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물
숨을 크게 들이켜며 눈을 떴다.
몸은 묶이기라도 한 듯 무겁고 주변이 어두웠다. 내 영혼은 아주 잠시 동안 구름 위를 걸었는데 지상에서는 이미 낮이 다 지나고 해가 지는 중이었다.
빛이 가득 차 성스럽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아무도 없는 성소 안이 음산하고 어둑했다. 낮에는 흰 빛이 들던 쪽의 반대편 창으로부터 붉은 석양이 쏟아져 신상의 발치와 제단을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피가 고인 것 같다. 아니……. 피인가?
정신이 멍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다시 버림받은 것인가? 분명히 그들이 내 영혼을 이곳에 던졌다. 어째서. 약속했는데. 순순히 이곳까지 따라왔는데. 나를, 왜…….
비척비척 일어나 앉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신상의 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란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멍한 정신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신관들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 사이로도 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구별된다. 그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일 힘도 없어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끔찍하게 고요했다.
그다음, 쾅 소리가 크게 울리며 문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잠겨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안으로 뛰쳐 들어올 것만 같았다. 안 돼. 숨이 점차 가빠진다. 제단을 딛고 일어섰다.
“아버지…….”
신상을 붙잡았다. 자꾸 몸에 힘이 빠져 허리에 매달리는 꼴이 되었다. 미끄러지고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고개를 들고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신은 입을 굳게 닫고 대답이 없었다.
“…이럴 수는 없어. 약속했던 것과 다르잖아.”
뒤를 돌아보자 문은 이제 거의 너덜거리고 있었다. 다 부서진 빗장이 간신히 걸쳐진 채 밖에서 여럿이 걷어차고 들이박는 대로 아슬하게 흔들린다. 다급해졌다.
“아버지!”
문을 부수는 소리, 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성소 안에서 뒤섞이며 키서세나스의 신전이 완전히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궁지에 몰린 미물처럼 뒷덜미가 선뜩해지고 신경 줄이 당겨 어쩔 줄을 몰랐다. 화가 나서 눈앞이 시뻘게지도록 정신이 흐려진다.
피를 토하듯 고함쳤다.
“날 소멸시켜 주기로 했잖아!”
고요한 곳에는 내가 비명처럼 내지른 목소리만 메아리로 되돌아와 울렸다.
어느 때부터 내 목소리 말고는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침묵이 신전의 성소를 뒤덮었지만 이성을 잃은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악을 쓰고 소리 질렀다. 누구에게 향하는지도 모를 비수 같은 말들을 뱉어냈다.
“계약을 지켜. 이 지긋지긋한 영원을 모두 끝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너희가 내 영혼을 어둠에서 건져 올렸을 때부터 약속된 일이 아니었느냐? …비겁한 위선자들. 너희는 머리 두 개 달린 뱀이다. 이 독사 같은 것들아! 흙바닥을 기는 짐승처럼 혀가 갈라졌으니 숨 쉬듯 거짓을 뱉겠지! 그러고도 스스로를 신이라 부른단 말이냐! 날 죽였던 화살도 네 손으로 직접 쏜 것임을 모를 줄 알아? 당장 내려와. 할 수 있잖아. 그때처럼 날 죽여! 죽이라고! 영혼을 갈가리 찢어서 그 강에 던지란 말이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잘못했어……. 나 좀 데려가. 다시는 안 그럴게. 아버지… 제발…….”
돌로 된 어깨를 주먹으로 마구 때리며 발악했다가, 곧 태도를 바꿔 뺨을 대고 애원했다. 손톱이 다 깨지도록 차가운 신상을 붙잡고 매달렸다. 짓무른 손끝과 팔의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 신의 흰 뺨이며 단단한 옷자락에 묻었다.
숨이 모자라 눈앞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저주인지 간구인지 모를 것을 퍼부었다. 힘을 다 소진하자 결국 목소리가 속삭이는 듯이 작아지고, 무거운 몸은 인력에 굴복했다. 제단 위에 무릎을 꿇었다. 피에 젖은 손이 신상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너무 아파. 지쳤어. 그만하고 싶어. 날 돌려보내 줘…….
누가 들을 수는 있을까 싶은 미약한 목소리로 뱉은 기도를 마지막으로 성대를 쥐어짤 힘까지 잃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색색 숨만 쉬었다.
챙그랑―
아주 먼 곳에서 난 것만 같은 소음이 귓가를 울렸다.
익숙한 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였더라. 아, 바닥에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 누군가 검을 손에서 떨어트린 것이다. 별궁에서, 그 침실에서, 파편들을 베어야 했을 때처럼.
이런 소리는 고막에 닿기도 전에 직접 신경을 찢어놓는 것만 같다. 내가 죽인 자들이 내던 소리.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신전 바닥에 떨어진 무기는 아직도 추락의 충격으로 칼날이 얕게 진동하고 있었다. 멍한 정신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올려 그것의 주인을 보았다.
카샤.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나는 그를 벤 적이 없는데.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나는 퍼뜩 몸을 떨었다. 내 꼴을 깨닫고 만 것이다. 다시 피에 젖은 모습을, 상처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만은 이런 나를 보아선 안 된다. 마음이 여리니까. 제가 다친 듯 아파하니까. 칠 년 전 충분히 보았다. 눈을 두기가 흉측할 것이다. 나는 왼팔을 등 뒤로 숨겼다.
