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같은 그림 전시회 2
봄이 무르익어가는 동안 한낮은 꽤 더워졌다.
녹음이 짙어졌다.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한 일은 전시회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 외에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젠 2023년도에도 2052년도에도 멸망의 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원흉이 다섯 재앙으로 존재할 뿐.
그렇기에 별을 제거함으로 얻을 보상도 이젠 없어진 셈이다.
2052년의 상황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여전히 한반도와 그 인근을 제외하면 괴식물과 괴수들이 들끓었고.
파괴된 도시에 괴수들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생존자들은 적었다.
원흉을 추적하는 일도 현재 어려웠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나노카의 예지 환영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뿐.
시간이 지나 6월이 되었다.
어느덧 초여름으로 계절이 바뀌어 가는 시기.
그러던 어느 날, 나노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뭔가 알아낸 것인지 그녀는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외쳤고.
나는 서툰 일본어로 그녀와 대화를 했다.
<화가님! 알아냈어요! 첫 번째 재앙은 ‘대지진’이에요!>
“대지진이요?”
<세계 곳곳에 대지진이 일어날 거예요. 아, 끔찍해요. 그것은 아포칼립스와 멸망의 전조로 나타날 거예요. 곳곳에 화산 폭발과 대형 쓰나미가 닥칠 거예요.>
“정확한 시기와 위치도 알 수 있어요? 가장 먼저 지진이 나타날 지역이라던가.”
<그건 아직... 당장 코앞에 나타날 일은 아닌 것 같았어요. 좀 더 알아낼게요.>
“네.”
<그런데 그러한 지진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걸까요? 원흉이란 존재는 대체 어떤 능력을 지녔길래.>
“아마도 염력일 겁니다.”
<염력이요?>
“염력은 원흉의 주요 능력 중 하나거든요. 범위가 넓은 강대한 염력은 지반을 붙들고 움직여서 지진을 유발하는 게 가능해질 거예요.”
<아.>
“원흉의 염력은 곳곳에 대지진을 일으킬 만큼 강해지는 것 같네요.”
원흉은 가장 강한 다섯 별을 통해 존재하면서, 자신의 능력 역시 한 가지씩 나누었을지 모르겠다.
염력에 몰빵한 첫 번째 재앙, 그다음엔 다른 능력에 몰빵한 재앙, 그런 식으로...
<두 번째 재앙은 소행성 충돌이에요. 별의 모양은 이전에 봤던 멸망의 별과 모습이 흡사해요. 하지만 별의 크기가 컸어요. 별의 지름이 6킬로미터나 되어서 대재앙이 될 거예요.>
“음.”
<예지 환영으로 보였던 바로는요. 그 소행성은 갑자기 지구 인접한 곳에 나타나서 쏜살같이 날아왔어요. 그 탓에 나사는 예측 못 하고 대처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어요. 뒤늦게 행성을 파괴하기 위해 미사일을 쏘아 올렸어도 그 별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걸 환영을 통해 봤어요.>
“별 중 하나는 최대로 몸집을 불렸군요. 그다음 재앙은요?”
<회색 입자를 머금은 토네이도가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나타나요. 의외로 한반도와 중국, 일본 쪽으로는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요.>
“네.”
<위의 세 가지 재앙이 동시에 나타나요.>
그녀의 말에 나는 무겁게 침묵하다 입을 뗐다.
“동시에 나타나면 조금 버겁겠군요. 하지만 걱정 마요. 충분히 막을 수 있어요.”
<제가 본 것을 세상에 미리 알리면 어떠할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노카도 알잖아요. 사람들은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을 거라는 것을. 세상이 재앙을 미리 알고서 대비하려는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능력으로는 막을 수 없어요.”
나노카는 의기소침하게 답했다.
<그렇겠네요.>
“사람들을 대피하게 한다고 해도 세계 모든 이들이 피할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재앙이 닥치는 순간이 되면, 최대한 사람이 피할 곳을 마련해둘 겁니다. 물론, 재앙으로 세상이 피해를 입기 전에 막을 거지만.”
<네. 네 번째 재앙은 이곳 세상의 무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수한 사람들이 재앙이 되었던 것 같아요.>
“네 번째 재앙이 이곳 세상의 무기와 사람이 된다고요?”
<네. 곳곳에서 핵무기가 멋대로 도시로 떨어지고 미사일이 발사되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무작위로 돌변해서 주변 사람들을 공격해요.>
음, 원흉의 조종 능력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건가?
