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야
기사들은 황자를 데리고 에오네테의 별궁으로 돌아갔다. 본성의 계단을 마지막으로 밟았던 때가 전생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시종들은 오랫동안 간 곳 없이 사라졌던 사 황자의 귀환에 눈시울을 붉혔지만 황자 본인은 그것에 반응해 줄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호들갑을 떠는 시종들이 말 한마디 없이 서있는 황자의 옷을 다시 값진 것으로 갈아입혔다. 옆에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도 곧 그들에게 잡혀 옷이 벗겨지고 새 옷이 씌워졌다.
사 황자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인원은 전보다 몇 배로 늘어났다. 그가 황위를 이어받게 될 확률이 전보다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따르려다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밀려 그와 거리가 벌어졌다.
어느새 나를 두고 서재로 몰려 들어간 사람들이 내 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나는 언젠가의 날처럼 문 옆의 복도에 등을 대고 앉았다. 다시 기다릴 심산이었다.
모아 당긴 무릎 위에 뺨을 얹으려는데, 다시 문이 안쪽에서부터 벌컥 열렸다. 덕분에 서재 밖을 지키던 기사들은 경례를 두 번 올려야 했다. 다급하게 밖으로 나온 황자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나를 발견하곤 손목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들어가자.”
서재 안에는 르리긴, 황자의 보좌관을 포함한 가신 몇 명, 펠리서스 기사단에서 가장 직급이 높던 자까지 열 명이 좀 덜 되는 정도의 인원이 있었다.
황자에게 이끌려 서재로 들어오는 나에게 여럿의 시선이 쏠렸다. 가만히 보던 펠리서스의 기사가 말했다.
“아무리 사적으로 아끼시는 자라지만, 이런 기밀 회의에 외부인을 참관시키시는 것은…….”
나를 가장 가까운 옆에 두고 천천히 자리에 앉던 황자가 말없이 기사를 노려보자 그는 저도 모르게 흠칫해 입을 닫고 물러섰다.
사 황자는 연이은 부고에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별궁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안색이 죽은 자 같이 창백하고 핏발이 선 안구과 눈가에 붉은 기가 가득해 언뜻 광기가 어린 사람처럼 보였다.
서재 안 분위기가 서늘해지자 황자의 보좌관이 말이 없는 황자를 대신해 내 신분을 변호했다. 침묵하던 르리긴도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사 황자 전하께서 전에 에오네테의 기사 작위를 내리신 일이 있습니다. 비록 아직은 정식으로 성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외부인은 아니십니다.”
“이번 기습에도 황자 전하를 무사히 모시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입니다. 전하께서도… 최측근이라 여기시니 모두 그렇게 대하십시오.”
둘의 말을 들은 황자는 펠리서스의 기사에게서 싸늘한 시선을 거두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천천히 책상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황자의 눈치를 보던 가운데, 그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성……. 성이라…….”
그는 제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발끝만 까닥거리고 있던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성이 없었지. 내 사샤, 이참에 네게 성을 내리마.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황자가 입꼬리 한쪽을 올려 비죽,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사 황자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곧바로 알아들은 르리긴이 반발했다.
“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일 네프라타스. 그렇게 기록에 올리거라. 내가 성을 주었다고.”
“황자 전하, 신성한 이름을 기사에게 성으로 내리는 것의 선례는… 저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보좌관도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황자는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신의 이름을 인간이 쓰지 말라는 법규가 있느냐? 나는 수도 없이 법전을 읽었지만 본 적 없다.”
법전에 그런 조항이 없는 것은 모두가 신들을 섬기며 당연하게 여기던 암묵적인 규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자는 막무가내였다.
“신께서 내게 내리신 성스러운 사자이니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지 않느냐. 내가 신의 이름을 함부로 여겨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노할 테면 노하시라지…….”
내 한 손을 끌어당겨 손등의 뼈마디에 입을 맞추던 황자는 마지막 부분은 거의 중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원래부터 감각이 예민한 르리긴 말고는 아무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르리긴은 아연함이 비치는 굳은 얼굴로 황자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파편의 습격이 있던 그날 밤 그가 우리 둘을 신전에 남겨두고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무슨 대화가 오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이 신들께 독실하던 사 황자에 성품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친 것인지. 왜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듯 에오네테를 떠난 것인지.
매사에 신들에게 의지하는 기도를 올리던 황자가 왜 네프라타스의 이름에 대해 이런 비틀린 태도를 보이는지, 르리긴은 아무것도 알 길이 없어 의문스러울 것이었다. 그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른 짚더미 위에 떨어진 불씨를 보는 눈길이었다.
보좌관과 가신들, 나머지 펠리서스의 몇 기사들은 그저 젊은 황자가 정부에게 집착하다 미쳐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이들 중에는 직접 전투에 참여한 자가 적었다. 내가 검을 든 것을 제 눈으로 목격한 자가 거의 없어 신의 사자니 하는 황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상황에서 정부 하나만 데리고 한 달이 넘도록 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는 일도 망설이지 않았던 황자가 무슨 짓을 하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순식간에 모든 혈육을 잃어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사 황자의 명령에 더 딴지를 놓다가 저들에게 불똥이 튈 것이 두려웠는지 더 이상 그 건에 대해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이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이 황녀가 동생에게 남겨둔 마지막 소식대로, 정말 사 황자를 제외하고 현 황제를 포함한 모든 황족이 죽은 것이라면……. 홀로 살아남은 사 황자는 제국의 유일한 직계 황족이었다.
그는 곧 거대한 땅의 황제가 된다. 살아 숨 쉬는 인간에게 고귀한 신의 이름은 멀고 황제의 권력은 가까운 법이다.
그렇게 사일 네프라타스라는 전에 없던 이름이 사 황자 소속의 기사 명단에 올랐다. 에오네테의 총사단장인 르리긴의 휘하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사 황자의 직속 호위로 황자의 명만 들으며 기사단과 별개로 행동이 가능한 기묘한 직위가 급조되어 내게 내려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 황자 전하께서 강경하시니… 원하시는 대로 하도록 하고, 앞으로의 큰 대책에 대해 상의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잖습니까.”
황자의 가신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나이가 든 자, 젊은 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제각각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성곽이 튼튼한 에오네테에 남아 별궁을 주둔지 삼고 황자를 지켜야 한다, 수도로 돌아가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여러 가지 목소리가 뒤섞여 언성이 높아지자 순식간에 서재 안이 어지러워졌다.