힘겹게 걸음을 떼던 그는 제단에 가까워질수록 거의 뛰는 듯이 거리를 좁혔다. 나는 앉은 채 뒤로 물러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등 뒤는 신상이 가로막고 있었다.
팔을 품에 끌어당겨 단검이 찢어놓은 상처를 가리고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시야가 가려지기 전, 그가 입술을 달싹인 것도 같다.
온몸을 웅크리는 나를 그가 붙잡았다. 손길은 억센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목이 막혀 죽어가는 사람처럼 작았다. 아니, 날 부른 건 맞을까.
그는 어떻게 해서든 내가 고개를 들게 하려는 것인지 나를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었다. 나는 손길을 피해 몸을 뒤틀며 간절히 기도했다. 보지 마. 보이고 싶지 않아. 제발…….
신전 안에는 사람 둘이 몸싸움을 하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울렸다. 의미 없는 실랑이 끝에 결국 그가 내 팔을 잡아채 웅크린 품 안에서 뜯어냈다. 밀어내려던 손까지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내 몸을 살폈다. 흐른 피가 옷을 다 적신 탓에 상처가 어느 곳에 있는지 바로 알기 힘들었던 것이다.
옷깃을 뜯듯이 콱 잡아당겨 내리더니 오른쪽 가슴과 등을 확인했다. 흉터를 포함해 이전과 같은 것을 본 그가 떨리는 숨을 쉬었다. 다음으로 팔이 움켜잡혔다.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소매가 걷혔다.
팔뚝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옷에 스민 피가 살에 도로 묻었을 뿐, 제사용 단검이 피부를 가르고 깊은 곳의 혈관을 끊어놓았던 흔적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다. 자상이 사라졌다.
내가 잠시 멍하니 팔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그는 나를 발가벗길 기세로 옷깃을 들추고 나머지 맨살을 쓸었다. 그는 아무 곳에도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멈췄다.
둘 모두 숨을 고르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곧 그가 나를 제단에서 끌어 내렸다.
위팔이 억세게 잡혀 신전 밖으로 끌려 나가는 도중에도 고개를 떨구고 비틀댔다. 바닥이 파도치듯 울렁거렸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 나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발이 질질 끌리다가 복도 한가운데서 그대로 무너져 무릎을 꿇고 말았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만 잡아끌며 걷던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숙인 머리 위에 쏟아지는 시선이 푸르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런 것을 알아챌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기만 하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힘겹게 얕은 숨을 쉬는 소리만 신전 안에 울리고 있었다. 그는 결국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주저앉아 있던 나를 안아 들었다.
등과 무릎 뒤가 받쳐져 허공에 떴다. 팔다리를 늘어트리고 얌전히 안겨있었다. 고개를 가눌 힘도 없던 탓이다. 중력이 당기는 대로 목을 젖히고 그를 올려다보는 도중 약한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죽었을 때. 그때도 나를 이렇게 들어 옮겼지. 그땐 좀 더 품에 당겨 안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몸을 감은 팔이 느슨했다. 아무래도 화가 났나 보다.
왜 화가 났지. 내가 무슨 짓을 했더라. 안에서 무슨 말을 했지. 멍한 정신으로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사고를 붙잡으려 눈을 깜박이는데, 어느새 실외였다. 다 떨어진 저녁 태양이 신전의 흰 기둥들을 반쯤 비추고 있었다.
죽은 듯 품 안에 늘어져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내가 움직이는 것을 본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분명, 분명히 숨이 끊겼었는데…….
“…그분을 놓아주십시오!”
내가 힘없이 안겨 나온 것을 본 키서세나스의 신관, 전쟁신의 칼날 하나가 간 크게도 인간 중 가장 높은 자에게 대들었다. 어리석었다. 정작 내게 직접 칼을 댔던 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떨고만 있는데.
문을 막아서던 신관들은 모두 신전에서 쫓겨나 앞뜰 구석에 내몰려 있었다. 황제를 따라온 근위대가 그들을 포위한 것이다. 정작 황제는 걸러지지 않은 실외의 석양이 그의 옆얼굴을 뒤덮었을 때부터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그가 어느 순간 영혼이 깃든 인형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푸른 시선이 발언한 신관에게 꽂혔다. 표정 없던 얼굴에 천천히 비소가 떠올랐다.
황제가 저를, 아니면 제 신을 비웃는 것을 목격한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다시 데려다 죽여보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 주인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쌍생신인 것을 알아도 저렇게 맹목적일까?
“신의 거처에서 제물을 강탈하다니. 아무리 당신이라도, 황제라도 이럴 순 없는 법입니다.”
“내가…….”
가만히 그를 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어느새 웃던 기색은 완전히 사라졌고 혼자 읊조리는 듯한 말투가 차갑고 선득했다.
“…내가, 내 것을 가져가겠다는데, 신의 거처가 다 무슨 상관이냐. 네 신이, 네가 그렇게 지극히 모시는 주인이 도둑 까마귀처럼 내 집 한복판에서 도적질을 했다.”
“무슨……!”
그는 책을 읽는 것처럼 낮고 평이한 말투로 신성 모독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냈다. 저항하던 신관은 그 기세에 질려 잠시 말을 잃었다.
