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의 싸움 2
다음날 오후 3시 50분.
한 남자가 올차드 저택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잿빛에 가까운 창백한 피부.
눈동자 색은 짙은 밤 갈색.
머리카락은 흑발이다.
아포칼립스 원흉이라 불리던 자를 위해 존재하게 된 별.
그는 얼마 전만 해도 붉은 유성으로 지구 대기권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머물러 있었다.
언제부터 그가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그는 평범한 작은 유성으로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었을 뿐.
하지만 어느 날, 각성하듯 그에게 자아가 생겨나고.
그가 누구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인식하게 되었다.
최근, 그는 지구의 대기권에 가까워졌다.
작은 붉은 유성이던 그가 갑작스럽게 ‘멸망의 별’이 되고.
인간형의 외형을 갖추게 된 것은 이틀 전이었다.
그가 급격하게 진화하게 된 까닭은 아포칼립스 원흉의 육신이 사라진 것에 있었다.
고수가 원흉의 육신을 아예 이 세상에서 흔적없이 지워버렸기에.
원흉은 자신의 매개체들인 멸망의 별들에게 나뉘어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흉의 능력과 의지가 깃들자 몇 개의 별들의 진화가 가속되었다.
그 중 첫 번째로 인간형 별에 이른 것은 ‘그’였다.
현재 인간형 멸망의 별로 진화한 것은 그가 유일했다.
이는 이전 시간선보다 훨씬 앞당겨진 부분.
원흉의 육신이 고수에게 제거당했던 일이 이러한 변화를 불러온 셈이다.
조금 전, 그는 고수가 인도인 가족과 함께 외출하는 것을 확인했다.
사과나무 다섯 그루를 싣고 공항으로 향하던 모습.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제법 저택에서 멀어지는 것까지.
멸망의 별은 먼 곳까지 보는 초월적인 시선으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고수를 지켜보던 그의 눈동자에 증오의 빛이 어렸다.
섬뜩한 빛으로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그에게 원흉의 의지와 생각이 흘러들었다.
오늘은 보복의 날이다.
이전에는 그가 고수에게 당했었으나, 오늘은 고수가 당할 차례다.
고수의 아들이 죽는다면 미래에서 받던 지원이 끊길 것이고.
시간을 앞당겨 나타났던 고수의 능력은 원래의 시간에서 뒤늦게 나타나게 될 터다.
고수의 창조 능력과 시간 능력은 이 시점에선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다.
멸망의 별은 저택으로 나아가던 도중 외모가 바뀌었다.
고수의 외모로 변한 것이다.
그의 입매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에게는 원흉에게 있던 능력, 두 가지가 깃들었었다.
외형을 변모시킬 수 있는 능력과 공간 이동 능력.
외형 변형 능력은 고수와 대적하고 대항하기 위해 원흉에게 새로 나타났던 능력이다.
멸망의 별은 원흉에게서 전해진 의지를 따라 생각하고 움직였다.
외형을 변모하면 그림으로 공격하는 고수의 방식이 무력화될 수 있을 테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했다.
그가 홀연히 저택 안에 나타났을 때, 한나는 수호를 재우고 침실을 나오다가 그를 발견했다.
“어? 제부, 다시 돌아온 거예요? 뭐, 잊은 물건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한나를 못 본 척 무시했다.
아무런 대꾸 없이 수호가 잠들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나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여겼으나 딱히 더 말하지 않았다.
이제 어머니와 쇼핑을 나갈 참이라서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멸망의 별은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 벽에 걸린 시계가 정확히 4시를 가리긴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주저 없이 아기 침대에 잠든 아이에게 다가갔다.
고수에겐 시간 능력이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
고수가 눈치채고 뭔가 손을 쓰기 전에, 속전속결로 아기를 죽여야 한다.
이 아기를 죽이고 나면, 고수는 무력하게 될 것이니.
그가 시간을 되돌리는 수법도 쓰지 못하게 될 거다.
그는 빠르게 다가가 아기의 목을 강한 힘으로 움키려 했다.
하지만 그때, 아기 침대 곁에 고수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딜!”
멸망의 별은 순간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고수에게도 공간 이동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대응할 줄은.
