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슬과 매듭
“사샤, 일어나거라… 사샤.”
나는 포근한 햇빛 냄새가 나는 부드러운 침구 위에 뺨을 대고 있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팔을 휘저어 잡히는 것을 당겨 안았다. 따듯하다. 얼결에 끌어안긴 그가 머리칼을 쓰다듬어 넘겨주고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 그만 일어나.”
잠도 덜 깨고 몸이 나른해 칭얼거렸지만, 그는 결국 침대에서 내려가는가 싶더니 나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나는 그의 품 안에 폭 안긴 채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잊었느냐? 신전에 가야 해.”
신전에 왜 가기로 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나를 안고 몇 걸음 걸었을까. 어느새 머리 위에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뜨겁지는 않았다. 가을인가 보다. 노란 일광에 닿은 살갗이 적당히 따스하게 데워진다. 별궁의 뒤뜰. 안장 없는 키슈가 거닐며 풀꽃을 뜯고 있다.
“이곳에서도 행복했지.”
나는 눈앞의 풍경에 정신이 팔린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했었다. 사실 시간이 멈췄으면 했었다. 나도 내내 너와 같았다. 꿈속에서야 알겠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푹신한 잔디 대신 이르게 떨어진 푸른 낙엽이 그의 두 발 밑에 차오르고 순식간에 우리의 주위로 커다란 나무들이 솟아오른다. 곧 그들의 단단한 팔이 머리 위를 뒤덮었다.
무성한 잎사귀 사이사이로 보이는 태양이 높았다. 초여름, 처음 만난 그날의 숲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파묻은 얼굴을 뗄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내게 왜 왔느냐?”
나는 그에게 뭐라고 웅얼거렸다. 내가 뭐라고 했지. 끝내고 싶어서? 신이 내게 영원한 죽음을 약속해서? 방금 무슨 말을 했더라.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안심했다. 너도 이해하는구나. 그렇지?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그에게 기댄 채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렸다. 너무 아파서…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그랬어.
그가 천천히 내 등을 토닥이더니 다시 걸음을 뗐다.
푸른 나무 소리, 촉촉한 흙 냄새, 뺨을 간질이던 향긋한 바람은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 공기에 달큰하고 비릿한 향이 가득 차있다. 향유와 피 냄새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신전이었다. 누구의 신전이지. 주위를 살펴보니 신상은 있는데 누가 얼굴 부분을 다 뭉개놓은 것처럼 분간이 가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니 제단이 있었다. 그는 나를 안은 채 계속 걸음을 옮겼다. 제단이 점점 가까워진다. 나는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만 짓고 말이 없다.
그는 내 몸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등허리와 발꿈치가 축축하다. 그제야 돌아보니 제단은 이미 피로 젖어있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제단 위에 반쯤 누운 채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손을 들더니 내 가슴을 짓눌렀다.
상체를 지탱하려 제단을 짚고 있던 손바닥이 고인 피에 미끄러지고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어깨와 뒤통수를 부딪혔다. 골 안이 징징 울린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머리칼이 세게 움켜잡혔다.
그의 다른 손에는 단검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어지러운 정신으로도 무슨 상황인지는 바로 깨달았다. 죽이고 싶겠지. 그는 곧 배를 갈라 죽일 짐승처럼 나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럴 만했다.
“말해 보거라.”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눈꼬리에서 흐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가 귓불을 뜨끈하게 적셨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언젠가의 그가 물었다.
“왜 날 죽였습니까?”
아니야. 네가 그럴 줄 몰랐어. 나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물 밖에 나와 말라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거짓이라도 말하고 싶은데, 아니면 미안하단 말이라도 전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신음조차 할 수 없다.
“네가 지긋지긋해.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단검은 허공에 있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칼이 아니라 말에 상처를 입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널 이곳에서 죽여 제물로 바치면… 그러면 신께서 내가 너 때문에 잃은 자들을 되돌려 주시지 않겠느냐? 네 영혼은 낡고 더러워도 이 몸뚱이엔 그 정도 가치는 있겠지. 신이 제 피와 살로 직접 빚은 것이 아니냐. 내가 바칠 수 있는 것 중 가장 값진 것인데, 내가 어리석어 몰랐다.”
그가 단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는 그가 그것을 아래로 내리꽂을 때에도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심장을 찌를 줄 알았던 단검의 날은 그곳을 조금 비켜 갔다. 오른쪽 쇄골 아래, 파편이 관통했던 자리에 차가운 금속이 깊이 박혔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쇠붙이로 내 흉터를 헤집었다.
