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겐 생명이 곧 무덤 2
세계 곳곳에 흩어져 심긴 나무들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내게 각인되었다.
평범하게 행동하던 사람들이 별안간 돌출된 행동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내적 변화를 겪는 것 같은 조짐을 보였다.
원흉의 조종 능력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지구상의 많은 이들을 조종할 사전 작업이 끝난 상태인 것 같다.
어제 내가 서재에서 잠시 눈을 붙일 때 원흉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런 비슷한 형태로 꿈을 한 번씩 꾸지 않았나 싶다.
나는 매개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다들 있는 곳에서 생명의 바람이든 폭풍이든 최대한 넓은 범위로 일으켜.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곁에 서 있던 한별에게서 부드러운 바람이 일어났다.
그의 바람은 부드럽고 유했지만 넓은 범위로 사방에 퍼져나갔다.
아마도 그의 바람은 한반도 전역에 영향력이 미치게 될 것이었다.
문별이 내게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 근데 고수, 멸망이 세계 모든 사람을 조종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 건가요? 그 전에 재앙을 색출하여 제거하지 않고?
나는 그녀에게 답했다.
- 위험하긴 한데. 나는 네 번째 재앙과 다섯 번째 재앙을 다 잡아내야 해서.
지금 이 순간, 생명의 바람이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일었다.
봄바람을 닮은 온화한 바람.
사람들은 사과꽃 향기가 온 곳에 퍼져 있다는 기분을 받을 것이었다.
생명의 바람은 사람을 조종하는 원흉의 능력을 깨뜨릴 수는 없을 것이나.
조종받는 이들이 원흉의 뜻대로 움직이는 걸 조금이나마 제지할 수는 있을 터다.
나는 3D 디스플레이를 활성화하여 손으로 터치했다.
이내 완성된 그림 하나가 내 눈앞에서 열렸다.
타블렛으로 그린 그림.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버리고 싶지 않을 만큼, 내가 봐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제껏 내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독보적인 그림이랄까.
이 그림을 실물 전환하면 영영 사라져버리겠지.
종말로 얼어붙게 될 세상에 온기를 끼칠 불꽃이 일도록...
이 그림은 한낱 땔감이 되어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이 그림이 실현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능력 명칭에 여전히 ‘절대’라는 단어가 붙었으니, 실물 전환은 반드시 이루어지긴 할 거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절대 본질 창조력을 발현했다.
그러자 눈앞에 있던 그림은 은은한 빛을 발하는 듯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 * *
외근을 나갔다가 회사로 들어가는 중이던 김우준.
이제 곧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오늘따라 도로에 차가 유난히 막힌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제 밤잠을 설쳐서 그런가.
컨디션이 엉망이다.
밤새 꿨던 악몽 탓에 내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소행성 충돌이니 뭐니 소란이 일어서 그런 건지.
도시 풍경은 평소 같지 않다.
어딘지 어지럽고 혼란스러워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빵빵-
그는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눌렀다.
갑자기 화가 치밀고 극심한 짜증이 인다.
왜지?
오늘따라 내가 왜 이러지?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이상할 정도로 분노를 걷잡을 수가 없다.
그동안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이대로 거슬리는 저 앞차를 받아버리고픈 충동이 일었다.
차라리 어제 나타났던 소행성이 그대로 이 세상과 충돌하여 전부 다 끝장났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생각까지 하지 않았을 것인데.
정말 이상하긴 했다.
그때였다.
그의 뇌리에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 죽여.
- 죽여!
김우준은 멈칫했다.
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어떤 강렬한 상념이 그의 안에 흘러들었다.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
파괴적인 열망.
극렬한 피해의식.
자신이 새삼 불행하게 여겨졌고,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싶은 갈망이 미친 듯이 솟구쳤다.
세상은 그를 버렸고, 심지어 그를 죽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김우준, 그와 상관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누가 그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
이제껏 살면서 짜증 나고 화가 날 일이 간혹 있긴 했어도, 누군가 그를 버렸던 적은 없었다.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 다시 들렸다.
