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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는 별들 (5/17)

4. 지는 별들

어느새 초가을이었다. 초목은 여전히 푸르렀으나 해가 지고 나면 차가운 바람이 도시 위로 불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지도 세 달이 넘었고, 황녀가 떠난 지는 내일이면 어느새 한 달 반이 되는 아홉째 달의 첫 번째 날이다.

황녀는 그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카샤는 제 말이 씨가 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이 황녀에 대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지낸다면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버텼다.

황자는 서재에 앉아 태연히 일을 하다가도 종종 넋을 잃은 사람처럼 펜을 멈추고 멍하니 있는 일이 잦았는데, 그러면서도 절대로 먼저 빈 편지지에 안부를 묻는 글을 쓰지 않았다. 혹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나는 내 속에 있는 생각 중 아무것도 말로 꺼내지 않았다.

나는 황족 하나가 죽은 이후로 사실 속으로는 극도로 예민해져 한시도 사 황자의 곁을 떠나려 들지 않았다. 밤늦게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한 뒤 침실로 돌아온 황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따라 욕실에 들어가려던 내 이마를 손가락 두 개로 밀어냈다.

“안 되지. 큰일 나려고.”

“왜 안 돼?”

“내가 부끄러움을 타서 안 된다 치자. 이 손 좀 놓거라.”

“이미 다 봤잖아. 욕실에서.”

황자는 그대로 굳었다. 침실에 딸린 욕실 문을 사이에 두고 닫느니 마느니 나와 실랑이를 하던 도중이었다. 나는 지난번 키서세나스의 파편들이 찾아들었던 밤, 그가 욕조에 함께 들어가 피를 씻겨주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기억을… 하느냐?”

“응. 저기서.”

내가 열린 욕실 문틈 안으로 보이는 큰 욕조를 가리키려 손을 뗀 사이 정신을 차린 카샤가 다급하게 문을 쾅 닫았다. 나는 내 눈앞에서 닫힌 문만 보고 서있었다. 그가 욕실 안쪽에서 소리쳐 말했다.

“아무튼 안 된다! 그렇게 걱정되면 그 앞에 앉아있든지 하거라.”

곧 첨벙이는 물소리가 났다. 나는 그의 말대로 욕실 문 옆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한참 후 잠옷 차림으로 나와 나를 보고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란다고 정말로 그러고 있느냐? 바닥이 차니 어서 일어서.”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 일어났을 때였다. 침실 밖에서 사용인이 문을 두드렸다.

“황자님, 주무셔야 하는데 죄송해요……. 정문을 지키시는 기사님이 오셨어요.”

“무슨 일이냐?”

걸어가 문을 연 황자가 물었다. 나는 그를 졸졸 따라가 등 뒤에 붙어서 가만히 대화를 들었다.

“정문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예. 해가 있는 시간에 다시 오라며 돌려보내려 했지만 무슨 일인지 워낙 다급해 보이고, 또 이 물건만 전해드리면 황자 전하께서 자신을 알아보실 거라 주장하는 바람에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아무래도 배가 부른 여인인 듯한데…….”

황자는 기사에게서 받아 든 것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자가 손바닥에 올려 둔 것은 나무를 깎아 검게 색을 칠한 작은 조각상이었다. 아이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단순한 나무 조각은 작은 말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황자는 뒤를 돌아 잠옷을 벗고는 욕실에 들어가기 전 벗어두었던 옷들을 다시 주워 다급한 동작으로 입었다. 나도 일어나 검을 집어 들고 그를 따랐다.

“사람을 시켜 모시느라 오며 가며 시간을 지체할 것 없다. 내가 직접 마중을 나갈 테니 경이 앞서거라.”

사 황자는 그동안 황녀의 소식을 기다리며 내게 말을 타는 방법을 가르치고 검을 내려 기사 작위를 하사했다. 그래서 이제 나는 그의 앞에서 합법적으로 검을 찰 수 있었다.

나는 본성을 나서 다급하게 불려 나온 키슈의 등을 오르는 황자를 따라 옆에서 말을 달렸다. 손님을 두고 소식을 전하러 간 기사를 기다리던 나머지 문지기들은 황자가 직접 말을 타고 달려오자 당황해 경례를 올리고 정문을 열었다.

문밖에 망토를 걸친 여자 하나가 서있었다. 허름하고 품이 큰 옷을 입고도 가려지지 않은 큰 배가 보였다. 만삭의 임신부였다.

황자는 다급하게 말에서 내려 여자에게 다가갔다.

“제가 사 황자입니다.”

기사들은 황자가 행색이 추레한 여자를 공손히 대하는 것에 놀라 저들끼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문밖에 한참 세워둔 것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카샤는 여자를 조심히 걷게 해 기사들이 대화를 듣지 못할 곳까지 자리를 옮겼다.

“혹 테베나의 삼 왕녀 되십니까?”

여자가 황자의 물음에 망토의 모자를 끌어 내렸다. 드러난 얼굴은 허름한 옷과 다르게 햇볕을 받은 적 없는 것처럼 희고, 손은 거친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매끄러웠다.

여자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황자에게 보였다. 제국의 황족임을 증명하는 신분패였다. 죽은 삼 황자의 것이다. 카샤는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쏟아부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국에도 형님께서 그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 말고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황녀이신 누님께서 부인 되시는 왕녀를 돌보겠다며 한 달 전 테베나로 가셨는데 다들 수상쩍게 굴며 얼굴도 보여주지 않더라는 말만 전하시고 지금까지 소식이 끊겼습니다. 형님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왕녀께선 어떻게 이곳에 계신 겁니까? 도망을 치신 겁니까? 무엇으로부터요?”

피로한 기색의 왕녀는 서있기가 힘이 드는지 부른 배에 손을 올리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는 만삭의 몸으로 먼 길을 오는 데에 모든 기력을 다 쓴 듯 눈물도 더 이상 흘리지 못하고 마른 뺨과 덤덤한 말투로 그간의 사실을 전했다.

“나의 리브는……. 내 남편인 제국의 삼 황자 리베디온 이사르는 결코 역병에 걸려 신께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왕궁 밖의 내 저택에 암살자 여럿이 들이닥쳐 그를 우리가 자던 침실에서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나는 황자가 이를 악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나와 내 배 속의 아이도 죽이려 했습니다. 그가 두 생명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는 바람에 간신히 도망쳤습니다만 왕국에서는 나를 보호하려 들지도 않았지요. 나는 몸을 숨기며 도망치던 도중 남편이 항상 사 황자 이야기를 하며 모두 각별한 형제였다고 말하던 것이 생각나 이곳으로 향했습니다. 이 황녀께선 어디 계신지를 몰라 도움을 청할 수 없었고 제국의 황태자께서 계신 수도는 테베나에서 너무 멀었습니다.”

나는 왕녀와 사 황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어쩐지 길을 오는 내내 쫓기는 듯한 불길한 느낌이 들어 이 몸을 하고서도 쉼 없이 말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 서있기가 힘이 듭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실내로 들어가서 마저 하면 안 되겠습니까?”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카샤는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와 그가 만삭인 것을 기억해 냈는지 왕녀를 모실 마차를 끌어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옆에서 누가 무엇이라고 떠들든 주위가 흐릿해지며 정신이 정문에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문 너머, 이미 어둠에 잠긴 도심의 거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저절로 황자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곧 파편 셋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덮쳤다. 나는 검을 빼어 들고 그들을 단번에 베었다. 황자가 내린 검은 지난번의 날이 무딘 보검과 달리 확실히 사람을 살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머리를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뺨에 튄 핏방울을 손등으로 훔쳐 닦으며 뒤를 돌았다.

“나가야 해.”

“밖에서 암살자가 들이쳤는데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별궁 밖으로 나가야 해.”

황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창백하게 질린 왕녀를 부축하며 발을 떼지 않고 서있었다.

“돌아가면 안 돼. 위험해. 소리를 들어봐…….”

