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호랑이, 그리고 수호의 탄생
2022년 9월 9일, 인천 공항.
추석 연휴가 마침 시작되는 시기라 공황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가는 무수한 사람들 사이로, 한 소년이 무심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캐리어 가방이 끌리고 있다.
소년은 이제 17세 정도.
머리카락은 잿빛이다.
피부는 하얗고 눈동자 색 역시 회색이다.
외모는 북유럽 계열.
인형처럼 표정이 없고 피부는 핏기가 없다.
소년은 사람들을 무심히 스쳐 가며 걷다가 입국장 내부에 있는 커다란 TV에 시선을 주었다.
문득 소년의 눈빛에 이채가 인다.
TV엔 뉴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주혜 기자가 ‘애플 수’라는 이름의 화가 소식을 전하고 있다.
“국내 유명 화가, 애플 수 작가의 이번 작품이 청와대에 걸린다는 소식입니다. 애플 수 작가의 신작은 어떤 작품이 될지 국내와 해외 팬들의 관심이 한층 뜨거워졌습니다. 애플 수의 최근작으로는 ‘생명의 나무’로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58억 원에 낙찰된 바 있습니다.”
TV를 보던 소년의 회색 눈동자에 약간 붉은빛이 감돌았다.
소년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생명의 나무. 애플 수.”
* * *
추석 연휴라서 나는 루나와 함께 양평에 와 있다.
청와대에 판매할 그림은 그저께 완성해두었었다.
굉장히 커다란 그림인데, 은백색 호랑이가 한반도 모양으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은백색 털의 호랑이.
만일 이 호랑이가 실물 전환된다면 높이는 2미터, 길이는 4미터가 넘을 듯했다.
은백색의 털이 금속 빛깔로 반짝이는, 이런 호랑이가 실재할 리 없겠지만은.
워낙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호랑이가 금방이라도 그림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그림 작업 영상을 진구에게 넘겼었고.
그는 편집해서 조금 전 인터넷에 너튜브 영상을 올렸다고 했었다.
늦은 오후 즈음, 나는 홀로 아우디를 끌고 인적이 없는 강가로 나왔다.
그곳을 잠시 산책했다.
양평에 올 때면, 항상 이곳을 들르는 편이다.
한적하고 자연의 소리만 들려오는 이곳.
내 번잡함을 가라앉혀주곤 한다.
흐르는 강물을 응시하다가 핸드폰으로 너튜브 영상을 찾아봤다.
이번 그림은 어떤 반응이 있을지 궁금하긴 했다.
진구가 영상을 올리기 무섭게 사람들은 이 영상을 찾아보며 댓글을 달았다.
영상을 올린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조회수와 좋아요 숫자가 무시무시하게 올라가고 있다.
영어 댓글도 꽤 보였다.
└ 올차드 회장 : 화가님! 그림 작업 영상이 올라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 그림은 역대급 최고입니다! (좋아요 6.3천, 답글 42개)
└ 송주영 : 놀랍네요. 작가님의 실력은 볼 때마다 최고 수준을 경신하는 것 같아요. (좋아요 2.1천, 답글 21개)
└ 애플칩 : 그림에서 격이 느껴진다! 애플 수를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좋아요 900, 답글 16개)
└ 우정 : 감탄, 감탄! 감탄!! (좋아요 710, 답글 17개)
└ yhsj1004 : 이젠 애플 수의 그림을 사진 같다고 하는 건, 모욕이다. 사진이 아니라 실물처럼 보인다! 아니, 실물보다 아름답다! (좋아요 240, 답글 6개)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몰라서 소화기를 가져와 옆에 가져다 놓았다.
종종 가을 강바람이 불어오곤 해서 바람을 등지고 섰다.
바람에 불꽃이 영향을 받는다면 아마도 걷잡을 수 없게 될 텐데.
여기서 관건은, 내가 바람을 거스르면서까지 불꽃을 제어할 수 있느냐다.
재킷 주머니에서 라이터 하나를 꺼냈다.
불을 그림 재료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
불이 어느 수준까지 제어 가능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라이터를 켜고 불로서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했다.