첨단 무기를 조종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조종해서 나타나는 재앙 같다.
<그 재앙은 앞선 세 가지 재앙이 지속하는 중에 조금 뒤늦게 나타나요. 결론적으로는 모든 재앙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셈이긴 하지만요.>
“네.”
<다섯 번째 재앙은 아직 정확히 보이지 않아요. 그냥 뿌연 상태에요. 하지만 숱한 예지 환영을 보면서 느껴지는 건, 마지막 재앙은 최종 보스라는 느낌이 들었고요. 앞선 재앙들이 합세해서 세상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멸망이 다가오게 될 거로 느껴졌어요.>
“그렇군요. 나노카의 능력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원흉을 어떻게 상대하고 아포칼립스를 어찌 막아야 할지 조금이나마 가닥이 잡히네요. 재앙이 나타나는 정확한 일시와 위치를 알아내는 걸 계속 부탁할게요.”
<네, 그럴게요.>
나노카와 그러한 대화를 한 이후, 나는 다섯 별들과도 대화를 나누며 고민했다.
이 무렵, 한별은 조금 성장을 해서 이십 대 중반 외모를 하고 있었고.
은별은 제외한 나머지 별들도 20대 초반 외양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들은 ‘애플 쉘터스’ 직원이자 내 가족 경호원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저택 별관에 숙소를 만들어서 머물게 해주었다.
나는 정원의 정자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별들에게 입을 열었다.
“세 번째 재앙까지는 어떻게든 능력을 높이면 대항할 방법이 있을 거로 여겨지는데. 네 번째 재앙은 무슨 방도로 대항할 수 있을까?”
내가 묻자 한별이 답했다.
“네 번째 재앙은 원흉의 조종 능력이 특화하여 불거진 재앙이니, 이 또한 우리가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의 폭풍’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사람의 마음도 감화합니다.”
“오, 그래?”
“다만 무기나 사물을 조종하는 것을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방도는 염력뿐일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현재 염력이 가능한 능력자는 운빛과 장위, 나 정도가 되겠다.
운빛의 능력을 공유하면 나 역시 염력 사용이 가능할 테니.
지금으로선 한꺼번에 닥칠 재앙을 막는 게 어려울 것 같지만.
재앙이 출현할 때 신속하게 그것들을 제거하면 아포칼립스는 막을 수 있을 거다.
* * *
2024년 2월, 미국의 뉴욕.
존은 그의 아파트에서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집은 고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이라서 도시 풍경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바깥을 보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대한 토네이도가 저 멀리 짙은 잿빛 구름에 휩싸인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을 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잿빛 토네이도는 마치 하늘과 땅을 받치는 거대한 기둥처럼 보였다.
그 바람 기둥은 모든 걸 삼키며 점차 이곳으로 가까워져 갔다.
이토록 거대한 토네이도를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은 처음.
이런 건, 영상으로도 본 적이 없다.
존의 동공이 확장되며 입이 벌어졌다.
거실에 있던 그의 아내도 다가와 창가로 다가왔다.
“존, 어서 이곳을 피해야 해!”
“어, 응!”
존은 황급히 대답하긴 했지만 어디로 피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부리나케 집안의 물건을 챙겨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다 거실에 걸린 애플 수의 그림 액자에 눈길을 주었다.
작년에 애플 수가 단독 전시회를 열 때, 온라인으로 구매했던 그림이다.
기묘한 디자인의 건물.
마치 벙커 쉘터처럼 보였다.
애플 수는 왜 이런 건물을 그리는 걸까.
궁금하게 여기긴 했어도 그의 작품이라서 기쁘게 구입했었다.
그리고 보물 다루듯 애지중지 매일 그림을 감상하곤 했었다.
“저 그림도 가져가야 해!”
“지금 그림 챙길 때야?”
“그래도 가져가야 해!”
존은 고집스레 그림 액자를 챙겼다.
대강 챙긴 옷 가방과 액자를 들고서 아내와 함께 아파트 주차장으로 향했다.
쿠구구구구-
땅이 제법 흔들리는 듯했다.
지진이 다시 일어나는 걸까.
건물을 미처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무너지게 될까 덜컥 겁이 났다.
사방에서 아우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혼란 그 자체였다.
