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126화 (126/153)

그의 기억 3

수호의 말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시간은 우리 편이라... 그래, 그렇겠군.”

대화가 끊기자 수호는 일어나려 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붙들 듯 말을 꺼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서로 보는 것도 할 수 없겠지?”

언젠가 수호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인류에게 나타난 최초 능력자들의 능력은 어쩌면 지구상에 나타난 멸망의 별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아니면 원흉의 출현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도 했었다.

2052년의 미래에서는 그와 같은 추측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원흉을 제거하고 나면 내게 있던 능력도 사라질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내 직감으로도 그렇게 여겨졌다.

정확히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만.

만일 내게서 특이 능력이 사라진다면, 미래의 수호와 만났던 일들은 어찌 되는 걸까.

수호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렇겠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최초 능력이라는 그 특이 능력은 아포칼립스를 기점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던 만큼. 아포칼립스가 역사상에서 사라진다면 최초 능력자도 나타나지 않을 거로 여겨지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죠.”

“그럴까?”

“하지만 크게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아포칼립스가 오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래.”

미래의 수호를 만나고 그와 대화하는 일이 영영 끝이 날 수도 있겠다고 여겨졌지만.

그러해도 우리는 같은 시간선에서 계속 만날 수 있을 것이기에.

굳이 섭섭할 일도 아니었다.

수호의 말대로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아포칼립스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애초에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내게 나타난 신비한 능력 덕분인데. 혹시 널 만난 이후의 일들도 사라지게 되거나 그러는 건 아닐까?”

수호는 금세 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다 입을 뗐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는 건, 아버지에게 능력이 사라진다 해도 뭔가 주어지는 보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었지요. 이왕이면 부자 아버지가 좋다고.”

그는 설핏 웃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부자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진심이냐?”

나는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문득 내가 28살이던 여름이 떠오른다.

수호가 블랙카드를 주며 내게 톡으로 말을 걸었던 일.

그때는 몰랐었다.

수호와의 만남이 이만큼이나 소중해질 거라는 것을.

“네가 평화로운 세상을 살고 아포칼립스를 겪지 않게 된다면, 아프고 비극적이었던 그 모든 기억이 너에게서 사라지게 될 테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족하다.”

그러자 수호는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아니요. 저는 그래도 계속 기억할 겁니다. 수렁 같고 아름답지도 않은 갯벌이어도, 그곳에서 종종 값진 진주 알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가치 있기에 결국 찾아가지 않겠습니까? 제 기억도 그렇습니다.”

* * *

나는 지하벙커 안으로 들어섰다.

지하벙커 안에 작업실로 쓸 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유화 그림을 그리려는 것이다.

날이 좋다면 바깥 한적한 곳에서 그림을 그려도 되겠지만.

아직은 쌀쌀하고 바람이 거칠게 불곤 해서 작업 장소를 지하벙커로 택했다.

지하벙커는 가족에게도 개방되지 않은 공간이라, 집중하기에는 좋은 장소다.

나는 그림 작업 준비를 하면서, 근처에 켜둔 3D 디스플레이를 힐끗 보았다.

화면에 드론이 촬영하는 분할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다.

AI 수에게 말을 걸었다.

“베이징은 아직 별다른 이상 없는 거지? 원흉은 나타나지 않았어?”

<네, 장위의 주변엔 별다른 점이 없습니다. 원흉의 흔적도 없습니다.>

원흉이 노리고 있다고 장위에겐 말하지 않았다.

장위가 알게 된다면 그의 행동은 금방 티가 날 것이고.

그러면 원흉에게 우리의 계획이 발각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서 커다란 캔버스 앞에 섰다.

캔버스 앞에는 깎아둔 연필 몇 자루와 물감, 붓이 놓여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하자 하얀 캔버스에 명멸하는 빛의 점이 나타났다.

그 빛의 점이 나타나면 내가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내 내 의지와 의도대로 스케치가 저절로 되었다.

현재 내 그림 작업 속도가 58배속이니.

