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장막
나는 얼굴을 때리는 폭우를 그대로 맞으며 선 채 낯선 군대를 올려다보았다. 흐린 시야로 선두에서 푸른 깃발을 올리는 것이 보였다. 혼란 중에 적군으로 오인당했던 자들은 키서세나스의 파편이 아니었다. 황족을 지키는 수도의 근위대였다.
말을 탄 자 하나가 기사단의 대열을 뚫고 천천히 우리 앞으로 나섰다. 엉망진창이 되어 호위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우리를 그가 가만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카일런.”
그때까지도 내 얼굴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던 사 황자가 제 이름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자꾸 빗물이 들어가는 눈을 손으로 세게 문질렀다. 사 황자와 닮은 남자였다. 이목구비가 서로 비슷하지만 인상이 그보다 유약하고 예민해 보였다.
제국의 황태자였다. 사 황자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형님?”
황태자가 말에서 내리는 동안 사 황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황태자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가 황자에게 다가왔다. 황태자는 손에 무기라곤 쥐어본 적 없는 순 지식인 같은 인상과는 달리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나는 발을 떼 황자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호위하듯 황태자의 양옆에 있던 기사 중 하나가 고함을 쳤다.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춰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붙박은 듯 자리를 지키던 내 어깨를 사 황자가 뒤에서 끌어안아 물러나게 했다.
“형님……. 형님이 여길 어떻게…….”
관찰하듯 우리를 보던 황태자, 아니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입을 뗐다.
“싸우느라 수고했다. 지쳐 보이는구나.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르리긴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곧 다급하게 다가왔다. 그는 힘이 빠진 내 손에서 검을 빼앗아 검집에 넣어주곤 황자의 반대편에서 나를 부축해 걷게 했다.
고원 깊숙한 곳에 자리한 막사들은 땅이 비에 젖은 것만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매우 눈에 띄는 덕에 파편들이 황자를 찾으러 멀리 막사가 있는 곳까지 가 실내를 뒤지거나 어지럽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황제, 베르셀 이사르는 당장 비를 피하기 위해 사 황자의 막사에 따라 들어왔다. 황제가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황자들을 데려와라. 비를 맞고 있을 테니.”
사 황자는 황제와 나 사이에 멍하니 서있다가, 결국 내게 다가왔다. 그가 사람 둘을 불러 침대가에 넓은 천을 들고 나를 가리게 했다. 내가 황제와 그의 기사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지자 황자가 천 뒤로 들어와 내 옷을 벗겼다.
물에 젖고 창칼에 베여 여기저기 찢어진 옷은 피부에 무겁게 달라붙어 벗기는 데 힘이 들었지만 황자는 말없이, 상처가 최대한 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를 발가벗겼다.
마른 수건 여러 장을 든 손이 가림천 안으로 들어왔다. 황자는 수건을 받아 들고 내 몸을 닦았다. 흰 수건은 금세 축축해졌다.
빗물에 젖고 피에 얼룩진 수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사 황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는 내 온몸에 난 상처를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새기려는 듯 한참 동안 내 맨몸 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추워…….”
내가 떨리는 숨과 함께 중얼거리자 황자가 정신을 차렸다. 그가 약과 붕대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온몸에 붕대가 감긴 다음에야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옷매무새가 여며지고 침대에 앉은 후에야 가림막이 걷혔다. 황제는 제 동생이 수건을 들고 직접 내 머리칼의 물기를 닦아내는 것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끼는구나.”
황제가 곧 덧붙였다.
“신의 사자도 피를 흘리는 줄 몰랐다.”
사 황자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사일에 대해 아시고 계시는군요.”
“그러니 내 앞에서 자리에 앉게 두었지.”
사 황자와 닮은 황제는 가만히 서서 나를 살폈다. 관찰하는 시선이 집요하게 꽂혔다.
“소문이 과장되었겠지 싶었는데……. 오늘 보니 사실인 모양이다. 저자가 지킨다는 너는 정말 손끝 하나 베인 곳이 없고, 적들의 시체는 산처럼 쌓여있던 것을 보면. 검에서 신성한 불꽃이 타오른다지…….”
“누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황자는 대뜸 물었다. 황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황녀는 제 궁 쪽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살아남은 자가 없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황자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누님께 다 들었습니다.”
“뭐라고?”