- 죽여! 그렇지 않으면 네가 죽게 될 거야.
돌연 그의 눈빛이 변모했다.
붉어지고 사나워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흉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당연한 거겠지만 마땅한 게 없다.
도로에 정체되어 있던 차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그도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옆 차선에 있던 차량이 시끄럽게 클랙슨을 눌러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는 차창을 열었다.
욕을 찰지게 해준 후에 그의 차도 받아버릴 생각이었다.
차창을 열자 부드러운 바람이 차 안으로 훅 끼쳐왔다.
휘이이-
요즘 날씨답지 않은 부드러운 바람.
문득 두통이 일었다.
평소라면 이런 바람은 기분 좋게 여겼을 것이나, 기이하게도 밖에 부는 바람이 괴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창문을 닫으려 했다.
오늘 컨디션이 왜 이러지.
마치 그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
그는 차를 잠시 갓길에 세우고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마음.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
그러면서도 죽음이 두려운 마음.
모순되면서도 죽음의 빛깔로 점철된 감정이 뒤섞여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탁해졌고 초점이 없다.
‘아! 생각났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노아 앤더슨...’
김우준으로서의 자아가 잠시 묻혀버린 순간이다.
그는 노르웨이의 청년이었다고 자신을 자각했다.
오래전에, 부모에게 버려졌고 학대당했으며 늘 혼자였다.
세상과 삶을 원망하고 증오했었다.
고통과 분노가 그의 안에서 불길처럼 일었다.
그 불길은 당장이라도 그 자신을 삼킬 듯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어떤 새하얀 섬광이 비쳤다.
“아악!”
그는 눈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눈을 가린다고 해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섬광 같은 빛처럼 보이기도 했고.
싱그럽고 평화로우며 따뜻한 봄날 같기도 했다.
아니, 다시 보니 그것은 빛도 아니고 따뜻한 풍경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그림이었다.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그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뭉클해지고 마음이 평안해지며 감동이 되는 그런 그림이었다.
인간의 범주 안에서 예술로 논하기에는, 그 모든 걸 초월버린 듯한 작품.
그런데 기묘한 것은, 그 그림이 이제는 언어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위로의 말이었다.
위로의 말이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너는 버려지지 않았어.
적어도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작은 위로를 건네고 있으니까.
너는 죽음과 멸망이 세상에 임하는 통로가 된 인생이기도 했지만.
너에게 있던 고통과 불행은 가엽게 생각해.
불행에 처한 작은 소년에게도 행복해질 자격은 있거든.
죽음과 멸망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다.
그의 숙주가 되었던 한 생명이었던 존재에게 건네는 말이다.
그의 내면에 극적인 어떤 변화가 일었다.
잿빛으로 물들고 생명력을 까맣게 태우는 듯한 그의 마음 상태에 눈부신 빛이 채색되기 시작했다.
* * *
지구의 대기권으로 향하던 네 번째 재앙.
그는 조종당하게 된 무수한 사람들을 통해 존재하기 위해 옮겨가던 중.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조금씩 그의 능력이 금이 가듯 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곳곳에 생명의 바람이 불고 있기는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의 조종 능력이 깨어질 리가 없을 것인데.
놀랍게도 이제는 그의 능력이 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뭔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실현되어 이곳 세계에 적용되었다.
어쩌면, 세계라기보다는 한 인물, 또는 모든 인물에게 어떤 힘이 실현되어 적용되었다.
그것은 네 번째 재앙의 능력을 깨뜨리고, 다섯 번째 재앙의 힘까지 약화시켰다.
원흉은 눈 부신 빛 가운데 놓인 것 같다고 여겨졌다.
아니, 생명의 수렁에 처박힌 것 같다고도 느껴졌다.
속히 빠져나오지 않으면 그의 존재 자체가 끝장날 것만 같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된 것인지 의아해할 틈도 없이.
“아악!”
원흉은 비명을 지르며 그가 조종하던 사람들에게서 황급히 자신의 존재를 지웠다.
그는 대기권에 밖에 머물러 있을 별의 몸체로 다시 돌아오고자 했다.
