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겐 생명이 곧 무덤
“꿈을 통해 원흉이 세계의 모든 사람을 조종하게 된다는 거야?”
내가 묻자 이번에는 수호가 대답했다.
어느새 내가 보던 영상은 끝이 나 있었다.
- 2050 : 모든 사람을 조종하진 못합니다. 원흉이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이 약한 자입니다.
- 2050 : 또는 원흉과 코드가 맞는 사람이 쉽게 조종당한다고 할 수 있겠군요.
- 고수 : 쉘터는 괜찮아? 너는?
- 고수 : 근데 이번에는 2023년에 아직 일어나지 않을 일이 2052년에 적용된 건가?
- 2050 : 시간선의 변화가 적용되는 건 예측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 2050 : 현재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탓에, 저 역시 모든 걸 인지하기가 어렵습니다.
- 2050 : 아버지의 시간 능력이 닫힌 것과 관계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번엔 빠른 적용이 이루어진 게 다행이다는 생각도 듭니다.
- 2050 :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만. 덕분에 다음 재앙이 어떻게 올지 2023년에서 미리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나는 수호의 톡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 고수 : 음, 2023년의 상황이 좋지 않았나 보구나.
- 2050 : 네. 2023년의 내일 날짜에 동시다발적으로 네 번째 재앙이 임할 겁니다.
- 2050 : 지금 바뀌어 적용된 제 기억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1 가량이 원흉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 2050 :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원흉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은 즉각 가까이 있는 사람을 해하고 공격하게 됩니다.
- 고수 : 저택에 있던 이들은? 그들 중에 원흉에게 조종당하게 될 이가 있어?
수호는 짧은 침묵을 했다.
그러다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 2050 : 원흉에게 강하게 조종당한 이는 없고 약간 영향만 받은 이가 있습니다.
- 2050 : 이 부분에 대해선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지금 제가 기억하는 이 기억은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니까요.
- 고수 :
- 2050 : 분명히 그렇게 될 겁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바이지만, 중요한 건 현재입니다.
- 고수 : 그래. 나를 믿어줘서 그런 말 하는 거겠지.
- 고수 : 하지만 네가 겪은 시간선에선 나는 ‘멸망 구속’이란 능력과 창조의 별들의 능력으로 재앙을 막을 수 없었던 건가?
- 2050 : 아버지에게 멸망 구속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능력의 발현 조건은 원흉이 아버지의 눈을 바라봐야 하니까요.
- 2050 : 그리고 다섯 번째 재앙도 출현했던 탓에 어려웠습니다.
- 2050 : 네 번째 재앙으로 조종당한 사람들로 인해 온 세상이 비극과 공포, 혼란에 사로잡히게 되면, 다섯 번째 재앙은 더욱 강해질 겁니다.
나는 잠시 수호가 보낸 메시지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 * *
그날 늦은 밤, 나는 정원으로 나와 잠시 거닐었다.
밤하늘엔 맑은 별빛이 흩뿌려져 고적하고도 아름다운 밤 풍경을 자아냈다.
정원의 정자에 잠시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아까 서재에서 꿨던 꿈에 대해 곱씹듯 생각했다.
원흉이 했던 이야기.
처음 원흉은 노르웨이 인물이긴 했었다.
처음엔 꽤 젊은 듯했으나 이후엔 내 또래까지 나이가 든 모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자신에 관해 말할 때, ‘소년’이라는 표현을 썼다.
내 기억으로 원흉은 소년이라고 말하기 뭐했던 인물이었으나, 원흉은 자신에 대하여 ‘소년’이었다고 기억하는 모양이다.
원흉은 자신을 가리켜 죽음 그 자체라고 말했었다.
지금으로선, 다섯 번째 재앙이 ‘죽음’이란 존재일 것 같다.
나는 우주에 머물고 있을 한별에게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한별만이 아니라 다른 창조의 별들, 매개체로 존재하는 ‘사과나무’에 메시지를 보냈다.
