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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133화 (133/153)

별과의 싸움

으슥한 한밤중에 사과나무와 대화하고 있는 나를 누군가 본다면...

미친놈처럼 보였겠지만 가족 모두 잠든 저택 정원은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4그루의 사과나무에게 물었다.

“그럼 혹시, 강해진 너희가 세계 곳곳에 있게 되면 아포칼립스를 막는 게 가능해지는 건가?”

- 네! 저희가 수가 많고 강해진다면요!

- 하지만 영원하진 않아요. 우리를 다스리고, 또 우리가 반응하는 이는 고수뿐이거든요.

- 고수의 삶은 영원하지 않잖아요.

나는 쓰게 웃었다.

“하긴, 그렇겠네.”

그래도 능력 스탯이 충분히 오른 상태의 내가 존재하는 한.

아포칼립스는 오지 않게 된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 사이, 모든 별을 제거하면 될 터.

내 생애에서 아포칼립스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리 생각하니,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발길을 올려 저택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오후, 나는 라훌을 데리고 올차드 저택 바깥으로 나갔다.

오전 즈음에 미리 그림을 그려서 실물 전환을 해둔 상태다.

현재 매개 능력의 스탯이 ‘11’.

총 11그루의 사과나무를 매개체로 삼을 수 있었다.

그래서 5그루의 사과나무를 저택 정문 밖 근처에다 심어두고 매개 능력을 걸어두었다.

사과나무가 있는 곳까지 함께 걷는 동안, 라훌은 주절주절 말을 내뱉었다.

“제 아내가 계속 감탄하더군요. 여기 정말 아름답다고요.”

“그래요?”

“애플 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잖아요. 그래서 영광이랍니다. 초대를 받고 이 집에서 잠시 머물게 된 것이요.”

나는 짧게 웃기만 했다.

라훌은 내게 계속 떠들었다.

“아내가 루나 씨를 칭찬 많이 했어요. 연예인처럼 예쁘시다고. 아기도 예쁘고요. 그러면서 부러워하기도 하더군요.”

“......”

이윽고 사과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저택 안에 있는 것보다 조금 큰 사과나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무가 나를 반기는 것이 느껴졌다.

“사과나무로군요.”

“네. 라훌이 옮겨 심어야 할 나무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사과나무인데요.”

나는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나무가 특별하다는 걸 알려드리죠. 사과나무의 가장 가느다란 가지를 한 번 꺾어보세요.”

“사과나무를 왜...”

“괜찮으니까 꺾어보세요.”

“네, 그렇다면.”

라훌은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길로 가장 작고 가느다란 가지를 살며시 꺾으려는데.

“어?”

가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때 사과나무의 마음 소리가 내게 전해졌다.

- 까르르.

사과나무들이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라훌이 건드린 나무는 사과나무들이 일곱째라고 부르는 나무였다.

그 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성격이 좀 띠꺼운 편이었다.

- 뭐냐? 내 가지를 꺾겠다고? 어디 해보든지.

라훌이 더 힘을 쓰는데도 나뭇가지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강철로 만든 나무 같다.

아니, 강철보다 몇 배로 강한 것 같다.

“어? 나무가...”

라훌은 그제야 보통 사과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나무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가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 나무, 아무런 흠이 없어요.”

나는 조금 진해진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네.”

“아직 벌레가 꼬이는 시기는 아니긴 한데.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군요.”

“네, 그럴 겁니다. 아마도 한 여름철에도 이 사과나무는 병충해가 없을 테니까.”

“네? 그, 그래요? 놀랍군요. 이 나무, 언뜻 봐도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것 같아요. 작게 돋은 잎사귀와 이제 올라오기 시작한 꽃봉오리를 보면요. 작은 흠이나 티도 없어요.”

“내가 말했죠? 라훌이 심게 될 나무는 특별한 사과나무라고.”

라훌은 인정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특별하네요. 나무가 강철처럼 단단해서 혹시 만들어진 나무인가 했지만. 살아있는 사과나무가 분명합니다. 참 신기하네요. 이런 건 처음 봐요.”

