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142화 (142/153)

마법 같은 그림 전시회

나는 진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음이 가고 그가 전화를 받으며 대뜸 말했다.

<어이, 살아있었냐?>

오랜만에 연락했다는 의미다.

“그래, 죽을 뻔하긴 했지만 용케 살아있었지.”

<죽을 뻔하다니?>

“요즘 내 삶이 다사다난하다.”

<다사다난하긴. 요즘 네 삶은 쭉쭉 뻗어가며 꽃피고 있더구만. 너 기사나 SNS 반응 같은 거, 보긴 하냐?>

“음, 요즘은 그럴 틈이 없었네.”

<요즘 애플 수, 완전 날아 오르다 못해 대기권 뚫고 우주까지 날고 있어. 다들 부러워한다.>

“헐. 그러잖아도 요즘 우주를 넘나들었는데. 어찌 알았냐?”

<흐흫, 뭐래.>

“암튼 내가 전화한 건, 조만간 그림 전시회 하려고.”

<오! 드디어 애플 수 전시회 하는 거냐?>

“응. 그래서 말인데. 준비 좀 부탁해.”

<준비, 당연히 내게 부탁해야지. 전시 기획부터 즉각 해야겠다. 근데 그림은 몇 점이나 있어? 그동안 좀 그려뒀냐?>

“작품 수는 많을 거야. 그림 영상도 준비했으면 하고. 전시회 규모는 애플 수 단독으로 하되 최대 규모로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전시회 했던 모든 그림은 온라인을 통해 판매했으면 좋겠어. 대략 작품 수는...”

<백여 점?>

“아니, 몇천 점 정도.”

<히익! 뭐라고? 몇백도 아니고 몇천 점?>

“암튼 최대 규모로 했으면 해.”

<일단 내가 네 저택으로 갈게. 수연이, 주혜 씨랑 함께 가도 되냐? 자세히 논의할 겸.>

“그래 와라.”

나는 전화 통화를 끝내고는 서재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작품 구상을 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정면에 켜진 3D 디스플레이를 응시했다.

나직한 어조로 AI에게 물었다.

“수, 어떤 그림을 그리는 게 좋을까? 나는 내 그림들을 세계 곳곳에 퍼트릴 생각이야.”

그러자 디스플레이 화면에 수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고수님이 그림을 그려 세계를 퍼트리려는 목적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단순히 전시회를 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도 있지만, 아포칼립스를 대비하는 보험을 마련하려는 것이랄까?”

<물질적인 목적이 있다면, 수천 개의 작품은 고수님의 그림 희소성을 떨어뜨려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요?>

“일부만 유화로 그릴 거고. 그건 좀 비쌀 거야. 그 외 대부분 타블렛으로 그릴 거야. 타블렛으로 그린 그림은 다소 저렴하게 판매될 것이지.”

<그렇군요.>

“현재 여론을 보니까 애플 수라는 이름은 인기가 좋아졌는데 그림값이 너무 비싸서 불만인 사람도 있고. 소장하고 싶어도 소장하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더라. 그래서 타블렛 그림을 그릴 생각이야.”

<고수님은 판매 수익을 얻는 것보다 그림이 곳곳에 퍼지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두시는 거군요.>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내 그림을 곳곳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 보험 용도로 이 일을 하는 것뿐이야. 물론, 내가 수천 개의 그림을 그려두면 현재 시간선의 2052년 상황이 훨씬 나아질지도 몰라.”

<한 가지 더 여쭈겠습니다. 고수님의 실물 전환 능력은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신 건가요?>

“음, 글쎄. 아마도 한낮의 하늘 기상 상태를 일부 바꿀 정도 될걸.”

<그러면 하늘 그림이나 숲, 하천 같은 자연 풍경을 그리십시오. 그 외에 미래 무기가 될 만한 것이나 청와대 백호를 본뜬 호랑이 그림을 그려두는 것도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려 해외에 다수 판매된다면 고수님의 명성에도 도움이 될 듯싶습니다.>

“오! 괜찮은 방법이네.”

<그 외에도 대한민국을 상징할 동물이 더 있습니다. 고수님이 종종 그리시던 불새를 그리시되, 봉황 모양으로 그리는 것도 추천합니다. 색상은 황금빛 불이 좋겠습니다.>

“괜찮네. 너 AI 맞냐? 아이디어가 샘솟는구먼.”

<과찬이십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생각인 것이다.

* * *

김유라는 방안에 앉아 애플 수의 그림이 나오는 너튜브를 반복해서 보는 중이다.

애플 수의 얼굴이 그대로 공개되었던 광고 영상도 보는 중이다.

그녀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미쳤지.”

