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사과나무 2
최근 ‘미라클 쉘터스’ 한국지부는 본사와 독립했고.
이름을 ‘애플 쉘터스’로 바꾼 상태였다.
물론, 대표는 나였다.
미라클 쉘터스의 인재였던 유하준과 정테이는 이제 오로지 애플 쉘터스를 위해서만 일하게 되었다.
애플 쉘터스의 회의실.
그곳에서 나는 테이, 유하준 박사와 함께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원흉과 아포칼립스, 2052년의 미래 상황에 대해서 나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들.
유하준은 ‘라훌 데비’라는 최초 능력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식물의 가속 성장을 일으키는 능력이라니. 대단히 놀랍고 신기한 능력이군요.”
“남다른 능력이긴 하죠.”
“그자가 인도인이라고요?”
“네. 아마도 뉴델리에 거주하고 있을 것 같네요. 대부분 최초 능력자는 수도나 대도시, 혹은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으니.”
“신기한 능력이긴 해도 그자의 능력은 아포칼립스 이후에나 우리 전력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하지만, 나는 그자를 만났으면 합니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으면 해요.”
“왜요?”
테이의 물음에 나는 옅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건 라훌 데비의 능력이 우리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어, 그런가요?”
“라훌은 미래에 수호와 반목하게 될 인물이긴 하지만. 그런 인물인 만큼 초장에 그와의 관계를 잘 다져놓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테이에게 그렇게 말하며 수호와 대화했던 일을 떠올렸다.
2026년도에 한반도에 정착한 이후, 세력을 키워온 라훌 데비.
그런 그였어도 이전의 삶은 제법 순박했다고 했다.
수호는 그가 한반도로 오게 된 계기에 관해 톡 메시지를 통해 들려주었다.
- 2050 : 2026년 당시, 라훌 데비 35세였습니다. 그는 농부였고 그에겐 아내와 4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 2050 : 그런데 2025년 즈음, 아내와 자녀를 모두 잃었다고 하더군요. 그때 그의 능력이 각성했다고 합니다.
- 고수 : 그가 겪은 일이 남 일 같지만은 않네.
- 2050 : 이것 역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의 능력은 평소 그의 간절한 마음 탓에 나타났는데. 능력이 있어도 그 능력을 누릴 가족이 없으니, 라훌은 이후 철저하게 개인 영달을 쫓는 인물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 2050 : 그가 한반도로 오게 된 까닭은, ‘애플 수’라는 인물 때문이었다고 하니. 이 부분을 염두에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고수 : 그래. 네가 들려준 정보를 참고해서 라훌과 접촉해볼게.
라훌 데비.
나는 그를 만나볼 생각이다.
* * *
2023년 인도 뉴델리 인근.
올해 32세인 ‘라울 데비’는 뉴델리 인근에서 벼농사를 짓는 농부다.
그에겐 아내와 4명의 자녀가 있기에 부지런히 농사일을 하지만, 늘 가난하기만 했다.
소처럼 일해도 지겨운 가난은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겨우 가족들의 허기만 면할 뿐이었다.
작년은 병충해가 심해서 생산량이 형편없었다.
라훌은 들판에 나와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는 부디 풍작이 될 수 있어야 할 텐데.
모든 농작물의 병충해를 막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농작물이 빠르게 쑥쑥 자라게 하는 능력이 있다면, 농사일이 이토록 버겁지 않을 것인데.
그의 가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인데.
라훌은 빈 들판을 슬프게 응시했다.
그러다 오래된 나무에 기대어 앉아 책을 펼쳤다.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그의 꿈은 철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난은 어릴 적부터 늘 그를 괴롭혀오던 족쇄였기에.
그는 대학에 갈 수 없었고 그가 좋아하는 철학 공부도 할 수가 없었다.
라훌은 평소 읽던 책을 펼쳤다.
저자가 인용한 어떤 명언이 첫 장에서 보인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훌이 가장 좋아하는 명언이다.
이 말을 한 인물은 ‘바뤼흐 스피노자’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고.
