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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113화 (113/153)

멸망이 두려워하는 힘 2

고수가 원흉이라고 부르는 잿빛 머리칼의 남자.

그에겐 딱히 불리는 이름이 없다.

무수한 이름이 있으나 그중에서 정해진 하나의 이름으로만 불려본 적이 없다.

그의 무수한 이름 중에는 ‘멸망’이라는 이름도 있으나.

그걸 그의 이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고수는 그를 꾸준하게 아포칼립스 원흉이라고만 불렀다.

어쨌든 잿빛 머리칼의 그에게 신비한 능력이 휩싸인 순간.

원흉은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고수의 공격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

대체, 왜 그랬을까?

아포칼립스 원흉은 자신을 의아하게 여겼다.

왜, 도망치려 했을까?

그래 봤자 애플 수는 유독 희귀한 특이 능력을 지닌 인간일 뿐인데.

왜 그는 두려움을 느끼고 애플 수와 맞닥뜨리는 것을 피하려 했을까?

강력하고도 초월적인 힘과 능력이 있건만.

그의 예상을 깨고 애플 수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피하기보다 그의 파괴적인 능력을 즉각 나타내고 사용했어야 했다.

아포칼립스 원흉, 그는 미래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고 때로 공간을 초월할 수 있으며.

사람과 물건, 심지어 자연 자체를 조종하고 강한 염력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크아악!”

그가 애플 수를 피하려 하는 사이, 신비한 능력이 발동하여 저번처럼 극심한 통증이 그의 두 눈에 나타났다.

그는 손을 들어 두 눈을 감쌌다.

그가 이토록 상처를 입어본 적은 처음이다.

아니, 비행기 기장실에서 겪었던 일이 처음이었고, 오늘도 그때와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는 분노가 일었다.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다니!

원흉에게서 회색 오라가 더욱 짙게 나타났다.

그의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상처 입은 상태라서 눈을 감고 있다.

원흉은 애플 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았다고 해도 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애플 수는 다시 그에게 실물 전환 능력으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실패를 했다.

그림이 실물 전환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그렸던 그림과 실물이 미묘하게 달라진 탓.

회색 오라가 짙어진 것이 이유다.

원흉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것이 애플 수의 한계로군.

원흉은 애플 수에게 외쳤다.

“네 집과 가족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여기서 직접 보아라! 그편이 훨씬 내게 즐거우니.”

원흉의 말이 끝나는 순간!

쿠구구구구-

이곳 일대의 지면이 크게 움직였다.

원흉은 저택을 향해 손을 뻗더니 쫙 폈던 손이 콱! 허공을 움키듯 주먹이 쥐어졌다.

그러자 저택이 크게 흔들리며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 원흉이 사용하는 염력에 저항하듯 또 다른 힘이 침투했다.

그 힘을 감지한 원흉은 비웃었다.

“염력을 사용하는 자가 한 명 숨어 있었군. 하지만 내 앞에선 그냥 비루한 힘이고 생명일 뿐이다.”

원흉은 다른 한 손을 뻗어 조금 떨어져서 몸을 숨기고 있던 장위를 향해 손을 콱 움켰다.

장위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 * *

우리를 비웃으며 염력을 사용하는 원흉.

그의 힘은 장위의 염력과 비교하자면, 그의 말대로 비루한 능력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서서 그에게 외쳤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니다!”

“뭐?”

원흉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나는 곧바로 ‘시간의 문’ 능력을 사용했다.

그 능력이 발현되자 곧바로 이곳 세계의 시간이 멈추었다.

사방이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다.

시간은 멈추었다가 3분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멈춘 상태로 머물렀다.

원흉이 내게 두 눈을 상처 입은 직후다.

그가 아직 염력을 발동하여 저택과 장위를 공격하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시간에서 정지된 채 머물렀다.

‘시간의 문’능력을 오래 사용할 수는 없다.

