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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92화 (92/153)

한반도 호랑이, 그리고 수호의 탄생 4

멸망의 별이 파괴되는 순간이 입체적인 영상과 음향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콰광!

멸망의 별이 크게 세 조각으로 나누어지며, 그 외 작은 무수한 조각이 우수수 아래로 떨어졌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하고 단단했던 별이었으나, 이제는 평범한 암석 재질로 바뀌었으니.

미사일 한 방에 조각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이어 초소형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쾅! 쾅!

크게 조각났던 별이 다시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며, 한때 공포의 대상이었던 멸망의 별이 공중분해가 되었다.

사람들의 두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다래졌다.

막상 별이 파괴되어 와해 되니, 다들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

그래서 환성이 곧바로 터져 나오질 못했다.

짧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영상을 보는데 군중 속에서 한 노인과 아이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북받치는 감정을 못 이기며 오열하는 노인.

그 모습에서 지난날 숱한 슬픔이 엿보이는 것 같아서 보는 나마저 울컥했다.

노인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가리며 아이처럼 울었다.

어쩌면 그는 먼저 죽은 자식이나, 가족을 생각했을 거다.

노인 곁에 선 아이가 위로하듯 그의 옷자락을 붙든다.

와아아아!

“우아아아! 만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영상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수호와 나는 반드시 아포칼립스를 막게 될 것이다.

아포칼립스는 애당초 오지 않게 되는 거다.

비극과 불행으로 치닫고 있던 우리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쉼없이 방향을 틀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상황도 오지 않게 될 테다.

격한 감동과 기쁨, 지난 고통에 대한 위로.

저들의 환호와 눈물도 역사에 나타나지 않게 될 일이라서, 결국 모든 이에게 잊힐 테지만.

심지어 수호의 기억에서도 흐릿하게 될 것이겠지만.

나는 기억하고자 한다.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첫 승리를 경험했을 때, 저들이 어떻게 기뻐했는지.

절망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후 가까스로 수면 위로 올랐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를.

그리고 내 아들이 저 순간을 이루어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나는 기억하기 위해 저 광경을 뇌리에 새기고 또 새겼다.

* * *

이틀이 지난 후, 나는 미라클 쉘터스 한국지부 사무실에 와 있었다.

작은 회의실 안에서 유하준, 테이와 함께 드론이 보내왔던 영상을 보고 있다.

영상 속에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나왔는데.

그에게서 희미한 회색 오라가 나타나 있다.

나는 영상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행히 AI가 드론으로 저들을 찾아내서 손을 썼습니다.”

“손을 쓰다니요? 어떻게?”

“전기로 살짝 충격을 주었습니다. 기절했다가 다시 의식을 찾고 나니 다행히 회색 오라가 사라졌더군요.”

“다행이네요.”

“아마도 아직 아포칼립스 원흉의 힘이 약한 탓인 것 같아요.”

테이는 심각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근데 저들의 회색 오라는 뭐예요? 벌써 이곳에 아포칼립스가 나타나는 거예요? 저들은 어떻게 발견한 거예요?”

“한꺼번에 많은 질문을 하시네요. 저들의 회색 오라는 아포칼립스 원흉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더군요.”

“아포칼립스 원흉이요?”

“네. 원흉이 뭔지는 저도 모릅니다. 암튼 저들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테이 씨 덕분이었습니다.”

“저요?”

나는 옅게 미소지었다.

“미래의 테이 씨가 과거 시간에서 달라진 부분을 알려주었거든요. 테이 씨는 2022년도부터 의심이 가는 사건이 있을 경우, 전부 기록을 해 놓았다고 하더군요.”

“아, 그러잖아도 저 요즘 수상해 보이는 사건 있으면 기록해두려고 매일 기사를 살펴보곤 했었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2022년 11월 즈음, 만삭의 임신부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었다고 하네요.”

“끔찍하네요.”

“그걸 테이 씨가 알려줬어요. 지역과 대략적인 시기까지. 그래서 저는 그 피해자들 주변으로 드론을 보냈고. 그곳에서 회색 오라의 남자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유하준이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올리며 대꾸했다.

“끔찍한 일을 미리 막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건, 이런 점이 좋군요. 자칫 처제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이니.”

“비극을 막을 수 있어서 좋은 거죠. 근데 그 아포칼립스 원흉에게 조종당하는 사람은 더 없는 걸까요?”

테이의 말에 나는 무거워진 어조로 답했다.

