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153화 (완결) (153/153)

반드시 실현될 그림 (완)

다음날 오전, 나는 저택의 서재에 홀로 조용히 앉아 내 능력 창을 응시했다.

『멸망을 구속한 자

- 세계의 선물 3가지.』

이제껏 내게 있던 능력 스탯이 사라졌다.

모든 스탯이 사라졌다.

그저 남아 있는 건, 새로 나타난 ‘세계의 선물’ 뿐.

나는 핸드폰을 들어 AI 2050이 남긴 톡 메시지를 다시 보았다.

- 2050 : 고수님, 수호님 대신 제가 답변을 드립니다.

- 2050 : 수호님은 고수님과 이제껏 소통했던 일에 대하여 기억이 없으십니다.

- 2050 : 그러해도 2052년의 수호님을 만나길 원하십니까?

이 메시지를 보았을 때, 나는 마음이 쿵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막상 닥치니까.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 고수 :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으로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 수호에겐 말하지 않고 먼발치서 보기만 할게.

- 고수 : 그냥 평화로워진 그 시대의 세상을 확인만 할 거야.

- 2050 : 네, 알겠습니다.

-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전 같으면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서 지하벙커 안으로 곧바로 갔겠지만.

이젠 직접 걸어서 그곳까지 향해야 한다.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하다가 쓰지 못하게 되니 아쉽긴 해도.

어차피 이 모든 능력이 내게 계속 머물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나는 지하벙커로 향하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잿빛 머리칼의 청년 모습을 한 원흉.

그자 역시, 회색 입자로 화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입자는 한별이 일으키는 생명의 바람에 의해 온전히 소멸했다.

‘멸망 구속’ 능력으로 원흉의 능력을 영영 결박했으니, 네 번째 재앙으로 존재했던 실체를 남겨둘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존재함을 지울 것을 명령했고.

내 명령은 ‘멸망 구속’ 능력의 발현으로 원흉을 속박하여 죽음으로 몰아갔다.

네 번째 재앙으로서 원흉이 소멸해갈 때, 그가 내게 외쳤다.

“이곳에서 내가 사라져도 나는 ‘죽음’으로 영영 존재할 거다! 모든 인간이 결국은 죽음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게 그 증거다. 너희는 영원히 죽음을 극복하지 못할 테지. 그러니 나는 진 게 아니야.”

다섯 번째 재앙이자 아포칼립스 원흉의 근원.

‘죽음’.

소멸해가는 그를 차갑게 보며 나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원흉. 너는 처음부터 진 거야. 인간은 한 번쯤은 죽긴 하겠지. 하지만 죽음을 맞닥뜨린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실패한 건가? 사람은 죽음을 통해서도 그 삶이 가치 있게 될 수도 있다. 너의 모든 계획이 내게 가로막힌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건 내가 이미 죽음을 돌파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인간은 약하면서도 강한 이유가 그거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조차도 기꺼이 땔감 삼아 불사를 의지를 지닌 존재.

그 일이 가능한 게, 사람이 아니던가.

지금 시간선에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2026년에 내가 했던 그 선택이 있어서, 원흉의 승기는 그때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던 셈이다.

재앙이 소멸한 후 나는 그곳에 한참 동안 서서,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었다.

재앙이 될 모든 권능이 영원히 결박되고 그저 ‘죽음’으로서만 실체 없이 남게 된 원흉.

그는 이제 재앙이 될 수 없게 되었다.

또다시 그의 실체가 재앙으로 불거질 수 없게 된 거다.

이로써 아포칼립스를 막는 일은 끝난 셈.

나는 곁에 서 있는 한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별은 내 마음과 생각을 감지했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 관계는 계속 지속될 겁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수의 의지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래.”

나는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매개 능력도 사라졌는데도, 한번 이어진 창조의 별과의 유대 관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근데 너희는 이제 어떻게 지내길 바래? 나는 너희 의지를 존중해주고 싶은데.”

“우리는 인간 외형으로 이곳에서 지내고 있지만, 아포칼립스를 막는 일이 끝난 지금은 굳이 이곳에서 인간으로 지낼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본디 별이었으니 별로서 지내는 게 더 편할 테지.”

“네.”

