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과 창조 능력의 정점 2
원흉의 머리를 아예 제거하는 다섯 번째 그림을 실물 전환하는 건...
실패하고 말았다.
내 상태가 실물 전환하는데 사용되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한 까닭이다.
실물 전환에 실패하면 그림도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원흉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방금만 해도 복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원흉이었건만.
목이 절단나서 검붉은 피가 흥건해졌던 것도 말끔히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봐도 원흉의 흔적은 없다.
그때 시간을 붙들어 놓았던 힘이 다하여서,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 귓가에 다시 주변 소음이 들려왔고, 병원 복도에 그대로 박제된 채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움직였다.
원흉은 어디로 간 거지?
그런 의문이 여전히 품고 있는데, 갑자기 내 몸이 저절로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능력을 바닥까지 소모한 탓에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건만.
지금은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나는 내 재능 스탯을 확인해보았다.
『창조 능력자 49레벨
시간의 문 : 54
재능과 능력의 주인 : 53
생명 창조력 : 53
공간 이동 : 1
그랜드 코인 : 9230581.』
스탯에 보상이 들어와 있다.
무려 스탯이 ‘20’이나 상승해 있다.
코인도 대거 들어와 있는 상태.
그런데 공간 이동은 또 뭐지?
새롭게 능력을 각성한 것도 아니고.
나는 잠시 갸웃하다가 언젠가 원흉이 공간을 초월해서 나타나곤 했던 것을 떠올렸다.
혹시, 원흉의 능력 중 하나가 내게 나타난 건가?
원흉을 제거해서?
방금 나는 원흉을 확실히 제거한 건가?
그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오빠?”
고개를 돌리니 눈이 동그랗게 된 루나가 서 있다.
그녀는 다가오더니 내게 와락 안겼다.
“괜찮은 거예요? 이대로 오빠가 눈을 뜨지 못할까 봐.”
어느새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쏠렸다.
그들은 내가 다가오며 말했다.
“애플 수?”
“애플 수가 깨어난 거예요?”
“애플 수가 깨어났어요! 세상에, 감사합니다. 너무 다행이에요.”
나를 알아챈 이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VIP실로 들어갔다.
수호가 괜찮은지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잠에서 깨어났는지 아이가 찡얼대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내 어머니는 원흉을 맞닥뜨렸다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상황에 어리둥절하다가 아이를 안고 달랬다.
나는 다가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수호를 안을게요.”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고수야. 너 언제 일어난 거니? 괜찮은 거야?”
나는 수호를 품에 안아 든 채 어머니에게 옅게 미소지었다.
“네, 괜찮아요.”
* * *
내가 깨어난 직후, H 병원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깨어난 나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었고.
취재진도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매스컴에선 한동안 떠들썩했다.
뉴스와 기사, 인터넷 매체.
그 모든 건 내 이름으로 가득 메워졌다.
온종일 지겨울 정도로 나에 관해 보도하고 내 그림에 관해 다뤘다.
덕분에 진구는 바쁘고 정신없어졌다.
애플 수 재단의 이사장인 수연이도 마찬가지.
나는 깨어난 그 날 VIP 병실로 옮겨서 입원하게 되었다.
퇴원은 그다음 날 할 수 있었다.
병실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핸드폰으로 까톡 메시지를 보냈다.
- 고수 : 수호야 대화 가능해?
그러자 AI 2050이 대답을 대신했다.
- 2050 : 지금 수호님은 대답하실 수 없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 고수 :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2052년의 상황이 혹시 바뀌었는지 알고 싶은데.
- 2050 : 곧 돌아오실 겁니다. 2052년의 상황은 변화가 있긴 합니다만. 제가 답해드리기 어렵습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고수 : 그래, 알았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수호의 연락을 기다리는데.
띠리리링-
진구에게서 전화가 와서 받았다.
“어, 진구야.”