속도는 한순간에 뚝딱이었다.

스케치를 끝내고 연필을 확인하니 끝이 뭉툭하게 닳아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물감을 팔레트에 배합하고서 채색을 시작했다.

물감은 마르는 시간 때문에 무조건 작업을 빠르게 이어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타블렛 창을 켜두고, 유화 그림을 도중 다른 그림도 그려나갔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완성된 그림을 응시했다.

커다란 캔버스에 끝을 알 수 없는 우주가 펼쳐져 있다.

멀리 보이는 맑게 빛나는 별들.

그리고 커다란 지구가 있다.

지구는 실제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실물 같아 보였다.

워낙 세밀하게 그려져서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륙과 구름, 그런 것들이 꽤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구의 한편에서는 태양이 눈부시게 떠오르고 지구를 환히 밝힌다.

다른 반대편은 어두워서 육지 부분은 미세한 불빛이 불규칙하고 촘촘하게 모여 반짝였다.

불빛이 짙은 곳은 도심이고 어두운 곳은 도심 밖인 것이다.

북극 지역엔 신비한 오로라가 여러 색상으로 드리워져 있다.

태양이나 별, 오로라 등등.

모든 빛의 표현은 그림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교했다.

나는 지구를 그린 다음, 지구 대기권 밖에 거대한 불새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푸른빛 바탕에 백색이 미약하게 섞인 모습.

불새는 지구 대기권에 뜬 마지막 멸망의 별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작은 별 하나를 한입에 삼켜버릴 듯하다.

나는 완성한 그림을 한걸음 뒤에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능력 스탯을 제법 올리고서 오랜만에 그리는 유화 그림인 셈.

그렇기에 완성한 내 작품이 낯설게 느껴졌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그렸던 유화 작품도 역대급이었는데.

비교하자면, 지금 작품은 그 전보다 훨씬 우월했다.

기교는 이미 정점을 찍은 듯하지만.

그림에 담긴 아우라라고 해야 할까.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격이 한 단계 올라선 듯했다.

나는 그림을 감상하다가 나도 모르게 말소리를 내뱉었다.

“이야.”

이걸 내가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뿐더러.

이런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경이롭다.

인간의 능력 영역을 초월했다 싶은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이런 그림은 아마도 역사상 보물 취급을 받을 만하지 않을까.

나는 그림 제목을 정했다.

‘별을 삼키는 불새.’

이 그림이 대중에 공개된다면 원흉도 보게 될 터.

그에게 보내는 경고가 될 것이었다.

* * *

다음날, 내가 그린 그림은 너튜브를 통해 공개되었다.

애플 수의 신작이라고 해서, 그림이 공개되자마자 댓글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좋아요 수도 걷잡을 수 없이 가파르게 숫자가 올라갔다.

댓글은 영어 댓글이 대부분이라서 한국어 번역을 클릭해서 읽었다.

└ 애플 영원 : 애플 수의 신작이 떴습니다! 만세! 오늘도 그의 그림은 경이롭습니다! (좋아요 1.4만, 답글 120개)

└ 멜리사 로이 : 너무 아름다워요! (좋아요 1만, 답글 59개)

└ 김 애플 : 이번에도 애플 수는 최고를 경신했네요 ㄷㄷ ㄷ (좋아요 1.5천, 답글 67개)

└ 알 칼로스 : 나는 매일 애플 수를 봅니다. 즐겁게. 그는 잘생겼습니다. 진정으로! (좋아요 710, 답글 42개)

└ 사과쨈 : 믿기지 않아요. 그는 정말 사람일까요? 어떻게 그림이 매번 진화하는 것 같죠? (좋아요 690, 답글 90개)

└ 조이 벨로즈 : 애플 수의 나라, 한국에 방문할 겁니다! 그의 얼굴과 그림을 실제로 볼 것입니다. 일생일대의 꿈입니다. (좋아요 207, 답글 38개)

내가 너튜브 댓글을 대강 훑어보고 있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진구의 전화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고수야, 너튜브 올려진 거 봤어?>

“어, 지금 봤어.”