황제가 알아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 결국 사 황자는 고함을 치고 말았다. 막사 안의 기묘한 평화가 깨졌다.
“누님이 돌아가시기 전 제게 서신으로 사실을 모두 전하셨단 말입니다! 어머님, 선황 폐하의 죽음을 왜 숨기셨습니까? 누님은 왜 황궁에 가두어두신 겁니까! 형님께서 왜!”
황자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 제 형제인 황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황제에게 접근하자 근위대의 기사들이 검에 손을 올렸다.
침대에 앉아있던 나는 맨발로 벌떡 일어나 황자의 바로 뒤에 서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기사들은 나에 대해 들은 것이 있는지 조금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무기도 없는 맨손의 나를 두려워하는 제 기사들에게 황제가 힐난의 시선을 보냈다.
우리를 다시 돌아본 황제는 사 황자의 의문엔 대답하지 않고 정신이 다른 곳에 가있는 사람처럼 딴소리만 늘어놓았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신의 사자라……. 네프라타스께서는 왜 너에게만 방패를 내리셨을까.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항상 궁금했다. 나는 가만두어도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신 것일까? 우리가 너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더구나. 신은 네게서 무엇을 보셨길래…….”
영문을 몰라 찡그린 얼굴을 한 제 동생을 본 황제가 느닷없이 피식 웃었다. 인상 덕에 온화해 보이는 미소 뒤에서 어떤 격렬한 감정의 편린 같은 것이 미약하게 비쳤다가 곧 사라졌다.
겨울비를 맞아 창백한 낯을 한 황제는 아무도 알기 원하지 않는 세상의 진리를 홀로 깨닫고 만 학자 같은 염세적 분위기를 풍겼다. 허리에 찬 검보다 깃펜이 더 어울릴 자였다.
나는 가만히 그를 관찰했다. 좀 전 밖에서 사 황자가 나에게 애원하며 운명이니, 황제니 하던 말들을 그가 들은 것은 아닌지 가늠하는 것이었다.
“그래. 높으신 신들의 눈엔 뭔가 다른 것이 보이셨겠지. 그렇지 않느냐. 그게 아니고서야…….”
그때 천막의 입구가 밖에서부터 걷혔다. 기사 두 명에게 하나씩 안겨있던 어린아이 둘이 막사 안에 놓였다.
황제가 곧바로 아이들에게 돌아선 탓에 나와 황제의 호위 기사들이 서로를 위협하며 팽팽하던 막사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왔느냐. 비를 맞느라 추웠지. 어서 몸을 닦거라. 감기에 걸리겠다. 황자들에게 마른 옷을 가져다주거라!”
황제의 어린 자식들이었다.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만한 남자아이 하나, 그보다 더 작은 남자아이 하나.
아들들을 본 황제는 태도가 돌변해 다정한 아버지가 되었다. 황제가 몸을 떠는 첫째 황자를 제 옷으로 감쌌다. 둘째 황자는 천진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 멍하니 서 있던 사 황자를 발견하고는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막내 삼촌!”
키가 제 허리에도 닿지 않으면서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조그만 아이를 본 사 황자는 분노와 의문이 갈 곳을 잃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황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정하게 일렀다.
“숙부님이라고 불러야지.”
“숙부님! 보고 싶었습니다. 제 생일 연회 이후로 한 번도 뵙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왜 황궁에 자주 놀러 오시지 않으세요?”
사 황자는 아직 너무 어린 탓에 어눌한 말투로 칭얼거리는 아이의 정수리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황제에게 물었다.
“황태자비께서는…….”
“황후께서는… 부인께서는 먼저 신들께 가셨다.”
어릴 때부터 수도의 정치판에 몸을 담갔던 황제는 타인의 말투나 단어의 사용, 호칭을 은근히 지적해 정정하는 것이 습관이 된 듯했다.
사별로 부인을 잃기에는 아직 젊어 보이는 그는 자리에 함께한 어린아이들을 의식한 듯 추상적인 표현으로만 죽음을 설명했다.
황제의 눈가에 잠시 비통함이 스쳤다.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던 밀도 높은 감정은 곧 인위적인 미소에 가려졌다.
