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차드 저택
갑작스러운 정적이 모든 곳에 드리워졌다.
일반적인 고요함이 아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이 갑자기 멈추고 일시에 사라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대한 세계에 나 홀로 선 것 같은 그런 기분.
정말로 시간이 멈춰 버렸다.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움직이고 있는 거다.
병원 내부의 소음들이 다 사라졌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발현된 내 능력이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누가 일러주지 않았는데도 내 능력에 대해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신기하다.
멈춘 시간은 3초 후면 다시 흐르게 될 터.
그러니 지체할 여유가 없다.
나는 수호에게로 달려가던 그 기세로 신생아실로 뛰어들어갔다.
회색 오라의 남자, 자세히 봐야 옅은 오라가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내 아이에게 주사를 놓으려던 놈!
그가 쥔 주사를 빼앗고,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끌고 나와 패대기를 쳤다.
나는 흥분하고 분노한 상태라서, 그를 몇 대 두들겼다.
복도 바닥에 쓰러져서 남자는 시간이 멈춘 상태라서 미동도 없이 속절없이 얻어맞아야만 했다.
위잉-
그 순간, 다가온 초소형 드론.
치지지직-
드론이 쓰러진 남자에게 전기 충격을 주었다.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전기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러자 그 남자에게서 회색 오라가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잠시 멈췄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위잉-
드론이 멀리 사라지는 걸 보며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 2050 : 방금 회색 오라가 사라졌습니다. 그를 조종하던 힘이 풀린 것 같습니다.
“으으.”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사라졌던 주변 소음이 다시 들려왔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그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아, 예.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여긴 어디...”
“G 병원입니다.”
“네?”
“여긴 신생아실 앞이고요. 의사분이셨던 것 같은데. 방금 이 주사기를 든 채로 쓰러져 있었어요.”
“네?”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내게 얻어맞았던 곳이 아픈지, 아야야 소리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신생아실에서 간호사가 나와 남자에게 소리쳤다.
“이 사람 언제 나왔지? 누구신데 여기 들어왔던 거죠? 조금 전에 뭐 하려고 했던 거예요?”
나는 간호사에게 주사기를 보이며 말했다.
“여기 이 분, 이 주사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 여기 넘어지셨다가 이걸 떨어뜨리셨더군요.”
그때 다른 간호사가 나와 동그래진 눈으로 외쳤다.
“어머, 맞아요. 아까 이 사람이 아기에게 주사를 놓으려 했어요!”
남자는 당황했다.
“어? 제가요? 언제요? 전 제가 여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나는 쓴 표정을 지었다.
아포칼립스 원흉에게 조종당하는 동안, 그 사람은 아무런 기억을 못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했던 행동 탓에,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건 어쩔 수가 없을 터다.
결국, 그 남자는 간호사의 신고로 경찰에 끌려가야 했다.
나중에 들어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다른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였고.
그가 내 아이에게 놓으셨던 주사는 극약 성분이 든 약물이라고 했다.
그가 어쩌다 조종을 받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별 탈 없이 위기를 넘겨서 다행이었다.
1인 입원실에 있던 루나.
나의 강력한 요청으로 신생아인 수호는 그곳으로 옮겨졌다.
나는 그곳에서 잠시 루나와 대화를 했다.
루나는 신생아실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던 터라 안색이 창백해 있다.
“루나야, 너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내일 여기 퇴원하면 산후조리원보다는 집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집이요? 수호는.”
“수호랑 같이. 수호와 네 안전 때문에 여기 있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또 이런 일이 있을 것 같고.”
또 이런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말에 루나는 조금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시선이 잠든 수호에게로 향했다가 내 얼굴로 옮겨졌다.
“집이라면...”
“있잖아. 가장 안전하고 견고하고 따뜻한 집.”
내가 옅게 웃으며 말하자 루나의 얼굴에도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네. 거기 가요. 근데 거긴 아직 제대로 못 꾸몄는데.”