이전처럼 빛의 점이 수풀에 나타나더니, 그곳에 불꽃이 확 하고 갑자기 일었다.
화르륵!
나는 괜히 깜짝 놀라며 불꽃이 작아지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불꽃은 금세 잦아들었다.
다행하게도, 불꽃은 제어가 된다.
불꽃으로 스마일 그림을 빠르게 그려냈다.
초록빛 들풀이 자라던 곳에 스마일 그림이 까맣게 그을리며 그려졌다.
이번엔 그림 재료를 바꾸었다.
켜고 있던 라이터를 끄고, 흐르는 강물을 그림 재료로 삼았다.
활활 타오르고 있던 자그만 불길 위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튀었다.
하지만 금세 증발해버렸다.
이제는 그림 재료가 아니게 된 불길이 내 통제를 벗어나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아, 이런!”
그 광경에 내 마음이 급해졌다.
그림 재료를 듬뿍 써야겠다.
나는 커다란 스마일 그림을 그리려 시도했다.
한 개가 아니라 두 개, 세 개의 스마일 그림을 빠른 속도로 그렸다.
촤르륵!
꽤 많은 양의 물이 쏟아지며 물 그림이 그려졌다.
동시에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단숨에 꺼져버렸다.
아, 진땀 나네.
소화기를 쓸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나는 라이터를 재킷 주머니에 넣고 차가 주차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어느덧 며칠이 지나 추석 연휴가 끝났다.
나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까톡!
톡 알림이 와서 확인해보니 수호의 메시지가 와 있다.
- 2050 : 고수. 다음 재능 스탯을 올릴 땐 창조력을 올리십시오.
- 2050 : 아마도 실행 창조력이란 명칭은 변화가 없겠지만 능력에는 변화가 나타날 겁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핸드폰으로 톡 메시지를 작성했다.
- 고수 :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데?
- 2050 : 이건 저에게 없는 능력이지만 고수에게는 나타날 능력입니다.
- 2050 : 이제까지는 그림을 실물 전환하고 나면 그대로 끝이었지만. 능력의 진화가 나타나면 한 번 실물 전환했던 것을 다시 그림으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메시지 문장을 적었다.
- 고수 : 그래? 그럼 되돌린 그림을 또다시 실물 전환하는 것도 가능하나?
- 2050 : 네, 그렇습니다.
- 고수 : 와, 괜찮은 능력인데? 한번 실물 전환했던 건물이나 무기 같은 걸 다시 그림으로 바꾸고 다른 장소로 옮겨 실물 전환하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청와대에 걸게 될 그림이 뇌리에 스쳤다.
언젠가 수호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창조력이 높아지면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도 실물 전환이 가능해진다고.
- 고수 : 내가 호랑이 그림을 그린 게 있거든. 청와대에 걸 그림으로. 나중에 능력 수치가 적정 수준으로 오르면, 그림 속의 호랑이를 실물 전환하는 게 가능해지려나?
- 2050 : 아직은 동물을 실물 전환해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가능할 겁니다. 식물이나 작은 곤충이 실물 전환이 가능했던 걸 보면 그렇습니다.
- 고수 : 그래.
- 2050 : 오늘 블랙카드 30레벨에서 그렸던 그림을 실물 전환할 예정입니다. 오늘 중으로 실물 전환 촬영 영상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블랙카드 30레벨의 그림으로 그렸던 쉘터와 도시 근방의 거대 숲과 과수원.
쉘터와 도시까지 이어지는 도로까지.
그 그림이 오늘 실물 전환되는 거겠다.
- 고수 : 그래, 알았다. 근데 수호야.
- 2050 : 네.
- 고수 : 너는 내 능력에 관해 어떻게 미리 잘 알고 있는 거냐?
- 2050 : 고수가 남긴 핸드폰에 기록이 있었습니다. 2026년도에 작성된 내용입니다.
- 고수 : 그랬군.
띠리리링-
그때 진구에게서 전화가 와서 받았다.
“어.”
<고수야, 네 그림 말이야. 청와대 국무회의장에 걸릴 예정이었거든?>
“근데?”