황제는 제 핏줄을 다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아들들은 아직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렸다. 그 증거로, 아이들은 오랜 행군과 추위로 인해 피로한 기색만 있을 뿐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심지어 어린 둘째 황자는 창백한 얼굴과 푸르스름한 입술을 하고서도 오랜만에 삼촌을 만난 것이 마냥 즐거운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비에 젖어 곱슬기가 올라온 아이의 머리칼을 매만지던 사 황자가 어린 조카를 품에 안은 채 나를 돌아보았다. 무엇인가를 깨닫고 만 듯 아연한 표정이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가 속으로 깨달은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 황자가 다시 고개를 돌려 조카를 내려다보았다. 제 손끝에서 부질없이 녹아내릴 섬세한 눈 결정을 보는 눈길이었다. 제 운명을 알 리 없는 작은 아이가 숙부를 올려다보며 종알댔다.
“어머니께서는 아파서 휴양을 가셨습니다. 아버지, 그렇지요? 배탈이 나셔서 쉬셔야 한대요! 어머니랑 형님이랑 점심 간식을 나누어 먹고 모두 배가 무지 아팠는데, 형님과 저는 자고 일어나니 금방 나았습니다. 아버지가 요리사를 혼내주신다고 했어요. 과자는 어머니보다 저희가 더 많이 먹었는데…….”
“황자.”
황제가 대뜸 끼어들어 어린 아들의 말을 잘랐다. 얼핏 이를 악무는가 싶던 황제는 곧 표정을 풀고 꾸짖는 기색 없이 상냥하게 말했다.
“어머니께는 아파서, 가 아니라 편찮으셔서, 라고 해야 한단다. 아버지가 전에도 말해주지 않았느냐?”
“맞다……. 어머니께서 편찮아, 편찮으셔서요!”
어린 황자는 아버지에게 두 번이나 단어 지적을 받고서도 천진한 얼굴빛이 가시지 않았다. 황제가 자식들에게는 워낙 다정한 말투를 쓰는 탓이었다.
둘째 황자는 막내 숙부의 품에 폭 파묻힌 채 제 아버지에게 제가 잘했냐는 듯 으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제가 눈을 휘어 마주 미소 지었다.
“옳지.”
어린 황자들은 마른 수건을 여러 장 소모시킨 끝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뽀송해졌지만,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빛은 그대로였다.
황제는 사 황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막사의 침대에 아들들을 눕혔다. 한 이불에 감싸인 형제는 피곤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졸기 시작했다. 어린 동생이 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자기 싫은데. 숙부님, 아침에 일어나면 목말 태워주세요. 저번에 해주셨던 것처럼 높이요…….”
사 황자는 어린아이가 잠결에 중얼거리는 것에도 눈을 맞추며 끄덕여 주었다.
황제는 침대가에 걸터앉아 어린 황자들을 다정한 손길로 토닥이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들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황자가 조카들을 깨우지 않으려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다른 막사를 쓰겠습니다. 전사한 자들이 많아 빈 곳이 있을 겁니다.”
“됐다. 아이들이 깨면 널 찾는다. 아침부터 숙부님을 찾아다 주는 것도 일이니 그냥 여기서 자거라.”
황제는 동생이 사양할 틈도 없이 사람을 불러 침대를 하나 더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황자는 조금 난처한 기색이었지만, 조카들을 언급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더 이상 거부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판자며 이불이며 여러 가지를 짊어지고 들어와 임시 침대를 추가로 설치하는 동안, 황자는 막사 안의 촛불을 끄고 돌아와 나를 가만히 보았다. 그가 물었다.
“몸은… 괜찮으냐?”
“응.”
별로 괜찮지 않았다. 나는 속에서 핏물이 올라오는 것을 삼키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가 내 상태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그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사 황자는 나를 침대 안쪽에 눕히고 제 등으로 황제가 있는 쪽을 가리며 마주 누웠다.
서있을 때보다 토기를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홀로 일어나 앉아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저 잠을 청하려 최대한 가만히 있었다.
곧 몰려온 수마에 의식이 잠겼다.
문득 잠에서 깼다.
나는 어둠 속에서 침대 앞에 선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누운 채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한 손이 아래로 내리꽂히려던 검날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
황제가 두 손으로 몸무게를 실어 누르는 힘에 저항하는 동안 예리하게 벼려진 금속은 손아귀의 살과 힘줄을 손쉽게 가르고 뼈를 긁어냈다. 손목에 힘줄이 서고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지만, 황자를 노리는 흉기를 놓지는 않았다.