고수가 눈앞에 나타난 이상, 일이 틀어진 거나 마찬가지지만.
뒤로 물러날 수는 없다.
애초 목표였던 아기를 죽이기만 한다면, 게임은 끝나게 될 것이다.
그는 멈추지 않고 아기에게 손을 빠르게 뻗었으나 고수가 붙들었다.
“......!”
고수의 능력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육신은 나약하다.
반면 멸망의 별인 그의 육신 능력은 강철보다 강하고 위력이 초월적이니.
고수가 그를 붙들어 제압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팔을 휘둘러 고수를 내동댕이쳤다.
고수를 당장 죽이고 싶으나 그보다 먼저 되어야 할 것은 아기를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먼저 일어난 일은, 그가 선 곳이 바뀌는 것이었다.
고수가 내동댕이쳐지기 전에 먼저 장소가 바뀐 것이다.
그가 선 곳은 침실이 아니라 저택 정문 밖 인근 지역이 되었다.
고수가 그를 붙들었던 순간에, 공간 이동 능력이 발현된 까닭이다.
어쨌거나 그가 팔을 휘둘러서 고수의 몸이 튕겨 나갔고.
고수는 침실 벽에 부딪힌 것이 아니라 근처에 서 있던 나무줄기에 부딪혀 떨어졌다.
고수는 신음을 흘리며 당장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나와 같은 모습이라면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거로 생각했겠지?”
“......?”
멸망의 별은 도로 아기가 있는 침실로 공간 이동하려다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쓰러져 있던 고수가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고 곱상한 그 얼굴에 자잘한 생채기가 난 모습.
멸망의 별은 그제야 알아챘다.
그는 재빨리 공간 이동을 시도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린 후였다.
고수의 시간 능력이 먼저 발동하고 만 것이다.
그는 찰나의 시간이라 해도 주저하지 말았어야 했다.
고수에게 틈을 내주지 말았어야 했다.
* * *
멸망의 별에게 내동댕이쳐진 나는 금세 일어나기 어려울 만큼 몸에 충격을 입었다.
방금 나무에 세게 부딪혔다가 떨어진 까닭이다.
나는 입을 악물고 시간 능력을 발현했다.
이내 이곳 세계에 흐르던 시간이 정지했다.
모든 소음이 소거되고 바람과 빛마저 그대로 못 박혀 공간에 박제되었다.
나는 시간이 멈춘 것을 확인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으윽, 진짜 더럽게 아프네.”
어디 골절 입은 거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미리 열어놓았던 3D 디스플레이에 눈길을 주었다.
거기에 내가 그려둔 완성된 그림이 있다.
현재 내 모습과 똑같은 모습의 그림.
절로 쓴 표정이 지어진다.
멸망의 별은 지금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럴 것으로 짐작했던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미리 그려두었었다.
특별한 재능과 능력을 지니게 된 이후, 처음으로 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셈인데.
그 목적이, 해하는 것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나를 위한 그림도 그려두었다.
똑같이 그려낸 내 모습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하나는 나를 위한 것.
다른 하나는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었다.
먼저 나를 위해 그려둔 그림을 선택했다.
머리 색과 눈동자 색, 피부 톤까지 바꾸는 그림.
나는 미리 준비해둔 거울을 꺼내 내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자잘한 상처와 생채기와 온몸에 나 있다.
지금 시점에서 멸망의 별과 내 모습의 유일한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미리 완성해둔 그림에 방금 내가 입은 상처를 빠르게 그려내었다.
그러고는 즉각 실물 전환을 했다.
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실물 전환까지 하는 건 처음이다.
실물 전환에 성공하자 내 모습을 거울로 확인했다.
염색을 전혀 안 한 내 흑발은 애쉬 블론드로 변해 있다.
그리고 눈동자 색은 옅은 푸른색.
피부톤도 훨씬 옅어졌다.
색상만 바꾸었는데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고 다른 인물 같다.
나는 거울을 본 채 내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염색을 안 한 천연 머리 색이 블론드가 된 셈.
신기하다.
거울을 다시 재킷 주머니에 넣고는 멸망의 별을 힐끗 보았다.
이젠 외모상으로도 멸망의 별과 나는 확연한 차이가 났다.