<너 괜찮냐? 괜찮은 거지?>
“응. 괜찮아. 다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
<괜찮으면 됐다. 너 괜찮은 게 중요하지. 근데 거기 기자들 찾아오지 않았냐?>
“당연히 찾아왔지. 하지만 VIP 병실까진 외부인이 못 들어오니까.”
<너 지금 유명세 장난 아냐. 기자들이 여기 재단 사무실에도 찾아오고, 우리 다니던 학교에도 찾아오고 난리도 아냐.>
“그래?”
<내가 민감한 기사는 막고 그러거든? 그리고 너 퇴원하고 저택갈 때 조심해라. 기자 따라붙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조심할게. 진구 네가 여러가지로 수고가 많았을 텐데. 고마워.”
<나야 뭐. 근데 너 누워있는 동안 정말 대단했어.>
“뭐가?”
<해외에서도 너 깨어나는 걸 기원하겠다고 서울까지 단체로 찾아오는 팬들도 있다더라.>
“허.”
<네 이름으로 도배된 건 대한민국 매체만이 아니야. 해외에서도 연일 너에 관해 보도하고 그랬더라고. 네 사고를 나보다 더 비통해하는 사람도 많던데.>
“그래.”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대꾸했다.
<암튼 무슨 이벤트라도 되는 것처럼. 핸드폰 광고로 너 얼굴 공개하자마자 그 일 터지니까. 네 이름이 더 크게 유명세를 타게 된 것 같아.>
“흠, 그랬군.”
<조만간 너튜브로 올리거나, 아니면 기자들 통해 인터뷰를 하든 해서 너 괜찮다고 얘기를 해야지. 안 그럼 이대로 폭탄처럼 터질 것 같다 진짜.>
“그래.”
<암튼 몸조리 잘해라. 내일 너 퇴원할 때 갈게.>
나는 통화를 끝내고 원흉과 맞닥뜨렸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포칼립스를 막는 일.
이대로 끝난 거 맞겠지?
* * *
2052년, 수호가 이끄는 쉘터.
수호는 쉘터 건물 밖을 나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날카롭게 경계 어린 시선으로 앞을 응시했다.
한 남자가 수호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회색 머리의 남자였다.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를 직접 맞닥뜨리는 건 처음이었지만.
수호는 그가 원흉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원흉이 수호에게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게 되었다. 네 아버지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비루하고 쓸모없어 보이던, 그림에서 시작된 능력이 어떻게 강해지고 특별해질 수 있었는지. 내게 감히 도전하고 엿먹일 수 있었는지. 이제 알게 되었어.”
“......”
“그의 창조 능력은 모든 능력자 중에서 특별했다. 나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그가 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건 시간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더군. ”
원흉은 느긋하고 자약한 태도로 수호에게 계속 말을 이었다.
“최첨단 무기나 최초 능력자들의 공격 능력도 내겐 무용지물이다. 첨단 무기는 내게 닿지도 못할뿐더러 그 어떤 특이 능력도 나보다 강하지 않다. 그런데 네 아버지의 능력은 내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지. 그의 능력이 비루하지 않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
수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에게 대꾸했다.
“나는 주절주절 떠드는 네 이야기, 관심 없다.”
원흉은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당장이라도 움킬 듯 손가락을 갈퀴처럼 벌렸다.
모든 걸 얼려버릴 것 같은 음성으로 수호에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목을 당장 부러뜨릴 수도 있다.”
“그러든지.”
수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놈이 뭘 하든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하. 너는 네 아비를 닮아 죽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군.”
“글쎄.”
수호는 서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새삼 생각되는 건...
고수가 2026년에 선택했던 일이었다.
고수는 최초 능력자 중에서 유일하게 목숨을 버리는 걸 선택했다.
그는 죽음을 돌파한 것이다.
아포칼립스 원흉이 지닌 능력과 힘의 근원은 파괴와 죽음이었던 터라.