“너희가 원하는 때에 우주로 돌아가도 좋아. 다만 한 번씩, 올차드 저택에 놀러 왔으면 좋겠다. 너희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 같거든.”

그러자 한별의 눈매와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럴 때면, 저희가 먼저 이곳을 찾아오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상념을 그쳤다.

내 발걸음은 어느새 저택의 지하 차고를 지나 벙커 안에 들어서 있다.

아바타 기계와 캡슐을 굽어보았다.

이 기계를 사용해서 2052년을 방문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듯하다.

내게 나타났었던 시간 능력의 효력은 만 하루가 지나면 온전히 닫힐 것이니.

그 전에 미래의 수호와 한 번쯤은 직접 만나보고 싶었고.

그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얼싸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캡슐 안에 누워 AI 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 이제 아바타 기계를 작동해.”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나타났던 ‘세계의 선물’.

그것을 발현했다.

* * *

오전 11시. 나는 2052년의 세상에 섰다.

내 시야에 AI 2050의 메시지가 반투명한 문장으로 홀연히 나타났다.

<2052년 대한민국 육군 사관학교.>

학교의 교정이 보였다.

근무복을 입은 생도들이 오갔다.

복장의 디자인이 요즘과 다르다.

<고수님은 2052년도에 아바타로 접속하셨습니다. 방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으로 2052년의 고수님에게 2023년도의 고수님이 덧씌워졌습니다.>

<2052년의 고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미리 아시고 육군 사관학교에 홀로 오신 상황입니다.>

미래의 내게 2023년도의 내가 덧씌워진 것.

다시 말해, 나는 아바타 접속을 한 것이나 이전과는 달리 2052년에 여전히 살아있을 나를 통해, 이곳 세상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이것은 ‘세계의 선물’이라는 것이 발현된 순간, 나타난 현상이다.

‘세계의 선물’은 소모성 능력이었는데.

내가 원하는 바를 3번 실현할 수 있었다.

아포칼립스를 막은 후 보상으로 주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방금 ‘세계의 선물’ 세 번 기회 중에서 한 개를 실현한 것이고.

2052년의 수호를 직접 만나는 것으로 그 기회를 소모한 거다.

<수호님이 강의 중이신 강의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내 눈앞에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나타났다.

내게만 보이는 광경이다.

“수호가 육군 사관학교에서 강의를 해?”

<네. 2052년의 수호님은 최연소로 대한민국 육군 사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어 일하고 계십니다.>

“오! 그래?”

나는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유리문에 내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2023년도를 사는 서른 살의 내 모습이다.

지나던 학생들이 나를 힐끗 쳐다보고 지나가곤 한다.

수호가 강의 중이라는 강의실까지 이르렀다.

조용히 강의실 문을 열고 가장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차분하게 강의하는 수호의 목소리가 들리고, 조용히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수호는 이전과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전에는 거친 환경을 오랫동안 살아왔던 탓인지 거칠고 강해 보였는데.

지금은 굳건하면서도 한결 유해 보였다.

물론 압도적인 리더십이 느껴지는 건 여전했다.

타고난 그의 지도력은 강의에도 효과적으로 발휘된 탓에, 학생들은 딱딱한 그의 수업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강의가 이어지다가 수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의 무심한 시선이 나를 스쳐 다른 학생으로 옮겨갔다.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그래도 아버지인데.

이제야 겨우 수호의 어깨를 토닥여줄 수 있게 되었는데.

짙은 아쉬움이 내 안에 들어찼다.

“오늘 수업은 이만 여기까지.”

이윽고 그가 수업을 끝나자 강의실을 채웠던 학생들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앉은 자리에 계속 머물렀다.

수호 역시 강의실을 나가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뚜벅뚜벅 걸어 다가왔다.

내가 의자에 앉은 채 올려다보자 그가 입을 뗐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후, 시간은 비워 두었습니다. 아버지와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나를 알아보는구나.

과거에서 온 나를 기억하는구나.

나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에게 듣고 싶은 게 많아.”

“전 이제 교수가 되었습니다. 더는 군사령관 노릇할 필요가 없어진 거죠.”

“너, 이전 시간선의 일. 기억나는 거야?”