검을 움켜쥔 내 손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내 옆에서 잠든 사 황자의 뺨과 목덜미 위에 툭, 툭, 떨어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기사들이 나를 붙잡아 바닥에 쓰러트린 후였다. 등 뒤로 팔과 손목이 꺾이고, 머리채와 뒷목이 거세게 잡혔다. 갑옷을 입은 무릎이 등을 짓눌렀다.
나는 흙먼지와 피가 뒤섞여 흩어진 나무 바닥에 뺨을 댄 채 근위대 대여섯 명에게 온몸이 눌려 엎드려있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정신이고 육체고 모두 마취당한 듯했다.
황제는 제가 들었던 검에 복부를 관통당했다. 그는 자식들이 잠들어 있던 반대편 침대 곁에 힘없이 기대앉아 있었다. 시체같이 창백한 얼굴이었다.
몸싸움이 벌어지는 소리에 뛰어 들어온 근위대의 기사단장이 황제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늦었다. 그의 주인은 죽어가고 있었다.
황제가 결코 회복하지 못할 치명상을 입은 것을 본 그는 곧바로 내게 분노를 돌렸다.
“감히……. 감히!”
눈에 핏발이 선 기사가 몸을 부들부들 떨다 결국 검을 치켜들었다.
넋 나간 얼굴로 서있던 르리긴은 내가 포박되어 바닥에 엎드리게 될 때까지는 모든 과정을 방관하다가, 기사가 아무런 방비가 없는 내게 검을 휘두르려 들자 앞을 막아섰다.
사 황자가 죽어가는 제 형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차마 황제의 복부에 꽂힌 검에 손을 대지도 못한 채 피가 흘러 바닥에 스미는 것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옆얼굴에서 속삭이는 듯한 의문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사 황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황제에게 대고 질문만 반복했다.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황제는 피가 흐르는 제 상처를 지혈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는 제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흩어지는 와중에도 기이하게 초연해 보였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대체, 형님께서 왜… 저를 죽이려고 하신 겁니까?”
황제가 고요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담담해 보이던 그의 얼굴은 말을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젊은 황제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피와 눈물, 그리고 진실을 쏟아냈다.
“내가… 내가 먹었어야 하는 음식이었다. 원래는 내 입에 들어갔어야 하는 것들을… 내 손으로 비와 황자들에게 보냈다……. 좋아할 것 같아서, 부인과 아이들은 단것을 좋아했으니까……. 내 손으로, 내가, 내가…….”
제국을 물려받을 황태자는 배우자와 어린 자식들 앞에서는 그저 평범하고 다정한 남편, 상냥한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그의 애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가족을 해쳤다.
“…달려가 보니 이미 모두 숨이 끊어져 있더구나. 입가에는 검은 피가 흐르고 입술은 푸른색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모두 한순간에……. 이미 신의 품에 안겼는데도 얼굴에 남은 표정을 보니 너무나도 아파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랫것들이 전하더구나. 이 어린 것들이 숨이 끊길 때까지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했다고…….”
황제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핏발이 선 눈에서는 불그스름한 피 눈물이 창백한 뺨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광인이 깃든 것처럼 그가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나는 평생을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모두 조심하며 살았다. 내 정적들이 보는 곳에서는 숨도 살펴가며 쉬었지……. 내 아이들은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황자들이 다 자랐을 때는 더 좋은 세상이었으면 했다. 이런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더… 더 노력했다. 뒤에서 나를 모욕하고 음해하던 자들도 포용하려 애쓰며 너그럽게 웃어주었다. 어머님께 배운 대로 다 내 백성이거니 했다.”
고통인지 슬픔인지 모를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던 그는 이를 악물더니 곧 태도가 서늘하게 돌변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었느냐? 그 간악한 자들이 내 부인과 사랑하는 내 아이들을 모두 죽였다! 한순간에 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내가 무엇을 해야 했느냐? 응? 내가 어떻게 해야 했느냔 말이다! 나는 반드시 그것들을 내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만 했다! 내가 틀렸느냐? 동생아, 말해 보거라!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 그것들을 찢어 죽이지 않고서도 남은 삶을 살 수 있었겠느냐?”
