건가요?
우리 대신 우리의 신께 애원해 주세요. 우리는 감히 다가갈 수조차 없지만 당신은 그와 함께 잠들고 일어나지 않습니까. 당신이 검은 강의 주인에게 사랑받는 것은 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헉…….”
시끄럽게 떠드는 것들은 다 찢어놓았다. 하지만 내 곁에서 편히 잠들었던 그는 눈 감은 채로 괴로워하더니 결국 몸을 떨며 깨어나고 말았다.
그가 멍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동안, 식은땀에 젖어 눈가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왕의 배에 난 상처는 느리게 아물고 있었다. 핏기가 가시고 흉터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나는 떠날 날을 가늠해 보았다. 영원히 입을 몸에 흠을 남긴 채로 신이 되게 할 순 없었다.
그가 잔떨림이 남은 숨을 느리게 내뱉었다.
“악몽을… 꾸었습니다.”
“괜찮아.”
이제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꿈속에 기어들던 것들은 여느 때처럼 다 잘게 조각나 말라가는 강에 던져졌다.
“…아무래도 답답해 그런가 봅니다. 달이 바뀌도록 침실 밖으로 오래 나가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그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상처 입었던 곳을 손으로 누른 채 천천히 걸어 창가에 섰다. 어스름하고 푸른 새벽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왕은 이제 망자들의 목소리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성 주변을 맴도는 영혼들을 마음껏 허물어트려 돌려보냈다. 이제는 그들이 지르는 비명을 듣지 못할 것이다.
창에서 쏟아지는 새벽빛에 덮인 그의 뒷모습은 언뜻 평화로워 보였다.
“성안에만 있다 보니 창문 밖으로 하늘과 땅만 바라보게 되더군요…….”
인간의 눈으로는 고작 흐린 색깔, 뭉그러진 형태밖에 볼 수 없을 텐데. 나는 그가 무엇을 그렇게 오래 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래를 보았지만 내게는 너무 지겨운 것들뿐이었다.
“오래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땅의 색, 해가 지나가는 잔상, 어느 별이 가장 밝은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나는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가 그런 것들을 아름답다 느낀다면 떠나기 전에 충분히 보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들은 그런 것에 도통 관심이 없다.
“사일.”
그의 시선을 따라 멀리 보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직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땅도, 하늘도, 그 사이도 아니었다.
나는 그제서야 왕이 그저 나와 눈이 마주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보아도 매일이 같습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겨울은 끝나가는데 땅에는 새싹이 하나도 돋지 않고 해는 여전히 낮으며 밤하늘에는 한 달 전의 별자리가 얼어붙어 그대로입니다.”
나는 그가 손을 스스로 세게 움켜쥐어 손가락의 살갗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까지 모두 들었다.
“신들께서 이 땅을 버리셨습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조급해진 그는 돌아서고 말았다. 하지만 잠든 그의 곁을 지키던 그대로 침대 위에 앉은 나를 향해 한 걸음도 다가오지 못했다. 그는 자리에 붙박인 듯 서있었다. 왕이 다시 물었다.
“우리를 버린 겁니까?”
“우리?”
아무도 말을 잇지 않아 침실 안은 한참 동안 조용했다. 그가 숨 쉬는 소리만 내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창밖이라도 고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폭풍 전날 밤의 잠잠함과 같았다.
신들이 땅을 버렸냐는 물음에 답하자면 그렇다고 할 것이다. 신들은 이미 대부분 떠났다. 곧 폐허가 될 하늘과 땅에서 벗어나 다른 태초신들의 세계로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왕은 남겨질 운명이 아니었다.
“함께 가자고 했잖느냐.”
나는 턱을 괸 채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시선은 그의 복부에 쏠려있었다. 왜 이리 오지 않지. 발을 딛기가 힘겨운 것일까? 상처가 아픈가?
“저들은……. 저들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해주십시오.”
저들이 누군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숨 쉬는 저것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네 꿈에 찾아온 자들? 그들은 세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감히 네 꿈에 찾아와 허튼소리를 한 것들은 내가 이미 다 바스러트렸다.
산 인간들은 무지한 덕에 변화 없이 마지막 남은 생을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망각의 강에 발을 담근 망자들은 달랐다. 강은 내가 손을 놓자 빠르게 말라붙고 있었다. 더 이상 다음 생도, 안식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버려진 세계에 남겨져 서서히 마모되어 갈 운명을 직감하고 땅으로 몰려나와 발버둥 쳤다.
날 귀찮게 한다면 손으로 흩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산 인간인 왕을 괴롭게 하는 것은 거슬렸다. 그들은 끝도 없이 왕이 잠든 틈을 파고들었다.
어느 때엔 전쟁에서 죽은 그의 병사들이. 그다음엔 그의 가족 중 병들어 죽은 자가. 더 지나서는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자들이……. 무엇을 비는지도 모르고 그에게 애원했다.
나는 귓가에 닿는 소리를 흘리는 것에 익숙했다. 산 자의 기도, 망자의 기도, 인간 아닌 것들의 속삭임. 그것들을 여태 모두 귀 기울여 들었다면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잠든 도중에도 괴로워했다. 그 창백한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서야 그가 나와 같지 않음을 다시 깨달았다. 그들이 하는 무의미한 소리에 마음을 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떠날 수 있어.”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바람에 변명을 덧붙여야 했다.
“…네가 원한다면.”
“원하지 않습니다.”
왕은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가 쉬웠다. 바라는 것이 나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제가 가진 것 중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것처럼 굴었다. 지금의 그는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서는 걸음에 망설임과 두려움이 묻어있었다. 그는 내 앞에 선 채 잠시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주세요.”
