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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101화 (101/153)

멸망의 별

나는 새벽 5시 즈음, 간단한 간식거리를 들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은 그림 작업할 때 에너지 소모가 어마어마해서 잘 먹어줘야 한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저택 안은 고요했다.

다들 잠들어 있다.

수호가 도중에 깨서 울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고요할 터.

3D 디스플레이를 활성화해서 유하준이 보낸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가 설계해서 이미지화한 그림.

키가 난쟁이처럼 작은 인간형 로봇이다.

그 그림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이게 과연 저택을 말끔히 청소해낼 만큼 성능이 좋을까 싶다.

생긴 건, 키가 작아서 그런지 귀여울 듯한데.

이미지는 단순한 형태의 그림이다.

이걸 가지고 나는 실물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일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31배속으로 그려지는 거라 단숨에 스케치가 끝났고 채색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날이 어슴푸레하게 여명이 밝아올 무렵, 그림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 그림을 곧바로 실물 전환했다.

이젠 창조력 수치가 제법 높아져서 미래형 로봇 한 대를 실물 전환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이내, 그림이 사라지고 내 앞에 청소 로봇 한 대가 나타났다.

자그만 리모컨으로 작동 스위치를 누르면, 쉘터를 통제하고 있는 2023년도의 AI 2050이 청소 로봇을 제어하게 될 것이었다.

유하준은 이 청소 로봇을 설계할 때 AI 2050과 대화할 수 있는 기능도 집어넣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로봇이 청소 작업을 하지 않을 때면, AI와 대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거다.

이게 정말 작동될까?

유하준이 제작 예정인 물건을 이미지화한 것뿐인데.

나는 로봇에게 말을 걸었다.

“2050?”

“네, 고수님.”

되네. 신기하군.

“청소 가능해?”

“네, 가능합니다. 어느 곳을 청소할까요?”

“지금은 청소할 필요 없어. 다들 자니까 조용해야 하거든.”

“그렇군요.”

2023년도의 2050은 나와 유하준의 명령을 듣는다고 했었다.

미래의 2050과 다른 것이다.

현재와 미래의 AI를 구별할 필요가 있으니, 이름을 다르게 지어주어야겠다.

“2050. 넌 이제부터 ‘수’라고 부를게. 너의 이름은 ‘수’다.”

“네, 알겠습니다.”

“너에게 주의사항 일러줄게. 2052년의 일과 아포칼립스에 관한 내용은 유하준 박사와 정테이, 강민철 외에는 결코 누구에게도 누설해서 안 돼.”

“네.”

“그리고 네가 이 집에서 지켜야 할 사람은 가족 전부지만. 우선해서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 그리고 수호, 루나야.”

“네, 알겠습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 로봇을 루나에게 보여주면 좋아할 듯하다.

유하준에게 정원관리 로봇도 부탁해야지.

* * *

‘재능과 능력의 주인’.

현재 스탯은 ‘32’.

이 능력이 전보다 업그레이드되어서 타인에게 또 하나의 능력을 일깨워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스탯이 ‘36’이 된다면, 일깨워줄 수 있는 능력이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

나는 수호가 잠들어 있는 침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한차례 울다가 우유 먹고 방금 잠든 수호.

이 아이에게 능력을 준다면 ‘리더 통솔력’이 나타날 거다.

수호에게 있는 실물 전환 능력.

그 능력은 그에게 잠재된 능력을 일깨운 게 아니라, 내 능력을 주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일 테다.

어쩌면 ‘재능과 능력의 주인’ 능력도 주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 덕에 수호는 2021년도를 살아가는 내게 능력을 일깨워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잠든 아이를 보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수호는 굳이 아포칼립스가 아니더라도 리더 자질 만큼은 타고났던 모양.

아포칼립스가 오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

아바타 접속을 해서 처음으로 수호의 모습을 봤던 게 떠오른다.

쉘터민들에게 리더로서 목소리를 내던 그의 모습.

그때 나는 좌중을 압도하는 수호의 장악력에 감탄을 했었다.

아마도 통솔력 능력이 업그레이드 되어서 그와 같은 장악력도 나왔었나 보다.

그 탓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수호에게 이끌리고 통제를 받았던 거겠지만.