“원래부터 내 것이었다. 내게서 훔쳐 간 것을 되찾으러 온 것인데 주인을 닮아 너희들도 헛소리만 하는구나. 신은 인간에게서 무엇이든 빼앗아도 되고, 인간은 신에게 감히 그럴 수 없는 법이다? 왜 나는… 어째서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냐.”
신의 종은 황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신을 모욕한 것을 깨달은 후에야 완전히 화가 나 고함을 질렀다.
“날 때부터 신께 속한 소유물입니다. 빼앗아 가실 수 없습니다!”
“네가 무엇을 어쩔 것인데……. 응?”
그는 보란 듯 오히려 나를 더 힘주어 안았다. 나는 몸이 뒤틀린 채 죄이는 바람에 작게 신음했고, 이제 그 신관은 검이라도 뽑을 기세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일종의 전리품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전쟁 뒤, 남겨둔 가장 귀한 것 하나.
황제는 고개를 기울이더니 느닷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의 안부를 묻기라도 하듯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 것을 찾아 헤매던 이틀 동안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네 신이 내게 저지른 짓이 꽤 많더구나. 그동안 잠시 누가 내게 이런 일을 했는지를 잊고 있었지. 마침 생각이 났으니 그 김에 돌려주어도 괜찮겠느냐? 네 주인이 내 어머니와 형제들, 사랑하던 연인까지 모두 죽였다.”
사랑하던. 황제는 그 말을 품에 안은 나를 내려다보며 했다. 신관이 아니라 내게 하는 말 같았다.
바락바락 대꾸하던 신관도 이번에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황제가 정말 무슨 짓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저지를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표정은 천연한데, 핏발 선 짙푸른 눈 속에서는 진득한 분노가 이글이글 끓어오르고 있어 사람 가죽을 쓴 다른 무엇 같았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왜. 목숨은 아까우냐. 걱정 말거라. 나는 이 신전의 주인과 다르다. 너희를 칼로 베어 죽인다고 내게 무슨 소용이 있지…….”
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그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애처롭게 눈을 내리깐 채 무도한 일을 명령했다.
“하지만 화풀이라도 해야겠으니… 기름을 가져와라.”
신관들은 모두 허옇게 질려 말을 잃었는데, 황제는 상관하는 기색도 없이 나를 보며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키서세나스, 그 고귀한 이름을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고 치가 떨리는데. 내가 왜 여태껏 네 신의 신전을 모조리 불태우지 않고, 너희를 끌어다 모두 쳐 죽이지 않고 견뎠겠느냐. 내 것이 신의 손아귀 안에 있으니 참았다. 괜한 짓으로 분노를 샀다가 내 사랑하는 영혼을 영원히 되돌려받지 못할까 두려웠지……. 그것이 아니라면 이유가 없었다.”
그의 눈 안에서 불티가 튀어 번지고 있었다. 깨달았다. 내가, 그를…….
“오늘에야 조금이나마 원한을 풀겠구나. 불이라도 지르지 않고서는 내가 화병이 나 죽을 것 같다. 신께서도 자신이 한 일들을 스스로 알고 있을 테니 화내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지?”
내가 그를 망가트렸다.
아파할 것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신의 계획과 나는 아무 상관 없는 척, 내 책임은 없는 척 위선으로 스스로의 눈을 가렸다. 그에게 일어난 일들은 운명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날 사랑해 버린 건 그니까. 그건 내 잘못도, 신의 속임수도 아니니까…….
모두 한순간이라며 그가 겪는 고통을 못 본 척했다. 그를 버렸다. 그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땅에 묶여 내가 초래한 모든 것을 보아야만 했다. 그는 내게 분노하고 있었다.
곧 기사들이 횃불을 만들 때나 쓰는 기름통 여러 개를 찾아 가져왔다. 그들이 신전 안을 짓밟으며 들어가 성소에서부터 끈적한 기름을 온통 뿌리고 나왔다. 유취가 진동했다.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기사 하나가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시뻘겋게 일렁이는 불을 들고 서있었다. 신관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황제는 망설이지도 않았다.
“불을 붙여라.”
“감히, 감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그가 발악하는 신관에게 조용히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신께선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제 내게 아무 짓도 못한다.”
일렁이며 흐르던 기름 위에 횃불이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몸집을 불린 화마가 순식간에 신전을 집어삼켰다.
희기만 하던 신의 집이 불에 그슬리며 검게 변하고 있었다. 강렬한 열기에 바위를 깎아 만든 기둥에서도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신관들이 제 살이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불을 끄려 하면 베어라. 모두 잿더미가 될 때까지 꺼지지 못하게 해. 매는 보이는 족족 쏘아 죽이고, 신상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모두 부숴라. 내 땅 위에서 전쟁신을 지워버리겠다. 그 더러운 이름이 내 귀에 들리지 않게…….”
어둑한 하늘에 닿을 듯 타오르는 불길이 신전 뒤로 지는 태양보다 더 붉었다. 검고 짙은 연기가 구름 기둥처럼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불은 막을 수도 없이 점점 거세어졌다. 멀리 있는 것만으로도 등에 더운 화기가 와 닿고 뺨이 화끈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명치 속에 무거운 돌이 얹힌 듯 숨을 쉴 수 없고 토기가 치밀었다. 폐가 찌그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내게 할 수 없는 조롱을 신관들에게 퍼붓고 있었다.