나는 더 이상 인간을 올려다보는 일이 예전처럼 불쾌하지 않았는데, 왕은 스스로 몸을 낮췄다. 그가 침대 아래 내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가 이곳에서 같은 모양새로 나를 원한다고, 나를 소유하고 싶다고 속삭였던 일을 기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입을 연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할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닌 모양이었다. 왕은 변했다.
“…제발,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십시오.”
“너 때문이 아니야.”
널 만나기 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오히려 그 하나 때문에 스스로 맹세한 것을 미루고 늦췄다.
“나는 이미 오래 참았다.”
하지만 그를 진정시키려던 내 말이 오히려 그에게 어떤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저들의 말이 맞는 겁니까……?”
무릎을 땅에 댈 때조차도 아픔을 참던 인간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선을 내리고 그의 손을 만지작대고만 있었다. 그의 눈 속에 든 것을 보게 되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신들이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를…….”
너희를 버렸다고.
물고기가 제 등 위에 멋대로 핀 이끼를 떨쳐내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 버렸다는 표현을 굳이 쓰고 싶다면 그의 말이 맞다. 모두 버렸다. 하지만 그가 왜 자꾸 저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왜 그냥 두십니까?”
왜 그냥 두지 말아야 하는데.
“제가 에오네테의 마지막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버려질 자들은 모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 제 사람들입니다. 제발……. 이 땅을 버리지 마십시오. 머물러주십시오. 떠나지 마세요.”
나는 그만 조금 전보다 더 화가 나고 말았다. 어쩐지 이전에 들었던 떠나지 말라는 말이 지금의 목소리보다 더 간절했던 것 같지 않았다.
연인이 아니라 고작 받침돌 취급이었다. 네 도시를 떠받치도록 발밑의 땅과 머리 위의 하늘 사이에 괴어놓는 돌. 부탁하고 애원하는 목소리들. 너도 그들과 똑같아.
“…싫어.”
그가 칠 년간 내게 속삭였던 밀어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했던 말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이렇게 되려고 빛이 너를 내 앞에 들이밀었지. 내 연인이 되게 하고, 간절히 애원해 내가 떠나지 못하게 하고……. 모두 계획된 일이었던 것이다.
“싫어.”
반드시 떠나고 말 것이다. 네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 땅은 모두 무너트리고, 너는 손안에 쥔 채 떠날 거야.
그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배신당한 자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나를 달라기에 주었고, 떠나라기에 떠났다. 나는 여태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래서 제 부탁을 거부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나를 제 구명줄처럼 붙들어 놓고는, 정작 입으로 뱉는 말은 죄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위한 애원이었다.
“이렇게 무너지도록 두고 떠나실 정도로 당신께 이 땅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면 저는 무엇이 다른가요. 왜 저 하나만 살피십니까? 저도 이곳에서 났습니다.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느니 차라리 제가 남겠습니다. 저들도 구해 주세요. 당신께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 않습니…….”
“나와 함께 가기로 했잖아.”
그만 노려보고 말았다. 남겠다고?
“약속했잖느냐.”
“…그런 말은 한 것은 기억합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저들이 남으니 자신도 남겠다고. 자신이 선 이 땅을 무너트릴 수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를 끌고 가려고 정말 마음먹은 때라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께서 날 두고 떠나지 못하듯, 내가 저들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저들과 내가 무엇이 다르다고 사람들 중에 홀로 당신께 구원받는단 말인가요…….”
“넌 저것들과 달라.”
“다르지 않습니다.”
“달라.”
“제가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저들과 제가 무엇이 다르냐고 끊임없이 묻길래 잠시 생각했다. 저들은 중요하지 않고, 너는 중요하다. 저들은 내 것이 아니고, 너는 내 것이다. 저들은 내가 사랑하지 않고…….
“너는 내가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다르다. 넌 두고 갈 수 없어. 이미 서로에게 묶였다. 이제 빛의 뜻대로 되지 않으려면 널 데리고 떠나는 것뿐이다.
네가 나와 사랑에 빠지기 위한 운명에 묶여 태어났다면 모두 끊어버릴 것이다. 아주 오래 지나면 너도 네가 이곳에 발을 디뎠던 시간조차 잊을 거야. 운명이 네게 씌웠던 굴레도 다 흩어져 사라지고, 네 눈앞에 나밖에 없으면……. 그러면 날 새롭게 사랑하게 될 것이다.
빛이 네게 심은 거짓된 마음 따위와는 완전히 다를 거야. 그러면 나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다른 것이 아닌 나를 달라고 말하던 목소리는 너 하나뿐이어서,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니까.
말을 뱉고 나서 내려다본 왕의 표정은 어쩐지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것 같기도 했고, 가장 바랐던 말을 가장 바라지 않은 때에 들은 사람 같기도 했다. 그는 또 내 시선을 피해버렸다.
“당신은 아직…….”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내 이름을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손을 내려 왕의 뺨을 감쌌다. 이때는 나조차 몰랐다. 눈앞에 놓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몰랐을까. 작은 불씨 하나 없이도 모든 것을 선명히 지켜보던 신의 눈동자가 고작 인간 하나의 속마음을 읽지 못해서…….
말하지 마. 그런 말은 하면 안 됐어. 하지만 뒤늦은 어느 때의 후회는 지금 이 새벽에 아무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
“지금 떠나자.”
상처가 흐려질 때까지 기다리려던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마음이 조급했다. 그깟 작은 흠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
“신이 되고 싶지 않으냐?”
