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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131화 (131/153)

창조의 사과나무 3

내가 2023년도에서 시작한 일을 먼 훗날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건...

남다른 경험이기도 했다.

나는 2052년의 세상에 아바타 기계로 접속했다.

그곳에서 내가 심은 사과나무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수호는 나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2023년의 저택 정원과는 사뭇 다른 풍경.

잔디가 깔리고 여기저기 관상수가 자라던 정원과는 달리,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는 정원을 조금 걷다가 어느 나무 앞에 섰다.

쉘터의 정원에 심긴 나무 한 그루.

굵은 가지를 여기저기 뻗은 고목.

내가 심었던 사과나무 중 하나다.

사과나무의 수명은 길지 않다고 한다.

보통 20년이 지나고 나면 사과 열리는 것이 시원치 않게 되는 것.

병치레도 하고 그러다 죽기도 하는 탓에.

20년을 넘기면, 농부는 오래된 사과나무를 파내고 묘목을 심는다고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대략 찾아봤었다.

나는 사과나무의 두꺼운 원줄기를 보며 감탄했다.

“이야, 오래된 나무 같아 보이는데?”

“평범한 사과나무에 비해 오래된 나무죠.”

“몇 살 정도 되었을까?”

“라훌의 말로는 55년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사과 열매를 꽤 많이 맺습니다.”

“55년?”

55년 정도 된 사과나무라면 고목이라 불릴 만했다.

“2023년에 묘목 상태에서 가속 성장이 한 번 이루어졌던 거죠. 라훌이 다른 건 몰라도 이 나무만큼은 애지중지합니다. 도시에 머물고 있어도 여기 종종 들르거든요.”

“그래?”

수호는 나무를 보다가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아버지가 라훌을 만난 후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좀 더 긍정적으로요.”

“다행이네.”

나는 나무로 가까이 다가가 줄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바타 상태라서 나무의 촉감이 느껴지지 않아 아쉽다.

나무의 잔가지가 흔들리게 하는 이곳의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 건 마찬가지.

그때 한 남자가 갑자기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는 약간 흥분한 얼굴이었다.

“수호, 방금 봤어?”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그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을 거다.

“사과나무가 반응했어!”

그러자 수호는 좁혀진 눈매로 사과나무를 올려다봤다.

나 역시 사과나무에 눈길을 주었다.

대체 뭘 봤냐고 물어보는 거지?

“바람이 없는데 나무의 잔가지가 흔들렸어!”

“아.”

아바타로서 존재하는 나는 촉감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에 나무가 흔들린 건 바람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사과나무가 스스로 움직여 흔들렸던 것이다.

남자는 수호에게 말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2026년 이후 처음으로 반응을 나타냈어!”

“......”

“이게 어찌 된 거지? 마치 고수가 살아있었던 그때와 같아!”

수호는 그에게 대강 둘러댔다.

“지금은 제가 아버지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그랬나 봅니다.”

“어? 그래? 그래서 그런 건가.”

그는 마치 푸시시 바람 빠지는 것처럼 흥분했던 기색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언제 흥분했냐는 얼굴로 돌이켜 자리를 떴다.

수호는 그런 그를 보다가 사과나무로 시선을 돌리고 내게 말했다.

“우리는 이 나무를 창조의 사과나무라 부릅니다.”

“창조의 사과나무?”

“예. 아버지의 창조력이 깃든 나무인 까닭입니다. 원흉의 매개는 멸망의 별이 되었던 것처럼. 상반된 속성을 지닌 사과나무는 창조의 사과나무라 불립니다.”

“그렇군.”

“아버지가 이곳에 계셨을 때, 매개 능력이 적용된 사과나무는 아버지와 교감을 합니다. 나무가 있는 곳이면, 아버지는 그곳 부근의 지역을 보거나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헐, 진짜? 대단한데?”

내가 놀라자 수호는 짤막한 웃음을 보였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창조의 사과나무가 있는 곳은 오염이 타지 않습니다. 심지어 거센 회색 폭풍에도 이 사과나무는 면역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사과나무 근처에는 괴식물이 자라지 않고 멀쩡한 식물이 자라게 됩니다.”

“매개 능력이란 게 꽤 놀랍네.”