“견딜 수 없다면 저곳에 뛰어들어라도 보거라. 누가 아느냐. 신께서 나보다 제 개들을 더 사랑한다면, 가엾게 여겨 비라도 내려주실지.”
그에게 들켰다.
그가 모두 들었다.
내가 키서세나스를 아버지라 부르며 매달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이 아니라 나를 태워 죽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되살린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그가 저 화염 속에 내 몸을 던져두고 떠나도 할 말이 없었다.
속인 것도, 도망친 것도 나인데… 정작 그가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고, 팔로는 나를 안아주어도 속으로는 증오의 말을 쏟아붓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고 슬펐다.
나는 눈앞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느릿하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달래는 듯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박동을 건너뛰었다.
목과 가슴 사이, 깊은 곳이 시큰했다.
그는 불타는 신전을 뒤로하고 나를 안은 채 몸을 돌렸다. 황궁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울음과 졸음을 참아가며 어지러운 정신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버텼다.
그는 나를 말에 태우고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새가 단숨에 날아온 거리를 몇 배의 시간을 들여 되돌아가는 동안, 황제는 제 품에 안긴 것을 단 한 번도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는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나를 억지로 붙잡아 침대 위에 올려두고 족쇄를 다시 채우더니 말없이 뒤를 돌아 나가버렸다. 따라가려 했지만 몇 걸음 못 가고 발목이 당겨 바닥에 넘어졌다.
사슬이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잠깐 멈칫했을 뿐 돌아보지 않았다.
가버렸다. 더 이상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몸 어딘가가 욱신거렸다. 칼날을 삼키는 듯했다. 속을 긁으며 명치까지 미끄러져 내려간 그것은 다시 뒷목을 타고 오르더니 엉뚱한 곳으로 치밀어 올랐다. 눈물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지내왔음에도 항상 뒤에 무엇을 두고 떠나기만 했지, 누가 나를 떠날까 두려워해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버림받는 일에는 면역이 없던 모양이다. 이제서야 남겨진 자들이, 남겨진 그가 어땠는지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피가 차게 식는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떠날 때에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죽으면 모두 끝날 거라고,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그렇게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누가 침실에 들어오더니 바닥에 떨어진 채 우는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르리긴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황제의 충직한 기사는 나를 침대 위에 다시 앉히고, 한참을 선 채 인상만 찌푸리고 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주어는 생략된 채였다.
“경께 손을 대신 겁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르리긴은 거듭해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내가 원인이었다. 다 내 탓이다. 그의 삶을 이렇게 만든 것도, 그러고도 전과 같은 애정을 바라는 것도.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것도.
“폐하께서 저더러 경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사슬도 폐하밖에 못 푸시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옷에 묻은 피는 대체, 그 새가 그런…….”
문이 다시 열리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이번에도 카샤는 아니었다. 사람 몇이 들어오더니 하나는 의사인 듯 내 몸을 살피고, 나머지는 연장을 들고 와 테라스 문에 빗장을 대고 못을 박아 고정했다.
그들이 문손잡이를 안쪽에서부터 굵은 쇠사슬로 동여매고 자물쇠까지 채우는 것을 본 르리긴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르리긴은 의문에 뒤덮인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지만, 나는 설명하고 있을 힘이 없었다. 피를 많이 흘리고 완전히 지쳐서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의사가 내 몸에서 손을 떼기도 전에 웅크리고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도 그는 곁에 없었다. 침실 구석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은 르리긴만 있을 뿐이었다. 잘한 것도 없는데 서러워져서 눈물이 고였다. 한번 터졌다고 이제 눈물샘이 제멋대로 군다.
일어나자마자 울 기세인 나를 보고 르리긴이 다급히 일어나더니 침실 밖으로 나가 문밖에 선 시종에게 말을 전하고 돌아왔다. 탈진이라도 할까 걱정했는지 물이 채워진 유리잔을 손에 든 채였다.
“일어나셨다고 폐하께 전하라 했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마실 필요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목이 타고 속이 답답해서 주는 대로 받아 물을 마셨다. 갈증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나는 텅 빈 잔을 움켜쥐고 생각했다.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내가 죽을 때까지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일주일째였다. 문이 열릴 때마다 매번 몸을 일으켰지만, 그가 아니었다. 시종과 기사들이 교대하는 것뿐이었다.
르리긴은 제가 오가는 기척이 날 때마다 자다가도 일어나 문가를 확인하는 내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들은 말이 없는지, 아니면 그냥 인간인 탓에 습관이 된 건지 자꾸 나를 환자 취급 하며 필요도 없는 물과 음식을 끼니마다 내오게 했고, 나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에나 혼자 깨달은 것 같았다. 오랫동안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도 살이 전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몸은 겉으로 보기에는 처음 만들어진 그대로였다. 손톱도, 머리칼도 잘리기 전엔 자라지 않고 상처가 나면 없었던 것처럼 아문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죽음을 선사했던 치명상의 흔적뿐이었다.
섭취도 배설도 필요하지 않은 육체라니. 오갈 수도 없이 가둬두기에 딱 좋지 않은가.