2021년의 여름 무렵, 유라는 고수와 헤어지는 걸 선택했었다.

당시 그녀는 나름 힘들었고 지쳤던 탓이었다.

그녀는 고수와 사귀는 내내 다른 친구와 비교하게 되곤 했었고.

그럴 때마다 자신마저 초라해지는 기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영상을 보는 유라의 시선에 짙은 그리움과 후회가 얽혔다.

그와 제법 오래 사귀었었고 알고 지난 건 더 오래되었기에.

20대의 젊었던 나날의 대부분을 그와 보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그가 그립고 보고 싶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의 삶에서 고수가 차지했던 부분이 크다.

그만큼 그녀의 숱한 추억에 고수가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는 고수는 그러했다.

다감하면서도 무심한 성격.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구석이 있던 성격.

그녀가 먼저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졌어도, 그 이후로 한 번도 그가 미련을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러했다.

사귀는 동안 고수는 그래도 다정한 연인이었다.

때로 그녀가 짜증을 내거나 변덕을 부려도 화를 크게 낸 적이 없었다.

고수는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었고.

그녀 역시 고수가 좋았다.

20대, 젊고 아름다울 시기.

그와 함께 했던 나날은 궁상맞고 초라했으며, 때로 자존심 상하기도 했던 날들이었으나...

돌아보면 행복했었다고 여겨졌다.

어쩌면 그녀의 삶에서 그때만큼 행복할 순간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

이젠 영영 함께 할 수 없다고 여겨지니 마음이 아프다.

작년 즈음, 고수가 갑작스럽게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라는 충격을 받았었고 배신감도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잊지 못했었는데.

고수는 그녀와 사귀었던 세월의 무게가 별거 아니었다는 듯이.

금세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만일, 그때 고수와 헤어지는 걸 선택하지 않았었다면...

지금쯤 그녀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애플 수의 와이프는 아마도 그녀가 되어있지 않았었을까?

수백 번도 더 해봤던 생각이다.

유라는 광고 영상 속 고수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유라는 인터넷에 뜬 기사를 읽어보았다.

이제 곧 애플 수가 그림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이다.

기사에는 댓글들이 제법 달렸다.

└ 김치맛 과자 : 와! 이건 애플 수 그림을 소장할 기회다! 전시회 할 때까지 무조건 존버!

└ sun77 : 애플 수 결혼 전에 여자관계 꽤 복잡했다던데?

└ 지게꾼 : 생긴 거 봐라! 가만있어도 여자관계 복잡해지게 생겼지. 그보다 애플 수는 유명해지기 전에는 되게 비루했다던데. 어떻게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달라지지?

└ 수 멋져 : 애플 작가님! 첫 전시회 축하드려요! 전시회 꼭 가서 그림 살게요!

└ 김 박사 : 이번에 선보일 그림은 또 얼마나 ㅎㄷㄷ할지. 기대되네.

댓글들을 보던 유라는 문득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댓글을 달아놓았다.

└ 영원한 여친 : sun77! 애플 수 여자 관계가 복잡한 거 직접 봤어? 애플 수는 결혼 전에 한 여자만 좋아했거든?

유치하다는 건 안다.

근데 댓글 보다 보면 그녀도 모르게 감정이 휩쓸리고 만다.

└ 영원한 여친 : 그리고 애플 수는 유명해지기 전에도 여전히 멋졌거든? 전혀 비루하지 않았어! 그때도 그림 잘 그렸고 한결같이 잘 생겼었어!

그렇게 댓글을 적다가 뭐하는가 싶어져서 그녀는 컴퓨터를 꺼버렸다.

수연이는 여전히 고수와 잘 지낸다고 하던데.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라는 관계가 더 나았을 뻔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고수와 계속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 * *

요즘 나는 일본에 있는 나노카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나노카에게 부탁을 해두었던 것이다.

2023년 4월 이후의 한반도와 올차드 저택에 관해서 예지 환영을 보게 될 경우, 연락해달라고 했었다.

어제도 그녀가 톡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내가 그녀와 톡 대화를 하는 방식은 이러했다.

그녀가 톡을 보내면, AI 수는 즉각 번역해서 디스플레이 화면에 문장을 나타냈다.

- 나노카 스즈키 : 화가님, 어제 예지 환영을 보긴 했었는데요.

- 고수 : 네.

- 나노카 스즈키 : 어제도 특별한 위험 같은 건 없어 보였어요. 화가님은 요즘 전시회를 준비하고 계신 것 같던데요.

내가 입으로 말하면 AI 수가 일본어로 작성해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걸 받아서 톡 창에 적어넣었다.