“저 역시 신기합니다.”

“내 생전, 이런 나무를 목격하고 직접 심을 수 있게 되어서 기쁘기까지 해요.”

라훌은 눈을 빛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라훌이 이 나무를 옮겨 심을 곳은 우선 베이징 인근과 청두 시 인근, 인도에 있는 라훌의 거처, 벵갈루루 지역, 일본의 도쿄 인근입니다.”

“아, 예.”

“이를 위해 전세기를 장기간 대여했습니다. 총 5그루를 다 심고 돌아오시면 다시 2차로 나무들을 심을 지역을 지정해주겠습니다.”

“예.”

“그리고 이 일은 그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라훌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드리는 조건은, 나무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네, 물론입니다. 이런 특별한 사과나무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금 피곤해지겠지요. 이 사과나무의 출처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런 나무가 있을 수 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

“이 또한 제가 고수에게 넉넉하게 받는 물질의 대가이겠죠.”

나는 그를 직시하다가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네. 그리 말씀하시니 대화하기가 수월하군요.”

라훌, 그는 농부처럼 순박하긴 했지만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걸맞게 대처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그였으나, 그의 삶이 비극으로 치달았을 때는 간교한 인물로 변질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 * *

2052년, 쉘터 지휘실.

방금 지휘실로 들어서던 수호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설마?

“......”

수호는 미간을 좁혔다.

이상 현상 같은 건 없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에 휩싸이는 걸까.

그는 시선을 들어 지휘실 풍경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훑어보았다.

익숙하던 이곳이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진다.

오래전부터 이곳 지휘실은 그와 상관없던 장소였던 것처럼.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수호는 괜히 불안한 생각이 들어 AI 준에게 입을 열었다.

“준, 2023년의 세상은 별문제 없는 건가?”

그러자 기계적인 음성이 답했다.

“네. AI 수의 말로는 2023년의 상황과 올차드 저택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AI 수와 AI 준은 서로 교류하며 협력하곤 했다.

수호는 책상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마도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다.

수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불안감을 억눌렀다.

* * *

늦은 밤까지 서재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3D 디스플레이 화면에 AI 수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고수님, 이메일을 확인하십시오. 나노카 스즈키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나는 그림 그리던 것을 멈추고 물었다.

“나노카 스즈키?”

나노카는 전에 한국에서 만난 적 있던 예지 능력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왜?

나는 이메일을 열어 그녀가 보낸 내용을 읽었다.

<안녕하세요? 애플 수 화가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그날 한국에서 화가님을 뵌 후로, 일본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이전처럼 악몽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하지 않게 되었어요.

다만, 저는 미래를 대비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화가님이 일깨워주신 예지 능력을 줄곧 사용했었어요.

참 신기한 건, 제가 보는 앞날은 아포칼립스와 관련된 미래만 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저와 제 가족에 관한 앞날을 보고자 해도, 아포칼립와 관련된 미래만 보게 되었어요.

마치, 내게 주어진 능력은 내 개인적인 욕망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칼립스가 될 세상을 대비하고, 인류의 존속을 위해 사용하라고 내게 허락된 것 같다랄까요.

음, 제가 화가님에게 이메일을 드리게 된 이유는...

오늘 오전에 보게 된 예지 때문이었어요.

내내 고민하다가 오늘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조만간, 화가님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아,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조심스럽고 저도 마음이 그런데요.

화가님의 아드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걸 봤어요.>

그녀의 이메일을 읽다가 아들에 관한 내용을 본 순간.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동요하는 얼굴로 한참이나 이메일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다 늦은 시간임에도 참지 못하고 나노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자 나는 초조해진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마침내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나노카?”

<아, 네. 화가님. 이메일을 보셨군요.>

단순한 회화만 가능한 수준이긴 해도,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늦은 시간에 연락 드려서 죄송합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기다릴 수가 없어서요.”

<예, 이해해요.>

“나노카가 보셨다는 내용,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요?”