고집을 부리는 나를 의아하게 보던 그들은 곧 표정이 굳었다. 우리가 입을 다물고 숨소리를 죽이자 저 멀리서, 궁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가 전해져 왔다.

살육의 소리.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인간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살려달라고 비는 소리. 수많은 발걸음들.

그 소음들은 싸움이라기보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들려올 만한 것이었다. 나는 차가운 금속에 베인 숨들이 결국 끊어지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듣고 있었다.

본성 쪽에서 르리긴이 기사들과 밤 근무를 서던 병사들을 끌고 달려왔다.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성이 이미 점령당했습니다! 수가 너무 많아 대항할 수 없으니 당장 별궁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아연한 눈으로 방금 전까지 우리가 있던 본성 쪽을 바라보던 황자는 곧 이성을 되찾고 르리긴에게 명령했다.

“기사 열을 시켜 병사 백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가게 해라. 아직 궁에 남은 사용인들을 밖으로 대피시켜. 다 죽게 그냥 둘 수는 없다. 나를 노리고 온 것이니 내가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그들을 쫓진 않겠지. 나머지 기사들만 나를 따라라.”

삼 황자의 일로 경비를 강화해 이제 밤에 경비를 서는 자들은 모두 기사 오십과 병사 백이었다. 그는 일반 병사들이 적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두를 성으로 돌려보냈다.

“우리는 신전으로 가자. 네프라타스께서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황자는 왕녀가 키슈의 등에 오르도록 도왔다. 뒤이어 안장에 올라 왕녀의 뒤에 자리한 카샤는 뒤를 돌아보았다. 본성 쪽에서 키서세나스의 수많은 파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수백은 되어 보였다.

황족을 발견한 그들이 길을 막는 사용인들에게서 관심을 거둔 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서야 박차를 가했다. 나는 말을 달리는 기사들 사이에 섞여 그를 따랐다.

“큰길만 사용하여 도심의 피해를 최소화한다!”

우리는 말을 탄 덕에 파편들과 거리가 벌어졌지만, 그들은 마치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아는 듯 완전히 뒤처지지는 않고 끊임없이 따라붙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신전에 도착했다. 기사들은 주변을 확인하고, 카샤는 왕녀가 말에서 내리도록 도왔다. 언덕 밑에서 파편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 몇 분이면 이곳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우리는 빈 신전에 달려 들어가 가장 깊은 곳까지 흙발로 밟았다. 마지막 기사가 문을 통과하자 르리긴이 성소의 문을 걸어 잠갔다. 제단 뒤에 자리한 네프라타스의 거대한 신상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샤는 왕녀를 르리긴에게 맡기고, 죽은 인간의 육체를 품에 안은 신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곧 바닥에 두 무릎을 모두 꿇고 검을 쥔 손을 그대로 모아 제단 위에 올리며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입으로 무엇을 중얼거리는 황자를 지켜보았다. 나는 문득 그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신에게 빌고 있을까?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황자의 조용한 기도가 끝나지도 않았을 무렵,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곧 문에 무엇이 쿵,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시작으로 문이 부서질 듯 거세게 흔들렸다. 내가 말했다.

“카샤, 제단 위에 올라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몸을 떨며 가쁜 숨을 쉬는 왕녀를 보고서는 결국 그를 부축해 데리고 제단 위로 올라섰다. 수십의 기사들이 제단 앞을 완전히 막아 둘러섰다.

나는 검에 불꽃을 피웠다. 긴장한 와중에도 무언가를 느낀 기사들이 뒤를 돌아보고는 하나같이 신이라도 마주한 얼굴을 했다.

그들은 좀 전보다 두려움이 가신 표정으로 흔들리는 문을 다시 마주하고 섰다. 그들 등 뒤에 신의 사자가 서있다는 것처럼. 내가 그들을 모두 구원해 줄 것처럼.

문이 부서졌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수백의 파편들은 네프라타스의 성소 안을 꽉 메우고도 다 들어오지 못해 문밖에서 계속 공간을 압박하며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성에서 황자를 찾으며 사용인들을 학살하던 것들까지 죄다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카샤는 좋아할까? 그들 대신 자신이 위험해져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둘러 키서세나스의 파편을 조각냈다.

기사들은 맹렬히 싸웠다. 수를 당할 수 없었을 뿐. 숨이 달리고 몸이 지친 기사들은 곧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졌다. 숨이 끊어져 가는 그들이 하나같이 절망과 공포가 깃든 얼굴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파편들을 베며 어지러운 정신으로 생각했다. 신이 너희를 지킨다고 누가 약속했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기사들이 모두 죽어 누워있었다. 아직도 몰려드는 파편들은 차갑게 식은 그들의 몸을 짓밟아 가며 내게 달려들었다. 수백을 베었는데도 수백이 남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느새 뒤로 몰린 르리긴과 왕녀, 황자는 신상의 무릎에 누인 인간의 조각상을 밟고 올라서서 오갈 데 없이 네프라타스에게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등 뒤에 선 자들에게 접근하는 파편들을 모조리 죽였다.

제단에 홀로 올라선 내 주위로는 조각난 시체가 수없이 쌓여있었다. 심장이 아프다. 축축 처지는 몸과 달리 손에 쥔 검에서는 찬란한 황금빛 불꽃이 타올라 파편들을 베고 또 벴다.

나는 자꾸만 졸음이 와서 눈이 반쯤 감기고 팔다리에 상처가 늘어가면서도 위기감이 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나는 이곳에서 죽지 않아. 나는 희게 쌓인 눈 위에서 죽는다. 오늘이 아니다. 아직 겨울이 아니야.

나는 돌로 깎인 아버지를 무심코 올려다보았다. 신의 얼굴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힘을 다하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카샤가 정신을 놓은 나를 향해 들리지 않는 고함을 질렀다.

흐릿한 정신이 잠시 육체도 멈추었을 때였다. 성소 밖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곧 들이닥친 그들은 파편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검을 든 그들은 파편 하나에 두셋이 스러지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싸워 적의 수를 줄여갔다. 결국 마지막 파편이 심장을 꿰뚫려 죽었다.

낯선 기사들이 내어준 길로 성소에 들어온 사람이 황자를 발견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무사하십니까? 이 황녀 전하께서 저희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황자는 왕녀가 신상에서 내려오는 것을 돕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서있었다. 추워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검을 든 손이며 입술까지 덜덜 떨렸다. 오한이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와 나를 옥좼다.

황자는 르리긴이 왕녀를 부축하게 두고는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몸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피와 경련하듯 떨리는 몸과 혼이 빠진 듯한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그는 기사가 다친 곳이 없냐며 말을 걸 때서야 흠칫 정신을 차렸다. 황자가 다급히 겉옷을 벗어 내 어깨 위에 덮으며 기사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디의 기사들이냐. 제때 도착해 싸워준 덕에 우리가 목숨을 건졌다.”

“저희는 펠리서스에 주둔하고 있던 이 황녀 전하의 사병입니다.”

그는 질문을 하면서도 내가 검을 놓게 하려고 내 손을 감싸쥐고 있다가, 기사의 대답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너희가 어떻게 여기 있단 말이냐? 누님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지?”

내게서 앗아간 검을 든 사 황자의 얼굴은 조금 서늘한 느낌이 있어서, 그의 앞에 서있던 기사는 어쩐지 조금 변명하는 투가 되고 말았다.

“한 달 하고 일주일 전, 이 황녀 전하께서 테베나에서 수도로 가시던 도중 펠리서스의 저택에 들르셔서 말을 전하고 가셨습니다. 당신께선 수도에서 알아볼 것이 있으니 혹 정확히 한 달 후에도 아무 연락이 없다면 바로 모든 병력을 끌고 에오네테로 가서 사 황자 전하를 지키라고, 그렇게 명하셨습니다.”

펠리서스는 수도의 동남쪽, 에오네테의 남서쪽에 있는 항구 도시였다.