“그래서 미라클 쉘터스에 도움을 요청하려고요. 저 혼자 이런저런 일을 감당하기 버거워서요.”

“그럼요. 아포칼립스를 막는 일은 고수 씨만의 일이 아닌걸요. 우리가 다 함께 협력해야만 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힘이 나는군요.”

“우리가 해줄 일이 뭐죠?”

“미래에서는 2022년 11월까지 임신부 살해 사건이 이어졌고. 12월에는 신생아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사건 기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피해자 주변으로 드론이 은밀히 맴돌며 영상을 보낼 테니. 모니터링 해주세요.”

“임신부와 신생아를 노린다라... 왠지 루나 씨와 수호 씨를 노리는 느낌이네요.”

“예.”

“아포칼립스 원흉이란 게. 정확히 뭐죠? 사람인가요?”

“저도 모릅니다.”

“그게 수호 씨를 노리고 있다면 뭔가 우리처럼 미래를 아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요. 미래를 알지 않고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수호 씨가 제거 대상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하준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럼 더 위험해진 거 아닙니까? 원흉이 처제와 수호를 노리고 있는 거라면.”

“수호가 그러더군요. 아포칼립스 원흉은 한국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거라고요. 수호가 겪은 시간에선 아포칼립스의 시작은 북유럽이라고 했어요. 짐작일 뿐이긴 하지만, 원흉은 유럽으로 돌아갔을 거라는 거고. 한국엔 그가 조종하는 사람만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이전에 수호 씨가 임신 될 시기에 이런저런 방해가 있었던 것처럼. 이번엔 태어나는 시점이 문제네요. 우리는 아포칼립스를 막기 위해 고수 씨와 수호 씨를 보호해야만 해요. 생각해보니, 이점을 우리가 간과해왔었네요.”

“......”

“고수 씨, 미라클 쉘터스. 그냥 고수 씨가 인수해버리면 어때요? 돈도 많다고 들었는데. 요즘 사장이 사사건건 걸림돌이에요.”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건 생각 좀 해봐야겠군요.”

“암튼 고수 씨 자택 주변도 저희가 살필게요. 저희 직원이 주변에 cctv도 설치해서 모니터링도 하고요.”

“네, 고마워요.”

“아, 그리고 과수원 땅 건물은 완공되었어요. 저희는 그곳 저택을 올차드 저택이라 불러요. 지금 정원 조성 중이죠.”

“올차드 저택이요?”

“네, 그곳 땅이 과수원이었으니까. 올차드라는 이름이 찰떡이죠. 이제 이사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답하며 빙긋 웃었다.

* * *

12월, 수호가 태어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루나는 출산 준비를 해 나갔다.

아기용품과 산모용품을 꼼꼼하게 준비해뒀다.

준비할 게 뭐가 그렇게 많은지 가지 수만 해도 다 헤아리기가 어렵다.

나는 루나에게 소홀했고 시간도 함께 보내지 못할 때가 많아서 늘 미안했다.

그녀에게 고맙기도 했다.

출산 준비를 내가 챙기고 돕지 못해도 루나는 많은 것을 스스로 야무지게 해 나갔다.

여리고 소녀 같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녀는 나이 어려도 야무지고 똑순이 같다.

12월 3일, 주말 저녁.

이날에 첫눈이 내렸다.

루나와 저녁을 먹고서 우리는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첫눈을 보며 우리는 거실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오빠, 조금 있으면 우리 아들이 태어나겠죠? 어떤 모습일까? 얼마나 예쁠까? 기대되면서도 무섭고 그래요.”

“우리 아들은 강하고 능력 있고 잘 생겼어. 키도 크고 올곧은 아이야.”

“흐흫. 오빠, 전부터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하면요. 웃음이 나오면서도 기분이 좋아요. 정말로 우리 아들이 그런 듬직한 아들일 것 같아서.”

나는 옅게 웃었다.

“정말 우리 수호는 그래. 조금 무뚝뚝하고 표현에 서투른 것만 빼면 자랑스러운 아들이야.”

“흫, 그래요?”

“응. 그러니까 루나야.”

“네.”

“수호가 다 자라서 어른이 될 때까지, 네가 수호를 많이 안아 주고 사랑한다는 말 많이 해줘.”

“수호가 어른이 될 때까지요? 전 수호가 할아버지가 되어도 그렇게 할 건데요?”

“하하, 그래.”