“사실, 전 기억하지 못합니다. 갑작스러운 시간선의 변화를 제가 다 붙들고 가늠하며 감당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 시간선에 있었던 모든 일의 기록을 2023년의 AI 수를 통해 저장해두었고, 2051년 즈음에 AI 준이 그 기록을 저에게 보이도록 명령을 해두었었습니다. 전 어떻게든 아버지와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랬군.”

“지금의 저에겐 기억이 없지만 모든 기록을 숙지해둔 상태입니다. 오늘은 과거의 아버지와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는 걸 인지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를 보니, 이전 시간선의 일들이 어렴풋이 내 기억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를 보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좋았던 기억이 아니라서 별로 기억해내지 않아도 돼. 오늘 먼발치서 보고 가려고 했거든.”

그러자 수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포칼립스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이 아니었어도, 그 기억에 아버지가 늘 있었으니 저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잃을 생각이 없어요.”

수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동갑 나이로써 함께한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미래에서 먹는 식사는 생각보다 평범한 음식이었다.

수호는 밥을 먹다가 내게 물었다.

“지금 시점에, 아버지에겐 ‘세계의 선물’이란 게 생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소모성 능력이고 3번의 기회밖에 없는데, 왜 2052년을 방문하는 것으로 한 번의 기회를 소모하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세계의 선물은 내게 주어진 보상 같은 거야. 그러니까, 내게는 지금 이 순간이 보상이라는 거지. 평범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사는 너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게 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죽을 힘을 다해 지켜낸 세상을 네가 누리는 걸 직접 싶었어. 이건 그 어떤 보상보다 귀해.”

수호는 시선을 떨구었다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해가 뜨고 지듯이 어김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일상이라 해도,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이 삶이 소중하고 가족이 가까이 있어서 충분히 행복한 삶일 수 있다는 것도요.”

“함께 지켜낸 거다. 우리가 같이.”

수호도 미소를 보였다.

“네.”

* * *

시간이 지나 3일 동안만 유지되었던 시간 능력의 효력이 온전히 소멸되었다.

이렇게 되면, 미래와의 소통만이 아니라 미래에서 비롯되었던 모든 일과 혜택이 사라질 수 있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리되기 전에 ‘세계의 선물’를 발현하여 남은 두 번의 기회를 소모했다.

한 가지는 그림 재능이 여전히 내게 머무는 것.

다른 한 가지는 미래의 수호에게서 받았던 혜택과 일의 결과도 유지되는 것.

그것을 원했다.

그와 같이 세계의 선물 세 가지를 전부 소모하고 나니.

내게 보이던 능력 창 같은 게 사라졌다.

2052년도와 소통할 경로도 사라졌다.

미래의 수호와 대화하며 아포칼립스를 막고자 분투하고 미래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이 전부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게, 이전으로 돌아갔다.

세상 역시, 소행성 충돌이나 토네이도로 인해 불거졌던 혼란을 딛고.

다시 차분하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공포는 상처가 아물 듯 점차 잊혀갔다.

나는 서재에서 그림을 그렸다.

타블렛으로 미래에서 보았던 평화로운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날 마지막으로 보았던 수호의 미소를 그림으로 남겼다.

잊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슥슥-

나는 팔을 부지런히 놀리며 그림을 그렸다.

재능은 그대로여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림 작업 속도는 평범해졌다.

초인적인 작업 속도가 사라진 것이다.

손을 대지 않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능력도 사라졌다.

딱히 아쉽진 않다.

적어도 그림 재능만큼은 선물처럼 내게 주어졌으니까.

그래, 선물이었다.

생각해보면 내 재능도 삶과 소중한 만남도 전부 내게 선물이지 않을까.

아포칼립스와 재앙의 위협은 사라지긴 했어도.

평화로운 미래가 우리 앞에 주어지긴 했어도.

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들의 예술적인 감성 충족만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도 붓을 든 것이다.

지금 내가 그리는 아들의 미소는...

다음 세대를 살아갈 모든 이들의 미소이기도 하다.

굳이 실물 전환 능력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실현될 그림.

이 그림에 모두가 행복해질 믿음을 담았으니, 이 믿음에 먼지 쌓이듯 세월이 쌓여 실현되는 모습을...

이제 지켜볼 것이다.

- 完 -

@k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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