“에오네테는 이미 한번 습격을 받았습니다. 지난번에도 속절없이 함락당한 별궁에서 무슨 다른 수가 있어 황자 전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별궁이 튼튼하긴 해도 구조가 애초에 전쟁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건물이 아니에요. 성곽이 뚫리면 별궁 자체로는 농성전이 거의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그럼 지금 생사가 확실한 유일한 황족을 모시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대책 없이 나가 앉잔 말입니까? 지난 전투로 병력 손실이 커 남은 자들을 다 긁어모아도 삼천이 채 안 됩니다. 이 숫자로 저번 같은 큰 기습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승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까? 이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사 황자 전하의 안전이 우선되어야 함을 몰라서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 다들 그것보다! 황태자 전하의 생사가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수도에 얼굴 한번 안 비치고 몸을 사렸다가 나중에 무슨 추궁을 받을지 두렵지도 않습니까? 황태자께서 살아오시기라도 한다면 황궁 함락 소식을 알고도 병력을 지원하지 않은 것은 반역죄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 황녀 전하께서 소식을 전하신 것이 벌써 이틀 전 밤이오. 이틀이면 빠른 전서구 한두 마리는 올 만한 시간인데, 헬베세노바 성곽 바로 밖에 주둔하고 있던 근위대에서 아무 소식도 없소. 수도의 황족 수호가 목적인 그들이 도망쳤을 리도 없는데 황궁이 결국 점령당했다면, 그 정예 기사단 오천 명이 전멸했다고 봐야지. 오천은 고사하고, 그것도 안 되는 우리 병력으로 뭘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대체 이런 병력이 갑자기 어디서 나와서 제국을 공격하는 거랍니까? 제국을 대적할 만한 나라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소국끼리 연합이라도 한 걸까요? 그런 기미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이라면 어째서? 영광되신 현 황제 폐하께서는 주변국에 지나친 압박을 가한 적도 없으시지만 만만하게 보일 만한 외교를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우리를 습격한 적들을 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오천의 수도 근위대가 전멸했습니다. 수도로 간 병력이 이 정도라고 친다면, 우리를 공격한 자들까지 합하면 수가 더 늘어나지 않습니까? 소국의 기사들이라기엔 수가 너무 많은 데다 이곳저곳에서 나타나 이동하는 속도가 빠르고, 그렇다고 연합군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충성도가 높고 강해요……. 적들 겨우 수백에 우리 기사단은 거의 천 명이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이리저리 떠들던 그들은 결국 에오네테에 머물든, 수도로 가든, 다른 주둔지를 찾든 우선 병력을 보충해야 한다는 한 가지 합의점을 찾아냈다.
책상을 둘러싼 사람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황자는 그저 말없이 들으며 팔걸이에 얹어진 내 손 위에 제 손을 덮은 채 손등을 엄지로 느릿하게 매만질 뿐이었다.
황자가 오래 침묵을 지키자 저들끼리 큰 소리로 떠들던 사람들이 점차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곧 서재 안은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것처럼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제서야 황자가 입을 뗐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잠잠히 말했다.
“내가 별궁에 머무는 이상 언제든 다시 이곳을 공격해 올 것이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우리는 시가전을 피해야 한다. 죄 없는 제국의 백성들을 방패 삼아 덧없는 피를 흘릴 수는 없어……. 에오네테를 떠난다.”
“황자 전하, 하지만…….”
반박하려던 가신은 곧바로 입을 닫았다. 황자가 겹쳐진 그와 나의 손등을 내려다보느라 내리깔았던 시선을 올려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보는 표정을 한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동안 그는 나에게 대부분 다정하게만 굴었다. 눈두덩에 서늘하고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진 황자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떠나고 나면, 그는 얼마 동안이나 저런 표정을 지을까. 한 주? 한 달? 일 년? 내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이 황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단들에게 전령을 보내어 각각 한두 개 군단씩을 보내게 해 병력을 모으면 충분하다. 이 주 안으로 에오네테에 당도할 수 있는 주둔군이 몇 곳이나 있지?”
“이 황녀 전하의 은혜로 펠리서스에서 이미 모든 기사단을 끌어왔으니, 그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곳은 북방 국경선 방비군입니다. 북쪽엔 항상 별일이 없으니 가까운 최북단 위치의 기사단 소속에서 만 명 정도는 소환해도 될 듯합니다. 삼 황자 전하의 일을 방관했던 테베나를 두고 동쪽에서 병력을 비우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인 것 같으니 제외하고, 서쪽 기디스 강 유역에 상주하는 기사단이 그다음 거리입니다.”
지도 한쪽에 푸른 잉크로 기다란 곡선이 그려져 있었다. 자세히 보려 상체를 책상 위로 기울이자 황자의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전령이 왕복해야 하니 이 주일 안에는 무리여도 기간을 더욱 넉넉히 잡는다면 그곳에서도 서너 개 군단 정도는 이동시킬 수 있을 것 같으니 모두 합하면 기사 삼사천, 일반 병력 삼사만 정도가 되겠군요……. 당장 단기간에는 이렇게가 최대일 듯싶습니다.”
“친필로 소환 서신을 써줄 테니 전령을 보내거라. 황족의 표식보다 앞서 소식이 도착해 그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전서구도 띄워라.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가 후에 도착한 내 인장과 필체를 확인하면 지체 없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황자가 피곤한 기색으로 이마를 짚자 보좌관과 르리긴을 제외한 사람들이 조용하게 인사를 올리곤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몇 분 후에나 겨우 펜을 집어 든 사 황자는 황가의 문양이 테두리에 금박으로 입혀진 편지지를 서랍에서 꺼내어 황족들의 죽음과 최근 일련의 일을 알리는 서신 서너 장을 천천히 써 내려갔다.
나는 그가 같은 내용을 반복해 적은 편지를 접고, 그 위에 녹인 밀랍을 붓는 것을 지켜보았다. 푸른 광택이 도는 봉인 위에 사 황자의 인장이 찍혔다. 황자는 편지에서 떼어낸 제 인장 반지를 내 손에 끼워주고는 옅게 웃었다.
사 황자에게서 에오네테를 떠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테베나의 왕녀는 예상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함께 길에 나서지 않겠다 주장한 것이다.