인도의 최초 능력자인 ‘라훌 데비’는 내가 요청했던 대로 세계 곳곳에 120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었던 터다.
- 문별은 미국, 샛별은 호주, 운별은 유럽, 은별은 아프리카로 가 있어. 그들의 이동은 한별이 도와주고. 그런 후에 한별만 지구 대기권에 머물고 있도록 해.
- 한별은 그곳에서 네 번째 재앙의 접근을 미리 알아낸 후, 즉시 이동 능력으로 저택으로 돌아와.
- 세계 곳곳에 있는 사과나무들도 내 말 잘 들어. 내일 내가 너희들에게 신호할 거야. 아마도 정오 즈음이 되지 않을까 여겨지는데. 너희는 그때 생명의 바람을 일으키도록 해. 최대한 강하고 넓은 범위의 바람으로.
매개 능력을 이어받은 ‘멸망 구속’.
이 능력의 스탯은 꽤 높은 수치라서 그런지, 매개체로 있는 모든 사과나무와 소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내게 사과나무들의 메시지가 쏟아졌으나 나는 그걸 다 듣지 않았다.
한둘도 아니고 무려 120그루라서 다 듣기 어렵다.
별이 건네오는 말은 귀담아들었겠으나, 사과나무들이 건네는 소리는 대부분 단순한 수다였다.
나는 내 능력 스탯을 살폈다.
『멸망을 구속할 창조 능력자 1레벨
재능과 능력의 주인 : 99
절대 창조력 : 99
공간 이동 : 45
멸망 구속 : 131
그랜드 코인 : +9999999.』
그러고 보니 코인이 가득 들어와 있는 상태였는데 스탯을 아직 업그레이드하지 않았었다.
‘절대 창조력’을 올릴까.
그랜드 코인은 그저 ‘9’로만 표기되어 있어서 몰랐는데.
상당한 코인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덕분에 창조력 스탯을 두 번이나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어느덧 절대 창조력의 스탯 수치가 100을 넘기게 되었고.
스탯 명칭이 달라졌다.
『멸망을 구속할 창조 능력자 3레벨
재능과 능력의 주인 : 99
절대 본질 창조력 : 101
공간 이동 : 45
멸망 구속 : 131
그랜드 코인 : 12501.』
절대 본질 창조력?
이 능력을 발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으니, 이 능력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제껏 나는 사물을 그림으로 그렸었는데.
이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 그림도, 실물 전환하는 게 가능해졌다.
본질적인 부분, 내면적인 부분도 실물 전환이 가능해진 거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원흉이 말했던 노르웨이의 불행한 소년.
아니, 소년이었던 청년.
죽음과 멸망의 근원이라는 존재의 숙주가 되고 만 존재.
그에게 실물 전환하고픈 그림이 생각났다.
나는 서재로 돌아와서 3D 타블렛 디스플레이를 열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내가 그렸던 그림과는 전혀 다르다.
극사실주의 그림도 아니었고.
풍경화나 인물화, 사물을 그린 그림도 아니었다.
추상화 같은 그림이랄까.
나는 누군가에게 건넬 회복과 행복, 위로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작은 속삭임 같은 것이기도 했고.
사랑을 담은 부드러운 토닥임이기도 했다.
그걸 연상하여 그림으로 그렸다.
내가 마음을 담아 그린 이 그림도, 사물이 실물 전환되었듯이 현실에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그림이 실현된다면 평범한 사람일 경우 마음이 한결 좋아지겠지만.
반대로 멸망 속성의 지녔거나, 멸망과 죽음의 근원이 대상이 된다면...
오히려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터였다.
죽음에겐 생명을 더욱 빛나게 할 아름다운 것들이 오히려 무덤이 될 것이니.
생명이 더 강해지고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지려면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행복, 위로, 기쁨 등등.
돌이켜보면, 내가 이제까지 실물 전환했던 그림들은 대항하고 버티고 살아남으며 이기기 위해 필요했던 것들이다.
음식, 무기, 건물, 식물 등등.
원흉에게 직접 사용했던 그림들은 어찌 보면 가혹하기도 했었다.