제국의 수도인 헬베세노바, 황제의 별궁이 있는 에오네테, 이 황녀의 별장이자 사택이 위치한 펠리서스를 지도 위에서 펜으로 이어 그리면 완벽한 정삼각형이 나온다. 황녀는 위험을 예감하면서도 자신의 사병이 수도가 아닌 동생이 있는 에오네테에 도착하도록 예비해 두었다.

카샤는 나와 같은 것을 깨달았는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너희도 누님을 마지막으로 뵌 지가 한 달이 넘었단 말이냐?”

“예. 수도로 떠나신 이후에는 뵙지 못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별궁에 일이 터질 것을 어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께서 도우신 모양입니다. 하마터면 같은 해에 황족 두 분을 잃…….”

기사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황자의 눈치를 보며 말을 멈췄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몇천이나 되는 병력을 영광되신 황제 폐하의 승인 없이 움직이는 것은 반역죄로 여겨질 수도 있는 행동이나, 황녀 전하께서 너무나도 단호하게 명령하시는 바람에……. 에오네테로 가서 다른 연락이 없을 때까지 사 황자 전하를 지켰는데도 아무 일이 없어 병력을 움직인 일로 수도에서 추궁이 오면 당신께서 다 책임지시고 없던 일이 되도록 물러주실 것이고, 무슨 일이 난다면 사 황자 전하를 보필하며 기다리면 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셨느냐…….”

넋이 나간 듯한 말투로 대답하는 그의 표정에서 채 숨기지 못한 불안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황자는 사람들을 불러 우리가 더럽힌 신전의 성소를 청소하도록 했다.

펠리서스의 기사들은 제단 앞에 수북이 쌓인 시체와 창백한 얼굴의 나를 번갈아 흘깃댔다. 내가 홀로 적들 수백을 죽였다고, 검에서 불꽃이 타올랐다고, 마치 신의 사자 같았다고. 펠리서스에서 온 기사들 중 가장 앞서 성소를 밟고도 살아남은 자가 그렇게 동료들에게 소곤대는 모양이었다.

황자는 신전의 뒤뜰로 대피해 있던 네프라타스의 신관들을 불러 자신이 신전을 어지럽혔으니 신관들과 신전의 사용인들을 모두 며칠간 제 별궁에서 머무르게 하겠다고 주장했다.

안 그래도 피와 시체로 더럽혀진 성소 안을 들여다보고 토악질을 하던 신관들은 황자의 말을 반갑게 여기고 펠리서스의 기사들을 따라 별궁으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왕녀도 신관들에게 부축받으며 신전을 떠났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파편들은 숨이 끊어지고 나자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키서세나스의 피와 살, 뼈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신전 밖으로 옮겨졌다.

핏자국을 닦아낸 사람들이 성소를 빠져나가자 아버지의 신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희고 성스럽게 돌아와 있었다.

“지금이… 몇 시지?”

“새벽 네 시가 지나지 않았습니다.”

황자는 곁을 지키려는 르리긴도 신전 밖으로 내보냈다. 버티려던 르리긴은 심상치 않은 황자의 표정을 보고는 우리를 두고 순순히 자리를 비웠다.

눈이 마주쳤다. 황자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애원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르리긴이 성소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문을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카샤는 르리긴의 발소리가 성소를 겹겹이 둘러싼 벽들 너머로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렸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인 그가 내게 물었다. 왕녀가 전한 나무 말 조각이었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셋째 형님께서 아직 망아지이던 키슈를 내게 주셨을 때, 내가 답례로 나무를 깎아 형님께 드린 것이다.”

그는 성인이 되던 날을 회상하는 듯 가만히 조각을 내려다보다가, 시뻘겋게 분기가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 알 수 없는 적들이 다정하던 우리 형제들을 죽음으로 완전히 갈라놓았다. 살아서는 다시 형님을 뵙지 못하겠지.”

나는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황자는 화가 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해서 나는 그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기가 힘이 들었다. 내가 말없이 그를 보고만 있자, 결국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답해. 내가 묻는 것에 숨김없이 대답하거라.”

나는 머릿속으로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들을 나누어본 뒤 말했다.

“응.”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황자가 결심한 듯 질문을 내뱉었다. 카샤가 네프라타스의 신상을 가리켰다.

“왜… 왜, 저 신상의 인간이 나와 똑같이 생겼지?”

나는 멍하게 황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질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가 다시 짓씹듯 말했다.

“내 적들은 도대체 누구인 것이냐?”

나는 고개를 돌려 네프라타스와 인간의 모습을 조각한 흰 석상을 보았다.

석상은 규모가 거대해서 의자에 앉은 듯한 신의 무릎만으로도 사람의 키와 엇비슷하고, 신의 얼굴은 더 높이 솟은 곳에 있었다. 신의 품에서 죽은 인간의 형상은 목이 뒤로 젖혀져 얼굴이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신전 바닥에 서서는 그의 얼굴이 어떤지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제단에 제물을 올리고 신에게 무릎 꿇어 기도를 올리는 동안은, 신의 엄숙하고 자애로운 얼굴만이 그들을 압도하며 내려다본다.

나는 깨달았다. 신상 위에 올라섰을 때, 그가 제 발에 짓밟힌 저 자신을 내려다보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묻지 않느냐! 왜 네프라타스께서 품에 거두신 인간의 얼굴이 나와 닮았는지……. 이 신상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첫 황제께서 제국을 세우시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닮았어…….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에게 사실을 말해야 할지, 그저 침묵을 지켜야 할지 갈등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지나치게 상심해 맞서 싸울 의지를 잃지는 않을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알 수 없는 적들과 싸우며 언제까지 지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운명을 들여다보고도 허무에 잠겨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인가.

사실을 말한다면 어디까지 알려야 하는가? 말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 숨길 것인가?

내가 많은 것들을 저울질해 보고 있을 때였다. 그가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제발 말해다오. 신께서 너를 내게 보내셨다. 너를 통해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시려 하시는 것이냐? 너는, 너만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아무것도 모른 채 무력하게 당하는 동안 이미 형제 하나가 죽고 하나는 생사마저 불분명하게 되었다. 더 이상은 잃고 싶지 않아. 무엇이라도 대비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전쟁으로 모두 잃을 것 같아 불안하다. 내가 발버둥이라도 칠 수 있게 해줘…….”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피로에 찌든 머리가 핑핑 돌면서도 생각에 잠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발버둥이라도 칠 수 있게 해달라……. 알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신의 목이라도 베어 망자에게 바칠 것인가? 벗어나려 든다고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운명이란 이름으로 불리지도 않았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운명은 육체가 채 지어지기 전에서부터 영혼에 묶인 사슬이며 삶에서는 목을 조이는 올가미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비웃는 표정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해볼 테면 해봐. 나는 툭 말했다.

“넌 황제가 될 거야.”

“뭐?”

“네가 황제가 될 거야.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어.”

“무슨… 말이냐? 내 위로 형제들이…….”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굳혔다. 그래. 죽은 삼 황자와 실종된 이 황녀. 하나하나 모두 죽어갈 거야. 널 위해. 네 운명을 위해 신께 바쳐지는 산 제물이다. 불만인가? 운명이라도 가진 것을 고맙게 여겨. 네가 그를 버리고 도망쳐 택한 그 자리…….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화를 내고 있었더라. 카샤는 순한 양의 표정으로 돌아온 나를 생경한 것 보듯 하고 있었다.

“…대체 왜? 형님들과 누님, 내가 그분들과 무엇이 다르길래?”

운명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정교하고도 무질서했다. 오늘 덧없이 죽은 자가 다음 생엔 황제가 될 수도, 지난 생에서 누구보다 고귀했던 자가 오늘 무참히 바닥에 쓰러져 짓밟힐 수도 있다. 나는 말을 돌려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원래 그런 거야.”