<음, 시기는 봄꽃이 피는 시기인 것 같아요. 올차드 저택이 보였고요.>

“네.”

<화가님이 사과나무에 관해 얘기하시는 걸 스치는 장면으로 보았어요.>

“아.”

<저택에 손님이 와 계신 것 같던데요.>

“네, 맞습니다. 인도인 가족이 와 있어요. 혹시 그들이 무슨 문제를...”

<아, 그런 건 아니에요. 조금 조심스럽긴 한데요. 제가 본 예지 환영에서는 화가님에게서 일이 불거졌어요.>

“네?”

<화가님은 분명 밖에 출타하셨는데, 동시에 화가님이 아드님에게 무서운 얼굴로 다가갔던 것을 보았어요.>

<근데 조금 불분명한 건요. 예지 환영이 두 가지로 보였다는 점이네요. 하나는 화가님의 아드님이 살해당하는 내용이었고요. 다른 하나는 두 명의 화가님이 서로 맞닥뜨리는 내용이었어요.>

나는 굳어진 얼굴로 그저 듣기만 했다.

내 시선은 줄곧 옆에 떠 있는 3D 디스플레이에 가 있었다.

이제껏 나노카가 말한 내용이 한국어로 번역되어서 적혀 있다.

잠시 침묵했던 나는 차분해진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나노카에게 두 가지 예지 환영이 보인 건, 아직 미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요.>

“나노카. 5분 뒤에 다시 전화 걸게요. 받아줄 수 있어요?”

<네, 그럼요.>

핸드폰 통화를 끊고서 서재에 걸린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것을 떼어내어 침실로 가져갔다.

루나와 아기가 잠들어 있어서 고요한 침실.

들고 있던 시계를 벽에 붙였다.

못 없이 벽에 붙일 수 있는 시계였다.

침대에 잠들어 있던 루나가 부스스 일어났다.

“오빠, 뭐해요?”

“갑자기 이곳에 시계를 두고 싶어져서.”

“이 시간에요? 오빠 얼른 자요.”

“나는 조금 더 있다가 잘게.”

나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침실을 나와, 서재에서 나노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나노카, 환영으로 본 내용이 정확히 언제 실현되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아기 침대가 있는 침실에는 시계가 있을 겁니다. 혹시 시간 확인했어요?”

뒤늦게 시계를 두는 이런 방법이 먹힐지 모르겠다.

<어, 음. 시계가 있었네요.>

나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몇 시인지 봤어요?”

<네. 오후 4시였던 것 같아요. 그때 화가님이 침실로 들어와서 아드님에게 손을 대셨어요. 하지만 전 알아요. 환영에서 본 그자는 화가님이 아니라는 것을요.>

“네, 맞아요. 그는 제가 아닙니다. 아무튼 고마워요. 연락해서 내게 알려줘서 고마워요, 정말.”

절절한 진심이었다.

내 아들을 구할 기회를 방금 그녀 덕에 얻은 것이니.

<화가님을 돕는 일은 아포칼립스를 막는 일인데. 당연히 제가 할 일인 걸요. 그런데요. 제가 본 환영에서 첫 번째 내용에선요.>

“네.”

<화가님의 아드님이 죽는 순간, 저는 모든 게 사라질 것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모든 게 사라지고 이 세상은 최악의 비극으로 치닫게 될 거라는 기분에 사로잡혔었어요.>

“네.”

나는 나노카에게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대화하다가 통화를 끊었을 뿐.

나노카가 환영에서 받았다는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2023년의 수호가 죽게 된다면, 현재 내게 있는 모든 능력은 사라질 것이었다.

올차드 저택도 사과나무도.

그리고 블랙카드도.

내 능력은 2025년에 가서야 각성하게 될 것이니.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건이 내일 발생할 것으로 여겨졌다.

내일 사과나무를 해외로 보내는 문제로 저택을 비울 예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일 오후 4시 즈음.

원흉의 능력을 받은 별 중 하나가 의심받지 않고 저택으로 침입했을 때.

나는 기필코 그 별을 죽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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