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되는 붉은 유성 2
내 능력이 발현된 순간,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던 비행기가 돌연 허공에서 멈추었다.
비행기 추락으로 인해 사납게 이어지던 주변 소음도 뚝 그쳤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있던 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자세를 편히 하며 똑바로 섰다.
이곳 세계의 시간이 멈추었다.
오직 나만 시간의 굴레 위에 섰다.
시간의 영향력을 벗어난 것이다.
시간은 멈춘 것에서 끝나지 않고.
어느새 거슬러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영상을 되감기 하는 것처럼.
이곳 풍경이 거꾸로 흘러갔다.
기장실에 있던 나는 도로 객실에서 앉아 있게 되었고.
추락하던 비행기는 원래의 고도를 향해 솟구쳤다.
살해되었던 기장과 승무원도 ‘죽음’에서 놓여나서, 다시 한번 삶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시간의 문’ 능력.
이 능력의 명칭은 별로 달라진 바 없는데.
능력 수치가 ‘36’이 되자, 능력 진화가 나타났었다.
시간을 멈추는 것을 뛰어넘어 되돌릴 수도 있게 된 것.
현재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3시간 전이 최대치다.
3시간 전이라면 내가 한참 잠들었던 때.
시간이 거꾸로 되돌려지는 일이 멈추고, 3시간 과거에서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그 시간에 좌석에 앉아 잠들어 있던 나.
의지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번쩍 떴다.
어둑한 객실 풍경이 보인다.
사방은 고요하다.
강민철 역시 잠들어 있다.
3시간 이전의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자리를 옮겨서 좌석의 조명을 켰다.
타블렛 펜을 작동해서 3D 디스플레이를 열었다.
저장된 그림을 불러와 초소형 드론 두 대를 실물 전환했다.
그리고 AI 기능을 활성화하여 소곤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수.”
디스플레이 화면에 수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네, 고수님.>
“저택은 별 이상 없는 거지?”
<네,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올차드 저택에 있는 이들은 다들 무탈합니다.>
나는 디스플레이를 터치해서 말로 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그래. 드론 한 대는 은밀하게 움직여서 기장실에, 다른 한 대는 객실에 둬서 침입자가 있는지 살펴 줘. 아무에게도 드론이 있다는 걸 들켜선 안 돼.>
<네, 알겠습니다. 고수님.>
<비행기에 침입자가 나타나면 즉각 알려줘야 해.>
<네, 즉각 알려드리겠습니다.>
위잉-
마치 날벌레가 움직이는 것 같은 미세한 소리를 내며 드론 두 대가 움직였다.
한 대는 기장실로 향하고, 다른 한 대는 객실의 어딘가에 자리를 잡는 듯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내가 만났던 아포칼립스 원흉.
그의 자세한 생김새는 똑똑히 기억한다.
내 재능 스탯 중에서 ‘생명 창조력’.
이 능력은 숙련도가 상당히 올라간 상태였다.
웬만한 건 자료 사진이 없어도 싱크로율 100%에 이르도록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조금 전, 만났던 원흉의 생김새를 뚜렷하게 나의 뇌리에 새겨놓았었다.
그림을 그리는 목적이라면...
내 관찰력과 피사체를 세밀하게 기억하는 능력은, 거의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나는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렸다.
3시간 안에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
완성할 수 있는 그림은 한 장뿐일 테니 말이다.
아포칼립스의 원흉.
멸망의 시작이며, 또 다른 창조의 시작이라던 그 놈!
그는 멸망의 별과 다를 것이었다.
더 강할 테지.
어차피 그림 한 장으로 원흉을 제거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더는 공격할 수 없도록 치명상을 줘야 한다.
상처를 한 개 만드는 것만으로는 어림없을 터.
치명상을 줄 방도.
뭐가 있지?
그를 제거할 만큼의 치명상은 아직 단숨에 만들어내는 건 어려우니.
가장 약한 부분에 상처를 내야 한다.
나는 그의 회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래. 그의 한쪽 눈에 상처를 만들어놓자.
아예 두 눈을 못 쓰게 만들고 싶지만.
그 정도 변화를 만들어 실물 전환하는 건, 내 능력 밖일 수도 있다.