죽음을 유일하게 돌파한 고수가 원흉을 제거하고 멸할 능력을 얻게 된 거였다고, 새삼 깨닫는 바였다.
만일 2026년이 지나도록 최초 능력자 중에 아무도 죽음을 선택한 이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었을 거다.
수호는 자신의 아버지를 믿었다.
이 자리에서 원흉이 자신의 목을 꺾더라도.
고수는 2052년의 세상으로 와서 여기서도 모든 걸 되돌려놓으려 할 거다.
어떻게든, 원흉이 한 짓을 무위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그 탓에 수호는 원흉 앞에서 대담할 수 있었고.
원흉 역시 수호를 코앞에 두고서도 굳이 죽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수호는 조금 전부터 어떤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이제껏 흘러왔던 역사가 뒤틀렸고.
현재의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기억은 뒤엉키는 중이다.
하지만 원흉이 눈앞에 나타난 바람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의 기억을 제대로 정리할 틈이 없다.
이리저리 엉킨 기억에 혼란스러워할 겨를도 없다.
원흉은 수호에게 말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나는 과거의 고수가 장성하게 될 아들인 너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걸.”
“......”
“우리 협상하자.”
수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더는 서로 대적하지 않는 게 어떠한가?”
“......”
“네가 아버지를 설득하는 거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래야만 더는 피를 흘리지 않게 될 거다. 나는 이제 네 아버지와 싸우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그를 작게 여겨왔던 일이 내 어리석음이었다는 걸 여실히 깨닫는 바다. 그가 비루하지 않다는 걸 처음부터 알아차렸으면 좋았겠다는 후회를 지금도 하고 있지. 그의 아들인 너라도 일찍이 제거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군.”
수호는 입을 꾹 다물었고, 원흉은 느릿한 걸음으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원흉은 계속 떠들었다.
“네 아버지는 내가 인정한 유일한 인간이다. 그의 능력은 정점에 이르렀거든.”
문득 수호는 피식 웃었다.
“그래. 내 아버지의 능력은 정점에 이르렀지. 너를 죽일 만큼.”
원흉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그 순간, 수호가 선 주변의 풍경이 돌연 바뀌었다.
흠칫하며 수호는 주변 풍경에 눈길을 주었다.
현실처럼 보이는 환영이다.
루나와 한나, 유하준, 그리고 수호에게는 조부모인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갓난아기일 뿐인 수호의 모습도.
2023년도의 그들이다.
“보이지? 저들은 저 모습 그대로 안전하게 살 수 있어. 더 싸우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너와 네 아비가 날 계속 대적한다면, 저들은 지금 이 순간이라도 죽을 수 있다. 네 아버지가 시간 능력을 사용한다 해도, 내가 맹렬히 달려든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
“하지만 나를 대적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너희 뜻대로 아포칼립스는 오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양보하는 거지. 세상을 삼킬 계획을 거두는 거다. 너는 평범한 인생을 살게 되는 거야. 너희가 나를 더는 추적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는다면.”
잠잠히 있던 수호는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군. 2023년 3월이 시작될 즈음. 내 아버지는 너를 죽였었다.”
원흉은 듣기 싫게 느껴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그래, 맞아. 애플 수는 나를 한 번 죽였어. 하지만 그는 아직 알지 못해. 그가 죽인 건 내 일부라는 것을. 애초에 인간인 존재가 죽음을 죽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수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원흉에게 이죽거리듯 대꾸할 뿐이었다.
“못할 것도 없지. 내 아버지의 능력은 이미 정점에 올랐지만 아직 끝이 아니거든. 그의 능력은 무한과도 같다. 지금은 단순히 그림을 현실로 실현하는 능력이지만. 창조 능력의 궁극에 이른다면 과연 어떤 능력이 나타날까?”
“너, 죽고 싶은 거로구나.”
원흉은 분노한 눈빛을 했다.
“원흉, 비루한 건 너다. 그렇기에 내 아버지의 아들인 나에게 목숨을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