‘마르틴 루터’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라훌이 감명받은 문구는, 그저 이 한 글귀였으므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볼 때마다 이 문구가 마음 깊이 새겨지며 그의 내면을 울리곤 했다.
당장 세상이 끝장난다 해도 희망을 놓지 않고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건...
그의 신념과 얼추 맞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가 라훌에게 접근했다.
낯선 젊은 남자다.
“저어, 성함이 ‘라훌 데비’가 맞습니까?”
라훌은 그를 돌아보았다.
“예. 그런데 누구신지...?”
“저는 ‘쿠마르’라고 합니다.
자신을 쿠마르라 소개한 남자는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라훌에게 건넸다.
라훌은 명함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애플 수 재단?”
“네. 애플 수 재단에서 나왔습니다.”
“음, 처음 들어보는군요.”
“애플 수라는 이름, 혹시 모르십니까?”
“네, 모릅니다.”
라훌은 애플 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가 책을 즐겨 읽긴 했어도 TV나 인터넷은 즐겨 보지 않은 까닭이다.
쿠마르는 약간 당혹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애플 수는 유명한 화가이면서 애플 수 재단을 설립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재단을 통해 여러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라훌의 눈빛에 의구심과 의심이 어렸다.
쿠마르는 라훌이 들고 있는 책에 눈길을 주더니 잠시 화제를 돌렸다.
“책을 즐겨 읽으시는군요. 저도 그 책 읽었습니다.”
라훌의 표정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그가 즐겨 읽는 책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처음이다.
“어? 이 책 읽으셨어요?”
“좋은 책이죠. 저자의 가치관이 제 신념과도 맞아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저도 이 책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괜히 반갑네요. 이런 책 읽는 사람, 제 주변에는 거의 없거든요.”
“저도 반갑습니다.”
라훌은 그가 좋아하는 책에 관해 누군가와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뜻밖에 나누게 된 이 대화가 그의 마음 빗장을 열게 했다.
낯선 이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방금도 이 책을 읽었는데요. 책의 첫 장에 나오는 명언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 그 명언이요. 저 기억합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였죠?”
라훌은 그새 신이 난 어조로 답했다.
“네, 맞아요!”
“개인적으로 정말 멋진 말이라고 생각해요.”
“동감해요. 그 말은 제 삶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쿠마르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라훌 씨가 적임자가 된 거겠죠.”
“네? 그게 무슨...?”
라훌은 눈을 깜박였다.
“라훌 씨는 탁월한 농부라고 판단했거든요.”
“탁월하다니요. 전 작년 농사도 망친 평범한 농부일 뿐입니다.”
“아니요. 결과물은 상관없습니다. 농사꾼으로서의 탁월함은 성실함과 충실함에서 찾을 수 있으니까요.”
“......”
“제가 라훌 씨를 찾아온 건 그 때문입니다. 애플 수 재단에서는 그런 분을 찾고 있거든요. 내일 멸망이 올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인재 말입니다. 실제로 애플 수 재단은 세계 곳곳에 특별한 사과나무를 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 음. 사과나무요?”
라훌은 어벙해진 표정을 지었다.
“애플 수는 한국과 일본, 유럽, 미국, 캐나다와 그 외 여러 나라에서 명성이 높은 화가입니다. 명품 카 페라리의 광고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죠. 인터넷이나 해외 언론 매체를 찾아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재단을 통해서 하는 선행도요.”
“대단하신 분이군요.”
“생각해보시고 명함에 적힌 제 연락처로 연락 주세요. 라훌 씨가 수락하시면 재단 측에선 당장 전용기를 보내어 라훌 씨를 모실 겁니다. 그래서 라훌 씨와 당신 가족이 풍족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보상을 할 겁니다.”
“저, 전용기요?”
라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3월이 훌쩍 지나는 동안, 올차드 저택에선 유하준과 한나의 결혼식 준비로 어수선해졌다.