“네 말도 거짓, 행동도 모두 거짓이었으니 결국 이 흔적도 가짜가 아니냐? 내가 다시 만들어주마.”
아파… 아파! 제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애원한 다음 순간 그는 아무 데도 없었다. 어느새 내 몸은 불에 타고 있었다. 거센 불길이 온몸을 살라먹는다. 피부는 열기에 짓무르다 녹아내리고 군데군데 흰 뼈가 드러났다가 곧 바스러졌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데 이제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디 있어, 어디로 갔어. 카샤…….
내가 또 그를 잃어버렸나?
* * *
“컥…….”
“경! 경, 정신 차리십시오.”
몸을 웅크리려 했지만 사지에 추가 매달린 듯 무거웠다. 나는 핏대 선 목으로 힘겹게 도리질을 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꺽꺽대며 뒷머리와 발꿈치로 이불을 밀었다.
오른 가슴팍에 아직도 그 파편이 박혀있고, 그것이 내 몸을 터트릴 듯 상처 속에서 부풀어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장기가, 혈관이 다 터져버릴 것 같아.
누군가 내 턱을 세게 잡아 억지로 입을 벌리고 혀를 눌렀다. 그 위에 천 뭉치가 틀어박혔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그 전까지 잇새로 짓씹고 있던 것이 입 안의 살덩이임을 깨달았다.
아파, 너무 아파……. 그만둬. 아파…….
“대체 왜……. 경께서 오늘 드신 것이 있습니까?”
“음식은 무, 물론이고 물도 입에 안 대시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적어도 입으로 들어가는 독은 아닙니다! 주무시던 도중에 뒤척이시는가 싶더니 갑자기 이렇게…….”
“…빌어먹을 의사는 대체 언제 온답니까!”
나는 팔다리에 매달려 있던 시종과 기사 여럿 중 하나를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한 손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곧바로 흉터 위 옷을 쥐어뜯었다. 그곳이 가장 견딜 수 없이 아팠다.
손끝을 세워 살을 다 파낼 듯 긁어내리자 그들이 곧바로 손목을 잡아 떼어내더니 침대 위에 짓눌렀다.
입이 틀어막힌 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데, 그들은 내가 고통에 흐느끼는 동안에도 당황한 듯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날 놓아줘.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래서 떠나려 했어. 끝내고 싶다고 했잖아. 놔줘. 몸부림치게라도 해줘. 너무 아파. 그는 어디에 있어. 그를 데려와…….
“…으.”
“경! 정신이 드십니까?”
그들이 내 입을 막았던 천을 끄집어냈다. 핏물에 젖어있었다. 내가 발작하는 바람에 밖에 서있던 기사들까지 놀라서 침실에 뛰어 들어와 내 몸을 잡아 누르고 있었다. 스스로 상처를 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정작 그는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곳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를 버렸던 것처럼, 그가 나를 버렸다…….
“놔… 아파…….”
“왜 그러시는지, 어디가 아프신 건지 말을 해주실 수, 윽……!”
“아파, 놔줘, 카샤……. 아파… 아파!”
숨 돌릴 틈도 없이 두 번째 파도가 닥쳤다. 잠시 공기를 담고 부풀었던 폐가 다시 꽉 조여든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살려줘, 아냐, 죽여줘. 나는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암전과 백야가 시야를 마구 스쳤다. 의식이 거꾸로 휙 뒤집혔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먼저 돌아온 감각은 청각이었다. 고막을 두드리는 것은 규칙적이고 작은 소리였다. 무언가 바닥에 부딪혀 형태가 깨지는 소리. 액체. 물보다 진득하고 기름보단 묽다. 발치에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피.
“…폐하께는 가실 수 없습니다.”
그다음은 통증. 발목이 욱신거린다. 사슬이 끊어졌다.
손끝 피부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마찰. 머리칼을 가닥가닥 건드리는 공기의 미약한 흐름. 하나하나 모두 느껴진다.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해서 생경하다. 곧 잃어버릴 것이지만, 이런 감각이 얼마 만이었던가?
아, 내 손아귀 안에 검이 있다. 바닥에 떨어지고 있던 피는 칼날에서부터 흐른 것이었다. 모래알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세세하던 감각들이 점차 잦아들더니, 통증도 감촉도 소리도 시야도 조금씩 둔하게 변했다.
그제야 나는 가만히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어느 복도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피가 흐르는 두 손으로 검을 단단히 움켜쥔 르리긴만이 홀로 버티고 있었고, 그조차도 팔이 불편한 듯 한쪽 어깨가 내려가 있었다. 지금 날 막아선 건가?