“그래도 대강은 준비해뒀잖아. 부모님 침실과 처형이 쓸 침실까지 전부 꾸며놓고선.”
“흫, 그러네요. 하지만 완벽하게 꾸며놓고 가고 싶었어요.”
“우선 그 집에서 지내는 동안 차츰 꾸며 보자. 이전 집을 내놓는 건, 진구에게 부탁했었거든.”
루나는 비로소 이전처럼 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네, 오빠.”
* * *
수호는 쉘터의 지휘관 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기계적인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다.
“수호님, 고수님이 보낸 까톡 메시지가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볼게.”
그가 답하자 3D 디스플레이가 켜지며 까톡 창이 나타났다.
수호는 화면에 눈길을 주었다.
- 고수 : 수호야, 2022년도인 여긴... 어제 네가 태어났어.
- 고수 : 병실에 엄마와 네가 있는 모습 찍었는데, 보내줄게. 그리고 영상도.
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디스플레이가 있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손으로 터치해서 고수가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
첫 번째 사진은 루나였다.
화장기가 없고 약간 부은 모습.
그래도 여전히 소녀처럼 예쁜 그녀였다.
23살의 어머니 모습을 사진으로 보는 수호의 표정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은 그에게 낯설기만 한 어머니 모습이기에.
수호는 두 번째 사진도 열어보았다.
이제 태어난 지 하루가 된 그의 사진이었다.
잠들어 있는 그를 루나가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사진은 고수가 찍었을 것이었다.
수호는 자신의 사진을 보면서도 별다른 표정이 없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오래도록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수는 그에게 영상도 첨부했다.
영상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신생아실에서 작은 아기를 안고 있는 고수의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가 고수를 찍어주고 있었다.
고수가 감동한 얼굴로 아기를 보다가 눈가가 촉촉해지자, 한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수호는 영상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라서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이젠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
실은 전부터 그러했었다.
오히려, 아포칼립스가 닥친 후 고수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고수에게 좀 더 친밀한 태도를 보이지 못했던 건, 그의 성격 탓.
어릴 때부터 고통의 칼날 같은 세월을 지나왔던 그였다.
그 탓에 메마르게 되어버린 삶은 그의 성품으로 굳어져 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그는...
요즘처럼 살 만했던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마음의 옷깃을 꽁꽁 여밀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숨이 쉬어졌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더는 들지 않았다.
수호는 고수에게 톡 메시지를 작성했다.
- 2050 : 고맙습니다. 조금 전에 준에게서 보고를 들었었습니다.
- 고수 : 그랬어? 아까는 정말 아찔했어. 널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야.
수호는 고수에게 뭔가를 더 적으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그만두었다.
* * *
그다음 날에 루나는 퇴원을 했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산후조리원으로 갔었겠지만.
병원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 터라, 우리는 올차드 저택으로 곧바로 향했다.
나는 아우디에 루나와 아기 수호를 태우고 운전하는 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제저녁, 2051년의 수호에게 물었었다.
- 고수 : 수호야, 아포칼립스 원흉에 관해 아는 바 없어?
- 2050 : 명확하게 아는 바는 없습니다. 원흉을 목격한 자에 의한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잿빛 머리 색을 한 유럽인이라고 하더군요. 혹은 붉은 눈을 한 적발이라고도 하고 흑발이라고도 들었습니다.
- 고수 : 흠, 그래?
- 2050 : 그 외에, 그는 온 세계의 괴수를 통제하며 다스리는데. 멸망의 별은 힘의 원천이라고도 들었습니다.
- 고수 : 그가 사람을 조종하기도 한다면, 조종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은 뭘까?
- 2050 : 아마도 정신이 약한 사람이 쉽게 조종당할 겁니다. 누군가를 조종하여 해치고자 하는 상대가 있다면, 그 존재는 전혀 무관한 사람을 택하여 조종하려 들 겁니다. 왜냐면, 조종당하는 대상의 의식이 저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루나와 어린 수호를 보호하기 위해선, 낯선 이들이 가득한 장소보다 가족이 있는 집이 나은 듯했다.