<장소가 변경되었대. 청와대 본관에 걸릴 거라고 하더라.>
“아.”
<청와대 본관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벽면이 있거든. 거기 걸리게 될 거래.>
“더 잘 된 건가?”
<잘 된 거지. 아마도 더 노출이 많을 것 같은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그림이 된 기분도 들고. 기사 사진으로도 국내와 해외까지 많이 노출될 것 같아.>
“그래.”
<사람들 호평이 자자하더라. 이번 그림은 네 그림 중에서도 최고래. 아마도 역사상 최고 작품이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해외에서도 네 그림에 관심을 많이 보인다더라.>
“그래?”
<흐흐, 주혜 씨가 전한 말이다. 주혜 씨가 그런 소식에 빠르잖아. 빠삭하고.>
“응.”
나는 통화를 끝내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작품이 호평을 받는다고 하니, 기분이 좋은 건 숨길 수가 없다.
* * *
2051년도의 쉘터.
그곳에서 박석훈은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2023년 12월이었다.
회색 폭풍의 여파가 겨우 걷힐 즈음.
아포칼립스가 임하던 그 시기에,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박석훈은 절망적인 시선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봐야 했다.
청와대마저 뚫리게 될 줄은 몰랐었다.
정말 이 나라에, 이 세계에 아포칼립스가 임한 건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피칠갑으로 얼룩진 청와대 본관 입구.
심각하게 훼손된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박석훈은 두려움 탓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크르르르르.
본관 내부에 있던 인간형 괴수들이 박석훈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박석훈은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도망쳐 봤자 얼마 못 가서 죽을 게 뻔하지만.
모든 곳에 괴수가 우글대서 어디로 가야만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도망치려 했다.
끼이이익-
그때 장갑차처럼 보이는 차량 한 대가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달려오더니 멈춰섰다.
패러마운트 머로더.
2021년도 즈음, 고수가 군용차를 민수용으로 구매했던 차량이다.
무려 5억 원이나 하는 차였다.
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며 방독면을 쓴 고수가 뛰어나왔다.
하지만 박석훈은 공포와 절박함과 다급함으로 얼룩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여기 오지 마요! 괴수가!”
고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오더니 박석훈을 덮치려던 괴수들을 총으로 쏴서 쓰러뜨렸다.
하지만 주변에서 괴수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본관 안에서도 괴수들이 튀어나왔다.
총으로는 이제 감당하기 어려울 터.
괴수들이 고수의 차량에도 그득해져서, 이젠 차를 타고 도망하는 일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박석훈은 이제 죽는구나 싶어졌다.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
퍽!
퍽!
강력하면서도 둔탁한 소리에 박석훈은 눈을 떴다.
그러다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거대한 은백색 털의 호랑이가 앞발로 괴수들을 한 방에 쳐서 날리고 있던 것이었다.
박석훈은 호랑이를 보면서도 얼른 납득이 되질 않아서 눈을 깜박거렸다.
아,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저 호랑이는 한반도 지도 모양으로 웅크린, 그 호랑이였는데.
애플 수의 그림을 보면서 한반도 호랑이가 금세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하다고는 여겼지만.
정말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고수가 그에게 소리쳤다.
“차에 타시죠! 쉘터가 있습니다.”
“예!”
은백색 호랑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자아낼 만한 위용이었지만.
놀랍게도 고수와 그를 보호하듯 괴수를 계속 쳐내고 있었다.
때로는 입으로 물어뜯어 괴수의 머리를 분리해내기도 했다.
"커흥!"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호랑이 덕분에 가까스로 박석훈은 차량에 올라탈 수 있었다.
고수가 운전석에 타자, 호랑이는 차량이 움직일 수 있도록 괴수들을 상대했다.
차 안에서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수님, 전격 드론의 에너지가 소모되어 더는 사용이 불가합니다. 속히 쉘터로 피해주십시오.”
“알았어.”
“조금 있으면 더 강한 괴수들이 도처에 깔릴 듯합니다. 쉘터에 들어가시면 이젠 외부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