“비켜…….”
“제가 비키면 어디로 가실 겁니까.”
윗입술이 들려 송곳니가 드러났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는 내가 다가간 만큼 주춤 물러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건방지게 내게 겨눈 검은 내려놓지 않았다. 손을 잘라놓을까. 검 끝의 방향을 미세하게 움직였을 때였다.
“사샤.”
목소리 하나가 나를 멈춰 세웠다. 잠시 동안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서있었다. 하마터면 꿈인 줄 착각할 뻔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복도의 저편, 내가 선 곳을 가득 채운 달빛도 닿지 않아 한밤의 어둠에 잠긴 곳. 꿈에 그리던 그의 형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던 속삭임이 밤을 틈타 다시 밀려 나왔다. 죽이자. 목을 베든, 심장을 찌르든 단번에 죽이면 된다. 그럼 다 해결된다. 모두가 편해진다.
천천히 돌아섰다. 우리는 이제 완전히 서로를 마주하는 방향이었다.
“접근하지 마십시오! 잠드신 도중에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시더니 이성을 잃으셨습니다. 폐하! 오시면 안 됩니다!”
르리긴은 저보다 그에게 가까운 곳에 있는 나를 자극했다가 제 주인을 다치게 할까 두려웠는지 함부로 접근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경고했지만, 황제는 근위대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느린 걸음을 계속했다.
그가 어두운 곳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베일이 걷히듯,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어둠이 뒤로 물러났다. 푸른 눈이 창백한 달빛을 받아 새벽의 하늘과 같은 색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발치, 피 묻은 족쇄와 끊어진 사슬에 꽂혀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순간 눈을 떼면 내가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기라도 할 것이라 믿는 사람 같았다. 숲속에서 신기루를 마주한 사람처럼. 꿈결을 걷는 사람처럼. 기어코 내게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가만히 멈춘 채 생각했다. 지금 죽이자. 그의 손이 내게 닿으면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몸이 움직였다.
그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그는 순순히 내 쪽으로 기울어 끌려왔다. 나는 아무 저항도 없는 자의 목에 손쉽게 검을 들이밀었다. 르리긴이 비명을 질렀다.
“경!”
턱 아래, 깊이 찌르지 않아도 단번에 숨을 끊을 수 있다. 수도 없이 스스로 해본 일이다. 금방 끝날 거야. 많이 아프지 않을 거야. 괜찮아…….
“…그래.”
나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순간 놀라 멍청하게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속마음을 말로 내뱉었던 것이다.
“경! 폐하십니다! 제 말이 안 들리십니까? 폐하시란 말입니다!”
숫제 애원하는 기색인 제 기사와는 달리, 그는 아직도 꿈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 짧은 말 한마디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느리게 깜박이는 눈 속에는 공포도 불안도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체념, 옅은 슬픔, 그리고 흐린 미소와 흰 달빛 조금. 그게 다였다.
왜 애원하지 않아. 왜 살려달라고 빌지 않아. 혼자 죽으라고 저주하지 않아.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칼날이 진동하며 그의 살갗에 얕은 상처를 남겼다. 언뜻 푸르게도 보이는 살결에 핏방울이 검은 보석처럼 맺혔다가, 곧 형태를 잃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목을 감싼 옷깃을 적신다.
그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막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속절없이 체온에 닿았다. 너무 뜨겁다. 한여름 태양에 데는 것 같아 나는 흠칫 떨었고, 그는 어느새 내 뺨을 감쌌다. 눈물을 문질러 닦아낸다. 나는 왜 울지.
“울지 말거라. 아프지 않아.”
이 일에 계약이 걸렸다. 분명히 그와 나 모두를 위한 일인데. 이래야 그의 영혼이 깨어지지 않을 것을 아는데. 여기서 끝내야 내가 안식할 수 있는데. 머리로는 다 아는데. 그런데, 나는…….
“…못 하겠어. 아버지, 난 못 해.”
시선은 그의 얼굴에 둔 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가슴에 돌이 든 것처럼 호흡이 무거웠다. 결국 그 말을 하고 말았다.
“계약을 파기해…….”
검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내가 놓아버렸다. 은빛으로 빛나는 금속이 영원 같던 순간 동안 허공에 머물렀다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다. 분명히 시끄러운 소리가 났을 텐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눈을 가리는 것,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 함께할 한 번의 생을 위해 영원을 버리게 하는 것, 그러고도 후회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런 것이었구나. 네가 내게 이런 것을 주었구나.