뒷좌석에 앉은 루나가 수호를 안은 채 계속 종알거렸다.
“수호야, 드디어 우리 집 가는 길이야. 멋지지? 여긴 공기도 맑고 조용할 거야. 꿈이란 건,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며 늘 생각하면 이루어지게 되나 봐. 어릴 때부터 매일 생각해왔던 일이 정말로 이루어졌어. 수호야, 넌 내게 기적의 결실이야.”
나는 그런 루나를 룸미러로 힐끗 보며 피식했다.
“루나야, 거의 다 왔어. 저기 앞에 저택이 보인다.”
루나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와아!”
건물이 완공된 모습을 이미 본 적이 있는 그녀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감탄했다.
저만치 4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저택이 보였다.
올차드 본관, 별관, 주차장이 있는 부속 건물, 그 외에 미라클 쉘터스 건물까지.
일단 보이는 건물이 4채였고, 지하로는 벙커 쉘터가 있는데.
지하 벙커 쉘터의 규모는 지상 건물보다 훨씬 컸다.
저택의 주변으로는 산과 숲이 전부였다.
나는 주변 땅을 전부 사들여서 근처에 남아 있는 집은 빈집이었다.
올차드 저택으로 들어서는 길목까지 널찍하게 닦아놓았다.
애초에 내가 처음 사들였던 땅은 과수원이었던 토지 1000평.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올차드 저택.
지금은 주변 땅까지 진구의 도움으로 사들여서 4만 평에 이른다.
덕분에 돈이 많이 들고 인건비도 지속해서 들어가는 바람에, 각 레벨당, 1310억 7200만 원씩 쓰고 있는 블랙카드는...
현재 27레벨을 전부 긁은 상태고, 28레벨을 긁고 있는 중이다.
“오빠. 가슴이 두근거려요. 저 집이 우리가 살게 될 집이라니!”
나는 빙긋 웃었다.
잠시 후, 내가 운전하는 차가 저택 정문 앞에 이르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루나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어? 오빠, 어떻게 문이 저절로 열리는 거예요?”
“인공지능 시스템이 집주인을 알아보고 문을 연 거야. 나중에 설명할게.”
나는 차를 운전하여 정문을 통과하여 주차장으로 향했다.
정원도 멋스럽게 조성되어 있다.
마치 19세기 귀족 저택의 정원을 보는 듯했다.
주차장 건물로 들어서서 주차한 후에 차에서 내렸다.
나는 루나에게 어느 입구를 가리켰다.
“루나야, 저기로 들어가면 저택 본관과 연결되어 있어. 하지만 오늘은 구경할 겸, 본관 로비를 통해서 들어가 보자.”
“네, 오빠.”
“부모님과 한나, 박사님이 먼저 와 있을 거야.”
나는 그녀에게서 아기를 조심스레 받아 그녀 대신 안아 들었다.
출발하기 전에 충분히 모유를 먹고 잠들어서 그러가.
오는 내내 조용히 잠을 잔다.
신생아는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잔다고 하더니, 지금 이 순간에도 잘 자는 아들 녀석이다.
주차장 건물을 나와 본관 로비 입구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저택 정원 풍경을 한번 둘러봤다.
넓은 정원을 둘러싼 담벼락에 있는데, 그다지 높지 않았다.
건축 규정상 2미터를 넘을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상관없었다.
여차하면 방어벽 그림을 그려 실물 전환해서 건물 개조를 할 생각이었다.
조만간 내 능력 수치도 더 올라갈 테니.
건물 외벽은 백색의 견고한 석재로 지어져 있다.
우리가 로비로 들어서자 저택에 미리 와있던 부모님과 한나, 유하준이 우리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