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고 싶지 않은 것 2
나는 장위와 통화하며 말했다.
“그를 죽이긴 했는데. 이대로 아포칼립스를 온전히 막은 것인지 확인은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장위의 어조에 희망이 어렸다.
<고수가 그를 죽였던 거군요! 그럼 아포칼립스도 오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근데 고수는 베이징에 오신 겁니까?>
“아뇨. 한국 자택에 있습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할게요. 일단 편히 쉬고 있어요.”
대강 설명만 한 후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서재의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채 잠시 묵묵히 있다가 내 능력 스탯을 바라보았다.
공간 이동 능력은 명칭만 봐도 어떤 능력인지 알 수 있었으나.
매개 능력은 쉽게 짐작이 가질 않았다.
원흉의 능력 중에 뭔가를 매개로 해서 능력 발현하는 게 있었던가.
일단, 사용해보면 알겠지.
매개 능력을 사용하고자 의지를 나타내니,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능력이 나타날지.
능력에 관한 정보를 저절로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능력 발현을 도중 멈추었다.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창가로 가서 섰다.
이제 알겠다.
짐작이 간다.
매개 능력이 어떠한 것인지를.
원흉이 그의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지를.
원흉은 매개 능력을 통해 멸망의 별을 키워왔다.
그리고 세상을 뒤엎을 힘을 축적하며 그의 세력을 준비했다.
매개 능력이란 건, 꽤 놀라운 능력이다.
다만, 이 능력을 사용하려면 무엇을 매개로 해야 할지 정해야 한다.
창밖을 응시하며 잠시 골몰했다.
원흉이 지구의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며 그의 힘을 불릴 매개로 ‘유성’을 선택했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하면 좋을까?
원흉은 파괴와 멸망을 목적으로 별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창조와 회복을 바라며 매개 능력을 사용하는 게 좋겠지.
애초에 내 능력은 창조 속성을 근간으로 두는 것 같으니.
그런 생각을 하며, 절대 창조력을 업그레이드하려고 아껴두었던 코인으로 매개 능력을 올렸다.
* * *
수호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침실에서 잠들었다.
평소 꿈을 꾸지 않는 편이었던 나는 이날 기묘하고도 생생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저택의 정원을 홀로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귀여운 외양의 남자아이.
10살 정도 되어 보이고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다.
눈동자는 짙은 회색이었으며 피부색은 창백했다.
이목구비를 보면 백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양인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 아이는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애플 수.”
외양은 달라졌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차갑게 굳은 말로 대꾸했다.
“혹시 내 꿈을 찾아온 건가? 원흉.”
그러자 아이의 입매가 조금 비틀렸다.
회색 눈동자에 증오의 빛이 얼룩진 게 드러났다.
“역시 알아보는군. 꿈속에서는 다들 흐리멍덩하던데.”
“넌 아까 죽은 거로 아는데?”
“그래. 죽었었지. 내 육신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는 죽지 않아.”
“......”
“그러니 너는 나를 이길 수가 없다. 아포칼립스도 막을 수 없지.”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잠에서 깨어나려고 애썼다.
그가 내 꿈에 찾아온 것이 못내 불안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잠든 사이에, 그가 내 저택에 찾아와 뭔가 수를 쓰는 건 아닐까 염려되었다.
“눈빛이 흔들리는군. 혹여 내가 두려운가?”
나는 멈칫하다가 코웃음을 쳤다.
“내게 두려우냐고 묻는 건가? 조금 전에 내 손에 죽어놓고서? 두려운 건 너겠지.”
그래. 내가 두려워할 건 없지.
만일 원흉이 여전히 살아있어서 저택에 접근했다면 AI 수가 그를 발견했을 거다.
그래서 수는 드론을 조작하여 나를 깨웠을 테지.
원흉은 짧게 흩어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내가 너에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지긴 했었지. 하지만 상관없어. 결국 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될 거니까. 아! 네 능력은 인정해. 너의 능력은 끝도 없이 진화하더군. 거기다 나와 비슷한 능력까지 쓰는 모양이야?”
원흉의 회색 눈동자가 붉어진 색으로 섬뜩하게 빛났다.
나는 그를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원흉이라는 이 존재는 사람일까.
그는 대체 어디에서 나타나서 이토록 해악을 끼치는 걸까.
“너, 사람인가?”
원흉은 히죽 웃었다.
“그게 중요해?”
“......”
“뭐, 궁금하다면 답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네가 죽인 내 육신은... 사람이었다.”
그를 노려보던 내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내 의지와 존재에 가장 적합했던 인간이었지. 그래서 조금 아깝고 아쉽긴 해. 네가 죽여버려서.”
“......”
“넌, 선하고 정의로운 척하며 사람을 죽인 거야.”
“어이없는 놈이네. 넌,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멸망을 가져오는 악일 뿐이야.”
“그래. 그 말도 맞아. 나는 죽음이고 멸망이다. 너희가 나를 원흉이라 부르지만. 엄연히 말하면 틀린 명칭이지. 원흉이 아니라 멸망 그 자체니까.”
육신은 사람인데 멸망이라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딴 말은 관심 없으니까 꺼져.”
“가긴 갈 거야. 그전에 할 말은 하고 가야지. 네 아들에게도 말한 바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너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너는 계속 나를 대적할 텐가? 아니면 적당한 평화와 지금 네가 누리는 부와 명예를 지키겠나?”
나는 입을 다물고 그를 쏘아볼 뿐이었다.
