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리는 미래 3
수호가 빠른 어조로 외쳤다.
“비행선을 일시 퇴각한다.”
“비행선의 비행 모드를 한반도 방향으로 전환하겠습니다.”
2050이 답하는 음성을 들으며 나는 비행선이 금속 유리창 밖, 저 멀리 보이는 멸망의 별에 시선을 주었다.
기괴한 멸망의 별.
그것은 곳곳에 작은 금이 쩍쩍 갈라진 모습으로 변해 있다.
공중 괴수들의 공격은 잠시 주춤한 상태였고.
비행선은 그사이 뒤로 물러났다.
괴수가 비행선을 쫓을 때면 미사일을 발사해서 그것들을 저지했다.
적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을 무렵, 수호가 내게 말했다.
“잠시 아바타 접속을 끝내고 2023년도에서 멸망의 별 그림을 그려주십시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바타 접속을 너무 오래 하면 내 몸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배려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아바타 접속을 다시 했었으나 멸망의 별을 파괴하진 못했다.
다만 규슈지방의 영역 하나를 쓸어버릴 수는 있었다.
파괴되어가는 멸망의 별 그림으로 수호는 두 차례 실물 전환을 했었고.
그래서 멸망의 별은 반쯤 갈라진 모습으로 공중에 떠 있게 되었다.
별의 기운이 쇠락한 탓에, 별 표면에 있던 기괴한 사람 얼굴 형상은 사라졌다.
규슈지방의 괴수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다소 하락했었다.
덕분에 조금 수월해진 전투를 벌였고.
수호는 내가 이전에 그려주었었던 불새 그림으로 불새 두 마리를 추가로 실물 전환해서 탑을 제거하기도 했다.
2051년도에서 벌어진 규슈 전투를 끝내고 2023년도의 현실로 돌아오니.
이미 시간은 자정이 넘었다.
보상이 들어온 게 있어서 나는 재능 스탯을 확인했다.
『명화 작가 41레벨
명화 시간의 고리 : 23
기교의 주인 : 23
실행 창조력 : 15
그랜드 코인 : 10461.』
그리고 지하벙커를 나와 주차장을 통해 저택 본관으로 걸어갔다.
1층 로비에서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린 것이 보인다.
나는 정원으로 나갔다.
뽀득뽀득.
정원에 하얗게 눈이 쌓여서 내가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득 소리가 난다.
정원에 켜진 가로등.
그 아래로 고즈넉한 겨울 정원이 온통 새하얗게 변한 것이 보였다.
나는 저택 건물과 정원을 둘러보았다.
이곳 저택이 내 집이며 소유라는 게 새삼 믿기지 않는다.
얼마 전만 해도 원룸 살던 나였는데.
이젠 결혼도 하고 아들이 있으며 저택까지 소유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정원을 거닐었다.
그러다 정원의 정자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 있는 루나가 보였다.
그녀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루나는 옅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오빠 기다릴 겸 정원을 보고 있었어요. 눈이 하얗게 쌓여서 정원이 참 예뻐요.”
“시간이 늦었는데 안 졸려?”
“실은 잠이 안 와요. 전 아직도 이 집에서 살게 되었다는 게 안 믿겨요. 실감도 안 나요.”
“나도 그래.”
내가 답하자 그녀는 싱긋 웃었다.
“수호는?”
“언니가 데리고 있어요. 지금 아마도 자겠죠? 언니는 수호가 많이 예쁜가 봐요. 저보다 더 예뻐하는 것 같아요.”
“응. 그런 것 같아.”
“근데 오빠, 이 집 너무 넓어요. 청소를 어떻게 할지 깜깜해요.”
“청소하는 로봇, 하나 둘까?”
“로봇청소기요? 실은 오빠에게 이실직고할 게 있어요.”
“그게 뭔데?”
“저택 2층에서 로봇청소기를 돌렸었거든요.”
“근데?”
“근데 너무 넓어서 그런지 로봇청소기가 무작정 가더니 계단에서 떨어져서 고장 나고 말았어요.”
“저런.”