“저는 그들이 저를 쫓아온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신전의 전투에서 두 눈으로 보았던 것을 찬찬히 생각해 보니 이제야 알겠더군요. 그들은 제가 아니라 사 황자 전하를 노리던 것이었습니다. 황자께서 옆에 계시지 않았다면 제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전 이곳에 남겠습니다.”
왕녀는 말을 마친 후 잠시 동안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담담히 물었다.
“신들께 무슨 짓을 저지르신 것입니까?”
황자는 아주 잠깐의 순간 동안 얼굴이 일그러졌다. 왕녀는 어렴풋하게나마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내 남편이던 삼 황자도 죽어 마땅한 이유가 있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운을 빌겠어요……. 신들께서 당신을 평온하도록 내버려 두길…….”
결국 황자는 왕녀를 설득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나를 데리고 별궁 꼭대기 층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마주한 넓은 침실은 곧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곳이 될 것이다.
침대에 앉은 황자는 극도로 피로해 보였다.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어차피 거동이 힘들어 임산부를 행군에 따르게 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었다만… 두고 떠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두고 가.”
나는 길게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왕녀의 말이 맞다.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 사람이 사는 땅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사 황자의 옆이다.
황자가 고개를 들어 거뭇하게 그림자가 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가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하마…….”
에오네테는 남쪽으로 신전들에, 북쪽으로 산맥에 보호받는 도시임을 언급했던가.
황자는 한시라도 빨리 별궁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무고한 인명이 더 상할까 염려하는 마음일 것이다.
거듭되는 회의에서 황자와 가신들, 기사들은 북쪽의 산맥과 이어진 고원으로 올라 그곳에서 주둔하며 지원군을 기다리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넓은 고원은 에오네테에서 지나치게 멀지 않아 이동이 쉬우며, 고지대의 특성으로 방어와 정찰이 유리했다.
가신들은 모두에게 선량하고 유순하던 막내 황자의 눈빛이 돌변한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변화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지난 시간, 고작 반년이나 될까 싶은 기간 동안 사 황자가 무슨 일들을 겪어야 했는가? 그의 삶에 들이닥친 황족들의 연이은 죽음은 황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그를 비난하거나 의문을 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오히려 황자는 한 사람에게 주어지기에 지나치다 싶은 고난들을 한순간에 모두 겪은 사람치고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울지 않는 대신 말수가 극도로 적어지고, 비틀린 미소가 아니라면 웃는 일이 드물었으며, 한때 온화하던 눈빛에는 온기가 가시고 서늘한 안광이 금속의 표면처럼 냉담한 빛을 낼 뿐이었다.
세상사에 질려버린 신처럼 모든 것을 무심히 방관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다녀 걱정을 사던 사 황자는 나를 대할 때만은 다른 사람처럼 태도가 변했다. 그는 주위에서 누가 지켜보든 나에게 애정을 표하며 내가 그에게 중요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별궁에서의 마지막 며칠 동안 우리는 병력이 에오네테를 떠날 준비를 마칠 날만 기다리며 그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여름과 같은 날들을 보냈다.
황자가 나를 지나치게 아끼는 것이 도저히 숨겨질 지경이 아닐 때가 되자 가신들도 드디어 나에 대한 소문이라거나, 목격담 같은 것들을 접한 것 같았다.
그제서야 그들은 황자가 떼어놓고 다니는 일이 없는 정부가 단순한 애인이 아니라 호위 기사임을 깨달았는지 내가 허리에 찬 검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를 은근히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보면서도 신께서 비통한 때에 사 황자를 축복해 수호의 사자를 내렸다고 수군댔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곁을 지키니 의지할 데가 있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황자 전하께 아주 다행인 일이라고. 그렇게들 말했다.
실제로 별궁에 돌아온 이후 식욕을 완전히 잃어 계속 음식을 물리던 황자도 내가 막무가내로 입가에 가져다 들이대는 것들은 하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받아먹어 주는 것이었다.
황자는 겨우 며칠 만에 살이 내려 턱선이 날카로워지고 볼이 패여있었다. 나는 핏기가 비치는 고깃덩어리를 잘라 포크로 찍어 그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황자는 한숨을 쉬면서도 입을 벌려 음식을 먹었다.
“배부르대도……. 이제 정말 그만 먹이거라. 네 덕에 배가 터질 것 같으니.”
식당에도 내려가지 않고 침실에서 만찬을 즐기던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침대에 뛰어들어 늘어지는 게으름을 마음껏 부렸다.
나를 껴안고 침대 머리맡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댄 황자는 내가 차고 있던 검이 제게 닿는 것이 거슬렸는지 손수 내 허리띠를 풀어냈다. 그가 검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너만큼 검이 어울리지 않는 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졸린 눈을 들어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고 황자를 올려다보았다. 황자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런 네가 여태껏 나를 지켜주는구나.”
나는 대답도 않고 그저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다시 눈을 감았다. 황자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정수리 위로 더운 한숨과 함께 속삭임을 쏟아냈다.
“네가 없었으면……. 너 없이 내가 혼자 무엇을 어떻게 했겠느냐.”
황자는 고르게 숨을 내쉬는 내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신전에서 파편을 베려 힘을 끌어 쓰다 어렴풋이 한계를 경험한 일 이후로 원래도 많던 졸음이 더욱 늘고 가만히 서있다가도 눈앞이 어지러울 때가 있었다. 나는 어지럼증이 도지거나 속이 메스꺼울 때마다 땅밑이 다시 단단해질 때까지 그저 잠잠히 있었다.
이전 생에서의 일들은 내가 통증이나 몸의 이상을 견디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금이 간 곳에서부터 몸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고통에 비하면 아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아무 티를 내지 않자 황자는 별다른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자신 위에 엎드린 내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던 내 몸을 황자가 흔들어 깨웠다. 혼몽한 정신에 어깨를 잡은 손을 밀어내며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눈을 감았는데도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쉽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황자는 어쩔 수 없이 내 등 밑에 손을 넣어 강제로 내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그가 받쳐주는 대로 일어났다가도 그대로 앞으로 기울어 그의 품에 머리를 박고 꾸벅꾸벅 졸았다.
따듯한 손이 잠을 깨우려는 듯 목덜미를 주무르고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나는 물먹은 솜처럼 그의 품에 늘어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결에 머리를 비비며 뒤척이는 내 머리 위로 황자가 안타까운 듯 한숨을 쉬었다. 그가 내 목덜미며 뺨, 얼굴 곳곳에 가벼운 입맞춤을 내렸다.