<어마어마하다. 더 어마어마한 건 네 그림이다만.>

나는 짧게 웃을 뿐이다.

<다들 난리야. 댓글뿐이냐? 강재랑 준호, 민석이도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너 인터뷰하고 난 후 한동안 핸드폰 불나지 않았어?>

“그러잖아도 한동안 핸드폰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아서 무음으로 해 놓았었다.”

<우리끼리 엄청 떠들었어. 다들 기억하더라고.>

“뭐를?”

<전에 너 원룸에서 처음으로 투룸 이사 갔었을 때, 집들이했었잖아? 그때 네가 방에 들어가 통조림을 잔뜩 그렸던 거 기억나?>

“아아.”

<그때 다들 감탄했었거든. 통조림을 실물처럼 그려서. 그래도 미처 몰랐었지. 네가 애플 수일 거라는 건. 내가 네 절친이라는 게 새삼 감사하다, 큭큭. 암튼 그 얘기 하자고 전화한 건 아니고. 지금 나한테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오고 있어.>

“어디서 연락이 오는데?”

<뭐, 국내 경매사를 비롯해서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사에서 연락이 오기도 하고. 이런저런 굵직한 기업에서도 연락이 왔었지. 그림을 사고 싶다고.>

“음.”

<그리고 청와대에서도 네 그림을 사고 싶대. 넌 어떻게 할래? 다른 곳에선 현재 제시한 최고가가 100억이거든.>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100억? 100억 주겠다는 곳은 어딘데?”

<인도 무슨 재벌이라더라.>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청와대는 가격을 얼마나 제시했어?”

<별로 가격은 높지 않아. 30억까진 줄 수 있다고 하는데. 그 금액도 사실 청와대는 역대급으로 높이 쳐주는 거야. 근데 별로 기대를 하는 건 같진 않더라고. 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곳이 수두룩하니까.>

“그럼 청와대에 연락해서 그림을 팔겠다고 해. 돈도 돈이지만 청와대에 그림을 파는 게 애플 수 이미지를 생각해서도 좋을 것 같다.”

<그래. 잘 생각했어. 청와대에 연락해볼게. 그리고 다음 작품은 언제쯤 그릴 거냐? 요즘 다들 그런다. 이런 걸작은 그릴 수 있을 때 많이 그리는 게, 모두를 위해서도 좋다고.>

“조만간 그릴 생각이야.”

나는 진구와의 통화를 끝낸 후 핸드폰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재에 있는 의자에 앉은 채, 옆에 켜둔 3D 디스플레이를 무심히 보려는데.

돌연 화면 전체가 붉을 빛을 깜박이며 발했다.

동시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타블렛 펜이 드르르 하며 진동을 일으켰다.

AI 수가 내게 경고 알람을 보내는 것이었다.

화면에 수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고수님, 원흉이 장위가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모습을 방금 촬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드론이 촬영한 영상을 보자, 원흉이 드론을 알아챈 듯했다.

나는 그 영상을 보며 곧바로 시간 능력을 발동했다.

그러자 영상 속 원흉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이다.

나는 그 상태에서 시간을 뒤로 조금만 되돌렸다.

1분 정도.

그러자 나는 이제 막 진구와 통화를 끝내려던 순간으로 시간이 되돌아갔다.

<그래. 잘 생각했어. 청와대에 연락해볼게...>

진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말하는 도중에 나는 핸드폰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타블렛 펜을 손으로 3초 동안 쥐어 타블렛 디스플레이를 열었다.

얼마 전에, 미리 몇 장 또 그려두었던 원흉의 그림을 불러왔다.

그때 타블렛 펜이 진동하며 3D 디스플레이가 붉은빛으로 명멸했다.

수의 메시지가 다시 나타났다.

<고수님, 원흉이 장위가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모습을 방금 촬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다시 시간 능력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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