사 황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바닥에 점차 넓게 번져가는 피 웅덩이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닌 듯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는 이제 피를 많이 흘려 의식이 혼미한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선황 폐하께서 나를 막으시더구나. 근신을 명하셨다. 증거 없는 처형은 그저 살육일 뿐이라고, 네가 아무리 당신의 아들이라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라고……. 증거가 왜 필요하지?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 꼬리를 빼고 도망치겠지. 나는 누구의 짓인지, 누가 날 죽이려 들었는지, 누가 내 가족들이 독을 먹게 했는지 다 알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독백을 듣는 황자의 얼굴은 피를 흘리고 있는 자만큼이나 창백했다. 오히려 사 황자가 자신의 형제 대신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믿을 만했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졌다.”
황제는 더 이상 유약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는 치열한 암투 속에서 보낸 오랜 시간을 증명하듯 죽어가는 와중에도 서슬이 시퍼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황제가 되면, 내 위에 선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이냐? 내 어린 아들들을 무참히 죽인 자들의 생사를 결정할 정도… 그 정도의 권력은 내게 주어지는 것이냐? 그러면 내가 폭군이 되는 것이냐? 그렇다면 나는 역사에 악인이라 기록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황제의 유언을 듣던 군중은 곧 그의 입에서 나올 참혹한 진실을 예상하고 숨을 죽였다. 나를 겨누던 근위대의 검 끝들은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어머니를 죽였다. 내가 선황을 살해했어.”
천막 안은 끔찍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뒤를 돌았더니, 작은 아이가 나를 부르더구나.”
황제는 이제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듯 시선이 바닥과 허공 사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장도 뛰지 않고 안색도 여전히 죽은 자의 것이었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도 내게 말을 걸고 웃어주고… 생전처럼 살아 움직였다. 내 아들이 되살아났어…….”
황제는 그 순간을 회상하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짓과 아이가 돌아온 것에 놀라서 선황의 죽음을 숨겼다. 목격한 자들을 모두 죽여 입을 막고 폐하께선 그저 몸져누우셨다,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기사들을 데리고 황궁을 나가 내 가족을 죽인 자들도 죽였다. 그 집안에서 난 것들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갓 난 가축 하나마저 남기지 않고 모두 벤 다음 그 끔찍한 자들의 집도 불태웠지…….”
정신이 흐려져 가는 듯하던 황제가 어딘가를 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의 초점 없는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가 죽은 선황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게 수많은 자들을 죽여 없앴는데도 내 장자는 며칠이 지나도 되살아날 기미가 없더구나. 희망을 버리려던 때에 큰아들도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리베디온, 내 동생… 삼 황자가 죽었다고 그런 소식이 왔다. 나는 깨달았다. 황족을 죽여야……. 내게 필요한 것은 황족의 목숨이구나…….”
사 황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그가 뭐라고 속삭이는 것인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누님, 누님을…….
“하지만 큰아이는 독에 목이 상해 말 한마디도 못 했다. 둘 다 심장이 뛰지도 않았지. 잠시 내게 돌아온 아이들이 다시 신께 돌아갈까 두려워 곧바로 신전에 가서 지혜를 빌었다. 그랬더니 신께서, 신께서… 처음으로 내 기도에 대답하셨다. 네 울음소리가 너무 비통하고 바람이 간절하여 마음이 아프니 첫눈이 오기 전까지 피가 짙은 황족의 심장을 두 개 더 바치면 운명을 교환해 내 아이들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다고.”
황제가 이곳의 전장까지 몸소 찾아온 이유가 모두 밝혀졌다. 기사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주인은 그가 성공했다면, 실패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있었을 것들을 쇳소리가 나는 숨과 함께 중얼중얼 늘어놓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산 시체로 잠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혈색이 넘치는 어린아이로 다시 숨 쉬게 할 수 있다고……. 건강하게 살다가 평화롭게 늙어, 여생을 다 마친 다음에야 잠에 들듯이 침대에서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 있다고……. 신께서 파편을 내려 도울 테니 너는 심장만 찌르면 된다고…….”