죽고 싶지 않다고, 영원히 살고 싶다고 빌던 수많은 목소리들을 생각했다. 인간이라면 바라 마지않는 소원일 것이다.
“지금 가자. 응?”
하지만 달래고 보채도 반응이 없었다. 애써 가라앉혔던 분노가 스멀대며 다시 뱃속에서 연기를 피웠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래. 너도 인간이 아니게 되면… 내 일부를 가지고 나와 비슷해지면 날 이해하겠지. 그깟 인간들, 네가 밟고 섰던 땅, 그토록 아끼던 네 도시, 모두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어차피 네 허락은 필요 없었다.
그의 어깨에서 손을 거뒀다. 몸을 일으키자 놀라 고개를 들었던 왕은 곧 목덜미가 틀어잡혔다. 내가 가려는 줄 알았나 보지. 하지만 말했잖아. 절대 널 두고 떠나지 않아.
“사일……?”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그는 손아귀에 점차 힘이 실리자 숨이 막히는지 기침을 하다가 더 지나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왕의 몸은 힘없이 뒤로 밀려 바닥에 눕혀졌다. 목을 움켜쥔 내 손을 뜯어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발버둥 치는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상체를 숙여 그의 가슴팍 위에 귀를 댔다. 빠르고 규칙적으로 쿵쿵대는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네 심장 소리. 인간의 심장……. 영혼을 묶어두는 곳.
내가 심장 바로 위, 그 살갗에 손끝을 댔을 때. 손목이 잡혔다. 내게는 미약한 힘이었다. 떨쳐내려면 떨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고통인지 무엇인지 모를 원인으로 눈가엔 눈물이 고여서도 입을 달싹거리는 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다는 얼굴이었다.
들어나 보자 싶어 그냥 목을 놓아주었다. 또 싫다, 남겠다 하는 소릴 하면 무시할 생각이었다.
“하루, 만…….”
그는 숨을 몰아쉬고 기침을 토하느라 헐떡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루만. 하루 동안만, 시간을 주세요.”
한 문장을 간신히 끝마치고 나서도 한참을 콜록대며 말을 잇지 못했던 그는 내가 별 관심이 없는 표정인 것을 보고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였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서의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떠날 수는 없습니다.”
왕은 직감적으로 내가 그에게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신이 되나, 내일 신이 되나, 그렇게 애써 미뤄도 아무런 차이도 없는데.
그가 남겨질 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경고? 아니면 연하기 그지없는 그의 마음다운 사죄의 말? 다 쓸데없는데.
“제발, 사일…….”
침실 바닥에 힘없이 누운 그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사실 그가 도망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주어진 땅 위에서의 마지막 날을 그렇게 쓸모없이 보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지. 그가 어디로 가든, 나는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 작별 인사를 하든 어딘가로 달아나 숨든, 마음대로 해.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는 것은, 다르게 들으면 그다음 날에는 나와 함께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가 순순히 구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놓아주었던 것 같다.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인내심을 발휘해 하루를 꽉 채워 기다렸다. 그리고 두 번째 동이 틀 때,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다시 그에게 돌아갔다.
태양신조차 이미 세계를 떠나 더 이상 해를 가릴 신의 손이 없었다. 죽어가는 천체가 쏟아내는 흰 햇빛이 그대로 땅 위를 채우고 있었다.
도망쳤다 해도 찾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도 가지 않고 침실 안에 있었다. 왕은 아주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째서. 대체 왜?
“일어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일어나란 말이다.”
나는 왕의 얼굴을 만지려다가 살갗이 닿은 순간 퍼뜩 놀라 손을 물렸다. 차가웠다. 다시 손을 대지는 못하고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고, 침대에 힘없이 떨어진 손끝과 얇은 눈꺼풀이 밀랍처럼 창백했다. 잠들었을 때처럼 뒤척이거나 가슴이 오르내리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침실 안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명백하게 알았다. 숨소리도, 날 반기며 달음박질하던 심장 소리도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분명한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죽었어.
그가 죽었다.
정말 숨이 끊겼다.
죽어버렸다.
내게서 도망쳐버렸다.
굳게 감긴 두 눈과 생기 없는 뺨 위로 무언가 툭툭 떨어져 내렸다. 투명하고, 조금 붉었다. 땅에 남겨진 왕의 육신은 그저 잠든 채로 우는 것처럼 보였다.
침실 안까지 스며든 이른 아침의 햇빛이 그의 얼굴 위를 덮었다. 기다리는 하루 내내 이런 모습을 상상했다. 태양 아래에서 마주 볼 일을 기대했다.
이런 건 원하지 않았다.
숨이 가빴다. 나는 공기가 모자란 것처럼, 숨이 달리는 인간처럼 헐떡대기 시작했다.
“아니야……. 사샤, 나는…….”
내 제단 앞에서 무언가를 위해 기도하던 인간들처럼 무릎을 꿇고 그의 몸 위에 엎드렸다. 이미 차게 식어 뺨에 닿는 체온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웅크린 등 뒤로 나를 깨우려는 목소리와 손길은 제대로 내 정신에 닿지도 못했다.
“…나는 다르다. 나는 널 이렇게 버리지 않아.”
“제발 날 좀 보거라, 응? 저자는 내가 아니야.”
“사샤, 울지 마. 제발 울지 말거라……. 내가 잘못했다…….”
누군가 나를 흔들며 끊임없이 말을 걸었지만 나는 죽은 왕을 붙들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팔을 둘러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나를 버렸어. 나를 두고 도망쳤다. 내게 거짓말을 했다.
