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되는 붉은 유성
이틀이 지난 늦은 밤, 고요해진 저택.
노르웨이로 가기로 한 날짜를 앞당겨서 이틀 후면 출국 날짜가 된다.
나는 저택의 로비에 섰다.
1층 로비는 커다란 창이 많다.
모두 방탄유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금속 유리로 바꿔야 안심이 될 것 같다.
타블렛 펜을 작동하여 3D 디스플레이를 활성화했다.
요즘은 그림 속도가 더 빨라져서 그림 작업 시간이 더 짧아졌다.
덕분에 여유롭게 저택을 방비하기 위한 많은 그림을 그려놓을 수 있었다.
이틀 사이 그려서 저장해둔 그림 중에서 저택의 창문 그림을 열었다.
창문 그림이 열리자 그것을 실물 전환했다.
그러자 저택 1층 창문 한 개가 금속 유리창으로 변하였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금속 유리창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자세히 눈여겨보니, 전보다 유리창이 조금 두꺼워진 게 보였다.
금속 유리는 이름 그대로 유리처럼 투명했다.
생김새가 유리와 같다.
언뜻 보면 이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아채기 힘들 정도.
하지만 명백히 금속 유리는 강철보다 강한 금속이었다.
유리처럼 깨지지 않는다.
금속 유리를 능가하는 강한 충격을 받았을 때 휘어지게 될 뿐.
나는 걸음을 옮겨 다른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다른 그림을 열어 그것 역시 실물 전환했다.
늦은 밤에 홀로 돌아다니며 창문을 전부 유리 금속으로 바꾼 다음, 저택 밖으로 나갔다.
정원을 밝히는 멋스러운 가로등이 빛을 내고 있다.
정원은 꽤 넓다.
정원에는 작은 분수도 있고 유럽풍 디자인의 정자도 있다.
텃밭으로 꾸며진 공간이 따로 있었으며, 곳곳에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다.
깔끔하게 꾸며진 정원 사이로 단단한 돌로 포장된 넓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은 정문에서 본관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또 주차장까지 포장되어 있어서 차가 오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나는 한밤중에 산책하듯 한동안 걸었다.
마침내 정문까지 이르자 그곳을 둘러보았다.
2미터 높이의 견고한 벽.
나는 3D 디스플레이를 다시 활성화해서 저장된 그림을 열었다.
2052년의 쉘터 방어벽에나 설치된 방어 시스템 그림이다.
적이 나타날 시, AI가 감지하여 레이저 빔을 출력하여 공격하는 시스템.
평상시엔 총구가 숨겨져 있다.
나는 그걸 실물 전환했다.
정문에 두 군데.
저택 측면과 뒤편에 두 군데씩.
그 모든 걸 실물 전환하고는 AI ‘수’에게 말을 걸었다.
3D 디스플레이에는 두 개의 AI 기능이 설치되어 있는데, 두 번째 것이 2023년도 ‘수’이다.
“수, 내가 저택을 비우는 동안 가족을 잘 지켜줘.”
내가 말하자 3D 디스플레이에 수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네, 알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선 지켜야 할 사람은 수호이고 루나야.”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수님의 부재 시 저택이 위험해질 경우 지하벙커로 그들을 피신시키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피치 못할 순간에 우선순위를 말한 거고. 너는 저택의 모든 사람을 보호할 의무가 있어.”
<네, 고수님. 초소형 드론 스무 대를 작동하여 은밀히 저택 주변을 정찰하는 일을 쉬지 않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수.”
* * *
내 짐은 별로 크지 않은 캐리어 가방 한 개뿐이다.
공항으로 출발하려고 저택의 주차장에 나왔다.
아우디에 올라타기 전, 나는 수호를 품에 안은 채 루나에게 말했다.
“루나야,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 다녀오는 동안 수호는 웬만하면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마.”
“알았어요, 오빠는 너무 걱정이 많아.”
그녀에게 수호를 안겨주고, 나는 아우디에 올라탔다.
강민철은 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오빠, 잘 다녀와요.”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는 차를 운전하여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공항으로 향하면서 진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전화를 곧바로 받았다.