“그럼 저자는, 나와 얼굴이 같은 저자는 대체 누구냐.”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그에게 찬찬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다. 하지만 나를 위하여 진실의 일부분, 그 작은 조각만은 왜곡해야 했다.

오래전 제국이 아직 작은 도시 왕국이던 때에, 네프라타스와 키서세나스가 첫 왕과 사랑에 빠졌다.

인간의 영혼이 시간 앞에 덧없이 스러질 것을 두려워한 신들은 사랑하는 그를 놓을 수 없어 죽어가는 왕을 붙들고 신이 되라고 말했다. 저들의 일부를 줄 테니 함께 하늘에 올라 구름 위에 앉자고 했다.

왕은 그들을 거부하고 인간인 채 죽었다. 그는 영원 속에 신들을 홀로 남겨두고 죽음으로 도망쳤다. 네프라타스는 지금까지 그를 어여삐 여기고, 키서세나스는 자신을 버린 그를 아직도 증오한다.

네프라타스는 왕이 죽은 후 영혼 없이 남겨진 육체를 거두어 자손을 남긴 적이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한곳에 고인 신들의 사랑과 증오가 인간에게 남겨진 신의 핏줄과 공명해 그의 영혼을 다시 먼 후손의 몸에 불러들였다. 꼭 닮은 얼굴로.

운명 같은 우연인지, 우연 같은 운명인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는 저자를 모른다!”

그가 소리쳤다.

“기억이 나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아! 얼굴밖엔 같은 것이 없는 자가 어떻게 나와 같은 사람이란 말이냐?”

“네 영혼이야.”

“내가 아니야! 아니다! 신께서 그를 그렇게도 증오했다면 그때에 영혼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신들의 강에 던졌어야지, 왜 이제 와서 나에게, 대체 왜… 왜…….”

발악하듯 전쟁과 칼날의 신 키서세나스에게 저주를 퍼붓던 사 황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실낱같은 희망이 떠올라 있었다. 가망 없는 희망이 빚어낸 표정은 광기와도 조금 닮은 면이 있었다.

황자가 다급한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서서 밀어를 나누듯이 속삭였다. 눈을 번득이는 그의 목소리만이 적막한 신전을 울렸다.

“사일, 내 사샤……. 나와 도망가자. 응? 이대로 함께 도망쳐 숨어 살자. 신들조차 우릴 찾을 수 없는 깊은 숲속에 작은 집을 짓고 함께 살아가자. 네 말대로라면 나의 형제들도 다 같은 신의 핏줄이니,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면 네프라타스께서도 결국 나를 버리시고 대신 내 형님이나 누님을 택하시지 않겠느냐? 너도 오늘 나를 지키려다 다쳤다. 네가 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가 없다……. 같이 이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자. 모두 상관없어……. 나는 너만, 너만 있으면…….”

숲은 네프라타스의 권속들로 가득 찬 곳이다. 신에게서 도망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장소였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궁지의 몰린 자의 헛소리려니 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 없이 가만히 선 나를 보는 황자의 표정이 서서히 절망에 물들었다. 그는 아연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넋이 빠진 것처럼 내뱉었다.

“나를 사랑하긴 하느냐?”

“응.”

나는 이번엔 아무렇지 않게,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황자는 저를 둘러싼 모든 것에 의심이 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나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신께 맹세하거라. 네가 처음 이곳에 나를 위하여 왔는지, 네 아버지인 신의 영광을 위하여 왔는지, 무슨 목적이었든 이유가 무엇이든 다 상관없다……. 지금은, 지금은 끝내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지? 그렇지?”

“응…….”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신상에 팔려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내 어깨를 그가 거세게 움켜잡았다.

“날 보고 말해! 내 눈을 마주하고 날 버리지 않겠다고, 사랑한다고 말해보란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단 하룻밤 사이에 신들이 제멋대로 정해놓은 끔찍한 운명을 마주하고 제 영혼마저 부정당한 사 황자의 눈빛은 혼란스러운 듯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해주었다.

“사랑해.”

그러고는 황자의 떨리는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땅에서 잠시 떨어졌던 뒤꿈치를 내리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는 멍하니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족한가? 아직도 의심을 키우는 것일까? 나는 멍청하게 선 그에게 다시 입 맞추었다. 이번에는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가늠하듯 그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보고는 꾹 다문 입술을 가르고 스스로 혀를 섞었다. 이쯤이면 충분하다 싶어 다시 그에게서 떨어지려 할 때, 큰 손이 내 뒷목을 움켜쥐듯 받쳤다.

다른 손으로 내 턱과 뺨을 단단히 쥔 황자가 갑작스럽게 달려들었다. 그는 마른 사막을 헤매던 자가 샘물을 발견한 듯 행동했다. 떨어지려 들지 않아 숨이 막혔다.

나는 막무가내로 구는 황자의 몸에 밀려 조금씩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숨이 달아 뒤로 한 걸음 주춤 물러나면 그는 내게 두 걸음 다가섰다. 열 오른 몸이 집요하게 달라붙으며 진득하게 입술을 빨고 서로의 혀와 타액을 뒤섞었다.

나는 등 뒤가 무엇인가에 막혀서야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췄다. 등허리에 제단이 닿아있었다.

그는 내가 뒷걸음질 치지 못하는데도 상관하지 않고 몸을 붙였다. 내가 뒤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등에 팔을 둘렀을 때였다. 입술을 떼지도 않은 황자가 뺨을 쥐던 손을 내려 내 허벅지 두 쪽을 한 번에 감싸 안았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나는 어느새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헐떡이며 제단 위에 길게 누운 채였다. 그가 순식간에 내 몸 위에 올라탔다.

그가 혼탁한 눈으로 제 아래에 가둬져 누운 자를 내려다보았다. 황자의 짙은 푸른 눈동자엔 신을 향한 분노, 제 운명을 원망하는 마음과 육체의 욕망 같은 온갖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어둡게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결국 상체를 낮춰 한 손으로 내 옷의 끈을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상의가 헤쳐지고 황자의 손이 맨살결 위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관자놀이에 입맞춤이라도 하듯 가깝게 붙은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이대로 너를 여기서 취하면… 신상의 얼굴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 제단 위에서 널 더럽히면… 신께서도 나를 역겹게 여기시어 내다 버리시지 않겠느냐, 응? 그렇지 않느냐? 아니냐?”

나는 귓가에 쏟아지는 더운 숨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상관하지도 않고 턱 밑, 목의 울대 같은 곳에 끊임없이 입술을 누르며 내 옷을 남김없이 벗겨냈다. 나는 네프라타스의 제단 위에서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짐승처럼 피를 흘리며 누워있었다.

그는 내가 좀 전까지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쓸모없는 것 치우듯 제단 아래로 던져버리더니 숨겨진 곳 없이 드러난 내 몸에 여기저기 난 상처마다 사뭇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그가 뜨거운 입술이며 큰 손으로 내 몸을 매만지는 곳마다 신이 새긴 주술과 공명하며 피부가 불에 덴 듯 달아올랐다. 황자의 체온은 신언에 묶인 내게 독주와도 같았다.

그가 건드리는 대로 멍하게 제단 위에 팔다리를 늘어트리고 누워, 마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신들은 외로움을 견디며 끝이 나지 않는 영원을 버텨왔다. 고작 이런 짓으로 널 내버려 둘 마음이 들 것 같아?

나는 어쩐지 절박함이 비치는 황자의 얼굴을 보기가 거북해 나를 완전히 덮은 그의 아래에서 간신히 몸을 돌렸다.

서늘한 제단 위에 맨가슴과 배를 대고 엎드려 누웠다. 매끄러운 돌 제단에 뺨을 기대자 정말로 곧 배가 갈라져 피와 내장을 쏟을 제물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가 예전 이 신전의 성소 안, 바로 이 제단 위에서 짐승에게 하던 것처럼 내 심장에 단검을 내리꽂을 것만 같았다.