사 황자는 이제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까마득한 절벽 끝에 서게 된 사람처럼, 제 친형제가 두려운 사람처럼, 죽어가는 황제의 몸에서부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엔릴은 제 발로 황궁에 오더구나. 내 동생은 언제나 거침이 없었지……. 그런데 이 황녀의 육신은 숨이 끊기자마자 푸른 불꽃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직계 황족의 심장을 덧없이 버렸다. 겨울은 점점 다가오고 첫눈은 언제 내릴지 모르겠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어……. 그래서 널 죽이러 이곳까지 직접 왔다…….”
그리고 실패했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만큼 간절한 자가 이곳에 있었던 탓이다.
“너와 네 곁에 선 신의 사자라는 저자를 보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나는 실패하겠구나. 너를 죽여 심장을 제물로 바치지 못하겠구나. 가여운 내 아이들을 살리지 못하겠구나. 나는 피눈물이 흐르도록 애원해서야 신의 도움을 받았지만, 너는 신의 사랑을 그저 받는구나…….”
모든 것을 고백하는 황제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듯이 미약했다. 고요한 천막 안에는 인간 중 가장 높은 자가 죽어가며 마지막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 그리고 그쳐가는 빗소리만 울렸다.
“사 황자, 카일런, 막내야……. 부탁할 것이 있다. 내 마지막 유언이라 생각하고 부디 들어주거라. 응……? 곧 내가 죽으면 너라도 내 심장을 신께 바쳐다오……. 그래줄 수 있느냐? 내가 이렇게 빈다……. 애초에 너를 혼자 보낼 생각이 아니었다. 네 심장을 바치고 나면 나도 첫눈이 내리기 전에 따라가려 했다. 정말이야.”
황제가 이 황녀의 심장을 얻지 못할 것을 신들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 신전에 찾아갔을 때부터, 남의 손으로든 저 자신의 손으로든, 날붙이로 숨이 끊길 운명이었던 것이다.
“너는 조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몹시 귀여워하지 않았느냐? 심장 두 개가 모자라니, 날 위해, 저 어린 것들을 위해 너도 죽어줄 것이 아니라면 내 심장이라도 꺼내어 둘로 갈라다오……. 제발… 어쩌면 신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반쪽짜리 심장으로도 내 아이들에게 운명을 되돌려 주실지 모르지 않느냐…….”
황제의 마지막 말은 신의 자비를 구하는 문장이었다. 그는 곧 조용히 숨이 멎었다.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감히 아무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이 비틀거리며 황제에게서 등을 돌린 사 황자가 발걸음을 떼어 작은 황자들이 누운 곳으로 다가갔다.
내가 황제와 벌인 몸싸움으로 침대가 세게 흔들렸는데도 그들이 깨어나지 않았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형제는 이 모든 소란에도 방해받지 않은 것처럼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직전에 선황이 된 황제의 어린 아들들은 서로를 껴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는 황자들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숨을 확인하고, 목덜미를 짚어 맥박이 있는지 보았다.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곤히 잠들었던 사이 고통 없이 다시 죽은 것이다. 어쩌면 어느 정도는 그들의 아버지가 원하던 방식이었다.
사 황자는 곧바로 무너졌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어린 조카들의 차가운 몸 위에 엎드려 흐느끼며 울었다. 나는 그의 등밖에는 볼 수 없었다.
죽은 황제의 귓가에 속삭였던 신일 것이 분명한 키서세나스는 황제를 속였다. 나는 전쟁과 날붙이의 신이 처음부터 아이들을 살려줄 계획이 없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신들은 산 인간을 죽일 수는 있어도, 죽은 인간을 다시 완전히 살려낼 수는 없다. 예정되었던 죽음을 잠시 미룬 것뿐이겠지.
나는 반열이 더 높은 다른 신들에게 툭하면 협박당하고는 하는 가여운 운명의 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자비한 키서세나스가 어린 황자들을 죽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말대로 그가 생전에 만든 정적들이 벌인 짓이었다. 작은 실수, 예상하지 못한 어긋남이 그들이 의도했던 목표인 아버지 대신 어머니와 어린 아들들을 죽였다.
키서세나스는 그저 인간사의 작은 틈을, 그러나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 틈을 겨울철의 빗방울처럼 적절하게 파고들어 효율적으로 바위를 깬 것뿐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짓까지 하게 만들 수 있는지 가장 잘 알 만한 신이었다.
나는 엎드린 채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천막의 입구가 바람에 휘날려 만든 틈 사이로 밖의 어두운 풍경이 언뜻 보였다. 비는 그쳤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