“네, 그렇죠. 다만 아쉬운 건, 아버지의 매개 능력 스탯이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2052년의 사과나무는 그다지 강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와 일본, 중국에만 사과나무가 남은 상태죠.”

“다른 지역의 사과나무는...?”

“멸망의 별에 의해 모두 죽었습니다.”

“......”

수호는 나를 보며 걱정할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원흉의 힘과 능력은 강하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없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원흉은 미래의 시간을 대강 감지할 수는 있어도 시간 자체를 통제하거나 다스리지는 못합니다.”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거지.”

“네.”

수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조만간 장위와 연합으로 또 한 번 중국 지역을 쓸어버릴 계획입니다. 그때 보상이 들어올 것이니 매개 능력은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 * *

라훌이 한국으로 오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나는 그를 위해 전용기를 렌트해서 인도로 보냈었고.

라훌은 그의 아내와 4자녀를 모두 데리고 올차드 저택으로 왔다.

난생처음 하는 해외여행이고 비행기, 심지어 전용기를 타보는 것이었으니.

그는 이러한 호사스러운 기회를 혼자만 누릴 수 없었을 것이었다.

라훌은 그의 가족이나 소유에 충실한 자인 듯했다.

그러한 그였던 만큼, 2025년에 가족을 잃게 되었을 때 자신의 텅 빈 마음을 부와 권력으로 채우려 했었던 거겠지.

그러다 나름 순박했던 그는 차츰 나이가 들수록 간교한 인물이 되었을 거다.

어쨌든 라훌의 가족이 올차드 저택을 방문한 건 4월 초 즈음.

저택의 정원은 봄꽃으로 화사하게 장식되는 시기였다.

라훌과 그의 가족은 연신 저택의 풍경을 두리번거리며 루나와 나의 안내를 받았다.

루나는 유창한 영어로 라훌의 가족에게 말했다.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해요. 여긴 올차드 저택이에요. 여기는 원래 사과나무 과수원이었던 곳이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집이군요. 정원도요.”

“고마워요. 라훌의 가족이 묵으실 방은 여기 손님 방이에요.”

우리가 그들을 어느 침실로 데려가자, 그들은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벌어졌다.

“여, 여기요?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집과 방은 처음 와봐요.”

“침실과 욕실에 필요한 모든 게 다 구비되어 있어요. 혹시 다른 필요한 게 있으면 저나 남편에게 말씀해주시면 돼요.”

루나는 상냥한 얼굴로 말하며 생긋 웃었다.

라훌 부부는 굽실거리듯 연신 고개를 조아렸고, 그들의 자녀들은 신이 난 얼굴이었다.

“엄마, 여기 너무 좋아요! 여긴 어떤 부자의 집인가요?”

“여기는 인도보다 훨씬 좋아요. 한국은 이런 집이 많은가 봐요.”

루나는 아이들을 보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렴. 사다 놓은 쿠키도 있어.”

“우아, 정말요?”

나는 라훌에게 넌지시 말했다.

“라훌은 서재에서 잠시 저와 대화를 나누도록 하죠.”

“예.”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조용히 라훌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서재 안으로 들어가 라훌에게 의자를 권하고 나 역시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맞은편 의자에 불편하게 앉은 라훌.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를 편안하게 해주려는 것이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훌 씨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서 이곳까지 오게 했었네요.”

“아닙니다. 덕분에 저희 가족은 평생 해보지 못한 진귀한 경험을 해보고 멋진 여행도 했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그를 직접 만나보려는 것은, 그의 능력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미션도 주고, 그의 능력을 공유하여 사용해볼 심산이다.

나는 그에게 어떠한 언질도 없이 ‘재능과 능력의 주인’ 능력을 발현했다.

그리고 라훌의 잠재 최초 능력을 일깨웠다.

이내 그의 능력이 각성하자 스탯을 확인했다.

『농사 능력자 1레벨

농사 능력 : 1

병충해 제거 능력 : 1

성실 : 1

그랜드 코인 : 3958422.』

다행히, 라훌에게도 코인이 꽤 있다.

2052년도까지 생존해서 무수한 이들의 생존에 보탬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훌은 능력 각성한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며 나를 바라만 봤다.

나는 그의 능력 스탯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영어로 대화하려니, 내 영어 실력은 루나만큼 유창하진 않아서 어색하다.