“많이 피곤한 것이냐? 하지만 이제 출발해야 한다. 기사들이 기다린다.”
그는 나를 조금이라도 더 재우고 싶은 것 같았지만 정말 시간이 촉박한 듯 결국 내 몸을 안아 침대에서 내렸다.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비틀비틀 바닥에 섰다. 발바닥을 감싸는 폭신한 카펫 위에라도 당장 드러눕고 싶었다.
황자는 내가 슬금슬금 카펫을 발바닥으로 문지르자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는지 휘청거리는 내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려던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몸에 힘을 빼는 대신 황자에게 대놓고 무게를 실어 기댔다.
“손 들거라. 어서.”
물먹은 천처럼 들러붙는 나를 끌어안다시피 한 그가 아이에게 하듯 내게 두 팔을 올리게 하고 밑에서부터 옷자락을 말아 올려 잠옷 상의를 벗겨냈다.
시중을 들러 침실에 들어왔던 사용인들은 내 몸에 손끝도 대지 못한 채 황자가 손수 내 옷을 갈아입히는 것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구경만 해야 했다.
그가 앞에서 몸을 숙이고 내 허리에 검을 묶어 고정하며 말했다.
“호위 기사라는 자에게 내가 검까지 직접 채워주었는데, 잠을 좀 깨보거라. 응? 사샤, 말을 타야 하는데 네가 졸다가 낙마라도 할까 겁이 난다. 체면은 안 서겠지만 키슈를 함께 타고 갈까? 싫으냐?”
내가 뭐라고 웅얼웅얼하자 황자는 어이가 없어 픽 웃더니 대답을 해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코알라… 아니,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황자에게 매달려 계단을 내려갔다. 르리긴은 나를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주인에게 들려 다니는 호위 기사는 저도 처음 봅니다. 차라리 전하께서 검을 두 자루 차시지 그러셨습니까.”
르리긴은 며칠 사이 마음을 정리했는지 최대한 태연하게 굴며 이 황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황자도 그것을 아는지 르리긴의 농담 같은 딴지에 비소를 지어 보이기만 했다.
시종이 본성의 입구로 말을 끌어올 때쯤엔 나도 잠이 거의 달아나서 황자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 눈만 꿈뻑꿈뻑 하고 있었다.
“깨셨습니다.”
황자의 뒤에 서있던 르리긴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고자질했다. 나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르리긴은 눈썹만 까딱 들어 보일 뿐이었다. 황자가 팔을 풀어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키슈 옆에는 나를 위해 끌어온 말 한 마리가 더 서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잿빛 색 털이 아름다운 암말이었다. 르리긴과 기사들이 탈 말 여러 마리 중에서도 키슈와 그 회색 말은 자태가 눈에 띄었다.
황자는 이제 내가 승마를 배워 말에 스스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것처럼 괜히 내 허리를 잡아 나를 말 등 위에 올려주었다.
“키슈가 구애를 하는지 내 말도 안 듣고 이 말 옆에서 떨어지려 들지를 않길래, 너를 태우면 되겠구나 싶었지.”
곧 황자와 기사들도 말에 올랐다. 시종들은 정문까지 거리가 있어 본성에서 배웅을 하는지 야외 계단 밑에 모두 모여있었다. 대부분이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황자의 지척에서 그를 직접 시중들던 시종들은 더욱 서글퍼 보였다.
우리가 출발할 기미가 보이자 시종 중 하나가 다급하게 일행에서 달려 나왔다. 매일 아침 황자와 나를 깨우려 문을 두드리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종일 곁을 지키던 자였다.
그는 험한 일을 몰아 겪은 황자가 연인의 곁에서 생기를 되찾아 가는 것이 반갑고 고마웠는지 피로 얼룩진 소문에도 불구하고 내게 호의적이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가 천으로 감싼 작은 상자 같은 것을 내게 쥐여주었다. 상자 속에서는 달콤한 버터와 밀가루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아침에 갓 구운 과자를 싸매 온 듯했다. 시종이 울먹이며 말했다.
“평소에도 간식거리며 단 과자를 좋아하셨잖아요……. 길 가는 도중에 드세요, 아시겠죠?”
“응…….”
키슈의 고삐를 움직여 내 옆으로 바싹 붙은 황자가 미소 짓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 먹어도 되는 건가?”
감히 내심 아들처럼 여기던 황자가 밝은 얼굴로 웃는 것을 오랜만에 본 시종이 다급하게 눈물을 닦아내며 소리 높여 대답했다.
“그럼요! 많이 넣었는걸요.”
울음을 참던 시종이 겨우 덧붙였다.
“금방 돌아오셔야 해요……. 두 분 모두 어디 다치지 마시고요. 수도까지 가시면 꼭 저를 부르셔야 합니다!”
“그러마. 자네도 건강히 있고. 왕녀를 부탁한다.”
황자는 망설이는 내색 없이 대답해 주었다. 어느 당부에 대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죽은 형제의 임신한 부인까지 그에게 부탁하고 나서야 황자가 말 머리를 돌렸다.
“가자.”
우리는 말을 달려 본성에서 멀어졌다. 정문은 이미 활짝 열려있었다. 별궁에 남은 기사들이 멈추지 않는 황자의 일행을 향해 경례를 올렸다.
도심의 가장 큰길을 계속 달리자 에오네테 성곽의 문이 보였다. 멀리서 다가오는 황자를 발견했는지 기사들이 성문의 장치를 당겼다.
거대한 문이 서서히 양쪽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틈은 점점 넓어져서 사이로 너머가 보였다. 수만의 기사와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 황자의 소환에 응해 에오네테의 병력과 합류한 북방 국경선 주둔 기사단이었다.
말에서 내린 기사 하나가 나와 황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존귀하신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남은 황자가 그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황자를 사 황자라고 부르기를 잠시 주저한 것 같았다.
사 황자는 그가 사용한 호칭을 지적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받아주었다. 그가 말 위에서 기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바로 와주었구나. 검은 뱀 기사단은 혼란한 때에 내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황자 전하의 서신을 읽자마자 명을 받들어 달려왔습니다. 황족을 수호하는 데에 몸을 아끼지 않을 것을 모든 기사를 지키시는 네프라타스께 맹세합니다. 키서세나스의 칼날도 우리의 적을 향하길.”
기사의 말을 들은 황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그가 무표정을 유지한 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북쪽 검은 고원에 올라 적의 기습을 경계하며 기디스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주둔할 것이다. 누님이신 이 황녀의 말씀대로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니, 가능한 병력을 다 모은 후에 황궁을 살피러 수도로 진군한다.”