존은 아내와 차에 타고서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지하 대피소의 위치를 대략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멀었고, 도로는 이곳을 탈출하려는 차량으로 혼잡했다.
빵빵, 빠앙!
차량 라디오에선 속보가 흘러나왔다.
“현재 각 지역에서 회색 토네이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회색 토네이도가 지나간 곳은 회색 스모그가 발생합니다. 이 스모그에 노출될 경우, 동식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치명적...”
아내가 존에게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우리 이젠 어떡해? 회색 스모그가 발생하면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저기서 8도, 9도 지진이 일어난다잖아? 여기도 안전하지 못해. 거기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가면 여긴 다 파괴될 거야! 최대한 안전한 장소로 가야...”
존은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눌렀다.
앞의 차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내가 두려움에 질린 어조로 절망했다.
“우린 모두 죽을 거야.”
그때였다.
뭔가 반짝이는 게 눈앞에 어른거린다 싶더니, 차의 뒷좌석에 둔 그림 액자가 돌연 위로 떠올랐다.
혼자 움직이는 것이다.
조수석에 있던 존의 아내가 그걸 돌아보더니 놀란 얼굴로 외쳤다.
“존, 그림 액자가!”
존도 뒷좌석에서 혼자 떠오른 그림 액자를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츠츠-
근처 공원에 거대한 건축물이 홀연히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몇몇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뭐지?”
사람들의 이목이 어느 한곳으로 쏠렸다.
공원이 있던 자리에 대형 건물이 돌연 생겨났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당연했다.
“갑자기 생겨났어요!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에요.”
“위험한 걸까요?”
존의 차 뒷좌석에서 잠시 위로 떠올랐던 그림 액자.
그 안에 있던 그림은 놀랍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액자 안에 백지만 남은 것이다.
액자는 도로 얌전히 의자에 놓였다.
존은 퍼뜩 스치는 생각에, 아내에게 외쳤다.
“저기야, 우리가 피할 곳! 저기로 가면 안전해질 수 있어!”
존은 황급히 짐을 챙겨 차에서 내리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저기로 피해야 합니다! 저 건물은 지하벙커입니다!”
* * *
방금 내가 본 예지 환영.
내년 초 즈음, 뉴욕시에서 나타날 일이다.
나는 나노카의 능력을 공유하여 예지 환영을 볼 수 있었다.
어제 나노카의 가족이 저택을 방문했던 터라, 그녀가 이곳에 머문 덕분이었다.
나노카 가족은 내가 초청했던 터다.
요즘은 내가 하는 전시회가 세계 곳곳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 퍼트리기 위해 타블렛으로 그린 그림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지하벙커 기능이 있는 건물, 작은 숲, 조각구름이 뜬 푸른 하늘.
작은 샘, 백호, 황금 봉황, 곡식이 자라는 들판, 전투 차량 등등.
작업 속도가 아무리 빨라졌다 하더라도 수천 점의 그림을 실물처럼 그리기 위해선 노가다와 숱한 에너지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극사실주의로 치중하던 기법에서 힘을 조금 뺐다.
이전에 내가 극사실주의로 그림을 그렸던 건, 실물 전환을 위해 사실 같은 표현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게, 창조력과 재능 스탯이 초월적으로 높아졌다.
굳이 극사실주의 표현 기법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 것.
이렇게 되니, 작품 하나 완성하는 시간은 압도적으로 줄어들었다.
드디어 전시회 일정이 잡혔다.
진구는 호들갑을 떨며 내게 전화했다.
<고수야, 전시회 일정 잡혔다. 날짜는 6월 1일부터 24일까지야. 장소는 국립 서울 미술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곳. 진짜 고수 출세한 거 새삼 실감나네.>
“얼마 안 남았네.”
<지금 홍보 영상이 너튜브에 올라가 있어. 광고도 SNS이랑 곳곳에 나가는 중이고. 해외에서도 계속 기사 뜨고 뉴스에도 나오나 봐.>
“그래.”
<그림은 잘 되어가고 있냐? 진짜 3200점이 가능해?>
“가능해. 암튼 수고가 많다. 여러 가지로 고맙다.”
<고맙긴. 내가 너에게 고마울 때가 많지. 그럼 수고해라.>
나는 통화를 끝내고 3D 디스플레이에 저장된 그림 파일들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수, 그림 분류 부탁해. 지하벙커 건물만 모아둔 그림은 첫 번째 폴더로 모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