멍하니 누워있으니 자꾸 힘이 빠진다. 안 오려나. 이 침실이 내 무덤이 될지도 모르겠다.
까무룩 잠들었다 작은 소리에도 깨어나고,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시간의 개념이 사라졌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르리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일으켜 앉히는 근위대장의 표정은 다른 때와 달리 유독 화가 난 것 같기도,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정말 알아야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몰라서 묻는 것인가? 그가 날 버린 것이지.
“폐하께서 전쟁신의 신전을 불태우셨다고 했을 때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폐하께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시는지 아십니까? 네프라타스의 신전들도 불에 타고 있습니다. 수도의 신전만이 아닙니다. 제국에 존재하는 두 신의 모든 신전을 다 없애실 기세입니다.”
두 신이 머리 두 개 달린 뱀임을, 서로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쌍생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그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주지 않았는가.
“제가 명령을 받고 수도와 가까운 키서세나스의 신전들을 무너트리는 동안, 폐하께선 제 등 뒤로 키서세나스의 짓인 것처럼 네프라타스의 신전을 불태우셨습니다. 지금은 사람들도 두 신들 간의 싸움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진실이 새어 나가는 건 한순간입니다. 언젠가는 누가 한 짓인지 알려질지도 모릅니다. 전쟁신을 모욕하는 것은 칠 년 전 일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 황실에도 명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네프라타스께는…….”
그는 진정하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분은 방패와 푸른 초목, 누군가를 수호하는 모든 기사들의 신입니다. 제가 맹세를 올린 신이시기도 합니다. 저는 알아야 합니다. 경,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르리긴은 간절해 보였다. 섬기는 주인이 제가 모시는 신을 모욕했다. 이 땅의 신전을 다 불태우겠다니. 어지간한 증오로는 저지를 만한 짓이 아니긴 하다.
이미 그에게 다 들켰는데 르리긴에게 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툭 뱉었다.
“같은 신이야.”
르리긴은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설명해 주었다.
“오래전의 카샤, 전생의 그가 신을 버렸어. 배신당한 신의 영혼이 두 개로 갈라졌고, 그 둘이 나를…….”
말을 멈췄다. 그에게 내려보냈지. 하나는 고통스럽게 하는 척 구원하려고, 하나는 구하는 척 아프게 하려고…….
나도 이제 잘 모르겠다. 그를 사랑한다고, 지키겠다고 말하던 신의 행동은 결국 내 죽음으로 그를 크게 상처입혔고, 그를 죽여버리겠다던 신의 염원은 지금 보면 인간의 연약한 영혼에게 안식이 될 만한 것이었다.
두 신의 마음은 분열의 여파 때문인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진심이었을 수도, 속임수일 수도, 둘 다일 수도 있겠지. 나는 방관하는 척 동조했다. 그게 다였다.
르리긴은 완전히 넋이 나가 대답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두고 그냥 다시 누워버렸다. 자고 싶었다. 너무 피곤하다.
꿈결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 옅은 정신으로 생각했다. 정말 신전을 불태우고 있었구나. 그 정도 화풀이는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분노가 그 자신이 아닌 외부로 향하고 있으니 낫다.
신의 뼛조각, 그런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을 만큼 이미 내게 정이 떨어졌는지도 모르지. 내가 죽을 때까지 다시 얼굴을 보지 않고 그래서 그의 마음이 완전히 식는다면, 그가 나 때문에 그 자신을 해칠 일이 없다면 좋은 일이다.
어느 날, 문이 열렸다.
나는 그동안 누가 등 뒤로 왔다 갔다 하든 잠만 자던 것과 달리 곧바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지만 역시 그가 아니었다. 걷는 소리가 닮아 착각하고 말았다.
어린 황녀는 내 눈에서 희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광경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 지켜보았다.
그는 내가 다시 시선을 거둔 다음에야 침대가로 다가왔다. 보폭이 일정하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걸이. 착각할 만했다.
내가 침대에서 몇 발짝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르리긴이 황녀에게 의자를 끌어다 주었다. 침대 가까운 곳에 앉은 황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침실 안은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새가 신전으로 갔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불 틈으로 드러난 사슬과 창문에 단단히 못 박힌 빗장에 한 번씩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내 눈을 바라본다.
“자리에 있었던 다른 기사들이나 그 일을 목격한 자들은 경이 또 한 번 숙부님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위험을 미리 느끼고 일부러 거리를 벌렸다고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이유가 아닌 것 같더군요. 숙부님도 아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지는 말투는 항상 그랬듯이 차분하고 높낮이가 없었다.
“숙부님으로부터 도망을 치시려 하신 겁니까?”
그랬지. 그랬었다.
나는 대답을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황녀는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는지 얼마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경의 아버지가 네프라타스인지, 키서세나스인지……. 그런 것은 제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전쟁의 신께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어머니와 숙부님이지 제가 아니니까요. 아버지를 죽였다고는 하나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니 원망하는 감정이 크지 못합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경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황녀의 말투는 정말로 그렇게 들렸다. 제 아비의 일을 말하는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있지 않았다. 아니… 어떤 감정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칠 년 전 숙부님을 황제로 만든 전쟁에서 경이 수백, 수천과 홀로 싸워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런 종류의 소문 대부분이 그렇듯이 과장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원래 전쟁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수록 불어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황궁을 벗어난 방식은 확실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제 눈으로 보고 나니 경이 정말 신과 관련되었다는 것이 믿깁니다. 그러니 말해주세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황녀는 잠시 내 표정을 관찰하는 듯하다가 결국 질문을 꺼냈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아십니까?”