“뜻을 알겠습니다.”
기사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황자의 손짓에 다시 말에 올랐다.
백 명은 겨우 될까 하는 에오네테의 기사들이 가장 지척에서 황자를 둘러쌌다. 저번 기습 때 신전으로 가지 않고 별궁에 남았거나, 쉬는 날이어서 근처에 없었거나 하는 바람에 파편에게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동료들이 처참하게 죽은 사건에서 목숨을 부지한 것이 부끄럽기라도 한 것처럼 사 황자를 지키려는 의지로 단단히 굳은 얼굴이었다.
그 주위로 펠리서스의 기사단과 북방 국경의 검은 뱀 기사단이 긴 행렬을 만들었다.
황족을 뜻하는 푸른 기 앞뒤로 기사단의 여러 깃발이 휘날렸다. 나는 그제서야 각 기사단이 무슨 이름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황녀의 사병이었던 펠리서스의 기사단은 깃발에 흰 매가, 에오네테 기사단의 깃발에는 푸른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깃발들을 구경하며 속절없이 황족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이 황녀와 사 황자,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삐뚤삐뚤 그린 동물들이 그들이 머무는 곳의 문양이 된 것이었을까.
내가 황자의 옆에서 멍하니 말에 올라있는 사이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별궁으로 돌아올 때와 달리 기사들도 나를 호위 진영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나는 황자의 바로 옆에서 말을 달릴 수 있었다.
황자와 내가 잠시 도피 생활을 하고 돌아오는 동안 소문은 더 퍼져있었다. 침실에서 파편들을 도륙하고 피를 뒤집어쓴 나를 본 시종들과 신전에서 타오르는 검을 쥔 채 제단 위에 서있던 것을 목격한 펠리서스의 기사들이 서로 말을 퍼트리고 다닌 것의 합작이었다.
암묵적으로는 이미 신의 사자로 여겨지는 내가 그들 중에 섞여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 명이 넘는 병력의 사기가 올라있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신전에서 모두 죽은 기사들도 등 뒤에 선 나를 믿다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내가 운명의 신을 통해 훔쳐본 미래는 내가 설원에서 죽고 사 황자는 살아남아 황제가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미래는 내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죽고, 얼마나 살아남을지.
* * *
에오네테에서 북쪽으로 올려다보이던 검은 고원과 비죽비죽 솟은 돌 산맥은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산맥이 워낙 높고 넓어서 아주 멀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였지만, 막상 다가가려 들 때는 거리의 가늠이 어렵고 가도 가도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고원에 닿기 전까지는 밤에도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을 정도로 해가 저물어 앞이 어두워지면 주위에 온통 보초를 두르고 나서야 잠시 눈을 붙였다.
사방을 경계하느라 천막을 칠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황자는 그저 다른 병사들처럼 모닥불 하나의 온기에 의지한 채 맨땅에 천 몇 장을 깔고 아무 곳에나 기대어 해가 뜰 때까지만 선잠을 잤다. 그는 그 와중에도 나를 옆에서 한시도 떼어놓지 않았다.
나는 길을 가는 동안 해가 있으면 그의 옆에서 말을 타고 해가 지면 그에게 안겨 잠들었다가 또 해가 뜨면 여전히 그에게 안긴 채 잠에서 깨어났다.
행렬은 며칠을 가서야 고원 끄트머리에 닿을 수 있었다. 기사가 아닌 일반 병사들은 말을 타지 않는 보병이어서 속도가 더 느렸다.
하늘 저편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자 기사들은 행군을 더욱 재촉했다. 겨울비에 몸이 젖기 전에 고원 위에 완전히 올라 막사를 설치하고 실내에서 비를 피해야 했다.
힘겹게 고원의 평지에 다 오른 병력은 숨 고를 새도 없이 천막을 설치하고 불을 피운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주위가 온통 소란스러운 가운데 혼자 고원의 끄트머리에 두 발을 걸치고 가만히 서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넘어지면 속절없이 구를 듯한 비스듬한 경사가 끝없이 내려가다가, 점차 각도가 완만해지며 넓은 평원이 펼쳐지고, 그 뒤로 온통 흰 에오네테가 손가락 두 마디만 하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서쪽을 보았다. 지평선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채 바람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몰려오던 먹구름은 서서히 다가올수록 형태가 기이해졌다. 지평선 가까운 곳에서는 모두 한 덩이 구름으로 보였던 것들이 거리가 가까워지며 하늘과 땅으로 분리되었다. 나는 그것들이 육안으로 구분이 될 때까지 하염없이 지평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하늘로 다가오는 것은 구름, 땅에서 몰려오는 것들은 사람의 무리였다. 키서세나스의 파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먼 곳만 쳐다보고 있자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 시선을 따랐다. 그들은 곧 내가 보던 것과 같은 광경을 발견했다.
“저, 저기에!”
곧 여기저기에서 고함을 지르고, 적이 몰려오고 있다며 상관에게 외쳐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란 속에 홀로 고요히 서서 적의 수를 가늠했다. 몇천은 되어 보였다. 나는 키서세나스가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훔쳐본 운명의 장면이 무사히 이루어지려면 나는 황자의 곁에 붙어있어야 했다. 행동반경이 좁았다.
하지만 내가 천 정도를 베고 나머지 병력이 전멸할 각오로 덤벼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모자라도 상관은 없었다. 병력이 전멸하든 아니든. 내가 파편 몇을 더 베거나 베지 못해도. 그런 것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나는 사실 며칠 전의 황자가 병력을 모아 바로 수도로 내려가 버릴 기색을 비칠 때까지도 조금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수도에는 눈이 내리긴 하지만 아버지에게 협박당한 운명의 신이 내게 보여준 것처럼 검은 산봉우리나 돌이 가득한 척박한 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로로 황자와 내가 그곳에 도달하게 되는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지원을 기다리는 동안만 에오네테를 벗어나 고원 위에 오르도록 결정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기습에서 도시의 민간인들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황자가 하는 모든 언행, 그가 내린 모든 결정들이 모두 한 줄기로 모여 우리를 그곳, 그 시간으로 이끌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그대로 죽는대도 황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지원군이 알맞게 도착하든, 홀로 도망쳐 몸을 숨기든……. 내 생사는 황자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것은 그저 도망치지 않고 그의 곁에서 언제일지 모를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이다. 정확한 날과 때는 알 수 없어도 멀지는 않았다. 나는 직감했다.