원흉은 비릿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지. 네가 나를 계속 대적한다 해도 이 세상은 아포칼립스가 반드시 오게 될 거야. 네가 막는다고 막겠지만 그래도 희생되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를 노려보던 내 시선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원흉의 비릿한 웃음은 짙어졌다.
“네가 아는 사람 중에도 죽는 사람이 있을 거다. 하지만 만일 네가 나를 더 대적하지 않고 싸우려 들지 않는다면, 너는 지금 누리고 있는 많은 걸 지킬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너는 내 손에 사라지게 될 거다. 설령 네가 죽음 자체라서 죽지 않는 존재라 해도, 너는 이 땅에 발을 못 붙이게 할 거다. 아포칼립스는 반드시 오지 않게 될 거지. 그리고 내가 너를 대적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평화가 지켜질까? 멸망 따위의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흐하하.”
원흉은 서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네 말대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리된다면, 네게 있던 능력도 사라질 건데? 너에게 있는 놀라운 능력과 그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코인. 그 모든 게 사라질 텐데? 너의 능력은 본디 아포칼립스 이후 나타날 능력이거든. 만일 아포칼립스가 오지 않게 된다면, 네 능력은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면 네 그림 재능은 다시 형편없어질 거고. 너에게 있는 부와 명예도 사라질 거야. 이 저택도 사라지겠네? 어쩌면 미래의 네 아들과의 만남도 사라질 테고. 모든 게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네 삶은 다시 비루해지고 평범해지는 거지.”
“......”
“어때? 지키고 싶지 않은가? 놓치고 싶진 않은가?”
빌어먹을, 저 면상을 더는 보고 싶지 않고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은데.
좀처럼 잠에서 깰 수가 없다.
그가 내뱉은 말.
나도 생각하고 있던 바다.
원흉을 온전히 멸하여 아포칼립스를 막고 나면, 내게 있던 능력도 어쩌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또한, 미래의 수호와 만났던 일조차 없던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기도 했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원흉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차분하게 생각했다.
원흉이 말한 선택.
나를 주저하고 괴롭게 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고민할 가치도 없는 부분이다.
지금의 내 삶.
너무도 높이 올라갔다.
내 인기와 명예, 부는 더 높이 올라가기 힘들 만큼 치솟았기에.
그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아쉽고 놓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내 맘이다.
무엇보다 놓치고 싶지 않은 건, 미래의 수호를 만났던 일.
생각해보면, 이런 엿 같은 선택의 순간은 이전에도 도전하듯 내 앞에 이르렀던 것 같다.
2026년에 내 생명을 불태웠던 일.
아, 이 일은 이전이 아니라 미래의 일이구나.
아직 내가 하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했다고 전해 들은 일이다.
2026년의 나는 내 아들과 가족, 모든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 생명을 내놓는 선택을 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모든 걸 되돌려서 생명도 다시 얻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2022년 이후로 얻은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더 나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확신을 할 수 없다.
원흉을 향해 사납게 타오르던 내 시선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언젠가 수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2021년 즈음 그가 까톡 메시지로 했던 말.
- 2050 : 어쩌면 내 삶도... 평범해질지 모르겠다.
- 2050 : 그런 건 꿈조차 꿔본 적 없었어.
- 2050 :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세계가 회복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긴 했어도. 내 삶이 평범함으로 채워지게 될 거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 2050 : 왜인지는 모르겠군. 아마도 내 마음이. 망가져 버린 세계보다 더 참혹하다고 여겨졌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최근에 수호가 넌지시 했던 말.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어릴 때부터 내내 평범함을 원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가장 원하는 삶은 평범한 삶입니다.”
나는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으나, 차갑게 가라앉은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 이전의 삶이 비루하고 평범하다고 했나? 하지만 어쩌지? 내가 놓치고 싶지 않고 지키고 싶은 건 오히려 평범한 삶인데.”
내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원흉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니, 내가 머물던 꿈속 공간이 차갑게 굳어졌고 깨어졌다.
바삭-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침실 천장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고요히 잠든 루나가 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놓인 아기 침대로 다가갔다.
아기 침대에서 쌔근쌔근 잠든 수호.
아이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정오가 지났을 무렵, 수호는 또다시 아바타 접속을 하여 2023년의 저택으로 왔다.
평소라면 까톡 대화로 끝냈을 그인데.
오늘도 아바타 접속으로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한다.
서재에 있는 의자에 앉은 수호.
그는 내게 말했다.
“원흉은 2023년 3월 이후 2052년도까지.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포칼립스는 여전히 2024년도에 나타납니다.”
나는 씁쓸하게 대꾸했다.
“그렇군.”
“하지만 세상은 조금 나아졌습니다.”
“어떻게?”
“나라마다 생존자 수가 조금 늘었습니다. 파괴 정도도 조금 나아졌고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코인이 더 들어왔을 겁니다.”
얼마나 들어왔는지는, 코인의 숫자가 죄다 ‘9’밖에 없어서 확인이 안 된다.
“...제가 사는 2052년의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전에는 2052년의 시간이 급변하지 않을까 여겼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수호는 서재의 한쪽에 떠 있는 3D 디스플레이에 눈길을 주더니, AI 2050에게 명령을 내렸다.
“준, 준비한 영상 띄워.”
그러자 화면에 AI 2050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네, 어제 촬영한 영상을 열겠습니다.>
2050은 스스로 내 이메일을 열더니 거기서 영상 파일을 받아 열었다.
이내, 디스플레이에 영상이 가득 채워져서 내 눈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