나는 침대 위에 앉은 채 힘없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황녀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느닷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의 기억이 선명하고, 어쩐지 제가 태어난 목적도 스스로 알 것만 같습니다. 가만히 있는다면 숙부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겁니다. 내년 생일이면 일곱 살이 되는데,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저 같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모르고 본 사람들은 제 나이가 열다섯이나 여섯, 아니 그보다 더 되는 줄 알더군요. 너무 빠르게 자라 달에 한 번씩 옷을 새로 맞춰야 합니다. 또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고, 읽은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외울 수 있습니다.”
다른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면 제 자랑을 한다 여겼겠지만, 황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람을 설명하듯이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아. 가슴께가 싸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다른 아이들처럼 여럿이 밖을 뛰놀다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고……. 그러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종종 저와 나이가 비슷한 귀족 아이들을 궁으로 불러오기도 하십니다만,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작은 것에도 크게 기뻐하고, 조그만 상처에도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겠더군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들이 평범한 어린아이라고 하셨습니다.”
르리긴은 벽에 붙어 서서 황녀와 나 사이의 일방적인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듣다가, 내가 이를 바득바득 갈기 시작하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기쁜 감정도, 슬픈 감정도 제게는 잘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스승들은 제가 자라면 완벽한 황제가 될 거라고 합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국을 잘 다스린다면 그것은 가르침과 이성에 의한 것이지 백성들을 아껴서는 아닐 겁니다. 아낀다는 감정을 제가 느껴본 것이 맞다면… 아직까지 그런 마음은 내 어머니 한 분께밖에는 향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운명의 신이 틈을 메우려 억지를 쓴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다. 황녀는 아직도 무표정했다.
“희로애락은 제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경을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이 신의 개입인지, 그것만 말해주십시오.”
나는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곧바로 침대를 밟고 황녀에게 덤벼들었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우리는 바닥을 굴렀다.
아직 어린 티가 덜 가신 목덜미에 두 손을 대고 조였다. 하지만 몇 초 힘을 주기도 전에 르리긴이 내 몸을 황녀에게서 떼어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머리가 바닥에 세게 부딪혀 어지러웠다.
그는 내가 잠시 쓰러진 채 일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황녀를 뒤로 끌어내고 있었다. 다시 손을 뻗어보려 시도했지만 사슬이 허용하는 범위 밖이었다. 족쇄도 잊고 세게 걸음을 디딘 바람에 발목이 당겨 앞으로 엎어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잇새로 위협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못 박힌 듯 시선은 황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걸 죽이면, 그가…….
황녀는 르리긴이 끌어낸 채로 주저앉아 목을 잡고 콜록대며 기침했다. 큰 소리를 들었는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황녀 전하, 르리긴 경. 괜찮으십니까? 들어가겠습니다.”
르리긴은 황망해 보였다. 그가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나와 황녀를 다급하게 번갈아 보는 사이, 목소리를 가다듬은 황녀가 밖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니 들어오지 말거라!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전하, 괜찮으십니까……?”
르리긴은 황녀와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사람을 부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나를 그냥 둘 수도 없다. 황녀는 르리긴에게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답을 잘 알겠군요. 제가 죽으면 어머님께서 슬퍼하실 테니 당신에게 죽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결될 일인지도 불확실하지 않습니까. 숙부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근위대장도 폐하께 이 일을 말씀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르리긴은 영문도 알 수 없어 어쩔 줄을 모르겠는지 대답하지 못했다. 황녀는 답지 않게 잠시 망설이더니, 곧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전했다.
“…대신 한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근위대장, 르리긴 경이 어머님을 모시고 테베나에 다녀왔습니다. 제 아버지이신 삼 황자의 일곱 번째 기일을 맞아 황족의 무덤을 제국으로 이장하려는 목적이었죠. 돌아올 때 테베나에서 받아온 공물 목록 중에 테베나 왕실에서 애지중지하던 단검이 한 자루 있더군요…….”
아직까지도 황녀를 죽일 듯 노려보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멍해졌다. 그사이 황녀는 바닥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높은 신이 가졌던 것이라니. 근거 없는 전설일 뿐인데도 궁금증이 생겨 찾아보려 했지만 창고 아무 곳에도 없었습니다. 제가 물어도 대답을 쉽사리 못 하는 것을 보니 누가 가져갔는지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몸을 돌리기 직전, 그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덧붙였다. 여태 들은 것 중 가장 속마음이 내보이는 투였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닙니다. 운명이 저항해 볼 수 있는 상대라면… 저도 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군요.”
황녀는 곧 침실을 나가버렸다. 넓은 방 안에는 르리긴과 사슬에 매인 나만 남겨졌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던 르리긴이 물었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다른 자들이 보았다면 아무리 폐하라도 그냥 넘어가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왜 그런, 왜 황녀 전하를…….”