아까 몇 시간 전에, 이미 이 능력을 사용하여 6시간이나 되돌렸었기 때문이다.

나는 옆에 열어둔 3D 디스플레이에 눈길을 주었다.

두 개의 디스플레이.

하나는 원흉을 그린 그림들을 열어두었었고.

다른 하나는 타블렛 디스플레이다.

나는 이미 그려두었던 원흉의 그림들을 수정했다.

회색 오라가 나타난 부분과 눈 부분을 금세 수정하고서, ‘시간의 문’ 능력을 해제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순간,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실물 전환을 실행했다.

* * *

원흉은 두 눈을 손으로 감쌌다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

그는 애플 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눈을 감았다고 해도 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애플 수는 이제 그림을 현실로 실현하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그려졌던 그의 그림은 실물과 미묘하게 달라졌으니.

그런데.

뭔가 잘못되었다.

일이 틀어졌다.

원흉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그의 생각, 예측과 달리 뭔가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지하기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그와 같은 의문을 품고서 주저한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

애플 수의 공격은 즉각 이어졌기에.

그의 의문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애플 수의 두 번째 그림이 실현된 것이다.

원흉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오른손을 들어 목덜미를 감쌌다.

그의 목에서 검은빛에 가까운 붉은 피가 솟구치더니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위험하다!

피해야 한다.

지금 애플 수의 저택을 파괴하고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더는 지체하지 말고 피해야...

“......!”

원흉은 공간 이동 능력을 발동했다.

하지만 그 순간, 거의 동시에 애플 수의 실물 전환 능력이 또 한 번 원흉에게 임하고 말았다.

* * *

나는 아포칼립스 원흉이 사라진 곳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에게 총 3장의 그림을 실물 전환했었다.

마지막 한 장을 사용하지 못한 게 아쉽다.

방금 그림이 실물 전환되었으니, 원흉의 목은 거의 반쯤 절단 난 상태가 되었을 터.

인간이라면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일 것이나, 원흉에게 그 정도의 상처는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AI 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 이곳 주변에 아포칼립스 원흉이 있는지 찾아봐 줘.”

그러자 내가 열어놓은 3D 디스플레이 화면에 수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택에 가족들이 무사한지도 봐주고.”

<네, 고수님.>

저벅.

그때 근처에 있던 장위가 조용히 다가왔다.

그는 주변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살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자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까 내가 3분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었다면, 장위는 아마도 이 자리에서 죽었을 거다.

그리고.

나는 저택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나와 수호도 큰 해를 입었겠지.

이 자리에서 그들을 잃게 되었을지 모른다.

“지금 찾고 있는 중이에요.”

“도망친 건가요?”

“네.”

그에게 짧게만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시간 능력을 연달아 사용해서 피로해진 탓도 있고.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저택이 파괴될 위기에 놓인 것을 목도한 까닭에.

내 마음이 심히 가라앉았다.

돈을 들여서 요새를 지어놨어도 안전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수에게 물었다.

“수, 원흉을 찾아냈어?”

<저택 주변 지역에선 아포칼립스 원흉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 지역을 벗어난 것 같습니다.>

“그럼 가족들은 어때? 다들 괜찮은 거지?”

<네. 저택에 있는 이들은 전부 무사합니다. 조금 전에, 루나님이 깨어나서 울고 있는 수호님을 달래는 중입니다.>

“그래.”

장위가 가까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고수, 이젠 어쩌실 생각입니까?”

“우선 베이징으로 돌아가야죠.”

“여기 고수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그자가 다시 나타나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자는 당분간 여길 다시 찾아오지 못할 겁니다. 이번 일로 그가 학습을 했다면 여기 찾아온 순간, 즉시 내게 공격당할 거라는 걸 알 테니까요.”

“그렇겠군요.”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있으니, 아내와 아들의 거처를 옮겨야겠어요.”

자정이 훌쩍 넘어 다들 잠들었을 새벽 시간이지만.

