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죽음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곳이 운명이라는 직감이 나를 덮쳤다. 적군이 모두 쓰러진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주변만 미친 듯이 둘러보았다.
한순간 내 발은 나침반의 바늘이 북쪽에 이끌리듯 어느 쪽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뾰족한 언덕의 봉우리가 있었다. 눈 덮인 돌 언덕은 태양을 등에 업은 역광으로 검게 보였다.
눈을 찌푸리고 태양이 걸린 언덕의 꼭대기를 노려보던 도중, 나는 아주 작고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그것은 삭일 밤에 빛나는 별 같기도, 검은 대리석 위에 부서진 유리 조각 같기도 했다. 나는 뒷목에 칼이 꽂힌 사람처럼 빳빳하게 굳어 소스라쳤다.
나의 숙적이 저곳에 숨어있었다. 저 빛 속에.
더 이상 다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언덕에 가려진 반쪽의 불완전한 태양이 피가 흩뿌려진 설원의 중앙을 비췄다. 비스듬한 빛을 받은 설원은 여름날의 노을이 비치는 호수처럼 붉고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그곳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곳에 황제가 있었다. 핏줄에 녹은 쇠가 흐르는 것처럼 피부 속이 타오르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가, 발가벗겨져 겨울 호수에 던져진 사람처럼 온몸이 선뜩해져 정신을 차렸다.
나는 당장에 그를 향해 달렸다. 땅을 박찰 때마다 뜨거운 입김에 시야가 흐려지고 발에 차인 눈이 날렸다. 아주 작게 보이던 그가 가까워졌다. 나는 목청이 터지도록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 내 목소리조차 내 귀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한 목소리만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를 지켜야 해. 나는 그의 방패.
나는 그의 방패. 지키는 나무. 그를 지켜야 해. 지켜야 해!
검이 내 영혼과 감응해 노랗게 타올랐다. 이제 나는 그와 겨우 몇십 걸음 거리에 있었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네프라타스 경……. 폐하께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경고합니다.”
르리긴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막지? 나는 그를 지켜야 하는데. 지키려는 것뿐인데. 나는…….
“나는…….”
황제가 화가 난 표정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은 호위 기사들을 비켜서게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언덕 위 태양 아래에서 빛나는 작은 별을 보았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입 밖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나는 너의 방패…….”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타오르는 황금처럼 빛나던 검신은 모닥불의 재가 스러지듯 서서히 차갑게 식었다. 르리긴은 내가 검을 버리자 당황하며 길을 비켰다.
멀리서 빛나던 별이 황제를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고, 동시에 나도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나는 달려가 그대로 그를 꽉 마주 안았고, 바로 다음, 별이 내 등 뒤를 덮쳤다.
내 몸은 크게 흔들렸지만 우리는 뒤로 넘어지거나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 주위에서 비명과 고함이 들리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보았다.
등이 아팠다. 아니, 가슴도. 상체에서 퍼지는 고통으로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사샤?”
그가 나를 안은 손으로 내 등을 더듬었다. 등 뒤, 오른쪽 날개뼈 아래 방패의 문양이 있던 자리에는 창보다 두꺼운 화살이 꽂혀있을 것이다. 군함에서나 쓰는 대형 석궁에 달아 쏘았겠지.
화살대, 아니 작살대에 가까운 그것에 손이 닿은 그가 내가 본 중에 가장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힘이 빠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는데, 그때 기사들이 나를 잡아 황제에게서 끌어냈다. 화살이 우리 둘을 한꺼번에 관통해 그를 상처 입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멍청이들. 나는 아버지 네프라타스가 직접 제 살을 깎아 만든 방패였다. 나를 꿰뚫어도 내가 지키고자 뒤에 세운 자는 해치지 못해. 비소를 지었다.
기사들이 제 주인을 살피려 내 몸을 아무렇게나 놓자 나는 물이나 포도주를 채운 가죽 부대처럼 힘없이 옆으로 기울어 바닥에 모로 쓰러졌다.