수호에게 자신의 몸을 지킬 만한 전투적인 능력도 나타나면 좋겠다.

수호의 능력을 일깨우는 것에 대해선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다.

나는 조용히 침실을 나와 저택의 본관을 나왔다.

산책하듯 조금 걸어서 올차드 저택 내부에 있는 미라클 쉘터스 한국지부 건물로 향했다.

그곳 안에 유하준의 연구실이 있다.

나는 유하준의 재능을 일깨워줄 생각으로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수호가 겪은 시간에선 내가 유하준의 능력을 열어주었었으니.

이번에도 그의 능력을 일깨워주는 게 맞다.

어차피 그의 재능도 현재 시점에서 필요하다.

내게 있는 ‘재능과 능력의 주인’.

이 능력의 좋은 점은...

타인에게 능력을 일깨워줄 수도 있었지만 거둘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능력 명칭에 ‘주인’이라는 말이 붙은 것일 테다.

만일 능력을 각성하게 된다면, 그에게는 ‘기계 공학 기술’이라는 재능이 나타날 터.

지금도 그는 천재긴 하지만.

능력 업그레이드가 된다면, 그의 천재성은 독보적으로 진화하겠지.

나는 유하준을 마주 보다가 일상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유 박사님, 연구는 잘 되어가십니까?”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습니다.”

“처형과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결혼식은 어디서 하실지 정하셨어요?”

“괜찮다면 올차드 저택의 정원에서 하고 싶습니다. 그냥 가족끼리 모여서 소소하게요.”

“처형도 그러길 원해요?”

“네. 제가 먼저 제안하긴 했었지만 한나도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그렇군요. 저택 정원에서 결혼식 올리는 거, 두 사람이 좋다면 저는 찬성입니다.”

유하준은 순박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고맙습니다, 고수 씨.”

나는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유 박사님은 이미 기계 공학과 물리 분야에서 천재셨지만 앞으로 더 탁월해지실 겁니다.”

“하하, 천재라니요. 사실 전 미래 기술과 고수 씨의 지원이 없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나는 ‘재능과 능력의 주인’ 능력을 발동하여 유하준의 능력이 나타나게 했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입술만 달싹여서 중얼거렸다.

“기계 공학 기술.”

내 눈앞에 유하준의 재능 스탯이 홀연히 나타났다.

『기계 공학자 1레벨

기계 공학 기술 : 1

코인 : 1535627.』

그의 스탯을 바라본 내 눈매가 가늘게 떠졌다.

유하준의 코인도 제법 된다.

아포칼립스가 나타난 후, 2026년도와 2027년도에 큰 활약을 했던 탓일 거다.

그가 만든 물건이 큰 도움이 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으니.

잘된 일이다.

그런데 내가 그의 스탯에 관여하는 것도 가능하려나?

가능하다면, 굳이 그에게 능력 각성에 관해 얘기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마침 유하준은 내게 맛있는 커피를 준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 틈을 타서, 그의 스탯을 올렸다.

오! 된다.

다행히, 그의 스탯에 내가 관여할 수가 있다.

나는 그의 코인으로 연달아 스탯을 올렸다.

『기계 공학자 18레벨

기계 공학 기술 : 18

코인 : 1406072.』

스탯은 이 정도만 되어도 그의 재능은 탁월해지겠지.

유하준은 직접 내린 커피를 나에게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향이 좋군요. 잘 마시겠습니다, 박사님.”

나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그가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 *

나는 서재에서 2050이 보내온 영상 파일을 열었다.

내 앞에 있는 3D 디스플레이를 크게 확대해서 영상을 보았다.

드론이 촬영한 영상이다.

언뜻 붉은 기가 남아 있는 흐릿한 하늘.

그래도 스모그 같은 게 없어서 잿빛 하늘은 아니다.

과연, 날이 좋을 땐 푸른 하늘이 보일 듯하다.

좋아진 하늘 풍경을 보니,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동안 미래의 한반도가 겪었던 고생과 고통과 비극을 알고 있던 나라서.

괜히 뭉클해지고 울컥하는 감정도 들었다.

위이잉-

드론이 비행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며 아래 풍경도 보였다.

군데군데 짙은 초록빛이 보이는 모습.

겨울이라 초록빛 식물은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다.

