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과 창조 능력의 정점
신중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주저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애플 수는 언제 의식을 회복할지 모른다.
그가 의식이 없는 상태, 그러니까 그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인 지금이.
그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애플 수의 아내와 아들도 병원에 머물고 있다.
좀 더 안전하게, 아들이 애플 수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좋으련만.
애플 수의 아내는 어찌 된 게, 중환자실에서 멀리 떠날 줄을 몰랐다.
아들만이라도 집에 따로 보낼 수도 있는데.
그녀는 아들을 자신의 손에서 떼어놓질 않았다.
원흉은 H 병원에 좀 더 그가 조종하는 사람들을 풀었다.
그들 중에는 간호사도 있었고 환자도 있었다.
그가 조종하는 사람들은 원흉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H 병원을 돌아다니며 그가 원하는 정보를 보고 듣는 것이다.
원흉은 조종하는 능력을 가족에까지 손을 뻗치진 못했다.
애플 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클 경우, 해악을 끼칠 목적으로 조종하려 든다면, 상대의 정신이 크게 저항을 하는 탓이었다.
그렇기에 다만 일시적으로 그들의 눈을 가리는 정도만 가능했다.
이를테면, 수상한 자가 애플 수의 중환자실로 들어가더라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원흉이 사람들을 조종하여, 그들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애플 수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의 사고는 진짜로 일어난 일이었으며, 애플 수의 가족도 충격에 휩싸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다.
결국, 원흉은 H 병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가 머물고 있던 오피스텔에서 일어나 현관을 나서려는 순간.
어느새 그의 발걸음은 H 병원 로비에 닿아 있었다.
그가 홀연히 나타났음에도 로비를 오가던 무수한 이들은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그를 무심히 스쳐 지나갈 뿐.
원흉은 로비에 선 채 뭔가를 가늠하듯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어느 방향을 향해 그의 서늘한 시선이 향하더니 그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원흉은 단숨에 중환자실 앞까지 도달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VIP실에 애플 수의 아들이 잠들어 있음을 보았다.
VIP실은 병원 측에서 애플 수의 가족을 위해 내준 공간이었다.
애플 수의 아들 곁에는 나이 든 여자가 홀로 있다.
원흉의 입매가 비틀리며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발길을 내딛자 이번에도 단숨에 VIP실에 도달했다.
아기 옆에 앉아 있던 나이 든 여자는 홀연히 나타난 원흉을 발견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
원흉은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 여자가 애플 수의 어머니인가?
애플 수의 아들과 함께 죽인다면, 그는 나중에 어떤 반응을 하게 될지 기대되는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염력을 사용하기 위해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을 구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다 그는 멈칫했다.
“......!”
이곳 가까운 곳에서 어떠한 힘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온 세계에 간섭하는 거대한 능력이었다.
그의 능력 근원과 상반되는 그런 힘이었다.
설마...?
원흉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 * *
최근 2년간 마음 놓고 잠을 길게 잔 적이 없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지금.
적어도 내 육신은 오랜만에 긴 휴식을 하게 된 것 같다.
사고를 내고 12시간이 지난 후부터 나는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진짜로 기절에서 의식이 없었으니까.
누워있으면서 중환자실에 오가는 이들의 말소리.
그들의 발걸음 소리까지 민감하게 귀를 기울였다.
부모님과 루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건 원치 않았지만.
나는 굳이 그들까지 속였다.
그래야 아포칼립스 원흉을 제대로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원흉에게 조종받는 자가 왔다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강민철이 내게 일러준 것이다.
그는 누워있는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화가님, 원흉에게 조종받는 자가 이곳을 염탐하고 갔습니다.”
그가 따로 일러주지 않았어도 내 앞에서 소란이 있었으니 원흉이 나를 염탐하고 있구나,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젠 원흉이 어찌 행동할지 더욱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터.
현재 기사도 나간 상태일 거다.
내내 고요하던 중환자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곳 구석에 숨겨져 있던 벌레만큼 작은 초소형 드론 한 대가 움직였다.
위잉-
그것은 내 지척까지 빠르게 날아와 내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나를 깨우는 것이다.
나는 원흉이 이곳에 온 까닭에 드론이 나를 깨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금 원흉이 이곳에 왔구나!
내가 먹은 알약의 약 기운이 아직 내 몸에 남은 상태.
그렇기에 의지적으로 의식이 없는 내 육신에서 깨어나야 한다.
나는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려고 애를 썼다.
생각보다 내 육신이 금방 말을 듣질 않는다.
내 정신은 마음이 급해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내 육신은 고요히 잠들어 있기만 하는 것이다.
톡톡!
드론이 계속 내 얼굴을 건드렸다.
내 손가락 하나를 겨우 꿈틀 움직였다.
드론이 건드리는 바람에 내 눈꺼풀이 움찔 움직였다.
이렇게 꾸물거리다가는 원흉을 놓치게 되거나 뭔 일이 생길 수 있겠다.
나는 별수 없이 시간 능력부터 사용했다.
육신이 이런 상황이어도 내 능력이 발현될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 능력을 발현하자, 드론의 움직임이 돌연 멈춘 게 느껴졌다.
그리고 주변에 미미하게 들려오던 소음이 사라졌다.
마치 공간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완벽한 고요.
시간을 멈춘 것이다.
다행이었다.
능력이 발현되어서.
나는 눈을 겨우 뜨고 몸을 움직였다.
약 기운이 남아서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갔다.
어지럽기도 했다.
하지만 몸이 정상 컨디션이 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나는 허공에 뜬 채 멈춰있는 드론 한 대를 힐끗 눈길을 주었다.