“로봇청소기로 저택을 청소하는 것도 무리인 것 같아요.”
“내가 말한 건 인공지능 로봇을 말한 거야. 너도 알잖아. 유 박사님이 이것저것 신기한 기계를 곧잘 만드는 거. 그건 계단으로 돌진해서 떨어질 위험은 없을걸.”
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일어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나야, 그만 들어가자.”
그러자 루나는 내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이제 2023년도 1월이 된 거다.
늦은 오후, 나는 침실에 와서 아기 침대에 누운 수호를 내려다봤다.
이제 태어난 지 며칠 된 아기.
아기를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수호야, 넌 아포칼립스로 인해 겪었던 모든 일들 악몽으로만 기억하게 될 거야. 너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아무 걱정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는 거지.”
나는 잠든 아이의 이마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악몽으로 남은 기억이 널 힘들게 하겠지만 괜찮아. 흉터로 남은 악몽을 덮을 만큼, 너에게 빛나는 기억이 덧칠해질 테니까.”
그러다 문득, 2021년도 크리스마스이브 날이 떠올랐다.
한나 집에 초대받아서 가기 전, 나는 미래의 쉘터민들이 크리스마스를 누릴 수 있도록 크리스마스 만찬 식탁을 그림으로 그려서 수호에게 주었었다.
그때 그냥 넘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2022년도 크리스마스이브.
이날 수호가 태어나는 때라 정신이 없었고.
다만, 그다음 날에 짬을 내서 커다란 케이크를 그림으로 그려 수호에게 주었었다.
그때 했던 까톡 대화를 다시 들여다봤다.
-고수 : 생일 축하한다.
- 2050 : 생일이요? 누구의 생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고수 : 네 생일이지 누구겠어. 암튼 축하한다. 하루 늦었지만.
- 2050 :
- 고수 : 수호야, 2022년도인 여긴... 어제 네가 태어났어.
그때까지 수호는 자신이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났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까톡 내용에서 시선을 떼고 재능 스탯을 확인했다.
『창조 능력자 41레벨
시간의 고리 : 27
재능의 주인 : 27
실행 창조력 : 19
그랜드 코인 : 30461.』
재능 명칭이 달라져 있다.
‘명화 작가’라는 명칭은 ‘창조 능력자’로 바뀌어 있다.
‘기교의 주인’은 재능의 주인으로 변하였다.
보상이 대거 들어왔던 탓이다.
규슈 전투가 있었던 그다음 날에 다시 한번 아바타 접속을 했었고.
마침내 2051년도에서 두 번째로 멸망의 별을 파괴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재능 스탯이 이렇게 바뀌어 있다.
이번에도 스탯이 열두 번이나 올랐고 그랜드 코인이 제법 채워졌다.
실행 창조력이 19.
이 정도면 블랙카드 19레벨 때 그렸던 사과나무를 실물 전환할 정도의 수준으로 오른 것 같다.
재능의 주인.
이 능력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한 사람의 재능을 일깨워줄 수 있다.
나는 재능 스탯을 보다가 창조력을 올렸다.
업그레이드에 16224 그랜드 코인이 소모되었다.
『창조 능력자 42레벨
시간의 고리 : 27
재능의 주인 : 27
실행 창조력 : 20
그랜드 코인 : 14237.』
이제 실행 창조력이 20.
붉은 유성을 파괴하려면 조금 더 오르면 좋겠건만.
우우우웅, 우우우웅-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진구 전화다.
나는 조용히 침실을 나오면서 전화를 받았다.
“어, 진구야.”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 오늘 저녁 7시에, 우리 집에서 집들이하기로 한 거 알고 있지? 친구들 죄다 올 거야.>
“오후에 강 회장님 만나기로 했으니까. 나온 김에 잠시 들를게.”
<강 회장님 뵙기로 했어? 그러잖아도 강 회장님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었는데. 전세기 사용은 1월 20일로 잡았거든. 자세한 건 네가 집에 오면 얘기할게.>
“그래, 알았어.”
<아! 그리고 페라리 측에서 연락이 왔는데. 광고 계약 기간 연장할지 묻던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답했다.