목을 떨어뜨리고 피투성이에 이르게 했으며, 눈이 멀게도 했었으니까.
파괴와 죽음을 나 역시 수단 삼아서 원흉에게 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그를 온전히 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언젠가 테이가 했던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죽음에겐 생명이 곧 무덤이 될 수 있겠네요.”
사물이 아닌 본질을 그리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를 그려서 실물 전환을 하는 건 처음이라서...
어찌 될지 모르겠다.
나는 일생일대의 그림을 그리듯 그 어떤 그림보다 심혈을 기울였다.
내 온 마음을 담으며 그렸다.
일부러 빠르게 그리지도 않았다.
그림의 선 하나에도 터치 하나하나에도 내 마음을 담았다.
이 그림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건...
원흉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모든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 * *
한별은 지구의 대기권 밖에서 초소형 드론으로 둔갑했다.
그의 외형 변형 능력은 외모를 바꾸는 수준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바꾸어 둔갑하는 게 가능했다.
쉽게 눈에 띄지 않은 투명한 드론으로 둔갑한 그는 쉼 없이 이동하며 지구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태양 에너지를 최대한 흡수했다.
수개월이 지나는 사이, 한별은 처음보다 강해져 있다.
처음 인간형으로 진화하고서 고수를 대적하려 저택으로 향했을 땐.
한별은 이 정도로 강하진 않았었다.
그건 원흉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도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점차 진화했을 거다.
한별은 별의 시야로 네 번째 재앙이 나타나는지를 살피기도 했으나, 가끔은 고수의 생각을 인지하기도 했다.
고수와 연결된 그였으니, 고수의 생각이 그에게로 흘러들기도 했다.
고수는 줄곧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다.
그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이 느껴졌다.
그 탓에 덩달아 한별도 고민하게 된다.
다섯 번째 재앙은 무엇인지.
네 번째 재앙을 이길 방도는 무엇인지.
사실, 네 번째 재앙을 이기는 건 쉽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원흉의 조종 능력은 그의 ‘생명의 영역’ 능력으로 충분히 파훼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문제는 다섯 번째 재앙.
그것은 줄곧 지구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수의 생각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가 짐작하기로는, 다섯 번째 재앙은 죽음 자체다.
생각해보면 죽음은 줄곧 인간의 삶 가까이에 머물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의 죽음도 아니고, 온 세계 사람에게 임할 죽음의 공포는...
실로 강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별은 별의 시야로 우주 어느 부근을 보다가 이동하는 걸 멈추었다.
저 멀리 자그마한 별 하나가 지구로 접근하고 있다.
지름 200미터 정도 크기의 별.
그것은 어느 지점에서 잿빛 우주 먼지 같은 것으로 변모했다.
그걸 본 한별은 즉각 고수에게 전했다.
- 고수, 네 번째 재앙이 다가옵니다.
* * *
수호가 일러준 시간과는 약간 오차가 있었다.
정확히 정오는 아니었고.
오전 11시 정도 즈음에 한별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나는 서재에 머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족에겐 굳이 벙커로 피신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한별에게 지시했다.
- 한별아,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말고. 너는 여기로 돌아와. 저택 밖, 내가 일전에 사과나무를 심었던 장소 알지? 그곳에서 있어.
- 알겠습니다.
나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조해진 마음에 주먹을 꽉 쥐어진다.
곧바로 공간 이동 능력을 발현했다.
내가 선 곳은 한순간에, 서재가 아닌 외부 풍경으로 바뀌었다.
근처에 한별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싱그러운 느낌의 녹안에 짧은 흑발을 흩날리는 그.
어느새 그는 전보다 더 성장해서 30대 초반 나이의 외모로 보인다.
나는 그에게 짧게 시선을 주었다가 사과나무들의 시선을 공유했다.
매개 능력의 숙련도가 높아지면, 매개체의 주변 지역을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다.
육안으로 보는 개념은 아니었고 다만 내 감각에 인지되는 것이다.
나는 한별에게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된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