날 속였어.
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고 깨어나지 않는 저것은 이미 빈껍데기다. 이를 악물었다. 소용없을 사고가 이어졌다. 그를 찾아야 했다.
찾아서… 돌려놓을 것이다. 날 속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네 눈앞에서 다 망가트릴 거야. 일단 다시 숨 쉬게 한 다음에, 다시 나를 보게 한 다음에… 그다음에…….
그의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쥐었던 손을 놓았다. 왕이 어디로 도망쳤는지는 당연했다. 나는 곧바로 버려두었던 강을 향해 날았다.
인간들의 땅도, 신들의 하늘도 아닌 어딘가. 죽은 자들이 잠기는 곳. 지친 망자가 영혼을 누이고 평안을 얻는 곳.
끝없이 흐르던 검은 강은 깊이를 알 수 없던 원래의 모습은 없고 이미 완전히 말라붙어 바닥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밑에 깔려 밟히는 것들이 죄다 영혼들이었다. 파도에 닿지 못하는 자갈처럼 물기라곤 없이 표면이 마르고 갈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을 짓밟으며 헤매도 원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모여드는 곳에서 하나를 찾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멍청히 서서 망자들의 바다를 둘러보다가 끝내 확실히 깨달았다. 그를 잃어버렸다.
“예전에 당신이 알려주었던 신의 이야기 말입니다. 배신한 연인을 죽였다가 후회하며 울었다던…….”
서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언젠가의 그가 내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 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영혼을 되돌려 받았습니까?”
내 발치에 매달려 눈물을 쏟던 그 작은 신을 떠올렸다. 망각에 강에 잠긴 연인의 영혼을 제게 돌려달라 애원하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찾아. 모래사장에서 모래알을 흘려놓고는 주워 달라 떼쓰는 것이나 똑같았다.
그래서 찾지 못한다고, 돌려주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입에서 나오는 이름조차 없었다. 부를 이름을 몰랐다. 한 번도 묻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력하고 무지했다.
결국 연인을 찾아 부르려던 목소리는 밖으로 새지 못하고 모두 고여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안에서 들끓는 무엇은 입술만 겨우 달싹거리게 했다.
그것은 닫힌 입 대신 더 위로 차올라 머릿속을 온통 지끈거리게 하더니 결국 스밀 틈을 찾았다. 눈꺼풀 안이 뜨거웠다.
눈가에서 흘러 뺨을 타고 떨어진 액체가 발치의 영혼 조각 하나에 닿았다. 그리고 발끝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눈물처럼 투명한 강물이 내가 선 곳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검고 흰 영혼들이 다시 수면 아래로 하나둘씩 잠기며 여기저기서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나는 어느새 발목까지 물에 잠겨있었다.
고요하고 빠르게 불어나는 물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했다. 버려졌다. 이곳에 영원히 묶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떠날 수 없다. 분노와 배신감이 눈앞을 뿌옇게 가렸다.
…너만 날 버릴 수 있는 줄 알아? 너만 모두 잊을 수 있는 줄 아느냐?
* * *
그리고 끝이었다.
머릿속을 휘젓던 격렬한 감정들이 한순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니, 내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주어졌던 역할의 의식에서 밀려 나온 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저 자신을 찢어내는 어린 밤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러니까, 나는. 과거의 어린 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아파 보였다. 하지만 나조차 눈물을 흘리기엔 이때에서부터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탈력감이 몰려왔다. 칠 년 동안의 연극은 끝났다. 이곳이 어린 밤의 마지막이자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검은 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돌아오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느새 내 곁에 서있던 운명이 말했다. 그의 눈은 아직도 괴로워 어쩔 줄을 모르고 몸부림치는 어린 밤에게 향해있었다.
“…강의 주인이 제 눈물에 기억을 잃을 리 없으니까요. 스스로 모두 뜯어내야 했습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인간이 자신의 살과 가죽을 긁어 상처를 내듯이, 어린 밤의 손끝이 제 몸을 스칠 때마다 그의 기억이 핏물처럼 맺히며 흘러나왔다.
물결 위에 떨어진 신의 기억들은 인간의 것처럼 흩어지거나 녹아들지 못했다. 저들끼리 모여 서서히 형체를 이뤘다.
하지만 자신을 배신한 연인을 사랑하던 기억도, 원망하던 기억도 지나치게 크고 순수했다. 매개체가 없는 그의 기억은 결국 완전히 뭉치지 못하고 서로를 밀어냈다. 그렇게 한 몸에 든 쌍생신이 태어났다.
망각의 강에서 솟아올라 스스로 눈을 뜬 새로운 신이 제 창조주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들을 결국 제게서 다 찢어낸 어린 밤은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피투성이가 된 그가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잠드는 것처럼 물 위에 쓰러졌다.
이미 허리까지 차오른 망각의 강이 편안히 눈 감은 그의 육신을 받아주었다. 일렁이는 물결이 그의 얼굴에서 피 눈물을 씻겨냈다. 그는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어린 밤을 집어삼킨 수면 위에 발을 딛고 서있던 빛이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물속에서 무언가를 건져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어린 밤의 영혼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재현해 보이는 빛은 어느 때보다 무력하고 무방비한 어린 밤에게서 그의 커다란 힘을 빼앗았다. 저항은 없었다.
그는 내게서 떼어낸 힘으로 칼날을 만들었다. 나 대신 영혼들을 베다가 결국 땅에 떨어져 나와 황제를 찌른 그 단검.