기껏 한 번뿐인 기회가 왔는데.
혹시라도 원흉을 다시 만났을 때, 내가 그린 그림이 실물 전환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죽게 될 거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시간 능력을 사용했던 시점을 30분 정도 남겨두었을 무렵.
고개를 들어 객실을 살펴보았다.
비행기 내부는 고요하다.
아직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AI ‘수’도 별다른 보고 없이 잠잠하다.
나는 다시 자리를 옮겨 좌석에 앉았다.
이제 곧 원흉이 나타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바짝 긴장하며 준비를 했다.
시간 능력을 사용했던 시점을 15분 정도 남겨두었을 때.
돌연, 3D 디스플레이에 ‘수’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고수님, 객실에 누군가가 나타났습니다. 잿빛 머리의 젊은 남자입니다.>
아포칼립스의 원흉이다!
그는 먼저 객실에서 나타났었구나.
3D 디스플레이는 내 눈에만 보일 터.
나는 눈을 감고 잠든 척을 했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내가 앉은 좌석을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그의 움직임이 고요하다.
그는 대체 비행 중인 항공기 내부로 어떻게 침투할 수 있었던 걸까.
기내에 홀연히 나타나다니.
그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초월적인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더욱 조심해야겠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나를 지나쳐 기장실로 향하자, 나는 눈을 떴다.
미동 없이 눈만 뜨고서 디스플레이에 눈길을 주었다.
새로 나타난 ‘수’의 메시지가 있다.
<그자가 기장실로 향합니다.>
나는 원흉이 기장실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열어두었던 불새 그림 두 개.
비행기 바깥으로 위치 지정하여 실물 전환했다.
이따가 아포칼립스 원흉이 비행기를 떠날 때, 그자를 추적해줘.
라고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나는 오른손으로 3D 디스플레이를 붙든 채, 성큼성큼 기장실로 다가갔다.
기장실에서 소란이 이는 게 들려온다.
새어 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당신, 누굽니까?”
“이봐요!”
나는 원흉을 그렸던 그림을 디스플레이에 열어둔 상태다.
그를 보면 즉각 실물 전환 능력을 사용할 거다.
기회는 한 번뿐.
아니, 어쩌면 기회는 두 번이 될 수도 있다.
나를 극한까지 몰고 간다면 한 번 더 시간 능력을 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 한 번으로는 족하지 않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내가 어찌 되든 극한까지 능력을 사용해보자.
문을 열고 기장실로 들어서자 원흉이 나이프를 들고 기장의 목을 내려찍으려는 게 보였다.
나는 바로 그림을 실물 전환을 했다.
내 시야에 새하얀 섬광이 번쩍 일며 능력이 발현되었다.
동시에, 소름 돋는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원흉은 들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뜨리고 오른손을 들어 오른쪽 눈을 가렸다.
그의 왼쪽 눈은 핏빛으로 변하더니 분노 어린 기색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는 왼손을 내 쪽으로 뻗으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시간 능력을 또 한 번 발현했다.
다행히, 이번에도 능력이 성공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을 뒤로 돌리지 못했다.
그럴 만한 에너지가 내게 없다.
다만, 시간을 멈추었다.
시간을 제한된 범위 안에서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유일하게 내가 원흉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내 목덜미에 강한 악력이 느껴지려던 찰나.
이곳 세계의 시간 흐름에 또 한 번 간섭이 이루어졌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추게 된 것이다.
멈출 수 있는 시간은 5분.
이 짧은 시간에 원흉의 모습을 그림으로 다 그려낼 수는 없다.
다만, 머리만 그릴 수는 있을 것 같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바, 저자는 멸망의 별보다 훨씬 격이 높다.
일부분만 그려서는 실물 전환하기가 버거울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목숨 걸고 도전한다.
나는 시간이 멈춘 사이, 서둘러 타블렛 디스플레이에 그림을 그렸다.
나머지 한쪽 눈을 예리한 나이프로 한 번 그은 것 같은 상처를 그려내며, 원흉의 머리를 그렸다.
시야가 침침해지기 시작한다.
내 모든 감각이 내게 경고를 해왔다.