죽이려고 그랬다. 마지막 남은 황족을, 신이 애써 끼워 넣은 조각을 없애버리면 그의 목숨이 연장될까 했다. 그래서 죽여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황녀의 말이 맞다. 황녀를 죽인다고 해결될 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남은 황족 둘 모두가 허무하게 죽는 길일지도 모르지.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다.
나는 비틀대며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르리긴은 나를 경계하며 사슬이 허락하는 반경의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였다.
“테베나에 다녀왔어?”
“…그건 왜 물으십니까.”
“대답해.”
사슬을 끊을 듯 발을 끌며 으르릉대자 곧 대답이 나왔다.
“…다녀오긴 했습니다.”
“황녀가 말한 대로 검을, 단검을 받아 왔어? 지금 어디에 있어. 카샤가 가지고 있는…….”
말을 하던 도중 스스로 깨달았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르리긴은 내가 끝마치지 못한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했다.
“해골 조각과 보석 장식이 있는 그 단검을 말하시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굳은 채 자리에 서있었다.
“황녀 전하의 어머니, 경도 아시는 테베나의 왕녀를 모시고 그분의 고향에 갔었고, 우리가 돌아올 때 왕실 쪽에서 내준 물품에 섞여있었습니다. 수도에 도착해서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늦은 밤이었습니다. 거의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폐하께서도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시다길래 돌아왔다 인사를 드리려고 갔었습니다. 그 단검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손잡이와 검신의 균형이 맞지 않아 보여서 기억합니다. 단검이라기엔 길고, 기사가 쓰기엔 짧았습니다. 이 정도…….”
그가 양손을 벌려 칼날의 길이를 회상했다. 한 사람은 꿰뚫고도 충분히 남고, 세 사람을 한 번에 찌르기엔 부족한 길이. 장검보다 짧을 뿐이지 단검이라 부르기 무색할 길이였다.
“화려하긴 해도 장식이 좀 불길한 데다 날의 길이가 어중간해서 공물치곤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황궁에 들어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 물건을 어느새 누가 가져다 바쳤는지 폐하께서 무릎에 올려두고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술을 많이 드신 것 같은 데다가 아무래도 표정이며 분위기가 이상해서… 나쁜 생각을 하시는 줄 알고 빼앗으려다가 몸싸움을 했습니다. 단검은 결국 폐하께서 가지고 가셨고요.”
그리고 내가 되살아났다.
몸에서 피가 빨려 나가는 것 같았다. 손끝까지 차갑다. 신경이 다 얼어붙어서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있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가서… 확인해야 해. 그에게 가야 해. 그걸 뺏어야 해. 없애버려. 응? 르리긴, 나 좀, 이것 좀 풀어줘……. 카샤가… 풀어줘!”
몸부림쳤지만 쓸데없는 몸뚱이에는 이제 힘이 없었다. 겨우 나은 발목만 다시 까지고 있는 꼴을 보다 못한 르리긴이 나를 잡아다 침대에 눌러 앉혔다.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가만히 계십시오. 또 다치시면 폐하께서 속상해하십니다. 경, 일단 진정하고 좀…….”
르리긴은 나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 아침에도 뵙고 왔습니다. 폐하께선 잘 계십니다. 사슬은 제가 못 푸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대체 그 단검이 어떻길래 그러십니까?”
나는 질문에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오라는 요구만 계속해서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침실에 혼자 계실 순 없습니다. 제가 다녀오는 동안 다른 기사들이 지키고 있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르리긴은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곧 그가 침실 밖으로 나갔고, 다른 기사 둘이 들어왔다.
근위대는 군기가 바짝 들어서 나를 경계했다. 내가 일어서기만 해도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같은 실수를 범하고 싶지는 않겠지.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안전한 것만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생각에 생각이 이어진다. 안전? 그의 손에 내가 예상하는 것이 있다면, 이 생 어느 곳에서 그가 안전할 수 있단 말인가?
테베나 왕실의 오랜 보물, 영혼까지 베는 악신의 단검……. 그것이 그 뼛조각인 것이 분명했다.
칠 년 전 가을의 오두막에서 아이들이 떠들던 전설, 신이 말한 밤의 뼛조각, 협박, 되살아난 나. 모든 것을 모으면 결론은 하나다. 그 단검은 운명의 신이 제 뼈를 깎아 만든 성물이다.
신의 일부로 만든 검이 어쩌다 인간의 땅에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악신의 것이라는 이야기는 헛소문일 테다. 밤? 누구인지 모를 그 신은 이름조차 아는 자가 없지 않는가.
하지만 영혼을 벨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인간들은 칼날에 육신은 물론 영혼이 베인다니 마냥 두려워 악한 존재의 소유였다 가져다 붙인 모양이지만, 그 검은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검이었다.
인간은 죽고, 망각하고, 다시 태어나기를 거듭한다. 그 횟수가 무한에 가깝게 많아지면 인간의 영혼도 흠집이 가기 마련이다.
유독 고통스러운 생들을 살아 너덜너덜해진 영혼이 하늘에 올라 제 품에 안겼을 때, 운명의 신은 영혼을 가늠한다. 앞으로의 생이 이 영혼에게 축복일지 고통일지.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면 그는 영혼을 망각의 강에 씻어 다시 땅에 내려보내거나, 아니면 검으로 벤다.