밤의 뼛조각. 어린 밤의 영혼 조각이었다.
창조신인 빛에게 안식의 힘 따위는 없다. 모두 내 것이었다. 나를 먼저 관통하고 황제의 몸을 찌른 단검은 이미 내 심장에 닿았을 때 모든 힘을 빼앗겨 영혼을 베는 능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해를 입지 않았다.
빛이 제 옷자락 안으로 검을 숨겼다.
“세계를 유지할 부분을 떼어내고, 남은 영혼은 제 손이 닿는 곳 밖으로 던졌습니다. 그러기를 원하실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안식 대신 스스로 인간의 몸을 만들어 매번 영혼 하나를 따라다니시더군요. 모두 가지셨을 때는 찾지 못했던 그 영혼을 말입니다.”
이제 빛의 손에 남아있는 것은 허물어진 별 같기도 했고, 검은 보석 같기도 했다. 어린 밤의 가장 밀도 높은 부분이었다. 아무런 기억도 힘도 없는, 가장 순수하고 짙은 조각.
“게다가 당신께서 계약을 맺기 직전에는 그자의 영혼이 길을 잃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그를 데려오며 어쩔 수 없이 다시 운명을 지어주어야 했습니다. 그곳의 주인이 함께 흘러들어 온 당신을 보고 겁을 먹어서요. 마침 쌍생신이 알맞은 핏줄을 땅에 만들어놓았더군요.”
나는 이후로 한참을 떠돌게 될 나 자신의 영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진짜 망각의 강이 아닌 내 기억이 만들어낸 환각이다. 저 영혼 또한 과거에 속한 것이다. 지금 저 손에 들린 영혼 조각을 빼앗아 부순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충동을 억눌렀다.
“제 것이 아닌 힘을 쥐고 있으려니 힘겨워서, 그건 이미 모두 돌려드렸습니다.”
황제가 날 찔러 죽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결국 이렇게 굴 것을, 나를 놓아줄 것을 알고서 그걸 땅에 떨어트렸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은 왜 돌아왔지.
빛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이 힘을 되찾는 과정에서 곁에 있던 영혼이 흐름에 휘말렸습니다. 당신께서는 강물에 몸이 젖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인간의 영혼은 오래 잠겨있다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지 않습니까. 쌍생신이 당신과 그의 영혼을 건졌고…….”
빛이 두 손을 모아 어린 밤의 영혼을 가렸다. 그가 다시 손을 펼쳤을 때는 손바닥 위에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었다.
곧 인간으로서의 짧은 생들, 그중 첫 번째를 시작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제 연인의 옆에서. 그 생이 끝날 때까지 그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었다. 이제 다 기억이 난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신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네프라타스와 키서세나스의 권능은 오로지 아주 오랜 시간 쌓인 어린 밤의 기억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 작은 조각만으로 신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여태 앉아있었다. 그들이 감히 강에 몸을 담근 덕에 내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으니 그들은 이제 완전히 무력했다.
힘은 운명에게, 기억은 쌍생신에게, 영혼은 연인에게. 갈기갈기 찢겨 나누어졌던 어린 밤이 하나로 되돌아왔다.
나는 언젠가 왕이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때는 그를 찢어놓아도 좋다고 속삭였던 것을 기억했다. 어린 밤이 스스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보고 나니, 그의 말 그대로 복수가 이루어진 셈이나 다름없었다.
신의 사랑이 그를 해쳤다.
오래전의 어린 밤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제가 억지로 그렇게 만든 일이 아닙니다.”
진짜도 아닌 강의 풍경이 지겨워져 떠나려던 즈음, 빛이 내 등에 대고 한 말이다. 날 때부터 심어진 세뇌도, 억지로 씌운 운명의 굴레도 아니라는 변명이었다.
“당신께서 그에게 스스로를 묶었듯, 그도 스스로의 의지로 어린 밤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의 마음을 오해하시니 안타깝고 슬프군요. 제가 한 일은 그가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한 것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 길의 갈래에서 제 세계의 희망을 보았으니까요.”
단지 화살 한 개로……. 그것 하나로 이렇게까지 만들었다.
태초신들 중에 가장 어리지만 가장 교활하다는 평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크게 화가 나지도 않았다. 제 첫 자식을 죽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냥 다 지겨웠다.
빛은 날 잡으려는 시도를 더 하지 않고 내 기억을 나가 돌아가 버렸다.
나는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계속 머물렀다. 과거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가짜 세계는 어떤 흐름도 없이 멈춘 채 고요했다. 신의 기억으로 지어진 세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였다. 하나 빼고는.
“제발, 사샤…….”
한숨이 나왔다.
옛이야기에서 나보다 먼저 퇴장한 왕, 그러니까 내 기억 속에 갇힌 황제의 영혼이었다.
가짜 인간, 가짜 신, 가짜 신관들… 거슬리는 것은 다 지웠다. 어차피 모두 환상이었고 석상처럼 멈춰있는 것을 그대로 놔두기보다는 혼자서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 휘말린 인간의 영혼 하나, 저것만은 이 가짜 세상 속의 유일한 진짜 존재였다. 그러니까 입을 다물게 할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문을 열어다오.”
벌써 몇 시간째였다. 이곳이 바깥에 실제로 세워져 있는 내 신전이었거나,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 역할에 갇힌 채였다면 그가 문을 부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만든 환상 속이고,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안다. 내가 문이 열리지 않길 바란다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제단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생각했다.
오래전에는 신과 인간 모두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둘 다 대가를 치렀고, 조금씩 변했으며, 이번 생에는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지 않았는가?