- 고수 : 올차드 저택과 한반도 상황에 관해 최근 환영만 보았습니까? 최근 일보다는 가까운 미래 환영으로 보지 못했어요?

- 나노카 스즈키 : 네. 제가 본 건 최근 날짜 뿐이었어요.

- 고수 : 그러면 조금 먼 미래에 관한 건요? 올차드 저택의 상황에 대해 본 거 있어요?

- 나노카 스즈키 : 제 의지와 상관없이 예지 환영을 보게 될 때가 많아서요. 그래서 주로 일본의 상황과 제 가족에 관한 것을 보게 되네요. 죄송해요.

- 나노카 스즈키 : 그래도 의지를 불태우면서 열심히 예지 능력을 사용하는 중이에요. 간혹 제 의지에 따르는 환영도 나타나니까요.

- 나노카 스즈키 : 한반도와 화가님에 관한 조금 먼 미래를 보긴 했었는데요. 이건 별로 내용이 좋지 않아요.

- 나노카 스즈키 : 대략 2024년 초 즈음인 것 같아요. 한반도는 다행히 큰 피해가 없는데요. 화가님에게 피해가 있었나 봐요.

- 나노카 스즈키 : 화가님의 동료로 보이는 강한 자들이 있었는데요. 그들 중에서 세 명이 이미 죽은 것으로 보여지네요.

아마도 창조의 별을 말하는 것일 테다.

- 고수 : 그렇군요.

- 나노카 스즈키 : 제가 보는 환영은 때마다 달라지곤 해서 가끔은 혼란스럽기도 해요.

- 고수 : 나노카가 보는 미래 환영이 때마다 달라지는 이유는 우리의 선택으로 미래가 뒤틀리거나 변하기도 하기 때문일 겁니다.

- 고수 : 계속 예지 환영 보는 일을 부탁드릴게요.

어제 그녀와 대화했던 톡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보다가 나는 지하벙커로 왔다.

지하벙커는 내 작업실이 되어있다.

이곳은 사람의 출입이 없어서 자유롭게 능력을 사용해도 무방한 까닭이다.

나는 조명을 꺼서 사방을 어둡게 하고 멀찍한 곳에 촛불 여러 개를 켜두었다.

내 곁에는 별들이 조용히 머물고 있다.

“한별 제대로 찍고 있지?”

내가 묻자 한별은 카메라를 든 채 답했다.

“네, 찍고 있습니다.”

“좋아.”

나는 불로써 그림을 그리려고 암흑뿐인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자 명멸하는 백색 빛의 점이 나타났다.

화르륵!

촛불에만 자그맣게 일렁이고 있던 붉은 불꽃.

그것이 갑자기 허공에서 화악 일어나더니 붉게 너울거렸다.

나는 불꽃을 그림 재료로 삼은 것이다.

이렇듯 그림을 그리려는 목적이라면, 불꽃으로도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해졌다.

나는 ‘재능과 능력의 주인’ 능력을 통해 운빛의 염력을 공유하여 발현했다.

염력을 사용하여 불꽃을 특정 모양으로 응집하게 했고 가두었다.

불꽃을 유지할 연료가 없는 상태라 불이 자꾸 꺼지려 했지만, 붉은 불꽃은 촛불을 통해서 지속해서 공급되었다.

불이 된 그림 재료가 물감처럼 공급되고 있는 셈.

까만 어둠 속에 붉은 불꽃이 타오르는 광경.

내가 보아도 실로 신묘해 보였다.

근처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구경하던 샛별이 동그래진 눈으로 감탄했다.

“와아.”

나는 준비해둔 푸른 불꽃 그림을 실물 전환했다.

푸른 불꽃은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짧다.

금세 불꽃의 색이 붉게 변할 것이니.

화르르!

허공에 푸른 불꽃이 생겨나자 즉시 염력을 사용하여 불꽃을 조종했다.

빠른 속도로 내가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내자, 붉은 불꽃과 푸른 불꽃은 아주 찰나의 순간!

태극 문양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푸른 불꽃은 붉게 변하였고 이내 꺼져버렸지만.

뭔가 생쇼하는 기분이긴 해도.

촬영한 영상을 그럴듯하게 편집하고 내가 직접 그린 그림을 부가한다면 멋진 작품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와! 마술 같아요.”

나는 불꽃을 끄고 전등의 조명을 켰다.

“너희들 마술이 뭔지는 알아?”

“알아요, 우리는 이미 이곳 세상에 관해 많은 공부를 끝마쳤거든요.”

“그래?”

“다음 그림은 어떤 걸 그릴 건가요?”

은별의 질문에 나는 느릿한 어조로 답했다.

“음, 다음 그림은 백호를 그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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