문득 저편에서 몰려오는 검은 구름이 비가 아닌 눈 결정을 흩뿌리지는 않을지 궁금해졌다. 내 죽음이 며칠 후일지, 몇 시간 후일지 생각했다.
이미 겨울이 오고 있었다. 고원은 비교적 따듯한 에오네테보다 지대가 높아 기온이 훨씬 낮았다. 눈이 내리지 않는 저지대의 별궁과 달리 멀리 보이는 산맥의 봉우리에는 만년설이 녹지 않고 쌓여있었다.
고원의 첫눈까지 한 달 이상의 시간은 걸리지 않겠지. 곧 끝이 날 것이다.
어차피 파편의 무리가 고원을 다 오르려면 적어도 오늘 자정은 지나야 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다. 전투까지는 시간이 남는다. 나는 생각을 그만두고 뒤를 돌았다.
어느새 나를 찾아 달려온 듯한 황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멍하니 이곳을 보고 있었다.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는 기사들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자리에 굳은 듯 서있는 황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사실만을 말했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황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어 얼버무리며 달래는 투로 다시 말했다.
“넌 무사할 거야. 아무 데도 다치지 않을 거야. 황제가 될 거라고 했잖아.”
그는 내 말을 듣고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입을 달싹이던 황자가 겨우 소리를 냈다.
“넌……. 너는?”
나는 알아듣지 못한 척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황자가 바싹 다가와 어깨를 붙들었다. 그가 어쩐지 절박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넌 어떻게 되는 것이냐? 너 자신의 운명은 신께 듣지 못했느냐?”
나는 거짓말을 툭 뱉었다.
“몰라.”
완전한 거짓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태연한 내 얼굴을 보고는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내가 무언가 잘못 반응한 듯했지만, 이제 와서 다른 말을 지어내기에는 머리가 몽롱했다. 나는 그냥 그를 잡아끌었다.
“들어가면 안 돼? 잘래.”
황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내가 손을 끌어당기자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
꽤 오래 걸어 막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고원의 가장자리에서 멀어져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일반 병사들이 적어지고 기사의 비율의 늘어 소란스러움이 덜했다.
결국 도착한 황자의 막사는 생각보다도 컸다. 두꺼운 천을 걷고 들어가니 바닥엔 맨흙이나 돌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판자가 깔려있었고, 사령관들의 회의를 위한 큰 책상도, 내가 원하던 침대도 있었다. 별궁에 있던 것보다는 못해도 임시로 가져다 놓은 것치고는 넓고 푹신했다.
나는 신발만 벗어놓고는 입은 옷 그대로 꾸물꾸물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곧바로 의식이 흐려졌다.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졸기 시작하는 내 옆에 황자가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가물한 의식 속으로 흘러들었다.
“내가 어렸을 적 원래 병이 있으시던 아버님께서 이르게 신께 돌아가신 이후로는, 더 이상 가까운 사람들이 멀리 떠나는 일이 당분간은 없겠거니 했다. 내가 아주 나이가 들기 전까지는 모두가 내 옆에 있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지. 사람이 감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을 함부로 단정 지었던 내가 어리석고 무지했다.”
다정한 손길이 뺨과 목을 어루만지고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나는 올해 너무 많은 죽음을 겪었다……. 사샤, 듣고 있느냐?”
눈을 감고 대답이 없는 내 이마에 황자가 입술을 눌렀다. 그가 속삭였다.
“그저 운명으로 여기고 다 감내하겠다. 떠난 사람들을 평생 애통해하며 살겠다. 하지만 너는…….”
귓가에 닿던 목소리와 얼굴을 감싼 손길이 가물가물 멀어졌다. 완전히 잠들기 직전 그가 뭐라고 말했던 것도 같다.
“너는 안 된다. 알겠느냐? 너만은…….”
나는 황자가 손을 대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피로가 가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온 감각이 본능적으로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막사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황자는 침대맡의 의자에 앉아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미적대지 않고 이불을 걷은 다음 상체를 일으켰다. 황자는 내가 일어난 것을 보더니 의자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말없이 신발을 신겨주었다.
나는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나 검을 뽑아 들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황자는 시선을 내리깔고 내 뒤를 따랐다. 역시 검을 든 채였다. 하지만 그가 제 손으로 그 검을 휘두를 일은 없어야 했다.
밖은 검푸른 새벽이었다. 동쪽 산등성이 뒤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는지 붉은 기가 돌았지만 하늘이 온통 검은 구름에 뒤덮여 시간을 알기가 어려웠다.
상황 파악을 위해 시야를 확보하려 빽빽한 막사 지대에서 벗어나는 도중,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온 르리긴이 우리 근처에서 멈춰 섰다.
“적들이 비탈을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얼마 걸리지 않을 듯합니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 고원의 가장자리에 가깝게 선 사람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궁병들이 아래를 향해 활을 쏘고 있었다. 이곳에선 아래가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화살의 비가 쏟아지는데도 망설임 없이 전진하고 있겠지. 단 한 가지 목표를 향해.
궁병들은 파편들의 맹목적인 기세에 밀렸는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칼로 잘리듯 끊긴 고원의 가장자리에서 까만 점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가 곧 궁병의 화살을 맞고 밑으로 떨어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동안 고요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던 순간, 곧 파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기어올라 고원 위에 나타났다.
활을 든 궁병들은 순식간에 스러졌다. 고원의 끄트머리는 파편들에게 뒤덮였다. 그들이 땅을 갉아먹는 개미 떼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곧 기사들이 허공에 검을 치켜들었다. 말을 탄 자들이 땅을 박차 보병을 순식간에 제치고 전선에 다다랐다. 그들은 말 위에서 창이며 검을 휘둘러 고원 위에 발을 디딘 파편들을 베어 넘어트리거나 낭떠러지 아래로 다시 밀어 떨어트렸다.
기병에 막혀 다가오지 못하는 듯 보이던 것은 잠시였다. 파편들은 점차 수가 늘어나더니 결국 하나둘씩 기사들을 넘었다.
키서세나스의 파편들은 배에 창날이 꽂히고 발목이 검에 베여 잘려도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이쪽으로 향했다. 하나를 완전히 바닥에 쓰러트리려면 기사 한 명이나 일반 병사 네다섯은 붙어 목을 베거나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난도질해야 했다.