나는 고통스러워도 머무르기로 마음먹었고, 그는 어디에서든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이 정도면 끝마치기에 별 흠이 없는 완결이다.
신이 내버린 마음을 떠안고 어쩔 줄 모르던 쌍생신의 기억도 고스란히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버지는 무슨. 저들이 부를 아버지가 필요했던 것일까.
태어나자마자 오랜 시간 동안의 기억을 가지게 된 그들은 아주 커다란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인간과 사랑에 빠진 어린 밤의 기억에서 태어난 네프라타스. 연인을 잃고 흘리던 피눈물의 기억에서 태어난 키서세나스. 하나는 수호의 신, 하나는 전쟁의 신으로 불렸으니 그들이 주어진 기억에 아주 충실하게 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들 것이 아닌 기억이었다. 상처에서 진주가 자라는 것처럼, 영혼 없이 태어난 두 신 속에서도 영혼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일이 틀어졌다.
왕이 새롭게 태어난 것을 보았을 때, 네프라타스는 영원 동안 곱씹었던 기억에 사로잡혀 그를 사랑한다 착각했다. 그를 데려오고 싶었다. 신으로 만들어 하늘 위에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 증오 끝에 지친 키서세나스는 제 것도 아닌 기억에 매여 사는 제 쌍둥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왕을 죽여버리고, 그 영혼을 다시 망각의 강에서 잃으면… 그때는 쌍생과 자신 모두 편해질 수 있을까.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마음에서 자란 두 신이 공유하던 하나가 있다면, 왕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신을 저버린 그가 미웠다. 어린 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도 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땅에 내릴 사자의 육신을 어린 밤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허물어진 창조주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따라다니던 왕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아무 곳이나 떠돌고 있었다. 무엇을 슬퍼하는지도 모르고 슬퍼했다. 되는대로 흘러다녔다.
그러다 쌍생신이 시기 좋게 어린 밤의 영혼을 건졌고, 기억 잃은 나에게 소멸을 미끼로… 많은 일을 시켰지. 그들은 내 영혼을 소멸시킬 힘도 없었다. 약속을 지키려 시도는 했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잡아 뜯는다고 될 리가.
힘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강에 몸을 던져 두 개의 영혼을 건져낸 것이 그리워했던 저들의 창조주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안에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낡은 사랑 때문인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모두 잊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왕을 다시 찾아냈다면 나는 그들처럼 굴지 않았을까. 지독히도 꼬였다. 나는 한꺼번에 돌아온 기억을 정리하려던 것은 그만두고 밖으로 관심을 돌리려 애썼다.
이곳은 시간이 멈춘 봄이지만 밖은 한겨울이다. 눈 내리던 에오네테를 옛일처럼 까마득하게 기억했다.
황제도 칼에 찔렸고 피를 많이 흘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죽었으려나. 그럼 시끄럽게 구는 저건 어떡하지. 몸을 살려내지 못하면 빛에게 떠맡기면 안 되나. 새로 만들어주라지……. 신도 아니고 인간의 육체 하나 정도야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생각이 많아지자 머리가 아픈 것만 같았다. 신이 두통에 시달릴 리도 없고 진짜 몸도 아니니 정말로 아픈 것도 아니었다. 인간으로 너무 오래 시간을 보낸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잠을 자고 싶어 몸을 웅크렸는데, 문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열 수 없으니 무시하려고 해도 자꾸만 틈새가 삐거덕거리고 쾅쾅 소리가 울리는 게 금방이라도 문짝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
몸을 제대로 일으키기도 전에 허리가 끌어안겼다.
완전히 부서진 문에서부터 달려든 몸에 떠밀려 뒤로 누울 뻔했다. 단단히 감긴 팔은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질 않았다.
신의 꿈속에서 겨우 인간의 영혼 하나가 어떻게 이런 큰 힘을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꿈이니 내 마음대로여야 한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하는데…….
“…놓거라.”
“못 놓는다.”
“놔.”
“싫습니다…….”
팔은 오히려 점점 조여들었다. 그가 속죄와 애원의 말을 마구잡이로 쏟아놓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라면 널 절대 그렇게 두고 가지 않아. 난 이미 다 버렸다. 너 말고는 아무것도 상관없어.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잘못을 빌었다가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했다가…….
그래서 그가 지금 제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건지, 아니면 그와 자신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기억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도 그랬다. 내가 왕을 사랑하던 어린 밤인지, 황자의 연인이던 사일인지. 그것들 모두인지…….
내가 손끝으로 그의 머리칼을 만지기 시작하자 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가 얼굴을 묻었던 명치께가 축축하더니 역시나 눈가와 뺨이 눈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사일, 당신이… 당신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내 이름도 묻질 않길래 당신께는 모두 잠시의 유흥인가 했습니다.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은 나를 원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래서 도망쳐서, 네가 얻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며칠, 몇 년이라도 벌어보려고, 그들을 위해서……. 그런데 네가 그렇게, 그럴 줄은 정말로…….”
어쩐지 빛이 얌전히 떠났다 했다. 내가 어린 밤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을 때. 제가 버려둔 연인이, 사랑하던 인간을 잃은 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에게도 보여준 모양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흐느끼며 내게 물었다.
“많이 아팠느냐……?”