나는 다른 그림을 선택했다.
내 본래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한 외양에 심장이 날카로운 검에 꿰뚫린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려둔 것.
현재 나와 차이점이 생겼다고 해도, 내 모습의 그림에 치명상을 그려 넣고 실물 전환한다는 것은...
썩 꺼림칙한 일이었다.
하지만 주저할 수는 없는 일.
그때 이곳에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츠츠-
멸망의 별이 내 시간 능력에 저항하고 있는 거다.
그가 시간 능력을 풀고 도망치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겠다.
나는 그림을 실물 전환했다.
* * *
잠시 후, 이곳 세계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여전히 저택 인근에 머물러 서서 쓰러져 누운 멸망의 별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검에 찔린 채 검붉은 피를 흘리며 나를 응시했다.
멸망의 별은 죽어가는 탓에 그의 외양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그도 고통을 느끼는 건지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검붉은 피가 계속 왈칵 쏟아지고 있다.
내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의 모습에 동정심을 품을 수는 없다.
나는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움켜 붙들었다.
그가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하여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널 기필코 죽일 생각이었는데. 어제 밤새 생각해보니까 그냥 널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별로 이득이 없는 것 같더군.”
그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나는 그에게 말을 이었다.
“시간이 멈추어 있을 때, 아예 네 육신마저 지워버릴까 했는데. 내 모습을 한 자의 목을 떨어뜨리고 세상에 아예 지워버리는 일은 기분 나쁘기도 하더라.”
“무슨 속...셈이지? 날 죽이지 않겠다는 건가.”
“착각하지는 마. 넌 어차피 죽긴 할 거야. 멸망의 별이었던 너는.”
“......”
별은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금세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원흉은 너를 통해 나를 보고 있을 테지. 하지만 아까보단 미약해졌을 거야. 네 눈동자에 깃든 증오의 빛을 보고 알았지.”
“차라리 죽이는 게 나을걸? 내 심장에... 커흑. 꽂은 검을 빼낸 순간 내 육신은 점차 회복하게 될... 테니.”
나는 훗 하고 웃었다.
“검은 있다가 빼도록 하지. 네가 죽기 바로 직전에.”
“......”
“그때가 너에게 있는 원흉의 힘이 가장 약해진 순간일 테지.”
내 말에 별은 뭐라 외치려 했으나 그의 말은 제대로 나오질 못했다.
다만 그는 입가에 검붉은 피만 쏟아낼 뿐.
아마도 원흉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쯤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치지 못했다.
현재 별과 연결된 그의 능력이 미약해진 탓도 있었고.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봤자 내가 붙들고 있어서 같이 이동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인내심 있기 기다렸다.
별의 눈동자에 빛이 스러져 가기를.
이러니 내가 무척 잔혹하게 여겨졌으나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또한, 그는 아포칼립스를 일으키는 멸망의 별이 아니던가.
잔혹하게 여겨진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별에 깃든 원흉의 힘이 바닥까지 약해졌다고 여겨졌을 즈음.
나는 별에게 매개 능력을 시도해보았다.
성공할 수 있을까.
내 매개 능력의 스탯 수치가 너무 낮다.
별의 눈이 감겼다.
그 순간, 내 매개 능력이 그에게 성공적으로 걸렸다.
내 계획이 성공한 것을 기뻐할 새도 없이 나는 황급히 일어났다.
“아직 죽으면 곤란하지.”
그의 심장에 꽂힌 검을 두 손으로 붙들고, 힘을 주어 그의 심장에서 빼어냈다.
그러자 그의 상처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 피가 내 얼굴까지 튀었다.
나는 그의 상처를 눌러 지혈하면서 말했다.
“넌 이제 멸망의 별이 아니다.”
별은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선홍빛 피가 이곳을 그득 적혔다.
피의 색이 달라진 것을 보며 나는 죽은 듯이 눈을 감은 그에게 거듭 말했다.
“숨만 붙어 있다면 넌 다시 살게 될 거다.”
멸망의 별이었던 삶은 여기서 끝이 나고, 이제 존재 자체가 새롭게 된 창조의 별로서...
그렇게 다시 살게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