전투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은 채로 타인에게 등 뒤를 완전히 내어주는 일은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었다. 그를 공격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나는 무방비한 등에서부터 쭈뼛하도록 뒷목을 타고 올라 느껴지는 위험 신호를 무시하며 그의 몸 아래에서 가만히 있으려 애썼다. 칼날 대신, 황자는 입술을 내렸다.

흠칫 떨고 말았다. 귀밑으로 드러난 부드러운 살에 누르듯 입 맞추는 것으로 시작한 그는 목덜미와 척추를 따라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오한으로 떨리던 몸에는 어느새 열기가 돌아 피부가 화끈거렸다.

곧 뒤에서 황자가 제 옷을 끄르는 소리가 났다. 그가 다시 무겁게 몸을 붙여와 등에 한 치도 남김없이 달라붙기 무섭게 나는 속이 헤집어지는 감각에 신음을 삼켜야 했다.

“흐으… 헉…….”

나는 배 속이 거세게 들이받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제단 위에 뺨과 이마를 문질렀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제단의 모서리를 두 손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몸 아래는 차가운 제단이 견고하고 등 뒤는 황자가 짓눌러 도망갈 곳이 없었다. 나는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처럼 제단을 붙들고 엎드린 채 모든 손끝으로 단단한 돌 위를 긁어내렸다.

우리는 한참을 짐승처럼 들러붙어 교미와도 같은 짓을 거듭했다. 발버둥도 치지 못하고 황자의 밑에 깔려 신음하던 나는 끝에 가서는 그를 견딜 수 없어 발끝만 바르작대며 거의 흐느끼는 듯한 숨소리를 내고 말았다.

허벅지가 경련하듯 바르르 떨렸다. 황자가 등 뒤에서 내 목덜미와 어깻죽지를 이로 다 짓씹어 놓고는 말했다.

“우리를 좀 보거라… 응? 개처럼 흘레붙고 있지 않느냐? 이래도 신이 변함없이 내 영혼을 어여삐 여기시느냐? 제 아들과 붙어먹는 나를 아직도 사랑한다더냐? 말해보거라…….”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몸에 새겨진 신언이 살을 파고들어 폐 속까지 태워버릴 듯 뜨겁게 달아오르고, 명치 아래 깊은 배 속에는 달군 쇳덩어리가 들어차 굴러다니는 것만 같았다.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것이 저들끼리 뒤섞여 아랫배 안에서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억압당한 몸은 비상과 추락을 거듭한 끝에 지쳐버렸다. 어느새 뺨을 타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제단에 고였다. 황자는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버린 뺨과 푸른 핏줄이 돋은 관자놀이에도 진득이 입을 맞추며 내 위에 거친 숨결을 쏟아냈다.

호흡이 가늘어져 의식이 부옇게 흐려지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황자가 마침내 움직이기를 멈추었을 때, 나는 이미 목을 물어뜯겨 숨이 끊긴 짐승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득하고 끈적한 감각들이 습지의 안개처럼 피부밑에 남아 내 몸에 스몄다. 그는 힘없이 축 늘어진 몸과 제단 사이에 손을 넣어 내 배를 팔로 둘러 안고는 식은땀에 젖은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나를 힘주어 껴안은 황자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사샤, 사샤… 사랑하는 내 사샤… 우리 이대로 사라져 버리자…….”

나는 그 후로 결국 탈진해 정신이 흐렸다. 황자는 내 몸에 옷을 다시 입히고 자신의 겉옷으로 감싸서 안아 들고는 성소 밖으로 나섰다. 그가 걸음을 옮겨 여러 복도를 지났고, 신관들이 다니는 신전의 뒷문은 소란 덕에 잠겨있지 않았다.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해가 뜨기 직전의 하늘은 동쪽의 산등성이만 테를 칠한 듯 붉고 나머지는 온통 어두운 바닷속처럼 푸르스름한 빛이었다.

가을의 새벽은 벌써 바람이 꽤 서늘하게 불어서, 나는 품 안에서 몸을 더욱 웅크렸다. 나를 단단히 고쳐 안은 그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곧 신전을 돌아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키슈가 나타났다.

검은 말은 황자의 팔 안에 늘어져 안긴 나를 순진한 검은 눈동자로 빤히 보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 내 목덜미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카샤는 나를 들어 말 등에 옆으로 탄 자세로 올려놓고 곧 저도 등자를 밟고 뛰어올랐다. 그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안장에 앉았다. 나는 그가 내 상체에서 흘러내린 겉옷을 다시 끌어 올려 걸쳐주는 것을 느끼며 품에 완전히 기댔다.

키슈가 땅을 박차며 출발했다. 우리는 에오네테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잠시 깨어났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황자는 얕게 잠들어 눈을 뜨지 않는 나를 데리고 하루를 꼬박 말을 달려 에오네테도, 황제의 별궁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갔다. 그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려 들고 있었다.

* * *

눈을 떴을 때에는 햇볕 냄새가 나는 침대 위에 누운 채였다. 따듯한 노란색으로 물든 오후였다.

나는 나른하게 풀어진 몸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듬어 깎은 나무 기둥을 엮어 지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조그맣게 난 창 밖으로 무성하고 푸른 숲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문 대신 두꺼운 천을 내려 가린 방 밖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곧 한 손으로 천을 걷으며 황자가 들어왔다. 다른 손에는 그릇이 들려있었다. 그가 김이 오르는 그릇을 흠집 가득한 협탁에 내려두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일어났느냐?”

그는 얌전히 누운 내 입과 뺨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며 손으로 내 이마와 목을 만져 열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그의 손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는 동안 잠기운을 떨치려 애썼다. 눈꺼풀과 팔다리가 무거웠다.

“이틀을 내리 잤다. 먹지도 않고 더 잠만 잤다간 몸이 상할 것 같아 마침 깨우려고 했는데… 때맞춰 잘 일어났구나.”

그가 수저로 수프 그릇을 휘젓고 입바람도 휘휘 불어 식히는 시늉을 하더니 그릇을 내게 내밀었다.

“태우지만 말자고 나름 하기는 했는데… 맛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먹거라.”

나는 그릇을 받아 들지 않고 그를 보며 물었다.

“여기 어디야?”

“사냥꾼에게서 산 오두막이다. 숲속이라 풍경도 보기 좋고, 조용하고… 좋지 않으냐? 우리가 입고 있던 옷에서 금은과 보석을 떼어 팔았다. 둘이서 겨울을 나기에는 충분한 돈이지. 가까운 마을에서 식재료를 사 오면 돼. 어서 먹어보라니까.”

어쩐지 황자는 농촌의 범부나 입을 만한 단순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자는 사이 어디서 빌려 온 듯했다.

나는 수프를 뜬 수저가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바람에 얼결에 입을 벌려 받아먹고 말았다. 그는 나를 빤히 보며 내가 평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싱거워.”

카샤는 무안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더니 소금을 가지러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나는 황자가 막다른 길까지 몰려 저질러버리고만 이런 현실 도피적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최악부터 차악까지 찬찬히 생각했다.

이 황녀는 소식이 없고, 테베나의 왕녀가 배 속에 품은 어린 황족의 육체는 아직 미성숙해 사 황자가 있는 이상 파편들의 관심을 크게 끌기 어렵다. 다르게 말하자면 조금은 그것들의 주의를 끌 수 있다는 말이다.

키서세나스는 며칠 전 에오네테를 급습하느라 힘을 많이 썼다. 다시 많은 수를 보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평화로운 환경에 둘러싸여 잠이 덜 깬 나는 그만 안일하게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조금은… 이곳에 숨어있어도 괜찮겠지.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그가 어디로 도망치려 들든, 모든 것들이 맞물려 우리는 결국 그 설원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한없는 게으름이 몰려들었다. 얼마 전 힘이 거의 다해 계약이 깨지는 줄로만 알았을 때에도 그의 운명이 당겨지거나 하는 일은 결국 없었다. 나는 침대에 한껏 늘어졌다.

