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가 아닌 평화도 대비해야 한다
그 새벽녘에 나는 장위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에, AI 수에게는 명령을 내렸던 터였다.
드론 800대를 은밀히 움직여서 계속 아포칼립스 원흉이 흔적을 찾게 한 것이다.
정원을 가로질러 걷는 동안, 장위는 신기한 눈으로 저택의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밝은 태양열 가로등이 곳곳에 있어서 정원은 어둡지 않았다.
“여기가 고수의 집이 맞아요?”
“네.”
“고수는 대단한 부자였군요. 마치 재벌 집 같아요. 이렇게 넓은 집엔 처음 와보네요.”
“네.”
나는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며 묵묵히 걸었다.
이번에 놓친 원흉은 최대한 빨리 추적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들로 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본관 현관 앞에 들어서자 루나가 서 있었다.
조금 전에 저택이 위험했던 일.
그 일은 시간을 되돌린 탓에 일어나지 않은 일로 되었을 터다.
그러니 루나는 별일 없었던 거고 괜찮은 것일 테지.
루나는 나를 보더니 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말간 얼굴은 휘몰아치는 감정을 애써 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 이 시간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 못 해서 깜짝 놀랐어요. 근데 옆에 계신 분은...”
나는 장위를 그녀에게 소개했다.
“중국 분인데 잠깐 여기 머물고 바로 중국으로 돌아갈 거야. 이 시간에 갑작스레 오게 되어서 미안.”
루나는 생긋 미소지었다.
“아녜요. 지금 오빠가 집에 와서 너무 기쁜걸요. 그런데 이 분, 중국분이라면 영어하실 줄 알아요?”
“응.”
루나는 시선을 옮겨 장위에게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반가워요. 전 고수 씨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제가 2층에 비어있는 방으로 안내할게요. 그곳에서 쉬시면 돼요.”
잠시 잊고 있었다.
루나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던 터라 영어를 모국어처럼 할 줄 안다는 것을.
루나와 함께, 장위에게 손님 방을 안내해주고.
우리는 수호가 잠들어 있는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조용한 침실에 우리 둘만 있게 되자, 루나는 갑자기 내게 와락 안겼다.
“루나야?”
루나는 한동안 내게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오빠, 이제까지는 내게 가장 안전함과 안락함을 주는 건 견고한 건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게 그러한 집이 있고, 나는 그와 같은 건물에 머물러 있다 해도 오빠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져요. 오빠가 없으면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을 뿐더러 행복하지도 않아요.”
나는 옅게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젠 나를 오랫동안 혼자 두지 마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루나야, 중간에 깨서 피곤하겠다. 그만 자.”
“오빠는?”
“나는 잠깐 손님과 얘기 좀 하고 나서 잘게.”
나는 그녀를 달래듯 말하고는 침실을 나왔다.
그리고 장위가 머물게 된 손님 방으로 노크하고 들어갔다.
장위는 침대 위에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벌떡 일어섰다.
나는 3D 디스플레이를 열어 AI 수의 기능을 활성한 다음.
수에게 명령을 했다.
“수, 잠시만 타인에게도 화면이 보이게 해줘. 그리고 중국어로 내 말을 번역해줘.”
<네, 알겠습니다.>
화면 바탕색이 바뀌며 장위의 눈에도 보이게끔 바뀌었다.
나는 장위에게 말했다.
“장위. 이 화면 보이죠?”
내가 말하자 화면에 내 말을 중국어로 번역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장위는 그것을 힐끔 보고는 내게 답했다.
“네, 보입니다.”
“본의 아니게 여기까지 오게 했네요. 원래는 바로 베이징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내일 아침에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어차피 여기까지 염력과 은신 능력을 사용하면서 왔던 터라 피곤했을 테니. 여기서 쉬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줄게요.”
“네, 알겠습니다.”
* * *
2052년 중국에 남아 있던 최대 쉘터.
그곳의 가장 높은 파수탑 위에 장위와 류진이 서 있었다.
그들이 있던 쉘터에서 이제껏 맞닥뜨린 적 없던 적의 대군이 밀어닥쳤다.
수십만 마리의 적들이 한꺼번에 이곳 쉘터로 몰려든 것이다.