아팠다. 고작 육체를 버리는 일보다는 훨씬 아팠다. 하지만 오래전의 일이었고, 어쩐지 지금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프지 않아.”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그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생각했다. 그는 이미 인간 중에 가장 높은 자였다. 다음 생에도 이어질 부귀와 영화, 편안히 죽을 운명, 그와 같은 인간과의 역경 없는 사랑, 적당히 괴롭고 적당히 즐거울 생들……. 그런 것들을 약속하면 되는 것일까. 빛도 양심이 있다면 그의 영혼을 잘 돌볼 것이다.
“운명의 신이 오면 따라가거라.”
“…뭐라고?”
“가. 그가 네게 새 몸을 줄 거야. 모두 잊게 해달라면 내가 그렇게 해줄 수 있어.”
표정을 살펴보니 무엇도 그가 원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의 고민 끝에 물었다.
“…그럼 새로 태어나게 해줄까.”
지금 바로 내게서 벗어나 모두 잊고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것인가?
이번 생의 비극적인 운명이 고작 신의 몰이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알았고, 저를 죽도록 괴롭힌 두 신이 내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짐작했을 것이다. 모두 알았다면 그런 것을 원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빛에게 부탁해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내가 다시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그를 숨겨달라고 하면…….
오래전의 감정이 아직 남아 가슴께를 뻐근하게 하며 나를 괴롭혔다. 내색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것도 싫으냐.”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이었다. 자유도 원하지 않으면 무엇을 원해.
“싫다. 한 발짝도 떼지 않아.”
“…….”
이제 그는 왕의 기억에 휘둘리는 기색이 없었다. 표정도, 눈빛도 모두 그와 닮지 않았다. 원하지 않았던 역할에서의 감정을 모두 떨쳐낸 그는 이제 거의 예전의 자신을 연적으로 여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함께할 수 없다면 이곳에라도 영원히 숨겠다. 아직 내게 화가 난 것이냐? 왜 날 버리려고 해. 그 어리석은 왕보다는 내가 너를 더 사랑한다. 응?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나는 절대 널 두고 가지 않아.”
이미 죽은 왕을 원망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오래전의 어린 신이 아니었다.
그의 선택이 내게 한 짓 때문에, 내가 그때와 지금 사이의 시간 동안 떠돌며 살았던 일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라면 그런 마음은 필요 없었다. 인간에게 동정받아 달라질 것도 없고 나는 그런 취급을 받을 존재도 아니었다.
“떠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네가 없어도 머무를 테니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싸웠다. 그냥 못 이기는 척 머물러 주었으면, 그랬으면 그를 잃지 않았을 텐데. 첫사랑을 겪는 어린 신은 그런 것을 몰랐다.
네가 묶어둔 세계를 내게서 끊어내고 싶지 않았다. 낡아서 형체가 흐리고 색이 옅어진 원망과 사랑을 되새기면서, 후회하면서, 네가 나만큼 무엇을 사랑했는지 지켜보면서…… 그렇게 발목에 사슬을 달고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네가 아끼는 것들을 부수지 않으마.”
어차피 네가 없으면 땅 위나 달 뒤편이나 별다를 것이 없었다.
“왜 그런 말을…….”
그가 나를 하도 세게 안아서 아픈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무언가 이상했다. 떼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이깟 인간 정도는 치울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 좀 놔.”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내가 사랑한다고 한 것은 다 흘려들었느냐? 나는 그자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을 듣기는 했어?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고, 그래서 그 말대로 다 버렸다. 그 멍청한 자와 난 달라.”
정말 다를까? 날 배신한 연인과 죽음까지 날 따라온 그는 정말 다른 인간인가. 그렇다면 쌍생신은 다른 자를 향한 미움을 엉뚱한 인간에게 물은 것이 된다. 또 신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증거도 되겠다. 내가 다른 인간과 새로 사랑에 빠진 셈이 되니까.
“나는 세계도, 무엇도 필요 없다. 너만 있으면 된다고, 바라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하지 않았느냐. 왜 듣질 않아, 사샤…….”
그가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는데,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인간 주제에.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 조그만 마음이 천 년은… 아니, 백 년은 갈 것 같아?
“지금이야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으니 함부로 영원을 약속하겠지. 풀어줄 때 떠나. 영원이 무엇인지, 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리석게 굴지 말…….”
나는 그만 말을 멈추고 말았다.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잔잔한 파도가 치는 것 같은 소리. 무언가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
“상관없어.”
내 작은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환상으로 만들어진 이 도시가, 가장자리에서부터 잿더미로 변하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끌어안은 그가 내 힘을 멋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게 어떻게…….
“그래, 영원 끝에 그 빌어먹을 쌍생신들처럼 미쳐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번 신이 되면 돌이킬 수 없는데 후회해도 무슨 소용이냐? 내가 탐나지 않느냐? 네 말대로라면 스스로 구렁텅이에 뛰어들겠다는데 왜 붙잡지 않아…….”
그는 밖에서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이 환각 속에서는 신과도 같았다. 어린 밤이 그를 저 자신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이 옅어졌다니, 그가 쥐고 휘두를 만큼 선명했다.
“내가 함께해 주마. 예전의 무자비한 신처럼 굴어. 나를 멋대로 신으로 만들고는 내 사랑이 얼마나 이어질지, 끝내 널 원망하지는 않는지 시험해 보란 말이다.”
오히려 내가 무력해졌다. 힘을 빼앗겼다. 그를 멈출 수도, 그를 가두어놓는 이곳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만해. 지금 나가면 정말 죽어.”
안 돼. 운명이 돌아오기 전까지 그를 잡아놓아야 한다. 치명상을 입은 육체를 고쳐놓기 전에 다시 영혼을 잃어버리면…….
