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불과 빛으로도 그려지는 4
AI 2050의 음성이 들려왔다.
“I 구역 공중 괴수들이 전부 제거되었습니다.”
수호는 비행선 외부 풍경을 보여주는 디스플레이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준, 방어 탑 실물 전환할 지점을 붉은색으로 표시해줘.”
“네, 알겠습니다.”
곧, 화면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에 선명한 붉은 X 표시가 나타났다.
수호는 다른 3D 디스플레이를 터치해서 방어 탑 그림 10개를 불러왔다.
곁에 서 있던 강민철이 수호에게 말을 꺼냈다.
“김 지휘관님, 연달아 실물 전환 능력을 쓰셔도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 저는 도시도 실물 전환에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수호는 금속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곧바로, 능력을 발현하는 거다.
금세, 내가 그렸던 그림이 사라지고.
붉은 표시가 있던 지점에 방어 탑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림 그대로의 모습이다.
'유도 레이저 빔 방어 탑'의 높이는 23미터 정도.
그것은 자동으로 적을 감지해서 사방으로 레이저 빔을 발사했다.
비행선 바깥 풍경은 기겁할 만했다.
방어 탑이 나타나자 지상 괴수들이 개미 떼처럼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한순간에 차곡차곡 쌓여서 꼭대기까지 뒤덮어 방어 탑을 파괴하려고 했다.
수호는 방어 탑을 연달아 실물 전환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근처에도 방어 탑을 실물 전환했고.
비행선과 남아 있는 전투 병력은 레이저 빔 공격을 했다.
그게 아니면, 수백 대 드론들의 전격 공격이 이어졌다.
이곳 세상은 적을 제거할 때 주로 레이저 빔이나 화염, 전격 무기를 사용한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자원 문제로 태양 에너지를 주로 이용하는 탓이었고.
적이 높은 온도에 취약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몇몇 전투 드론이 화염 방사 공격을 시작했다.
I 구역은 이내 불바다가 된 것처럼 거의 모든 곳에서 시뻘건 불길이 지옥처럼 타올랐다.
시뻘건 불길 위로 이따금 번쩍이는 섬광이 일었다.
수호는 방어 탑 그림 10개를 I 구역의 전역에 모두 실물 전환했다.
그러다 K 구역 괴수들이 몰려올 즈음.
I 구역의 괴수는 98% 이상 괴멸했다.
강민철이 수호에게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공중에서 공격하는 괴수들이 몰려오면 우리는 방어해낼 수 없을 겁니다.”
수호는 정복에 따른 보상에 집착하는 듯했다.
그는 단호한 태도로 대꾸했다.
“적을 온전히 쓸어 I 구역을 정복해야 합니다. 준! 남아 있는 적을 추적해줘.”
“네, 알겠습니다. 초소형 드론으로 적을 추적 중입니다. K 구역의 적이 이곳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5분 남짓입니다.”
나는 비행선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디스플레이를 면밀한 시선으로 훑다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불길이 없는 곳, 시야가 가려진 곳을 주로 찾아보면 좋을 것 같아. 저기 북쪽을 살펴보는 건 어때?”
“북쪽 끝, 건물 내부에 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050이 답하자 강민철이 말했다.
“무인 전투기 2대와 전투 드론을 보내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
“K 구역 적이 도달하는 시간, 2분 남았습니다.”
아직 I 구역의 괴수는 남아 있는 상황.
이 구역을 토벌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
나는 수호에게 말했다.
“수호야, 비행선의 속도는 빠르지 않은 편이니. 적이 도착하면 빠져나가기 어려울 거야. 우선 비행선은 퇴각하고 공중 병력만 이곳에 남아서 남은 적을 궤멸하는 게 좋겠다.”
강민철도 거들었다.
“내 생각도 그러합니다.”
수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비행선은 퇴각하도록 하죠. 공중 병력은 일단 I 구역을 쓸어버리는 임무를 계속 수행합니다.”
“네.”
비행선 내부에 있는 제 2의 통제실.
지휘 통제실과 화면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곳에선 공중 병력 조종팀이 무인 전투기를 조종하고 있었다.
AI 2050이 전투기 조종까지 할 수 없기 때문.
2050은 초소형 전격 드론만 제어했다.