괴수 떼가 쏟아져 오자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이곳 지대가 크게 진동했다.
쿠구구구구-
이곳 세계의 소리는 오직 괴수들의 괴성으로 메워진 것만 같았다.
그 엄청난 소리에 이젠 장위와 류진은 서로 대화하기가 어려워졌다.
장위는 절망적인 시선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공중엔 수천 마리의 공중 괴수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살고, 그들의 쉘터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건...
천지가 뒤바뀔 만한 기적이 일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장위는 마지막 힘까지 쥐어 짜내어 염력으로 공중 괴수를 막았으나.
어느새 공중 괴수들은 그들의 쉴터 위를 뒤덮고 생존자를 공격했다.
장위는 마지막 힘이 다하자 질끈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 비극적인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친 순간.
돌연 장위의 쉘터에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츠츠, 츠츠츠-
장위의 쉘터만이 아니다.
이곳 세계 전체에 이상 현상이 나타난 듯하다.
먼저 하늘이 바뀌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면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핏빛 하늘은 어느새 그 색이 옅어졌다.
그리고 쉘터를 덮쳤던 괴수들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거의 반 정도 파괴되었던 장위의 쉘터는 다시 이전처럼 굳건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공중 괴수의 괴성이 문득 아득히 들린다고 여겨져서 장위는 눈을 떴다.
장위는 갑자기 달라진 주변 모습에 눈을 크게 홉떴다.
“......!”
그가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류진이 그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물었다.
“장위, 왜 그러십니까?”
“진?”
장위는 당혹한 얼굴로 류진의 이름을 불렀다가 뭔가 기억이 엉키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장위, 곧 회의가 있습니다. 이만 내려가시지요.”
“회의?”
“네.”
장위는 당혹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쉘터 건물의 모습이 회복되어 있다.
이전처럼 중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위용을 자랑하는 모습이다.
“적의 대군은 어떻게...”
“네?”
“어, 아니. 아무것도...”
“그럼 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진, 잠깐만.”
장위는 류진을 불러세우고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폭풍처럼 뒤엉키는 기억의 혼란에 그는 두통마저 일었다.
장위는 기억을 정리하려고 애를 쓰다가 뭔가 깨달았는지 전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커다래진 눈으로 류진을 바라보았다.
“그랬었군.”
“네?”
장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장위?”
“하하. 진, 자네가 했던 말. 절망의 끝일지라도 기회는 있다고 했었지?”
“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던가요?”
“그래. 진은 내게 이런 말을 했었어. 기회라는 건, 매번 다른 형태이고 다른 모습이라고 했었어. 만일 그 기회가 다시 나를 찾아온다면 이번엔 알아보라고 했었지. 반드시 붙잡으라고 했었지.”
류진은 기묘해진 표정으로 장위를 직시했다.
“생각해보니 제가 그러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뭔가 데자뷰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그래. 그런데 진의 말대로 절망의 끝에 서 있던 내게 기회가 오더군.”
“그랬습니까? 그래서 장위는 그 기회를 붙잡으셨습니까?”
장위는 웃음기가 조금 걷힌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한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왔었어. 진의 말대로 위대한 기회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과 형태로, 심지어 시간을 거슬러 나를 찾아왔던 거지.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붙잡았어.”
“잘된 일이군요.”
“진,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싸울 수 있게 된 거야. 비극과 종말에 대항하여 이겨낼 기회를 다시 한번 얻게 된 거지.”
장위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돌려 황폐된 땅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가 어느새 물기로 젖어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강민철과 통화를 했다.
강민철은 여전히 호텔에 머물러 있었다.
“강 회장님, 다른 지역의 붉은 유성은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 알 수 있습니까?”
<네. 조금 전에 회사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베이징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의 상공으로 몰려들었던 붉은 유성이 돌연 사라졌다고 하는군요.>
“중국 말고 다른 곳은요?”
<다른 나라에 붉은 유성이 관측되는지 지금 찾고 있는 중입니다만. 아직 관측된 붉은 유성이 없습니다. 현재 모든 붉은 유성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나는 놀라며 되물었다.
“모든 붉은 유성이 사라졌다고요?”