황자는 범람하는 강물 같은 파편의 떼를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 위에 앉은 높은 신의 집요한 악의는 인간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짐승조차 불길함을 느끼는지, 황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호위 기사들의 말도 발을 구르고 거친 숨을 내쉬며 입가에 거품을 물었다.
나는 황자를 키슈의 등에 오르게 했다. 땅에서 한 치라도 멀어지는 편이 유리했다. 일이 잘못되는 경우에도 말이 있는 편이 도주하기 쉽다.
파편들의 파도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쪽은 기묘하게 고요하고, 눈을 들어 앞을 보면 사람과 사람 비슷한 것들이 피를 튀기며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생지옥의 경계가 스멀스멀 나를 향해 다가왔다. 황자를 등 뒤에 두고, 나는 파편 하나가 코앞에 당도할 때까지도 가만히 서있었다.
나를 지나치려 드는 파편 하나를 베었다. 선 자리에서 한 발도 떼지 않았다. 매끄럽게 휘둘러진 검은 파편의 허리를 찢고 지나가 단번에 그를 두 동강 냈다.
고깃덩어리가 된 파편이 둔탁한 소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뒤쪽 어딘가에서 기사 하나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나는 상관하지 않고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심장이 비틀리는 듯한 감각과 함께 은빛으로 빛나던 검신에서 불티가 확 튀더니, 곧 황금빛으로 작열하는 불꽃이 땅과 가까운 곳을 밝혔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손에 쥐어진 검만이 횃불처럼 타올랐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겨울비는 계절답지 않게 쏟아붓는 것처럼 내렸다. 구멍이 난 하늘 아래에서 파편을 베고 또 베었다. 한참을 발악하듯 검을 휘두르다 보면 눈앞에 사람의 가슴 높이만큼 파편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키서세나스가 보낸 증오의 증거들은 한번 숨이 끊겨 땅에 쓰러지고 나자 오히려 나와 황자를 보호하는 방벽이 되었다.
나는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황자는 손에 쥔 검을 한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려는 것들을 진작에 남김없이 조각조각 찢어놓았기 때문이다.
사 황자가 직접 작은 전선에 다가서려 들면 핏물에 젖은 나를 보고 질겁한 기사들이 그를 붙잡고 늘어지며 만류했다. 내가 하도 마구잡이로 불붙은 검을 휘두르는 탓이었다.
나는 등 뒤에서 무어라고 소란스럽게 굴든 무시하고 시체의 산을 넘어오는 지긋지긋한 것들을 난도질했다. 머리 위에 퍼붓는 차가운 겨울비가 뺨을 타고 턱에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전하,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지금은 위험합니다!”
내가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검을 쓰자 르리긴은 내가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피아의 구분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는지 자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싸우면서도 황자가 내게 접근하려 들면 고함을 질러 막았다.
르리긴이 아주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이 흐리고 몸이 처져 주변의 모든 것에 짜증이 났다. 전쟁터의 비명이나 물웅덩이를 여럿이 밟아 찰박이는 소리, 금속이 부딪히는 소음은 둔해진 청각을 뚫고 들어와 무거운 빗소리와 함께 고막을 때렸다. 나 자신의 거친 숨소리마저 귀를 아프게 했다.
나는 그럴수록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포악하게 굴었다. 처음에는 급소를 노려 단번에 숨을 끊어내던 동작이, 힘이 빠져 갈수록 마구잡이가 되어 타인이 보기에는 더욱 참혹한 시신들을 만들어냈다.
백병전으로 온통 난장판인 전장에서도 내 주위에는 내가 쥔 검 끝의 사정거리만큼 둥글게 텅 비어 파편 말고는 다가오는 자가 없었다.
몸이 무거워질수록 상처가 늘었다. 무겁게 젖어 살에 달라붙은 옷 아래로 비인지 피인지 모를 것들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찡그리고 뿌옇게 변한 눈앞을 살피려 애썼다. 돕겠답시고 접근하는 것들도 파편과 구분하기가 힘들어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는 형체들에게는 피아 상관없이 모두 들짐승처럼 이를 드러내 보이고 검을 들어 위협했다. 황급히 물러나면 아군, 달려들면 파편이었다. 물러서지 않는 것들을 다 베면 그만이다.
구름은 걷히지 않고 비는 그칠 기색이 없었다.
날이 흐린 탓에 하늘이 어두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떴는가? 사실 낮은 다 지난 지 오래고 어느새 졌는가?
더 이상 자리에 버티고 서있기도 힘들었다. 어두컴컴한 회색 하늘 아래에서 빗물에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문질러 눈가를 닦아냈다. 손에 묻어난 것들은 피가 섞였는지 투명한 붉은색이었다.
닦아내도 비가 쏟아져 다시 젖고, 온몸이 이미 축축해 소매로 문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애를 써도 여전히 흐린 시야로 간신히 주위를 살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다. 영원 같던 이유가 있었다. 달려드는 파편이 적고, 아군도 절반이 넘게 줄었다.
거세게 타오르던 검의 불꽃은 비를 맞은 모닥불처럼 서서히 사그라들어 빛을 잃었다. 나는 다시 평범하게 돌아간 칼날 끝이 땅에 닿을 만큼 팔을 늘어트리고 숨을 헐떡였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몇천의 파편 대신 내 배 속이 난도질당한 것 같았다. 생명을 쥐어짜 내 바치느라 혹사당한 심장은 더 이상 제대로 뛰고 있는지도 모르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팔다리는 누가 건드리면 툭 끊어질 것 같고 손발은 마비가 온 것처럼 둔했다. 감각이 사라진 사지 대신 온몸의 모든 혈관과 신경이 비에 젖어 차게 식은 피부 밑에서 자글자글 끓었다.
하지만 주위에 더 이상 베어 넘길 키서세나스의 파편이 없었다. 오늘은 이렇게 끝이 난 것인가?
갑자기 뺨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반사적으로라도 검을 휘두르지 못할 정도로 지친 것이 다행이었다. 키슈였다. 젖은 몸에 자잘하게 난 상처에서 피를 흘리는 검은 말이 내 얼굴에 코를 문지르고 있었다.
정신이 멍해 나는 내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천천히 뒤를 돌았다.
기사들 사이에 말에서 내린 황자가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온몸이 비에 젖은 그는 옷 군데군데가 붉게 물들어 있고 검에서도 피와 물이 섞인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내가 지쳐 정신이 흐린 사이에 파편 몇을 놓쳐 그에게 가도록 둔 모양이다.