<어, 고수야. 너 오늘 출국하냐?>
“응. 지금 공항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래. 올 때 선물 잊지 마.>
“놀러 가는 거 아냐.”
<갑자기 노르웨이는 왜 가는지 모르겠다. 페라리 광고 촬영 때, 이탈리아도 안 갔던 놈이.>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렇게 되었어.”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런데 페라리 본사에서 요청한 그림은 언제 되는 거냐?>
“그건 다녀와서 그릴게. 정확히 어떤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었지?”
<이놈, 정신없네. 전에 내가 말했던 건 어디로 흘려듣고. 이번에 페라리 본사에서 요청한 그림은 유화 그림이 아니야. 타블렛으로 그린 그림인데.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 자체가 필요한가 봐.>
“그래?”
<너 돌아오면 네가 그려야 할 자료 사진 보내줄게.>
“그래, 알았다.”
<너 유화 그림은 또 안 그리냐?>
“그것도 다녀와서 작업할게.”
나는 통화를 끝내고 운전에 집중했다.
내일이면 노르웨이에 도착할 듯싶다.
아포칼립스가 처음 시작할 지역으로 가는 거라서 조금 긴장이 된다.
무사히 다녀올 수 있겠지.
두려울 것 없다.
지금 내 재능 스탯은 붉은 유성을 제거하기에 충분할 테니.
아직 출국하기도 전인데, 벌써 루나와 아기가 보고 싶다.
* * *
이날 오후, 드디어 출국 수속을 마치고 전세기에 올라탔다.
우리가 탑승한 전세기는 좌석이 13석인 작은 항공기였으나 기내 시설과 서비스는 호텔 수준이었다.
좌석은 최고급 가죽 소파여서 안락하기 그지없다.
와인바도 있고 TV, 인터넷, 위성 전화 등이 갖추어져 있다.
편히 잠들 수 있는 침대와 같은 공간도 있었다.
고급스럽고 정갈한 기내식이 마련되어 있으며.
전세기 안에는 기장과 승무원 외에 정비사도 탑승했다.
그들이 머무는 공간은 나와 강민철이 머무는 공간과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전세기 이용하는데 드는 비용은 내가 결제했었다.
이윽고, 비행기가 이륙하자 나는 창밖에 눈길을 주었다.
사실, 이제껏 해외여행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대학 다닐 때는 학교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빠서 엄두를 못 냈었고.
졸업 후에는 먹고사느라 바빠서, 남들은 휴가처럼 다녀오는 해외여행을 다녀오질 못했었다.
내 직업은 프리랜서라서 불안정한 데다가, 일이 잘 풀리는 편도 아니어서.
늘 수입이 넉넉하지 않은 편이었다.
거기다 부모님에게 돈을 얼마씩 보내드려야 했던 상황.
원룸 월세 내고 생활비를 쓰고 나면 저축하기도 어려웠다.
해외여행은 이 나이가 되도록 가보질 못했었다.
제주도에 다녀온 게 전부.
그런 나였기에, 땅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광경을 창밖으로 신기한 듯 내다보았다.
강민철은 말없이 있다가 말을 꺼냈다.
“얼마 전만 해도, 화가님과 전세기로 유럽에 가리라고 상상도 못 했었는데. 앞일은 정말 모르는 일 같습니다.”
나는 미미하게 미소지었다.
“앞일은 정말 모르는 일이죠. 그 말에 동의합니다.”
“노르웨이까지 비행시간이 13시간이 넘는다고 하니. 눈 좀 붙이세요.”
“전 그려야 할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이요?”
그가 묻자 나는 타블렛 펜을 꺼내 3D 디스플레이를 켰다.
AI 기능을 활성화한 후에, 입을 열었다.
“수, 디스플레이를 5분 동안만 타인에게도 보이게 해줘.”
<네, 알겠습니다.>
내 눈에만 보이던 3D 디스플레이.
그것의 바탕 화면 색이 미미하게 변화하자 강민철의 눈에도 보이는지.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이게 뭡니까?”
“제가 그림을 그리는 도구입니다. 미래형 타블렛이라고 해두죠.”
“아. 정말 신기하군요. 이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게 할 수도 있나 봅니다.”