베이징만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모든 붉은 유성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
“강 회장님, 일단 전세기로 한국으로 돌아오셔야겠습니다.”
<네, 그래야겠네요.>
“강 회장님 혼자 돌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화가님은 자택에 머무시는 건가요?>
“네, 지금은. 하지만 장위는 베이징으로 곧 돌려보낼 겁니다.”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한국에서 뵙도록 하죠.>
나는 강민철과 통화를 끝낸 후, 곧바로 장위를 데리고 지하벙커로 왔다.
지하벙커로 누군가를 데려오는 건 장위가 처음이다.
여러 차례 보안 과정을 거쳐서 지하벙커에 이르자, 장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여긴 앞으로 다가올 일을 대비하여 만든 지하벙커입니다.”
“대단하군요. 집안 안에 이런 벙커가 있다니.”
나는 3D 디스플레이에 AI 기능을 켜놓은 채 그와 대화했다.
“장위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미래에 나타날 일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미래요?”
“네. 저는 오늘 아침에 미래의 인물과 대화를 나눈 후, 장위에게 미래의 모습과 정보를 공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장위는 내가 말하는 미래의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한 기색인 듯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 오늘은 나 말고 또 한 사람이 함께 아바타 접속을 할 거야. 준비해줘.”
<네, 알겠습니다.>
나는 유하준이 최근에 만들었던 최신 버전의 아바타 기계를 컴퓨터에 연결했다.
최신 버전의 아바타 기계는 캡슐 형태가 아닌 간소한 형태였다.
그것은 핼맷을 쓰고 아바타 기술이 내장된 수트를 입으면 아바타 접속이 가능했다.
나는 장위에게 미래로 아바타 접속을 함께 하게 될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고는 장위를 캡슐에 눕게 했다.
수가 초소형 드론을 움직여서 아바타 접속을 도왔고.
잠시 후, 우리는 2052년의 세상으로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내, 내 모든 감각이 2052년의 쉘터 지휘실의 풍경을 인지했다.
나는 지휘실 내부를 한 번 훑어보았다가 근처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장위에게 눈길을 주었다.
지휘실에는 수호와 정테이, 나이가 든 강민철, 유하준이 서 있었다.
2027년에 사망했을 유하준은 이제 운명이 바뀌어서 2052년에도 살아서 쉘터에 함께 머물게 된 상황이다.
그들 모두는 스마트 안경을 쓰고 있었다.
테이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고수, 이렇게 또 만나게 되니 반가워요. 이런 식으로나마 고수 씨를 만날 수 있어서 지금도 고수 씨가 살아있는 기분이에요. 근데 옆에 계신 분이 그 유명한 장위?”
장위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다가 얼른 답했다.
“네, 제가 장위입니다.”
“훗, 꽤 어려 보이시네요.”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죠.”
수호가 말하자 다들 긴 테이블의 의자에 자리했다.
장위는 아바타인 상태로 의자에 앉을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다 내가 앉는 것을 보고 그도 따라 앉았다.
사실, 아바타의 모습으로는 이곳 세계에서 물질적인 감각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곳의 물리적인 형태에 아바타의 움직임이 영향받을 수는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서 아바타로 앉고자 한다면 앉을 수 있었고 침대에 눕고자 한다면 누울 수 있었다.
다만, 물리력을 행사하여 문을 연다거나 물건을 옮기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수호는 우리 앞에 커다란 디스플레이를 띄우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분들은 우리가 과거에 개입함으로써 달라진 현재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의 흐름은 지속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최근 달라진 부분은 이것입니다. 이전에는 본격적인 아포칼립스가 2023년 겨울, 중국에서 시작되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아포칼립스의 시작이 중국이 아닌 전 세계에서 동시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호에게 물었다.
“2023년 겨울에 아포칼립스가 시작된다는 점은 달라진 게 없는 거야?”
“네. 아포칼립스의 시작 시기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전 기억에서는 붉은 유성이 2023년 1월에 중국으로 몰려들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달라진 우리의 기억에서는, 붉은 유성은 2023년 11월이 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었습니다.”
나는 놀라서 그에게 되물었다.
“붉은 유성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