나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어 그에게 다가갔다. 기사들이 주춤 물러났다. 사신이라도 본 듯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꼴이 꽤 험한 모양이지.
황자의 옷 중 붉게 물든 곳을 손으로 만져 살폈다. 옷이 베이거나 찢어진 곳이 없는 것을 보아 자신이 다친 것은 아니고 단순히 남의 피가 묻어 얼룩진 것 같았다. 나는 자꾸 감기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행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벌어진 입에서는 색색 쇳소리만 났다. 나를 내려다보는 황자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간신히 성대를 긁어 말소리를 냈다.
“졸려……. 가서 잘래. 자고 싶어…….”
울기라도 할 것 같은 이상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던 황자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를 가만히 보다가 느닷없이 인중과 입술을 타고 입 안으로 흘러드는 액체를 느꼈다. 빗물인가, 했는데 온도는 미지근하고 맛이 비렸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와 코 밑을 문질렀다. 내려다본 손은 온통 붉었다.
멍하니 손등에 새로 묻은 피를 보던 나는 곧 명치께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배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상체를 푹 숙이는 나를 황자가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펄펄 끓는 물을 삼킨 것처럼 목부터 아랫배까지 죄다 뜨거워 가만히 선 채 견디기가 힘들었다. 나는 부축하는 손길에도 불구하고 결국 격렬한 토기를 참아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아래로 무너졌다.
“컥… 흐, 헉…….”
이미 빗물이 고여 축축한 땅 위에 핏덩이가 쏟아졌다. 곧 두 무릎이 힘없이 떨어져 내려 바닥에 닿았다.
나는 한 팔이 잡힌 채 거의 엎드린 자세로 폭우 속에서 피를 토했다. 입 안에서부터 끝없이 흘러내리는 시뻘건 핏물이 세차게 내리는 비와 섞여 점점 주변으로 번졌다.
켁켁거리며 끈적한 핏물을 뱉어내던 입을 갑자기 떨리는 손이 덮었다. 황자의 흰 손가락 사이로 피가 질질 새어 나가 흘러내렸다.
나를 질식시켜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큰 손으로 내 코와 입을 모두 세게 틀어막은 황자는 그렇게 하면 내가 토혈을 멈출 것으로 생각하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그는 내가 제 피에 기도가 막혀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넋이 나간 채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막무가내로 입을 틀어막던 손이 흠칫 떨어지고 내가 목으로 잘못 넘어간 핏물에 힘겹게 기침하며 헐떡거리는 동안, 황자는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통에 생리적으로 눈물이 고여 흐려진 시야로 말을 탄 기사가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이 난장판에서 용케 말을 잃지 않은 기사는 말이 채 멈춰 서기도 전에 다급한 말투로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군대가 또 옵니다! 이미 고원 위에 올라 접근했습니다! 황자 전하, 피하십시오! 기병입니다!”
거의 죽은 듯이 내가 토해낸 피 웅덩이 위에 쓰러져 있던 나는 기사의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 힘을 주어 손으로 바닥을 밀어냈다. 황자가 기사 작위와 함께 내린 검은 더 이상 빛나지 않을 뿐 아직 손아귀 안에 쥐어져 있었다.
검 끝으로 땅을 짚어 비틀대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것에 넋이 나간 시선이 따라왔다. 황자가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를 내 등 뒤로 보내려 어깨를 세게 밀쳤다. 얼결에 뒤로 몇 발짝 물러서게 된 황자가 드디어 입을 뗐다.
“사샤…….”
나는 피할 줄을 모르고 자꾸 붙어오는 황자를 귀찮은 것을 떨쳐내듯 계속해서 밀어냈다.
내가 대답도 하지 않고 한 곳만 쳐다보고 있자 황자가 내 몸을 잡고 잠에서 깨우려는 것처럼 흔들었다. 처음에는 속삭이던 것처럼 아주 작고 미약하던 부름은 거듭할수록 비명에 가까워졌다. 어느새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애원했다.
“사샤. 사샤! 사샤, 제발… 사샤……. 가거라, 응? 도망가거라. 가버려. 혼자서라도 이곳에서 멀리 가거라.”
살아남은 기사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만 붙잡고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는 황자를 둘러쌌다. 그들도 알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이미 모두 죽었다.
기사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침묵을 지키며 호위 진형을 유지했다.
황자만이 빗속에서 절박한 음성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내 몸을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황자가 돌아보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내 얼굴에 대고 비는 것처럼 말했다.
“제발……. 제발! 네가 나를 사랑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안다!”
그 말에는 사 황자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여태껏 그렇게 보였나. 그는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을까.
“나도 다 알아. 그동안은 내 추악한 욕심으로 모른 척했다. 그저 널 곁에 두고 싶어서 그랬다. 내가 어리석었어. 끔찍하게 멍청했다. 나를 지키는 대가로 신이 너에게 무엇을 약속했든, 내가 다 주마. 나는 살아남는다고, 어차피 나는 산다고, 네가 그랬지. 그게 내 빌어먹을 운명이라고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결국 내가 황제가 된다지 않았느냐? 그것이 네가 본 내 운명이라면 제국의 황제가 가지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빗물이 스미는 눈으로 한동안 그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멀리 이름 모를 군대의 앞머리가 보였다. 나는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켰지만, 황자는 점점 다급해졌던 모양이다.
“이 땅의 모든 것이 다 황제의 것이다. 곧 다 내 것이 된다. 언제든 찾아오거라.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가 다 내어 주마. 무엇이든 주겠다. 제발, 사샤……. 그러니 제발 가거라. 잠시만 이 지옥에서 벗어나 있거라. 응? 내 말이 안 들리느냐? 가버리란 말이다! 제발 날 버리고 떠나…….”
그는 말로는 내게 가버리라 하면서, 손으로는 절박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계약을 깰 만큼 그를 사랑하는가? 아니었다. 나는 아직 아버지와의 계약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는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창백한 얼굴로 내게 매달리는 그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황자의 뺨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로 온통 젖어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아 반쯤 감긴 눈으로도 그의 까만 속눈썹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툭 떨어지는 순간만은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황자가 진흙탕에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내게 애원하는 동안 기병들은 이미 근접해 있었다. 수많은 말발굽들이 물을 튀기며 땅을 진동시키다 서서히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네프라타스의 저주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