드론 앞에 조그만 3D 디스플레이가 나타나 있다.
그 화면엔 AI 수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고수님, 일어나십시오. 아포칼립스 원흉이 VIP실로 갔습니다.>
VIP실이 어디인지는 대충 알 수 있다.
중환자실에 잠들어 있으면서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듣고 자연스레 알게 되었던 것.
나는 내 몸에 연결된 것들을 다 떼어내 버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욱신거린다.
사고 당하면서 다쳤던 곳이 아직 낫지 않은 탓이다.
아주 잠깐 몸이 비틀거렸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허공에 떠 있는 드론에 손을 가져가서 3D 디스플레이를 손으로 터치하여 확장했다.
그 화면엔 내가 그려놓았던 원흉 그림이 열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중환자실을 나섰다.
중환자실 복도엔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서 있다.
그들을 지나쳐 VIP실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엔 내 어머니와 아들만 있다.
그리고 원흉은 내 아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예측했었다.
내가 미끼가 되어 원흉을 낚고자 하였으나, 내 아들도 그가 노릴 거라고 여겼었다.
그래서 루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루나야, 당분간 수호를 내게 가까이 둬. 반드시 그래야 해."
나는 얼른 수호가 괜찮은지 확인하고는 원흉의 멱살을 잡아 VIP실에서 끌어냈다.
원흉을 제거하는 일은 내 어머니와 아들이 있는 곳에서 하고 싶진 않다.
원흉의 표정을 보니, 방금 내가 능력을 사용했던 것을 눈치챈 듯한 얼굴이다.
이번엔 기필코 잡는다!
나는 원흉을 복도까지 끌고 온 다음, 그렸던 그림을 열어 실물과 비교했다.
내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소한 몇 군데가 달라져 있다.
그림을 수정하지 않으면 이대로 실물 전환이 되지 않을 터.
나는 곧바로 그림을 수정 작업을 했다.
전에 미리 그려두었던 6장을 수정하는 것이다.
내가 첫 번째 그림을 완성했을 때, 원흉의 잿빛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살짝 스몄다.
시간을 멈춘 상태라, 일반인이었다면 감지조차 하지 못했을 것인데.
원흉은 시간이 멈춘 상황에서도, 내 능력을 깨뜨리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나는 재빨리 첫 번째 그림을 실물 전환했다.
원흉의 힘이 약해져야만 상대하기 쉬울 것이었다.
첫 번째 그림이 사라지니 원흉의 목덜미에 검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원흉의 눈동자에 깃들던 붉은 기운은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다시 두 번째 그림을 수정 작업을 했다.
수정 작업이라서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전 같았으면 이 또한 제법 시간이 걸렸겠지만.
지금은 작업 속도가 47배속의 빠르기다.
두 번째 그림에선 원흉의 한쪽 발목을 제거했다.
이걸 실물 전환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잔혹하기도 하다.
빠르게 작업해서 두 번째 그림도 완성해서 실물 전환을 하니.
쿵!
복도에 서 있던 원흉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한쪽 발목을 잃어서 중심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원흉은, 누군가가 자신을 그림으로 존재를 지울 수 있을 거라는 걸.
나를 만나기 전까진 미처 몰랐을 거다.
물론, 나 역시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림 재능이 업그레이드되었을 때, 내가 겨우 했던 생각은...
그저 유명해지고 돈을 버는 것이었으니까.
내 능력이 정점에 달하게 되면... 오직 내 능력만이 아포칼립스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했던, 수호의 말이...
납득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세 번째 그림의 수정 작업에 돌입했다.
그때.
츠츠, 츠-
원흉과 내가 있는 공간에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내 미간이 좁혀졌다.
이게, 무슨 현상인 거지?
아! 내 시간 능력이 도중 깨어지려고 하는 거구나.
나는 조급해졌다.
원흉도 시간 밖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곳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다 내 능력이 깨어지면 위험해지는 건 내 쪽일 수도 있다.
어쩌면 원흉을 제거할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세 번째 그림 수정을 가까스로 마치고 나는 실물 전환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적.
멸망, 아포칼립스의 근원.
그러한 자를 제거하는 데 능력을 사용하는 거라서, 만만찮게 내 정신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거기다 내 육신은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시간의 흐름도 붙들고 있는 터라 더 빨리 지쳤다.
세 번째 그림을 실물 전환에 성공하자, 공간에 나타났던 이상 현상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원흉의 목이 반쯤 절삭되었다.
나는 안도하며 네 번째 그림을 수정 작업했다.
이 그림은 원흉의 목이 아예 분리되는 모습이다.
그 그림 역시, 실물 전환에 성공했다.
VIP실 앞에 난데없이 끔찍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원흉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어 나뒹굴고 있는 상황.
나는 원흉이 이런 상태가 되었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원흉이 제거된 것인지 죽은 것인지 확인도 되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게 멈춰있는 상태였으니까.
무엇보다 내게 보상이나 코인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 역시 시간에 영향을 받는 탓인 걸까.
어쨌든, 원흉은 아예 존재조차 지우는 게 안전하다.
나는 다섯 번째 그림을 수정 작업했지만.
슬슬 시야가 흐릿해졌다.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
이번엔 작업이 오래 걸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섯 번째도 완성해냈다.
원흉의 머리를 아예 지워버린 그림.
즉시 그 그림을 실물 전환하는 걸 시도했다.
츠츠-
하지만 곧바로 실물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가 다섯 번째 그림이 사라지고.
이상 현상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