하지만 그 몸체로 다시 돌아온 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그가 별로서 존재하며 눈을 뜬 순간, 고수의 눈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
그의 몸체는 별이 아닌, 이전 날 원흉의 몸이었던 노르웨이 청년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고.
그의 눈앞에는 고수가 서 있었다.
원흉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곳은 지구 대기권 밖 우주였을 것인데.
그보다 그는 인간형이 아닌 별의 모습이었을 것인데.
어째서?
고수는 그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가 명령을 내렸다.
“네 번째 재앙, 또는 원흉. 얌전히 여기 있어. 이제부터 능력 쓰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
그러자 그의 말이 보이지 않는 사슬이 된 것처럼 그를 옭아매었다.
여기서 도망칠 수 없고 고수의 명령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재앙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방이 나무와 수플로 둘러있다.
주변엔 인가가 보이지 않고 외진 곳인 듯했다.
“혹시 놀랐나? 내가 눈앞에 있어서?”
그는 고수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
고수의 곁에는 한별이 서 있다.
그걸 보며 재앙은 겨우 알아챘다.
한별은 우주에 머물던 그를 ‘외형 변형’ 능력을 사용하여 인간으로 바꾸었고.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하여 이곳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고수는 그의 조종 능력이 깨어져서, 다시 별의 몸체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가 지구로 접근하면 이런 식으로 ‘멸망 구속’ 능력을 사용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능력이 발현되기 위해선 고수의 눈을 봐야만 한다.
그는 인간이 아닌 별이기에 고수의 눈을 마주 봐서 ‘멸망 구속’ 능력에 당할 일이 없다고 여겼건만.
모든 사람을 통해 존재하게 되면 고수의 능력은 무력해질 거로 여겼건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고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자신의 존재를 지움으로써 도망치는 것 또한 불허한다.”
* * *
나는 원흉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묻지. 넌 네 번째 재앙인가? 또는 동시에 다섯 번째 재앙인가?”
원흉이 눈을 크게 떴다.
“내 말이 맞나 보군. 다섯 번째 재앙은 실체 없이 죽음이라는 것으로 존재하나 보네. 그러니 넌 네 번째 재앙이자 다섯 번째 재앙이라고 할 수 있겠지.”
“고수, 네가 나를 복종시킬 수 있다고 해도, 다섯 번째 재앙인 죽음까진 영영 지울 수가 없어.”
“그래, 알아.”
“다섯 번째 재앙으로 존재하는 나는 실체도 없으니 ‘멸망 구속’ 능력도 한계가 있다.”
그의 말에 나는 조금 웃었다.
“이게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네. 네 번째 재앙이 인간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상 다섯 번째 재앙도 내 능력에 영향을 받을걸?”
그러자 원흉은 이를 까득 갈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너는 계속 존속하긴 하겠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건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넌 이제 네 뜻대로 세상에 멸망을 가져올 수 없다는 거다. 이제 내가 불허할 테니까.”
나를 노려보는 원흉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이제 너에게 있던 모든 능력은 네 의지대로 사용하는 것도 불허한다. 영원히!”
내가 내뱉은 말은 ‘멸망 구속’ 능력으로 발현하여 원흉을 속박했다.
내 말을 그대로 원흉이 이행할 수밖에 없게 된 거다.
나는 그가 이행할 말을 계속 내뱉었다.
“네 뜻대로는 멸망을 가져올 수 없다. 너의 존재는 이제 다섯 번째 재앙인 죽음으로서만 실체 없이 존재하게 되는 거지.”
원흉은 몸을 미세하게 부르르 떨었다.
그는 차갑고도 소름 돋는 얼굴로 이죽거렸다.
“고수, 너는 지금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어차피 나는 계속 존재할 것이고. 너를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는 영원히 죽음을 극복하지 못할 텐데? 그러니 너는 나를 이겼다고 할 수 없겠지.”
“글쎄.”
나는 그의 말에 전혀 흔들림 없이 자약하게 대꾸했다.
“...일단 네 번째 재앙부터 제거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