“네. 아무래도 이런 미래 기술은 일반인들에게는 드러나선 안 되니까요.”
“미래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화가님, 지금 어떤 그림을 그리려고 하십니까?”
“붉은 유성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강 회장님은 쉬십시오.”
“예.”
나는 타블렛 디스플레이에 초소형 드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유하준에게 부탁해놓았었던 초소형 드론.
미래형 카메라가 달려서 먼 곳에서도 초고화질 촬영이 가능했다.
그 드론을 직접 노르웨이까지 가져오기가 어려워서, 유하준이 만들어놓은 모델 그대로 그림으로 그리는 거다.
이내, 내가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내 시야와 집중력이 닿는 것만으로도.
타블렛 창에 그림이 빠르게 그려졌다.
36배속으로 그려지는 그림.
노르웨이에 도착하기 전까지, 드론과 푸른 불새를 최대한 많이 그려놓을 생각이다.
그렇게 한동안 드론과 불새를 꽤 그려놓은 나.
피로해져서 어느새 잠들었다.
내가 살던 대한민국 땅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수천 미터 떨어진 상공에서 이렇듯 잠드는 건 난생처음이다.
지금 이 길이 마음 편히 가족과 여행가는 길이었다면 좋을 텐데.
이다음에 모든 일이 해결되고.
아포칼립스 위협이 사라진 그때가 되면...
가족끼리 전세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한 번 와야지.
잠들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비행한 지 12시간이 넘었을 즈음.
갑자기 기체가 크게 흔들렸다.
“꺄악!”
날카로운 비명에 나는 퍼뜩 눈을 떴다.
강민철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는지 내게 말했다.
“화가님, 무슨 일이 있나 봅니다.”
그때 기장실에서 나온 승무원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비행기가 추락합니다. 산소 마스크를...”
그녀는 그렇게 말하다가 우리 앞에서 피 흘리며 쓰러졌다.
그 순간, 비행기는 크게 기울더니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강민철은 좌석 위에서 튀어나온 산소마스크를 썼으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민철이 만류하듯 외쳤다.
“화가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장실로 갔다.
중심 잡기가 어려웠다.
도중에 구를 뻔하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중심 잡으며 기장실에 이르렀다.
기장실을 본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기장들과 정비사까지 다들 피 흘리며 쓰러져 있고.
바닥엔 붉은 피가 흥건하다.
그곳에 낯선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중인데도 조금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창백한 피부에 잿빛 머리카락, 유럽인으로 보이는 외모.
멸망의 별이나 붉은 유성이라기엔, 외모가 그다지 흉측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 같은 외모다.
조그만 나이프가 들린 그의 오른손에서 붉은 피가 뚝뚝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나를 보더니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동자 색은 회색이다.
“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어. 애플 수. 기다리고 있었다.”
소름 돋는 목소리.
일전에 2052년도에서 들었던 멸망의 별 목소리와 흡사했다.
이런 참혹한 광경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서는 처음 본다.
내가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자 그는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넌 끝이다. 인간은 여기서 살아나갈 방도가 없지. 이 비행기는 어느 민가로 추락하게 될걸.”
“......”
“큭큭. 너 때문에 죽는 사람이 상당하겠어. 난 이제 네 아들놈의 숨통을 끊으러 갈 거야. 너희 부자가 앞으로 내 계획을 방해할 거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내가 절망적인 표정을 짓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뜻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에게 대꾸했다.
“끝장날 것은 너야.”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넌 멸망의 별은 아닌 것 같고. 붉은 유성인가? 붉은 유성도 인간형으로 이렇게 나타날 수 있었나?”
“붉은 유성... 그래, 넌 붉은 유성을 파괴할 목적이었지. 하지만 나는 붉은 유성이 아니야.”
“......”
“나는 멸망의 시작이며 또 다른 창조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는 이 별을 다른 세상으로 바꿀 거다”
나는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뭐가 그리 거창해? 이제 보니 넌 그냥 아포칼립스 원흉이었구만. 하지만 넌 이제 내게 잡혔어.”
“뭐?”
내 말에 그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의아함이 그의 눈동자에 물들려던 찰나.
나는 시간 능력을 발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