황자는 소금을 찾는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부엌을 뒤지다가 결국 양념 통을 찾아내어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수프에 소금을 섞었다.

“하다 보면 늘기도 하겠지……. 못 먹을 정도냐?”

내가 침대에 누워 멀뚱히 그를 쳐다보자, 그가 머쓱한 듯 입을 열었다.

“저녁거리는 마을에서 얻어 오마…….”

다시 외출했던 그가 얻어 온 음식들은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수수한 맛이 있었다. 우리는 삶은 감자와 절인 고기, 곡식알이 통째로 섞인 빵과 나무 열매 같은 것들을 나누어 먹고는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오두막에서의 나날은 시종도 하나 없어 생활이 번거로운 대신 더할 것 없이 평화로웠다.

매 끼니마다 음식을 직접 하거나 얻어와야 했고, 몸을 씻으려면 근처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불로 끓여 덥혀야 했다. 황자는 나를 위해 그 모든 일을 매번 귀찮은 기색도 없이 해냈다.

발가벗어도 춥지 않고 땀을 흘려도 곧 마르는 적당한 날씨 덕에 우리는 종종 입을 맞추다 멈추지 못하고 몸을 섞었다.

황자는 서툴고 다급했던 처음의 일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며 더없이 다정하게 굴었다. 집 안 아무 곳에서나 뒹굴다 벗은 채 잠들기도 일쑤였지만 다시 눈을 뜨면 항상 침대 위였다. 그가 나를 들어 옮기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나 마을 구석에 자리를 잡은 잘생긴 이방인에 대해 호기심에 찬 눈을 한 사람들이 오두막을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큰 도시에서 떨어진 시골 마을을 평생에 한번 벗어난 적도 드문 순박한 사람들은 사 황자의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마을에 처음 생필품을 사러 갔을 때의 옷차림을 본 주민들은 그가 큰 죄를 짓고 도망친 귀족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황자의 얼굴을 구경하려 오두막 근처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생기면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거나 오히려 몰래 도망을 나와 산책을 할 겸 손을 맞잡고 한가롭게 숲속을 거닐었다.

어느 날 사람들의 관심이 식어갈 즈음이었다. 우리는 차와 간식거리를 들고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사냥꾼의 작은 마당은 별궁의 정원과는 달라 키 작은 잡초와 풀꽃이 뒤섞여 제멋대로 피어있었지만, 맨살에 상처를 낼 만큼 무성하지는 않았다.

가을 햇볕을 쬐며 부드러운 풀밭에 반쯤 누운 채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안부 인사 같은 가벼운 입맞춤으로 시작한 접촉은 어느새 끈적한 키스로 돌변했다. 옷자락 아래 허리춤의 맨살을 조금 거칠어진 손이 만지작거리고, 그가 거의 내 위에 올라타기 직전이었다.

“어머나!”

뒤에서 기척과 함께 새된 비명이 들렸다. 황자는 놀라서 입술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천이 덮인 바구니를 든 시골 아낙이었다.

말려 올라갔던 옷자락이 곧 재빠른 손길로 다시 정리되고 몸이 일으켜졌다. 시선에서 숨기듯 나를 제 몸 뒤에 세운 황자가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아니… 혼자 사는 것 같아서 먹을거리를 좀 나누어주려고 했는데, 혼자가 아니었네…….”

여자는 얼굴이 확 붉어져선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황자가 다가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낙이 수줍게 내미는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가득하면서도 황자와 그 등 뒤에 반쯤 가려진 나를 번갈아 흘끔흘끔 훔쳐봤다.

“주책맞게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어선 남는 걸 조금 가져와 봤는데… 두 명인 줄 미리 알았으면 좀 더 가져올 걸 그랬네, 요…….”

황자가 천을 걷자 바구니 안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빵과 비스킷이며, 치즈 조각, 말린 과일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동작에서 묘한 우아함을 발견한 아낙이 안절부절못하며 손사래를 쳤다.

“잘 먹겠소.”

“잘 먹을게.”

나도 황자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 인사했다.

“마을에서도 나름 솜씨가 좋다는 말을 들으니 맛있게들 먹어요……. 바구니를 다시 가지러 올 테니 뭐 필요한 게 더 있으면 얘기하고……. 아이고, 난 하루 종일 할 일이 많아서 얼른 가봐야겠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던 아낙은 주절주절 말을 쏟아놓곤 홱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떠나던 것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던 황자의 어깨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뒤돌아선 그의 얼굴엔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가득했다. 바구니를 든 그가 킬킬대며 말했다.

“어쩌느냐, 이제 꼼짝없이 소문이 나버리겠구나.”

그가 나를 집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탓에 마을의 사람들은 그동안 내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런 좁은 곳에서는 한 명이 무엇을 알게 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진다. 다 들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우리는 며칠 지나지 않아서 방문객이 전보다 훨씬 늘고 말았다. 소문 속의 그와 나는 어느새 집안의 반대로 무작정 도망쳐 나와 사랑의 도피를 해버린 치기 어리고 혈기 넘치는 젊은 연인이 되어있었다.

도통 큰일이 날 일이 없어 지루한 시골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흥미진진한 눈요깃거리가 되어버린 사 황자는 순진하고도 집요한 관심을 며칠 어색해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적응해 우리를 구경 온 마을 사람들이 핑계 삼아 가져다주는 음식들을 능청스럽게 덥석덥석 잘도 받아 내게 먹였다.

덕분에 우리는 남아있던 돈을 거의 쓰지도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평화로운 시간은 활을 떠난 화살같이 흘렀다. 계절은 빠르게 바뀌어 여름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어느새 늦가을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르른 하늘 아래로 곧 올해의 두 번째 추수를 앞둔 밀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풍년을 맞아 빽빽하게 익은 거대한 밀밭은 고요히 부는 가을바람 아래에서 한 몸으로 춤추듯 물결치며 황금빛 파도를 그렸다.

해가 질 때가 되자 하늘 한쪽도 밀밭의 색이 물들어 오른 듯한 황금빛이었다. 황자는 푸른 하늘에 서서히 번져가는 금빛 노을 아래에서 내 손을 잡고 밀밭 속으로 이끌었다.

일을 하던 사람들은 저녁 시간이 되자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 우리가 밀밭을 헤치며 가는 것을 보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허리가 베일 밀밭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부는 바람결에 그들이 서로의 몸을 스치며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사방이 온통 유언이었다.

황자는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우리 둘 모두의 머리칼을 매만져 공중에 흐트러트렸다.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듯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한참 입맞춤을 나누었다. 두 발이 모두 허공에 뜬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질 즈음에야 숨과 혀가 섞이던 것이 멈췄다.

젖은 입술이 부드럽게 마찰하며 떨어져 나갔다. 따스한 손으로 내 양 뺨을 감싸고 이마를 맞댄 황자가 속삭였다.

“이 마을은 좋은 곳이다…….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기에 아무 모자람이 없는 곳이지 않느냐? 이곳에서 평생을 살자. 나와 함께 평온하게 늙어가자…….”

그는 내가 대답 없이 다시 입 맞추는 것을 멋대로 긍정의 표현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입술이 맞닿은 채 황자가 활짝 웃었다.

황자와 내가 머무르는 숲 입구의 작은 오두막에는 마을의 어린아이들도 종종 몰려다니며 놀러 오는 일이 잦았다.

작은 아이들은 마을에서 농사에나 쓰는 조랑말이나 당나귀가 아닌 거대하고 새카만 군마 키슈를 신기해했다. 황자는 졸라대는 아이들을 한둘씩 들어 키슈의 등 위에 올려주고는 그들을 태운 채 고삐를 잡고 마당을 천천히 돌아주곤 했다.

차례를 지켜가며 아이들을 번갈아 태우고 잔디밭을 몇 바퀴든 빙빙 돌아주고 나면, 승마가 질린 그들이 변덕스럽게 놀잇감을 변경했다.