뜻하지 않은 때에 깨닫고 만 사랑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숨쉬기가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위로 젖혔다. 가늘게 떨리는 날숨 한번을 허공에 뱉어내자마자 눈앞이 순식간에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대로 무너졌다.
* * *
입가에 차갑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 나는 잠결에 뒤척이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졸리고 피곤한데 자꾸 건드리자 짜증이 난 탓이었다.
잠시 가만히 두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얼굴에 무언가 와 닿았다. 이번에는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고개를 돌리려 해도 뺨이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캉한 덩어리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미지근한 액체가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까끌까끌했다. 모래알 섞인 바닷물, 아니면 설탕이 덜 녹은 차 같기도 했다.
입을 틀어막은 부드러운 것은 좀처럼 떨어져 나갈 기미가 없었다. 나는 결국 입 안에 든 것을 목구멍 안으로 삼켜야만 했다.
식도를 자극하며 내려간 액체는 위장 안에서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용암처럼 진득한 것이 혈관 안으로 스며들어 피와 함께 온 몸속을 흘렀다. 그러다가 금이 간 곳, 깨진 곳, 엉망진창인 여기저기에 다닥다닥 붙어 상처를 틀어막았다.
독주를 들이켠 것 같다. 목 안, 배 속, 손끝까지 뜨겁고 화끈하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옅은 정신마저 몽롱했다. 나는 반쯤 잠든 상태로도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 * *
같은 꿈이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꿈에서는 자꾸 그가 나를 아프게 했다. 꿈속의 그는 나를 온갖 말과 행동으로 상처 입히기도 하고, 오물 취급 하기도 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굴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말없이 울기도 하고, 울며 빌기도 하고, 발치에 매달리기도 하고 그랬다. 꿈인 걸 아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 꿈이라서 그럴 수 있었는지도.
“…….”
“사샤?”
“흐…….”
“약을 더 가져와. 어서!”
하지만 그런 꿈들 중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남겨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둘러봐도 암흑뿐이고, 불러도 돌아오는 답이 없고, 잡으려 해도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는 꿈을 잘 꾸지 않았었는데. 몸도 마음도 폭우 아래 촛불처럼 약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어쩔 수가 없었다. 다 내 머릿속의 일인 것을 알면서도 몸부림치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아팠다.
아파. 슬퍼. 마음이 너무 아파. 외로워, 무서워, 어디 있어,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잖아, 왜 날 버렸어, 사실 나도 알아, 하지만 무서워…….
“…만.”
“뭐라고 했느냐?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응? 사샤, 조금만 참…….”
“그, 만…….”
영화를 두 개 틀어놓은 것처럼 잠시 겹쳐 들리던 잡음과 목소리는 곧 완전히 멈췄다. 균형이 깨지자 나는 다시 속절없이 무성의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야가 마구 일그러지기도 하고, 주변의 풍경이 휙휙 바뀌며 나를 이리저리 흔들어놓았다. 어지럽다.
또 다른 꿈에서는 그가 사람들을 시켜 나를 망치로 부수고 있었다. 나는 돌로 된 조각상이었다. 내 몸은 금이 가고 가루가 떨어지다가 결국 군데군데 부서지고 파편이 떨어져 나갔다.
“그만, 그만해……. 아파, 카샤, 하지 마, 아파…….”
“…….”
하지만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그에게는 아무 소리도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나쁜 꿈이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완전히 형태를 잃고 조각조각 부서져 바닥을 나뒹굴게 된 후에야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아, 꿈이지.
꿈이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무의식의 환영이 물러난다. 감은 눈꺼풀 안쪽에는 흑백 악몽 대신 현실의 금빛 햇살이 쏘아졌다.
다 끝났다. 꿈에서 벗어났다. 손발의 감각이 돌아오고 공기가 폐를 부풀린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부시던 햇살은 떨리던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자 눈앞을 완전히 메웠다. 낮? 아침? 오후? 잘 모르겠다.
초점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한쪽 눈꼬리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관자놀이 위, 맥박이 뛰는 곳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흐리던 형체가 선명해진다. 그였다.
어쩐지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어느 순간 불에 덴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손에 들려있던 것이 추락했다. 다리 위를 덮은 이불이 천천히 축축하게 젖는다. 약이 든 그릇이었나 보다. 그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난 그저.”
눈이 마주쳤다.
“널 편하게 해주려고…….”
원래도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던 목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는 결국 문장을 끝마치지도 못하고 말을 멈추더니, 죄지은 사람처럼 황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활짝 열린 테라스 문에서부터 쏟아지는 햇빛이 검은 머리카락의 일부를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가만히 누운 채 젊은 황제의 옆얼굴을 관찰했다. 꿈속에서처럼 한 가닥 증오라도 묻어있는지. 원망이 남아있는지.