“라훌은 성실한 농부라고 들었습니다. 애플 수 재단을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라훌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농사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저처럼 성실합니다. 저만 성실한 게 아니죠.”

“네, 물론입니다. 사실 라훌의 성실함 말고도 다른 조건을 눈여겨봤습니다. 저희만의 기준으로 라훌을 적임자라고 판단했습니다.”

“아, 예.”

“우리는 사과나무를 한 그루씩 세계 곳곳에 심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장소는 제가 지정합니다. 라훌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해줄 것이고, 라훌이 긴 거리를 오갈 때는 전용기를 지원해줄 생각입니다.”

“어, 음.”

라훌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인 듯했지만 내게 차마 묻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알아챈 나는 설핏 웃음을 보였다.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군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데 넘치게 돈을 투자하는 셈이니.”

“네, 뭐, 그렇습니다.”

라훌은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심을 사과나무가 많이 특별합니다. 그건 직접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제가 하는 일은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이해하실 거고요. 라훌은 여기 오기 전에 저에 관해 찾아보셨겠지만, 제 이름과 명예를 걸고 이 일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라훌이 심게 될 나무는 내일 즈음 보여드리죠.”

“네.”

라훌은 한동안 나와 대화한 후, 서재를 나갔다.

서재에 혼자 남게 되자, 나는 라훌의 능력 스탯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 스탯 업그레이드는 블랙카드를 사용했지만, 많이 긁지는 않았다.

일단, 농작물 성장 능력을 중점적으로 투자했다.

그러자 그에게 진화된 능력이 나타났다.

『농사 능력자 59레벨

농작물 성장 : 36

병충해 제거 능력 : 11

성실 : 3

그랜드 코인 : 357.』

라훌의 능력을 블랙카드와 코인으로 올린 후, 나는 수호가 줬던 블랙카드를 꺼내 새삼스러운 눈길로 보았다.

수호는 이 블랙카드로 레벨까지 만들어서 내 능력을 체계적으로 끌어올렸었다.

블랙카드 레벨은 32레벨.

노르웨이에 있던 붉은 유성을 그리는 그림까지였던 것 같다.

레벨마다 수호는 1310억 7200만 원을 긁게 해주었었는데.

현재 28레벨까지 소진되었고, 29레벨의 돈을 긁는 중이다.

강민철이나 장위, 라훌의 능력을 올렸던 까닭에 제법 카드를 긁었었다.

블랙카드를 계속 의지할 수는 없다.

이제 슬슬 돈을 벌어두어야지.

아포칼립스가 아닌, 평화도 대비해둬야 하는 건...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

* * *

자정이 지났을 무렵, 나는 홀로 정원을 나왔다.

이제 완연한 봄이긴 해도 짙푸른 새벽 시간은 쌀쌀하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정원 가로등이 켜진 길목.

그곳을 지나 사과나무가 심긴 곳으로 왔다.

나는 나무를 물끄러미 보다가 ‘재능과 능력의 주인’ 능력을 발현하여 라훌의 능력을 잠시 빌렸다.

이내 농작물 성장 능력이 발현되었지만, 사과나무 성장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나무에 은은한 빛이 감돌 뿐.

“음, 수분과 영양 공급이 필요하다는 거군.”

나는 저택 건물을 향해 돌이켰다.

내가 공간 이동 능력을 발현하자 내 몸은 순식간에 저택의 창고에 와있게 되었다.

꽤나 편리한 능력이다.

문이 잠겨 있어도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커다란 물통과 영양제를 들고 나무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사과나무에 공급했다.

그 순간, 나무의 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키가 10센티 정도 자란 것.

가족들이 이상하게 여길 테니 나무의 성장을 이 정도로만 했다.

나는 사과나무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뭇가지에 손을 가져갔다.

나무가 바람 없이 흔들린다거나 하는 움직임은 없다.

아직 매개 능력 수치가 적어서 그런 것일 테지.

그래도 나무에 손을 대니 미미하게 느껴지는 게 있다.

이를테면, 나무의 감정이랄까.

나무에 감정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신기하게도 사과나무가 나를 반기고 흡족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매개 능력을 올리다 보면 멸망의 별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사과나무도 인간형으로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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