키슈 대신 황자를 표적으로 삼은 어린 인간들은 곧바로 태도를 바꿔 황자를 사악한 신 취급하며 네가 납치한 요정을 구해내겠다는 둥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잘도 지어내 우르르 작은 마당을 달려 다녔다.

그러면 오두막에 사는 검은 머리칼, 푸른 눈의 악신은 아이들이 서툴게 칼로 다듬어 깎은 목검을 하나 집어 들고 가볍게 마주 휘둘러 꼬맹이 용사들의 마구잡이 검술을 상대해 주는 것이다.

황자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목검 세례를 받더니 결국 못 이기는 척 검을 버리고 허공에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영혼까지 벤다는 악신의 칼이 바닥을 구르자 아이들이 시끄럽게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어느새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옷이며 손이 온갖 방향에서 마구 잡아당겨졌다.

“요정님, 나쁜 신은 버리고 우리 집에 같이 가요! 잘생긴 것만 보고 같이 살면 얼마 안 간댔어요! 우리 가족이랑 같이 살아요! 오늘 집에서 나무딸기 파이를 구운대요! 내가 특별히 두 조각 나눠줄게요. 아빠랑 엄마도 요정님이 예쁘댔으니까 좋아할 거예요. 내 방에서 같이 자면 돼요!”

“우리 집에는 닭고기 파이 있거든! 쟤 말고 우리 집으로 가요! 내 방이 더 넓어요! 강아지랑 고양이도 있어요!”

“그건 안 되지.”

용사들의 손에 속절없이 끌려가던 내 허리가 갑자기 큰 손에 단단히 잡혔다. 항복하는 척했던 황자가 적이 방심할 때를 노려 아이들의 키가 닿지 않는 공중에 나를 번쩍 들어버린 것이다.

요정을 다시 납치하는 데에 성공한 악신이 이름답게 사악하게 웃어 보이더니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눌렀다.

기습에 속절없이 당한 것이 분해 황자의 정강이를 목검으로 마구 때리고 내 맨발이며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내려놓으라 악을 쓰던 어린아이들은 하나같이 돌고래 비명을 지르며 조그만 양손으로 제 눈을 재빨리 가렸다.

“우리 엄마가 저런 거 보면 얼른 눈 감으랬어!”

“죽음의 신이 요정님을 마구 희롱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음식이 든 바구니를 가지고 나타난 어른 한 명이 손바닥으로 황자의 등짝을 야무지게 내리쳤다.

“아무리 좋을 때라도 그렇지 애들 앞에서 남사스럽게 뭐 하는 짓이에요! 그리고 얘, 너는 그게 어디서 배운 단어니?”

자연스럽게 오두막의 문을 열고 부엌에 들어가 식탁 위에 음식을 잔뜩 쌓아 두고 나온 여자는 점심 식사를 할 때라며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잡아끌어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는 그가 주고 간 음식 더미에서 손으로 대충 빵 조각을 몇 개 집어 먹고는 빨래를 한다는 명목으로 물을 채운 큰 나무통에 함께 비집고 들어가 서로에게 물만 잔뜩 뒤집어씌웠다.

머리끝까지 흠뻑 젖은 황자와 나는 옷을 벗은 김에 서로에게 달라붙는 바람에 결국 빨랫감만 더 늘려놓고 옷을 새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그날 아침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운명은 예상하지 못한 빗방울처럼 찾아온다. 걸어도, 뛰어도, 결국 쏟아지는 비에 옷이 젖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갑작스럽게 내린 늦가을의 소나기가 한바탕 숲을 적시는 동안 우리는 빗소리에 둘러싸여 서로를 껴안은 채 얕은 잠에 빠져있었다.

비가 다 그치고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걸리도록 늦잠을 퍼 잔 뒤에야 침대에서 기어 나온 우리는 비 온 후 갠 하늘이 유독 맑아, 신선한 사과 한 알을 나누어 베어 먹는 것으로 아침 식사를 대충 때우고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겨울을 날 마른 장작을 미리 쌓아둬야 하니, 지붕이 이러면 또 비가 올 때 천장에서 물이 새니, 하는 온갖 잔소리들을 피해 도망친 것이다.

버섯을 따겠다며 가지고 온 바구니 속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솔방울이며 돌멩이, 예쁜 나뭇잎 같은 잡동사니만 쌓여 묵직했다.

숲은 오전에 내린 비에 젖어 유독 색이 짙고 축축했다. 공기에서는 젖은 흙과 풀의 냄새가 났다.

이리저리 헤맨 끝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힌 버섯을 잔뜩 발견하고도 두 사람 중 아무도 이것들이 식용인지, 아니면 독이 든 것인지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바구니는 한쪽에 밀어놓고 키득대며 웃다가 큰 나무에 기대어 입을 맞췄다.

나무들이 우리의 머리 위에 이파리로 머금었던 차가운 물방울들을 툭툭 떨어트렸다.

우리는 한참 후에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앞서 걷던 그가 멀리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갑자기 멈춰 섰다. 마을 사람 하나가 숲을 헤집으며 우리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황자는 마주 대답하고 손을 흔들어 위치를 알렸다. 곧 뛰어온 기색이 역력한 마을 아낙이 함께 선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가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황자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지금, 마을에… 헉… 마을에, 웬 사람들이… 둘을 찾아요. 거의 군대 하나가 와서 마을 전체를 포위했어요! 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많아요. 둘같이 생긴 사람을 못 봤냐고 물으면서 온 마을을 다 뒤지고 다니길래 마을 사람들이 처음 본다고 최대한 시치미를 떼고 있는 중인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내가 눈치를 보다가 몰래 빠져나와서 알려주러 왔어요. 빨리 도망가요. 잡히면 큰일이 나는 거죠? 어서 가요! 내가 오두막에 가서 말을 풀어 보내줄게요.”

이름을 알 수 없던 버섯들이 가득 든 바구니가 바닥을 굴렀다. 나는 쪼그려 앉아 땅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진 버섯을 하나하나 주워 담기 시작했다.

황자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완전히 자리에 굳어있었다. 곧 정신을 차린 그가 아낙에게 인사했다.

“고맙소.”

황자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를 데리고 숲의 반대쪽으로 가려던 그는 내가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자 다급한 말투로 나를 달래며 한 걸음이라도 떼게 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가 내 팔을 마구 당겨도 가만히 자리에 서있었다. 이제 그는 숫제 애원하는 기색이었다.

“제발… 사샤, 떠나자. 지금 도망치면 다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갈 수 있어. 응? 더 좋은 곳으로 가면 된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필연적인 것들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가망 없는 도피이며 부질없는 몸부림이다. 나는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황자는 내 질문에 어쩐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힘주어 꽉 마주 잡았던 손이 풀어져 허공에 툭 떨어졌다. 황자는 내 얼굴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했다.

“소용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낙이 우리를 재촉했다.

“어서 안 가고 뭘 해요? 무슨 일로 도망치게 된 건진 묻지 않겠지만 잡으러 온 기사들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게 사람 하나 죽이려고 온 것 같았다니까요! 어디로든 가요! 이곳을 떠나요.”

말없이 나를 보던 황자가 혼잣말을 하듯이 툭 내뱉었다.

“…소용이 없지.”

옆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던 아낙이 비명처럼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일이든 간에 발버둥은 쳐봐야죠! 일단 도망치고 보란 말이에요!”

“아니……. 도망쳐도 소용없소……. 다 소용없어.”

황자는 나를 두고 돌아서서 오두막이 있는 방향으로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오두막이 보일 때쯤, 그가 멈춰 섰다. 나무 사이로 무엇인가 보였다. 말을 탄 기사였다.

르리긴이 이곳에 와있었다. 그가 결국 우리를 찾아낸 것이다. 아니, 진작에 알고도 갑자기 일이 생겨 이제야 데리러 온 것인가? 나는 속으로 질문했다. 이번은 누구지. 황제? 황태자? 이 황녀? 모두?