간단하게 가족과 몇몇 지인만 초대해서 저택 안에서 치르는 결혼식이긴 해도.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이 많았던 것이다.
수호의 백일도 다가와서, 백일 축하도 겸하게 되었다.
마침내 당일이 되어 모든 행사를 마치고.
봄꽃이 핀 정원에서 나는 초대한 이들과 함께 잠시 차를 마셨다.
김수연, 이진구, 박강재, 김주혜, 그들이었다.
이들은 어느새 그들끼리 친해져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수연이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재단에서 사과나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
“사과나무 프로젝트? 그게 뭔데?”
주혜가 눈을 빛내자 수연이는 손사래를 쳤다.
“말 그대로 사과나무를 심는 거지. 그렇게 눈을 빛내봤자 이건 기사로 쓸 수 없어.”
진구가 말했다.
“근데 고수는 원래 사과 좋아했나? 얼떨결에 애플 수라는 화명을 쓰게 된 것치곤 사과 관련된 이름을 많이 사용하네. 봐. 여기 으리번쩍한 저택도 애플 올차드 저택이잖아. 팬클럽 이름도 올차드이고. 재단 이름도 애플 수. 이젠 아예 사과나무 심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어.”
“그러게.”
주혜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고.
강재가 진구의 말을 받았다.
“고수, 실은 사과의 ‘사’자에도 관심 없었잖아. 고수, 사과 별로 안 좋아해. 팬들은 당연히 고수가 사과를 좋아할 거로 생각하지만. 이는 크나큰 오해지.”
“하긴 애플 수 이름 자체가 고수의 뜻과는 무관했지. 화명이 애플 수가 된 게 누구 덕분이었더라?”
진구가 말끝을 늘리며 수연이를 바라보자 주혜가 웃었다.
“무슨 사연이 있나 보네.”
“있지. 얼마 전에 수연이가 이실직고했거든. 어쩌다 고수 화명이 애플 수가 되었는지.”
“야, 입 다물어. 결과적으론 잘 되었잖아.”
그렇게 말하며 수연이가 진구를 한 대 친다.
“야, 고수야. 수연이가 너한테는 이러지 않지? 나한테는 이렇게 포악해.”
나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다.
그때 강재가 내게 물었다.
“근데 고수야, 사과나무는 왜 뜬금없이 심고 그러냐?”
“그냥 상징이지. 자의든 타의든 애플 수는 내 화명이기도 하고. 내가 처음으로 산 땅이 사과 과수원이기도 하고. 처음 대중에 선보인 그림이 사과나무이기도 하니까. 이래저래 사과는 나와 인연이 깊은 과일인 것 같아.”
“생각해보니 그러네.”
진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과라는 게 원래 이런저런 다양한 의미가 있잖아. 부정적인 의미도 있고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
“응, 그렇지.”
“하지만 나는 사과라는 과일에 ‘희망’이라는 의미를 담았어.”
언젠가 2050년에서 보낸 영상으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한 소년이 실물 전환된 사과나무에서 사과 한 알을 따먹고는 울먹였던 모습.
그 소년은 아무런 희망도 없던 아포칼립스 된 세상에서 난생처음으로 신선한 사과를 먹어보는 거였다.
그저 사과를 먹어보는 것이었지만.
그곳 세상에서는 그 일이 커다란 의미가 되었다.
암울과 절망, 비극만이 얼룩진 세상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는 처음으로 쏘아 올린 ‘희망’과 같았으니.
물론, 미래는 비틀리고 비틀려 흐르게 되어 그 사건은 이제 나타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명백히 기억하고 있다.
아무도 기억하는 이가 없어도, 수호마저 흐릿하게 기억이 남았을지라도.
그 일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저만치 보이는 사과나무에 시선을 주었다.
조만간 사과나무 꽃이 필 듯했다.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세계 곳곳에 희망을 심고 그것이 자라게 하고 싶었어. 그래서 사과나무를 심는 거야. 그리고...”
나는 친구들에게 눈길을 주며 빙긋 웃었다.
“나 이젠 사과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