하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런 것들은 찾을 수 없었다. 잠기운이 덜 가신 정신으로도 그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랬다.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었다.
여전히 걱정되고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그래서 모든 것이 두려워 어쩔 줄을 모르는, 나를 탓할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의 얼굴이다. 저항할 수 없었겠지. 나도 그렇다. 나를 땅에 끌어내린 인간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혹 내가 잘못 본 것이고 그가 나를 못 견디고 죽여버린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얼굴을 보지 못하고 며칠인지 몇 주인지가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이 지옥 같았다. 품에 안기고 싶었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배 속이 저릿하게 죄였다.
얌전히 누워있으려고 했는데.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끅끅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멈췄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통증 때문은 아니었다.
힘이 없어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반사적으로 내가 일어나 앉는 것을 도우려 했는지 손을 뻗었다가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왜 손 닿는 것도 싫은 것처럼 굴어. 안 그랬었잖아.
나는 그대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디에, 흐으… 어디에 있었어…….”
무엇이 달라졌지? 그의 마음이 그대로라면, 내가 변한 모양이다. 그의 체온이 닿자마자, 애틋이 여기는 영혼이 든 몸을 다시 품에 안자마자, 모든 자기 파괴적 충동이 빛을 피하는 악한 것처럼 깊은 곳으로 기어 들어가 사라졌다.
나는 직감했다. 다시는 내 의지로 그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바라는 영원과 내가 원하는 영원이 너무나도 달랐다. 그곳에서부터 잘못되었다. 너는 어리석게도 나를 위해 영원히 죽으려 했다. 그렇다면 나는 널 위해 영원히 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서로의 영원을 맞바꾸자.
엉엉 울고는 있어도 속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이상할 정도였다. 정말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쉬울 수가 있을까.
그의 체온이 정신을 흐려놓는 질 낮은 약물처럼 달콤했다. 얇은 실 하나만 끊으면 그와 영원히 함께하겠다 말로 뱉어버릴 것만 같았다.
연인들이 왜 허구한 날 신에게 한날한시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지 알겠다. 그들도 사랑에 빠져 멍청해졌던 것이다. 사랑이 만들어낸 비이성적인 안일함이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바라왔던 소원이 물거품이 될 상황에 처했는데도, 그런 것은 애초부터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위기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이대로 있고 싶다. 소멸이고 뭐고, 이번 생의 기억만으로 영원을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믿자. 그래야 해.
나는 지금 행복하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네프라타스, 키서세나스, 운명의 신, 밤의 뼛조각……. 그런 것들이 다 유리에 맺힌 입김으로 쓴 글자처럼 점차 뇌리에서 흐려져 갔다. 지금 눈앞의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아. 다 필요 없어. 난 괜찮아.
한꺼번에 몰려오는 묵은 감정들이 너무 지독해서 고통스러운데 그것까지 사랑스럽다. 모르고 술잔을 들이켠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그의 허리만 꽉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다행이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는 표정을 가다듬으려 잠시 애쓴 뒤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좀 얼떨떨해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나 못지않게 표정이 이상했다.
언뜻 보이는 붉은색에 이끌려 저절로 시선을 조금 내리자 그의 목에 생채기가 있었다. 내가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를 갈았다.
“미안해. 아팠지. 놀랐어? 다시는 안 그럴게. 그 빌어먹을 돌연변이 자식들은 이제 너한테 아무 짓도 못 해. 다 상관없어. 계약을 깼어. 이거 봐. 신언도 사라졌잖아. 응? 카샤…….”
스스로 옷깃을 잡아 내렸다. 문양은 사라져 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계약은 확실히 끊어졌다. 소멸은 영원히 물 건너갔다.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겠는데, 주체가 잘 안 됐다. 누가 내 머리에 장난질을 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그는 벌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맨살만 멍하니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래……. 이제 내가, 내가 싫어……?”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애초에 그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정신이 나간 줄 알았대도 할 말이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일단 눈물부터 닦으려고 손을 들었는데, 그가 먼저 내 얼굴에 손을 댔다. 큰 손이 내 뺨을 완전히 감싸고 천천히 눈물을 닦아낸다. 하지만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뜨겁고 건조하던 손끝이 축축하게 젖었다. 멈추려고 해도 내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그는 결국 내게 입 맞춰주었다. 접촉은 다정하고 애틋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숨을 나누어 받으며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것을 누르고 또 눌렀다.
(네프라타스의 저주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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