기괴하게 변형된 식물은 거의 보이지 않다.

혹여 그런 것들이 자랄지라도 사람들이 그때마다 제거했던 모양이다.

한반도 통일시 주변으로 작은 도시와 마을이 생겨나 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이나 도로에 지나는 차를 보면, 제법 인구수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조금 더 멀리 나아가면 파괴된 도시 풍경이 여전히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전처럼 그곳은 파괴된 정도가 심각해 보이진 않았고.

비어있는 건물 사이로 나무가 크게 자라나 있을 뿐이다.

띠리리링-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강민철이다.

나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네, 강 회장님.”

<화가님, 오늘 새벽에 관측된 게 있는데요.>

“네.”

<붉은 유성이 전보다 더 커진 듯합니다. 날짜를 미룰수록 안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북부 노르웨이에 회색 스모그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번엔 더 짙고 영역이 넓습니다.>

“음, 그렇군요.”

내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전에 화가님이 말씀하신 부분 말입니다.>

“네.”

<노르웨이에 화가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역시 동행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 그렇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노르웨이로 가는 일정은 이대로 좋을까요?>

“아뇨. 가능하다면 조금만 더 앞으로 날짜를 당겼으면 좋겠네요.”

<음, 예. 가능한지 한 번 보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나는 핸드폰 통화를 끝내고서 보고 있던 영상도 껐다.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서자 서재 밖에서 루나와 한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서재 밖으로 나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가니.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점차 커졌다.

“어머, 진짜 똑똑해. 걸레질까지 네가 알아서 다 한단 말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청소하는 로봇을 보고 있는 중인가 보다.

한나와 루나에게 로봇의 이름은 ‘수’라고 알려줬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저택 실내 오염도를 정밀하게 측정하여 청소를 시행합니다.”

“대단해. 우린 이제 청소 걱정은 필요 없는 거네.”

“저는 고수님의 가족이 잠들어 있거나 식사 중이거나 특별히 방해될 만한 시간을 제외한, 가장 적합한 시간을 스스로 찾아내어 청소할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고마워. 앗! 우리, 수호가 깨어났어!”

루나는 수호의 울음소리를 민감하게 포착하고는 침실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한나는 다가온 내게 시선을 주더니 말을 꺼냈다.

“역시 엄마인가 봐요. 나는 수호의 울음소리를 못 들었는데. 루나에겐 들리나 봐요. 루나가 저렇게 변하다니.”

“그러게요. 근데 처형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부탁이요? 무슨.”

“조만간 며칠, 제가 저택을 비우게 될 것 같아요. 루나와 수호를 잘 살펴주세요.”

“아, 어디 멀리 가요?”

“네. 그림 문제 때문에 잠시 유럽에 다녀와야 합니다.”

“그렇구나. 부럽네요. 유럽도 가고. 알았어요. 루나와 수호는 걱정 마요.”

한나는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 * *

수호는 패러마운트 머로더를 타고서 쉘터 밖을 나왔다.

오늘도 도시로 향하는 길이다.

페라리를 타고 가려다가 루나가 위험하다고 부득불 만류해서 그 차로 바꿔 타고 나왔던 터다.

아침엔 조금 흐리다가 그새 날씨가 좋아져서 지금은 푸른빛의 하늘이 보였다.

수호는 차창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게 갠 푸른 하늘.

이런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호는 문득 고수를 떠올렸다.

그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를 만나면 이런저런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많았는데.

아버지가 없던 나날을 견디면서 어떤 심정이었는지도 말하고 싶었는데.

그는 고수에게 딱딱하기만 했었고 심지어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았었다.

그래. 다음에 대화하게 되면 좀 더...

쾅!

끼이이이익-

그가 탄 차량에 갑작스레 커다란 충격이 가해져서 차를 멈추었다.

수호는 앞을 응시하다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튼튼하기로 이름난 이 차의 앞부분이 크게 일그러진 게 보였다.

그리고 차량 앞부분에 올라탄 어떤 존재가 보였다.

흉측한 잿빛 피부에 핏빛 눈동자를 지닌 여자다.

부우우웅!

수호는 황급히 차창을 닫고 뒤로 후진을 했다.

거칠게 좌우로 움직이며 차의 앞에 매달린 자를 떨어뜨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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