“오빠도 그래야 해요. 수호에게 그렇게 해주고. 나에게도 그렇게 해줘야 해요. 매일 안아 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해요.”

“응. 당연하지.”

나는 그렇게 답하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루나야, 수호가 태어나면 올차드 저택으로 이사 가자.”

“올차드 저택? 과수원에 지어진 그 집이요?”

“응. 거긴 이 집보다 안전할 거야.”

루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죠. 거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견고하며 따뜻한 집으로 제가 설계했는걸요. 늘, 그런 순간을 꿈꾸며 상상했어요.”

“맞아. 거긴 가장 안전하고 견고하며 따뜻한 집이지. 다른 곳은 다 어두워져도 거기만큼은 여전히 그런 곳이었으니까.”

나는 수호가 지내는 쉘터를 떠올리며 중얼거리듯 그녀에게 답했다.

* * *

다음날 오후, 작업실에서 아바타 접속을 했다.

비행선과 비행 전투력은 얼마 전에 보완하는 그림 작업을 끝내 둔 상태였다.

2051년도에 접속되고 보니, 내가 선 곳은 비행선 내부가 되었다.

지휘 통제실 내부엔 수호와 강민철이 머물러 있다.

나는 수호에게 물었다.

“수호야, 지금 중국으로 향하는 중이야?”

“네. 조만간 전투를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행 전투력만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수호는 내게 답하다가 2050에게 지시했다.

“준, 설명 부탁해.”

그러자 기계적인 음성이 내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수님, 우리가 곧 맞닥뜨릴 적은 A급의 이상의 공중 괴수들입니다. 몇 개의 영역에서 머물던 괴수들이 집결해서 한데 모인 것들입니다. 숫자가 거의 천 마리 정도 되며, 그것들을 괴멸하기 위해선 지상에 있는 여러 개의 탑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공중 괴수의 숫자가 많아서 탑이 있는 곳까지 침투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처음엔 800마리 정도 예상했는데. 최근 갑자기 숫자가 불어났습니다.”

2050은 우리 앞에 있는 3D 디스플레이에 자료 사진을 띄웠다.

흉측하게 생긴 괴수들의 사진 자료가 보였다.

2050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 보시는 괴수는 A급 공중 괴수로 고수님도 맞닥뜨린 적이 있습니다. 다음 괴수는 AA급으로 A급 괴수보다 몸집이 두 배 더 큽니다. 이것 역시 고수님이 보신 적 있습니다.”

입체적으로 보이는 괴수 사진이 다른 사진으로 연이어 바뀌었다.

“지금 보시는 괴수는 AAA등급입니다. 방어력이 강해서 제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몸집은 AA등급보다 약간 큰 정도입니다. 오늘 상대할 괴수 중에는 S급 괴수도 있습니다. 이 괴수들은 아직 상대해본 적 없는 강력한 괴수들입니다.”

화면을 보던 내 표정은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오늘 전투 방식은 어떻게 진행되는 거지? 중국 생존자들과 동시 협공인가?”

“동시 협공으로 전투할 예정입니다. 1시간 전에 중국 생존자 부대와 합류했었고. 지금은 적의 영역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중입니다.”

“전투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입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수호에게 말을 꺼냈다.

“이번에 멸망의 별을 파괴하면서 수호 너에게도 보상이 꽤 갔겠지?”

“네.”

“그러면 실물 전환 능력이 전보다 탁월해졌겠네.”

“네, 아무래도.”

나는 2050에게 말했다.

“2050. 내가 이메일로 보내둔 그림들이 있어.”

“이메일을 확인했었습니다. 고수님이 보내신 그림 100개는 따로 저장해두었습니다.”

수호가 내게 물었다.

“어떤 그림을 보내신 겁니까?”

“전에 쉘터를 아바타 접속해서 방문했을 때 호랑이 그림을 봤었잖아?”

“네. 그 그림을 보고 생각한 게 있었어. 내가 그려서 실물 전환된 호랑이는 나를 주인으로 인식한다고 했었지. 내 생각과 마음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고도 했고.”

“네, 그랬었죠.”

“그래서 이런 방법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어. 2050, 내가 보낸 그림 띄워줘.”

“네, 알겠습니다.”

2050은 3D 디스플레이에 내가 보냈던 그림 파일을 열어 띄웠다.

수호와 강민철은 그림을 보더니 조금 놀란 기색을 했다.

내가 보낸 그림은 푸른빛으로 타오르는 작은 불새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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