완전히 찢어진 영혼은 의식을 담을 수 없다. 그렇게 크게 훼손된 뒤 망각의 강에 던져진 영혼은 다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강에 잠겨 녹는다. 강의 일부가 된다. 길었던 고통을 끝내주는 것이다.
빌어먹을 운명. 교활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그가 네프라타스와 키서세나스를 속인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황제가 이렇게 나올 것을 알았다면 내 계약의 내용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신들에게 내 죽음 이후의 일을 숨긴 덕분에 다 꼬였다. 제 소중한 뼛조각을 지상에 떨군 것도 이상하고, 아니지. 애초에 네가 네 일을 떠맡겨서 날 이 꼴로…….
그런데, 내가 이런 것들을 왜 알고 있지?
잠시 떠올랐던 미약한 의심과 의문들은 곧 쏟아지는 감정에 휘말려 다시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카샤.
그가 그 단검을 가지고 제 영혼을 찢겠다 협박해 나를 돌려받았다는 것은 아버지의 입에서 밤의 뼛조각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부터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녀의 상태와 지나치게 빠른 성장세를 더하면 말이 달라진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황제는 그것으로 정말 죽음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를 스치는 죽음들을 버티고 버티다가 어느 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아주 전에 지나고 말았던 것이다…….
왜 여태껏 몰랐을까?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신들이 인간의 어설픈 연기나 눈속임에 넘어갈 리가 없는데. 태어난 인간의 운명은 아무리 신이라도 건드릴 수 없으니 황녀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그가 어미의 배 속에 있을 때… 내가 죽었을 때.
이번 생을 마지막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황제는 내가 죽은 지 칠 년 만에 결국 자신의 영혼을 찢어버릴 무기를 찾아냈고, 그 새벽에, 그가 제 목숨을 스스로 끊기 직전 겁에 질린 쌍생신이 나를 그에게 다시 던져주었다.
네프라타스와 키서세나스는 그가 죽어 다시 태어나는 것은 많이 보았어도 영혼까지 소멸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황제가 죽으면 그의 자리가 빈다. 남은 황족이라고는 배 속의 태아밖에 없으니, 제국이 정해진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결과를 맞이할까 다급해진 운명의 신이 황녀의 영혼과 육신에 손을 댔다.
아니, 손을 댄 것이 아니라 모든 운명이 처음부터 이러했던 것일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황녀의 꼴을 보니 망각의 강에서 다 녹아가던 아무 영혼을 다시 주워다 태아에게 묶어둔 것이 분명한데…….
“폐하께는 아무 일 없습니다. 집무실에 잘 계시는 것을 제 눈으로 뵙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
나는 생각에 완전히 잠식당해 멍하니 앉아있었다.
하지만 대체 왜? 황녀가 왜 아직 살아있지? 영혼이 바꿔치기당한 것이라면 목적을 잃었을 때 육신과의 결합이 풀려 죽었을 텐데.
무섭게 자라는 황녀는 몇 달 지나지 않아도 완전한 성인으로 보일 것이다. 황제가 자식 없이 일찍 죽는단 말인가? 타살? 아니면 정말 자살? 내 육신이 무너져 가는 속도와 얼추 기간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정말 우연일까? 지금은 단검이 쓸모없어진 것이 아니었나? 날 보려 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미워서 죽여버리고 싶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난 널 버렸는데. 왜?
…너는 왜 날 따라 죽으려 하지?
왜 아직도 날 사랑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두 아는데, 그의 애정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단지 감정이 습관으로 변한 것일까. 강렬하고 깊었던 사랑의 관성이 그를 죽이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도 칠 년이 지났다. 시체를 끌어안고 잠들며 꿈에서마저 애도했으면 충분한데. 왜 이 지경이 되어서도, 다 알고서도 내 손을 놓지 못해서.
어리석기 그지없다. 영원한 죽음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고작 한 생에서의 연인을 위해 그런 짓을 감행하려 들 수 있는 것도 무지다. 겨우 인간이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죽고 새로 태어날 거면서. 다 잊을 거면서. 네 사랑이 깊어봤자 얼마나 깊다고. 망각의 강보다 깊겠느냐?
단검을 남겨둔 채 먼저 숨이 끊긴다면 나는 다시 영원을 떠돌고 그는 영원히 사라진다. 최악이다.
“아…….”
문득 깨달았다. 다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왜 그에게 휘둘리는 척하는지. 왜 나를 이 몸 그대로 다시 내려보냈는지.
먼저 죽이면 된다.
단검을 쓰기 전에 그를 내 손으로 죽여버리면 된다. 신들이 그의 영혼을 주워 저들 곁에 영원히 묶어두든, 아니면 곧바로 환생시켜 기억을 잃게 하든. 그를 죽이면 신들이 염려하는 모든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궁지에 몰린 두 신이 마지막 패를 꺼낸 것이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무사할 것이고, 이번 생에서의 고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마침내 계약을 완수할 수 있다. 우리 둘 모두를 구원하는 길이다.
언뜻 환각을 본 것 같았다. 심장이 꿰여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다. 영혼을 인질로 연인을 돌려받은 황제. 원하지 않게 땅에 묶인 나. 태어나기도 전에 운명이 제멋대로 기워진 어린 황녀.
자의든 타의든, 모두 신에게 바쳐진 제물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