“다른 신이 주는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것들의 얼굴만 보아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도시가 무너지고, 신전의 외벽을 삼키고, 성소의 바닥이 꺼지고, 모든 것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가 멋대로 다루는 내 힘은 점차 가까워져서 그를 당겨 꽉 안아야 했다.
“사샤, 내 사일……. 내게 신은 너밖에 없다. 상이든 벌이든 네가 주거라. 내가 이대로 죽는 꼴을 보기 싫으면 무엇이든 해. 날 잃어버리지 말거라. 이번에야말로 날 취해.”
서로를 끌어안고 웅크린 자리마저 사라지기 직전, 내 품 안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나와 같이 있자. 밤하늘에 영원히 함께 갇힌 별과 달이 되자…….”
발밑이 무너졌다.
* * *
나는 눈을 떴다. 숲속이었다.
“…이리 와, 사샤. 나를 좀 안아다오.”
가까이 다가가 그가 나를 껴안게 두었다. 눈을 감으라길래 감았다. 나는 그에게 안겨있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눈을 감고 있기도 했고, 그가 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나 혼자서만 어쩐지 조금 이르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광경을 다시 보아야만 했다.
날개뼈 사이가 시큰했다. 단번에 숨이 끊어진 연인을 그가 품에 받아 안았다. 그는 내게 편안한 죽음을 주려던 대가로 저 자신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내 심장을 관통했던 높이가 그에게는 바로 정신을 놓지 못할 상처만을 입혔던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임은 분명했다. 발치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핏방울과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그는 내 몸을 꽉 껴안은 채 석상처럼 서있다가 어느 순간 비틀거리며 몇 발짝 뒷걸음쳤다.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등이 나무 기둥에 닿았고, 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굽히고 말았다.
황제는 한참 동안이나 피를 흘리며 숨이 붙어있었다. 나는 그와 내 몸에서 흘러나와 서로 섞인 피가 눈 위를 물들이는 것을, 내 손끝을 적시는 것을 눈 감은 채 보고 심장이 멈춘 채 느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고요했다. 뜨거운 피에 닿은 눈과 얼음이 순간 녹아내렸다가 다시 얼어붙는 소리. 내 등 뒤에 닿아있던 손끝이 옷 위를 스치며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 그런 소리들 말고는 숲조차 말을 잃어 적막했다.
그가 고통을 견디며 내쉬던 숨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커다란 나무에 기대앉아 있던 그가 결국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그의 입술 새에서 스며 나온 마지막 숨은 소리가 거의 없었지만, 작은 안개처럼 허공을 희게 물들이며 흔적을 남겼다. 그것이 곧바로 흩어져 사라진 뒤에… 어딘가에 붕 떠있던 의식과 감각들이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깃털이 등가죽을 찢고 서서히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내가 흘린 피가, 내 영혼의 일부가 그의 상처를 적시고 몸 안으로 흘러들도록 두었다.
어린 밤의 힘이 인간의 핏줄과 심장을 녹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내가 그에게 하려던 방식보다는 느리고 온건한 과정이었다.
몸을 겹친 채 영혼을 섞으며 서로에게 기대 잠든 것처럼 새벽을 기다렸다.
하늘에 빛이 번질 즈음, 어느새 완전히 펼쳐진 두 날개가 땅에 떨어진 손 대신 그를 감싸 안았다. 그 날개의 그림자 아래서 오래전 잊혔던 신 하나가 이름을 되찾았고, 새롭게 태어난 신 하나가 눈을 떴다.
나는 그가 첫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들었다. 다시 깨어난 그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사일.”
밤은 끝났다.
무거운 황금빛 햇살이 숲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조각난 빛들로 군데군데 메워진 어린 신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보이는 태양은 검지도, 가려지지도, 죽어가지도 않았다. 별과 달이 되자더니. 그가 무엇의 신이 되었는지 속으로 생각했다.
“사샤.”
내가 들은 척 만 척 다른 곳을 보고만 있자 그가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괘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입으로는 다른 사람이라 주장하는데, 목숨으로 협박해 나를 붙잡아 두는 것은 변하지를 않았다.
그는 말이 없고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아 한참 조용했다. 머리칼을 만져주던 그가 침묵 끝에 느닷없이 물었다.
“이제 우리도 쌍생이 아니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영혼을 나누어 받고는 한다는 소리가 겨우 이딴 소리라니. 눈을 치켜뜨자 그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입꼬리를 올리고 웃음을 흘렸다.
“네 신전이 지어지면 내가 다 부술 거야.”
“상관없다.”
“네게 기도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죽이고…….”
“상관없어.”
그는 그것도 좋다는 듯 미소 짓기만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것들은 내게 필요 없다. 원하는 건 다 가졌어…….”
그가 눈을 마주쳤다.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숨긴 것 하나 없으니 들여다볼 테면 그러라는 기세였다.
“…너도 알겠지.”
맥이 풀려서 협박은 그만두었다.
영원히 풀 수 없는 매듭처럼 서로 얽혀버린 영혼이 거미줄처럼 진동하며 존재를 알렸다. 서로에게 영원히 묶였다. 이제 떨어질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난 시간의 끝까지 네 것이다. 새벽처럼 짙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긋남이 지나쳤다. 너무 오래 헤매고,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다. 이제야 서로를 찾아 모든 것이 맞물렸다. 발치에서 찰랑대던 평온함과 만족감이 어느새 불어나 심장을 적시고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이제는 마르지 않을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아주 긴 한숨을 쉬었다. 함께할 밤도, 함께할 낮도 셀 수 없다.
어린 밤이 달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