이대로 무리하게 능력을 사용하면 자칫 내 정신이 붕괴될 수도 있음을.
숨을 쉬기가 어려워져 갔다.
확실히 버겁다는 걸 알겠다.
츠츠, 츠-
내 능력이 시간을 계속 붙들어 놓는 게 어렵다는 듯.
주변 풍경이 이상 현상을 나타낸다.
금세 시간이 다시 흐를 듯 일렁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내 시야는 점점 더 흐려져 갔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다.
조금만 더!
어느새 5분이 지나가고.
시간은 다시 흘러갔다.
시간을 따라 잠시 멎었던 모든 것이 다시 움직였다.
원흉은 내게 왼손을 뻗어 손아귀를 콱 움켰다.
그의 손이 내게 직접 닿지도 않았는데도, 어떤 강한 악력에 의해 내 목덜미가 콱 조여졌다.
“큭!”
이대로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숨을 쉴 수가 없고 시야는 더 흐려졌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방금 그렸던 그림을 실물 전환했다.
츠츠-
그림이 실물 전환되는 일이 힘겹게 나타날 때 나타나는 이상 현상.
츠-
능력이 발현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대로 죽게 될 터.
다행히 능력은, 내 간절한 바람에 반응하듯 발현되었다.
“끄아악!”
원흉이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동시에, 내 목을 조르던 힘은 사라졌고.
방금 실물 전환 능력을 썼던 게 마지막 힘이었던 듯.
내 의식도 거기서 끊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털썩 쓰러졌고, 승무원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내게 다가왔다.
* * *
기장을 살해하려 하고 고수를 해하려 했던 자.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도 강민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잿빛 머리의 남자는 어느 순간 두 눈에 상처를 입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듯이.
검은빛에 가까운 회색 연기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고수는 쓰러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은 비현실적인 광경.
승무원은 쓰러진 고수를 붙들었다.
그녀는 울음이 곧 터질 듯한 얼굴로 외쳤다.
“긴급 착륙을 해야 할 듯해요!”
의식을 잃고 있던 고수.
얼굴이 창백한 게 모든 기력이 다한 사람처럼 보였다.
호흡도 가냘파서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듯하다.
이곳엔 의사도 의료진도 없다.
암담한 상황인 것이다.
그때, 고수는 눈을 번쩍 뜨더니 눈물범벅이 된 승무원의 팔을 붙들었다.
고수는 숨을 몰아쉬며 승무원에게 말했다.
“긴급 착륙 말고. 먹을 것 좀 주시죠.”
공포, 두려움, 놀라움, 경악으로 치닫던 이들.
오열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던 승무원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물 젖은 눈을 깜빡였다.
“네?”
“지금 기운이 하나도 없어요.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요.”
* * *
그야말로 죽는 줄 알았다.
의식이 끊기지 전, 나는 내 재능 스탯을 열었었다.
방금 내 행동으로 원흉이 타격을 입고 그의 계획이 저지된 순간에.
죽음으로 치달았던 사람들의 운명이 비틀리면서...
내게 그랜드 코인이 채워졌다.
비행기 내부의 사람들.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다치고 죽게 될 사람들까지.
그들의 운명이 변하면서 그랜드 코인이 채워진 것이다.
그래서.
『창조 능력자 48레벨
시간의 문 : 36
재능과 능력의 주인 : 36
생명 창조력 : 33
그랜드 코인 : 4153355.』
나는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다음 업그레이드 비용은 4153344 그랜드 코인.
입술을 달싹여서 ‘생명 창조력’ 능력을 업그레이드했다.
『창조 능력자 49레벨
시간의 문 : 36
재능과 능력의 주인 : 36
생명 창조력 : 34
그랜드 코인 : 11.』
나는 알고 있었다.
창조력에 ‘생명’이라는 명칭이 붙은 그 순간부터는, 그 능력을 올리면 내게 생명력이 짙게 머물게 된다는 사실을.
의식이 끊어지던 순간, 생명 창조력을 올린 덕택에.
내 정신과 몸은 한계점까지 치닫지 않을 수 있었다.
생명 창조력이 깃들면서 내게 회복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