“광고 제작할 때 내가 등장하지 않고 그림만 제공해도 되는지 물어봐 줘. 그런 조건이면 광고 계약 연장해도 상관없다고 답해주고.”
<그림만 제공? 한 번 협의해볼게.>
진구와의 통화를 끝내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외투를 꺼냈다.
그러고는 저택의 주차장으로 나와 걸어가면서 유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구실에 있던 그가 금방 전화를 받았다.
<네, 유하준입니다.>
“박사님, 제가 부탁드렸던 청소 로봇 이미지는 언제쯤 완성될까요?”
<모레쯤에 완성될 것 같네요. 완성되면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 * *
잠시 후, 나는 회장실에 와서 강민철과 마주 앉았다.
내가 강민철을 만난 건, 이유가 있었다.
강민철의 재능을 일깨우면 어떤 능력이 나타날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아니지만.
나는 ‘재능의 주인’ 능력으로 누군가의 재능을 일깨우면 어떤 식으로 능력이 나타날지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강민철의 눈을 직시했다.
그가 하는 사업이 날씨 관측, 천제 관측이라서 그런 걸까.
강민철, 그에게 IT 기술 개발 능력과 ‘감시의 눈’이라는 능력이 나타나게 될 터다.
그래서 나는 강민철을 선택했다.
유하준의 재능을 일깨워줄까 하다가, 지금 당장 필요한 능력은 ‘감시의 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강민철의 능력이 열리면, 이후 2051년도의 미래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를 보며 입을 뗐다.
“강 회장님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던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 그림 재능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여겼던 적 없으십니까?”
“화가님의 재능이요? 이상하다기보단 기이하고 경이롭다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화가님의 작업 속도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를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를 여니 그 안에 12색 짤막한 색연필이 들어있다.
휴대용 색연필을 미리 챙겨온 것이다.
“제 능력은 이전보다 더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손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하죠.”
“네?”
“이 종이를 보세요.”
나는 색연필을 테이블 위에 놓기만 하고 손으로 잡지는 않았다.
다만 종이를 응시하고 그림을 그리려 시도했다.
하얀 접시에 담긴 마카롱 쿠키를 그릴 생각이다.
종이에 점멸하는 빛의 점이 나타나더니 이윽고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빠르게 스케치가 되었다가, 이내 채색이 저절로 되어갔다.
그림 작업 속도는 27배속 빠르기였으니, 그림은 빠르게 완성되어 갈 수밖에 없다.
강민철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아니, 그림이?”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몇 분 안 되어서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냥 봐도 먹음직스러운 마카롱 그림이다.
“그림이 저절로 그려지는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강민철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조금 흥분한 태도를 보였다.
“색연필도 자세히 살펴보시죠. 조금 닳아져 있을 겁니다.”
그는 몽톡해진 색연필을 확인해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마술입니까? 속임수?”
“제가 이런 걸 굳이 보여드리는 이유는, 제 그림 재능은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려는 겁니다. 방금 강 회장님이 보신 건 속임수가 아니라는 걸, 더 확연히 보여드리죠.”
나는 마카롱 그림을 실물 전환했다.
그러자 종이에 있던 그림이 사라지고, 대신 테이블 위에 마카롱 쿠키가 담긴 접시가 나타났다.
“어?”
나는 눈이 동그랗게 떠진 강민철을 보며 짙게 미소지었다.
“먹어보세요. 맛이 어떤지.”
강민철은 노란색 마카롱 하나를 집어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었다.
생각보다 쿠키 맛이 좋았는지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나도 마카롱 쿠키를 하나 집어서 맛을 보았다.
역시, 맛이 괜찮다.
기교 능력과 창조력 능력이 좋아서 실물 전환 결과도 좋게 나타나는 것일 테다.
“화가님, 이게 어찌 된 겁니까? 그림으로 쿠키를 만들다니. 제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죠?”
“꿈이 아닙니다. 강 회장님이 방금 보신 건 아포칼립스를 막기 위해 내게 주어진 능력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능력은 강 회장님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하면서, 오늘 내 행동이 미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