나는 핸드폰을 들어 루나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때 내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며 강민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지?

강민철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강 회장님.”

<화가님, 지금 어딥니까?>

“저는 지금 자택 근처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방금 원흉과 맞닥뜨렸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와 장위는 무사합니다. 원흉은 아쉽게도 또 내뺀 상태고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무사하시다니 다행이군요. 여기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베이징에 모여들었던 붉은 유성들 말입니다.>

“네.”

<그게 대기권을 벗어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다른 곳은 어떤지 아직 모르겠는데. 베이징 위에 떠 있던 붉은 유성이 대기권을 벗어나서 다시 우주 밖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번에 노르웨이에서 붉은 유성을 파괴할 때처럼, 유성들이 도주하고 있는 건가?

“아쉽게도 베이징에 있는 붉은 유성을 파괴하는 일이 곧바로 이루어질 수 없겠군요.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 쉬시고 내일 아침에 통화하죠.”

<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강민철과의 통화를 끝냈다.

베이징에 나타난 붉은 유성을 제거하기 위해 곧바로 베이징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일단 저택으로 들어가서 다음 계획을 생각해봐야겠다.

* * *

아직 신생아인 수호를 옆에 눕히고 루나는 침대에서 잠들었다.

방금 분유를 먹였으니 두 시간은 얌전히 잠들어 있을 거다.

낮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가 아기를 돌봐주긴 했지만.

밤중에는 루나가 곁에 두고 잠들곤 했다.

그래서 밤중에 아기가 깨어 울거나 하면, 루나는 일어나서 분유를 주고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신생아를 키우는 그녀이니 숙면하기가 어렵다.

겨우 잠들었던 루나는 몹시도 사나운 꿈을 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견고한 집이라고 믿었던 저택이 무너질 듯 크게 흔들렸던 것이다.

몹시 놀라서 그녀는 꿈속에서도 수호를 꼬옥 안아 들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아기에게 말하면서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렸다.

지진인 걸까?

당장 집 밖으로 나가야 할까?

이 집은 강진에도 버틸 수 있도록 견고하게 건축되었었는데.

루나는 수호를 안고 지하벙커로 가려고 침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 순간, 벽이 쩍쩍 갈라지더니 굉장한 소리를 내며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현실 같이 생생하던 악몽에서 그녀는 깨어나 눈을 떴다.

루나는 벌떡 일어나 침실 안에 멀쩡한지 살펴보았다.

역시 꿈이었다.

저택이 무너지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루나는 이마가 난 식은땀을 닦았다.

루나가 깰 때 수호도 깨어났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으애앵.”

평소라면 분유 먹고 얌전히 잘 잤을 아기인데.

방금, 루나와 동시에 깨어 울음을 터뜨렸다.

루나는 아기를 안고 달랬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악몽을 꾼 탓일까.

오늘따라 이 넓은 집에 고수가 없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다.

너무나 허전했고, 그가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간절히 했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우웅, 우웅-

핸드폰을 확인하니 고수의 번호가 찍힌 게 보인다.

이 새벽 시간에 그의 전화가 의아스러웠지만.

루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고수가 전화를 해준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고 두려움이 사라진 까닭이다.

“오빠아.”

<루나야, 자?>

“아니, 방금 잠깐 깼었어요.”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고수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오빠는 안 잤어요?”

<나 지금 집에 다 왔어.>

“네?”

고수가 빨리 집에 돌아왔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은 몰랐기에, 루나는 방금 잘 못 들은 건가 했다.

<근데 손님이 있어. 이 시간에 갑자기 도착하게 되어서 미안. 함께 들어갈게.>

통화를 끝낸 루나.

그녀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던 수호는 그새 잠들어 있다.

루나는 조심스레 수호를 눕히고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섰다.

마음 같아선, 손님이 있건 말건 고수에게 달려가 와락 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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