“사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르리긴이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땅에 발이 닿은 그가 잔뜩 내리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목이 쉰 것처럼 들렸다. 애가 타는 듯 멀찍이 우리를 따라오던 아낙은 기사가 황자를 부르는 호칭을 듣더니 흠칫해 뒤로 물러났다.

황자는 숲에서부터 상황을 예상한 듯 표정이 변하지도 않고 르리긴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참을 숲의 경계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있던 그는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제 기사 앞에 섰다. 그가 쏟아내듯 말했다.

“달이 지나도록 찾지 않고 그냥 두더니……. 왜 지금에서야 찾아왔느냐.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여기에서 죽겠으니 우리를 두고 그냥 돌아가거라. 가서 누님을 찾아.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겠으니 그분을 모셔라.”

가까이에서 본 르리긴의 눈에는 시뻘건 핏발이 서있었다. 그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버티고 선 우리를 노려보았다. 무겁게 침묵하던 기사가 결국 입을 뗐다. 지극히 건조한 어투였다.

“이 황녀 전하께선 서거하셨습니다.”

스산한 침묵이 공기 중을 떠돌았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느냐?”

황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르리긴은 곧바로 다시 대답했다.

그는 태연히 말하려 애썼지만 문장을 입 밖으로 뱉을수록 점점 감정이 격앙되는 것을 막을 수 없던 모양이었다. 문장을 마칠 때의 르리긴은 제 주인을 향해 거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황녀 전하께서 돌아가셨단 말입니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신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이래도 못 알아들으시겠습니까!”

황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전해 들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그에게서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신은, 누님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목격한 자가 있느냐?”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쥔 르리긴이 황자에게 다가갔다. 종이였다. 눈앞에 내밀어진 이 황녀의 편지지를 본 황자는 조금 가쁜 숨을 쉬었다.

그가 떨리는 손길로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지의 절반은 검붉은 무엇인가로 물들었다가 시간이 지나 마른 듯 주름이 지고 표면이 버석거렸다.

카일런 이사르, 친애하는 동생아. 잘 듣거라. 황태자께서 황제 폐하의 붕어를 숨겼다. 지금 수도는 공격당하고 있다. 우리의 황궁이 이미 적들에게 점령당했다.

어머님께서는 지난 네프라타스의 두 번째 축일에 황궁에 침입한 사악한 무리에게 해를 입으시고 이미 신의 품에 안기셨다. 오라버니께서는 모든 것이 두려워 이 사실을 몇 달이 지난 이때까지 숨겨오신 듯하다.

모든 일은 어머님이 잠드신 사이에 일어났으니 고통스러우셨을까 슬퍼하지는 말거라.

나는 그동안 태자궁에 근신당해 모든 일을 알았으면서도 너에게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으나, 지금은 한낮에 시작된 전투로 혼란스러운 사이 빠져나와 내 처소에 돌아오게 되어 급하게 편지를 남긴다. 너에게는 아무 일이 없어 무사하기만을 바란다.

황녀의 필체는 조금 흔들리는 듯하더니 그 아랫줄부터는 반듯하게 돌아왔다.

나는 지금 내 궁에 갇혀있다. 오라버니와는 적들이 쳐들어온 처음 함께 도망쳤지만 혼란 속에 일행이 뿔뿔이 흩어지고 갈려 그분의 생사를 알 수 없다.

내 처소는 포위당했고, 이미 많은 사람이 황궁을 지키다 스러졌다. 이곳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적들은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처럼 싸운다. 뒷일은 계획에 없고 우리 황족들의 말살만이 목적인 것처럼 덤벼든다.

지금은 잠시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며 네게 소식을 전할 시간을 벌고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을 굳게 먹고 너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길 것을 약속해 다오. 먼저 가신 어머님과 형제들도 네가 무사해야 슬퍼하지 않는다. 살아남아야 한다. 알겠느냐?

전력이 지원되고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수도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을 선하신 신들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거라. 복수에는 늦은 때가 없다. 신들께서 너와 함께하시기를.

글귀의 마지막은 상황에 쫓겨 매우 급하게 쓴 듯 필체가 어지러워져 있었다.

황자는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황녀의 필체 아래로는 르리긴이 간절하게 황녀의 무사함을 묻는 문장들이 반복되어 쓰여있었다. 돌아온 답신은 더 이상 없었다.

“이 편지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제가 보았습니다. 편지가 피에 젖어가는 것을 보았단 말입니다. 편지는 한밤중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쓰셨는데, 밤이 다 가도록 답장이 없으시더니 해가 뜨기 전 갑자기 종이가… 붉게 물들었습니다……. 제가 다 지켜봤습니다…….”

“누님께서 확신하시니 어머님에 대해 그렇게… 그렇게 쓰셨겠지. 하지만 형님과 누님께서 어디 계신지는, 아직…….”

황자는 입으로는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명을 중얼중얼 늘어놓으면서도 정신이 어지러운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울컥해 눈물이 차오른 르리긴이 결국 황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가 다 쉬어 긁히는 목소리로 험악하게 속삭였다.

“그렇게 피하기만 하시면 무엇이 해결됩니까? 전하께서 이곳으로 무작정 도망오신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손에 들고 계신 것을 좀 보십시오! 황제 폐하께선 붕어하셨고 황태자 전하께선 생사가 불분명하십니다. 이제 남은 황족이 전하밖에 누가 있습니까? 황녀 전하께서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벌써 잊으신 게 아니라면 이러실 순 없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 폐하라고 불러드려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

“아직… 난…….”

그는 목이 메는 듯했다. 손에 편지를 든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황자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가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마법사는 죽으면 시신이 남지 않는다. 숨이 끊어진 마법사의 몸은 생전에는 심장을 채우고 모든 혈관에 흐르던 저 자신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발화한다. 강력한 마법사일수록 스스로를 태우는 불꽃이 더욱 세차다.

나는 황녀의 마법을 떠올렸다. 수고로운 기색 하나 없이 한순간에 손짓 한 번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나비들의 환상을 피우고, 수도와 에오네테, 동쪽 국경을 넘어 테베나까지 이을 만큼 먼 거리에서도 편지를 동시간에 복제하는 고위 마법이 유지된다. 그는 드물게 축복받은 재능을 지녔던 자였다.

르리긴이 전한 상황에서 유추가 가능한 대로, 답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결국 강력한 마법사인 이 황녀도 모든 힘이 다하여 황궁 안에서 죽었다면. 그렇다면 아무도 이 황녀의 시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미 잿더미조차 남지 않았겠지. 황자도 알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은 온통 황자를 오히려 자극할 만한 것들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무 그늘이 진 숲의 경계 안쪽에 가만히 서있었다.

흰 햇볕에 빛나는 그의 얼굴이 여름날의 그때처럼 창백했다.

아낙의 말이 맞았다. 겨우 작은 시골 마을 하나를 군대가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군단 하나의 절반은 되어 보이는 병력이었다. 에오네테에 지원된 이 황녀의 사병, 펠리서스의 기사단 중 살아남은 자들을 모두 모아 온 것 같았다.

황자는 곧 군대에 둘러싸였다. 그는 애도하거나 애통해할 시간도 없이 급류에 휘말렸다. 운명의 흐름은 예고도 배려도 없다.

황자는 호위 기사들에게 겹겹이 에워싸인 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 하지만 그가 눈에 보이는 곳에서 뒤를 따라 걸었다.

본부대가 있는 곳에 합류한 기사들은 내게도 말을 내주었다. 나는 호위 진영 바깥에서 기사들과 섞여 말을 탔다.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도, 아끼던 것들을 챙길 시간도 없었다. 우리가 가을을 보낸 마을은 순식간에 떨어져 눈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원래부터 없던 일인 것처럼, 잠시 낮잠 중에 단꿈을 꾸었던 것처럼 등 뒤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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