등 뒤에 꽂힌 화살 때문에 바로 누울 수도 없었지만, 거대한 화살촉의 끝이 내 가슴팍을 뚫고 빙산의 일각처럼 삐죽 나와있는 꼴이 우스워서 실실 웃었다. 겨우 그만큼 뚫었다니!
그러다 너무 아파서 웃는 것을 그만두었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는 우스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를 살피는 사람들을 밀쳐낸 황제가 나를 옮기려는 듯 땅에서 들어 받쳐 안았는데, 내 몸에 박힌 화살은 너무 거대해서 길이가 성인의 키만 했고 그만큼 무게도 무거웠다. 몸이 들리자 화살이 중력을 받아 바닥으로 처졌다. 화살촉이 움직여 내 몸속을 천천히 헤집고 갈랐다. 너무 아파서 별이 보였다.
내가 숨이 넘어갈 듯 신음하자 그는 다급하게 나를 다시 땅에 내려놓고 화살 끝이 땅에 눌리지 않도록 옆으로 돌려 눕혔다.
그의 손이 내 뺨과 바닥 사이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지저분하게 얼굴에 흙 섞인 질척한 눈이 묻는 일은 면했다.
“사샤, 사일! 사샤…….”
그가 나를 계속 불러댔는데, 사실 처음 몇 번 이후로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청각과 시각 모두 물안개에 잠긴 것처럼 부옇고 흐렸다.
나는 누운 채로 그에게 말을 하려고 애를 썼다.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일단 엄청나게 아팠고,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목구멍에서 핏덩이가 치솟았다. 그는 내가 제 피에 익사할까 두려웠는지 내 뺨을 세게 누르고 고개를 기울이게 했다.
황제는 내 예상보다 무척 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화살을 부여잡고 내 이름을 불렀다가, 고함을 지르며 의사를 찾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이름을 불렀다. 내가 입을 떼려고 할 때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내게 윽박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말을 하지 말랬다고 정말 입을 닫았다가 유언 한마디 못 하고 저세상에 가버린 멍청한 놈이 되기는 싫었다.
나는 이곳에서 죽는다.
운명처럼, 맑은 날의 높은 별처럼 명확한 일이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피가 흐르는 입으로 그를 불렀다. 좀 험한 꼴이려나. 나는 입을 열었다가 그의 이름 중 겨우 한 음절 정도를 발음하는 데만 성공했다.
“말하지 말거라. 응? 안 돼, 제발…….”
카샤가 손바닥으로 화살촉 끝이 비죽 튀어나온 가슴을 덮어 눌렀다. 지혈을 시도하는 손이 좀 떨리고 있었는데, 손이 떨리는 것인지 내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손 다치지.
“카, 샤…….”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고, 덜 닫은 창문으로 새는 바람 같은 소리가 섞여서 났으며, 피가 계속 넘치는 바람에 발음도 불분명했다.
그때부터는 너무 졸려서 시야가 까맸다. 내가 정말로 소리 내어 그에게 말을 한 건지. 입 모양으로 중얼거린 건지. 그도 아니면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하고는 말을 전했다 착각하는 것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말했다. 말했다고 생각한다.
카샤, 나는 집에 가는 거야.
이건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다 그런 과정일 뿐이라고. 나는 다른 곳에서 왔다고 내가 그랬었지. 기억나?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었잖아. 이제는 집에 돌아가면 돼.
내가 가서 아쉬워? 그래도 말리면 안 되지. 난 그냥 집에 가는 거야. 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좀 아프긴 한데, 참을 만은 해. 정말이야.
카샤… 난 괜찮아…….
그 뒤로는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뺨을 두드리고 쓰다듬는 손길만 느껴졌다. 나는 한참을 그 소란스럽고 평온한 졸음 속에서 떠돌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따듯한 품에 안겨 육체가 영원히 잠들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