강민철이 그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무인 전투기와 전투 드론 팀은 다음 지시가 떨어지기까지, I 구역에 남아 있는 적을 멸하는 것을 최대한 조속히 수행합니다.”
* * *
나는 아바타 접속을 끝내고 캡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바타로서 2051년도의 세계를 인지하고 있다가, 2022년의 현실로 돌아올 때면...
항상 이런 증상을 겪곤 한다.
어질어질하다.
장시간 접속해서 심할 때는 구토가 일기도 한다.
나는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5시 55분이다.
내 재능 스탯과 코인을 확인했다.
보상이 들어온 것이 있을 거다.
『명화 작가 38레벨
명화 시간 : 17
명화 기교 제어 : 16
실행 창조력 : 5
그랜드 코인 : 1160.』
재능 스탯이 ‘4’나 올랐다.
그랜드 코인도 꽤 들어온 상태.
나는 냉장고에 병 커피를 꺼낸 다음, 그걸 한 모금 마시며 의자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니 컨디션이 한결 낫다.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결과적으로 I 구역은 가까스로 정복해내었다.
그래서 보상이 들어온 것.
무인 전투기와 전투 드론은 절반이 넘는 숫자를 잃었지만.
인명 피해는 없으니 그것으로 된 거다.
비행선은 살짝 파손된 부분이 있었다.
그림으로 복구하면 될 거다.
격추되었던 무인 전투기와 전투 드론도 내가 금방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적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바타 접속을 끝내기 전에 수호에게 말했다.
“수호야, 잠깐 안아줘도 될까?”
“네?”
주저하다가 말을 꺼낸 건데, 그 녀석은 떨떠름한 표정과 반응을 보였다.
뜬금없지만 수호를 토닥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호가 29세가 되기까지 참으로 힘들고 고생했겠다고 여기긴 했었다.
하지만 피부로 와닿지 않았는데.
요즘은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루나의 뱃속에서 수호가 자라고 있어서.
그 아이가 태아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을 때마다 초음파 사진으로 지켜보게 되어서.
이전보다 내게 부성애라는 게 생겨서 그런 걸지 모르겠다.
2051년도에서 수호와 함께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동안 더욱 피부로 느껴지기도 했다.
수호가 그동안 겪었을 일들이 더욱 마음 아픈데.
지금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이런 표현뿐이다.
나는 수호에게 말했었다.
“수호야, 나는 2026년까지 너와 함께 머물던 아빠는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때의 아빠처럼 너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나는 그에게 다가가 팔을 뻗어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를 위로하듯.
대견하다는 듯.
수고했다는 듯.
그를 안으며 토닥이기까지 했다.
아바타로 실물 형상이 보이는 것뿐이라서,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안아주고 싶었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이젠 혼자 두지 않아. 오랫동안 견뎌주고 참아주고 그래서 나를 찾아 만나줘서 고맙다. 네가 겪은 아픔과 슬픔. 내가 반드시 지워줄게.”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좀 어색하다.
누구에게 이런 행동, 잘 안 하는 나인데.
절절해진 마음이 평소 성격을 이겨버리는 것 같다.
수호는 뻣뻣한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이런 상황과 위로는 익숙하지 않았던 거겠지.
나는 상념을 그치고 다시 내 재능 스탯을 바라보았다.
실행 창조력이 ‘5’.
작년에 블랙카드 5레벨일 때,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를 그렸던 일이 생각난다.
그림 수준은 그 정도로 하면 될 듯하다.
이번에는 어떤 그림으로 실물 전환 능력을 시험해볼까나.
조금 생각하다가 루나가 좋아하는 티라미수 조각 케이크를 떠올렸다.
나는 타블렛 디스플레이를 터치해서 작게 축소하고는 그림을 그렸다.
케이크를 넣을 작은 상자도 그려 넣었다.
그림 작업이 확실히 더 빨라졌다.
17배속으로 화면을 빨리 돌린 것 같은.
잠시 후, 그림이 완성되자 나는 그것을 실물 전환하는 것을 시도했다.
그림이 사라지고 탁자 위에 티라미수 케이크와 상자가 나타났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내 입가에 머금어졌다.
루나는 오늘 친정에서 자고 온다고 했으니까.
케이크는 내일 줘야겠다.
케이크를 상자에 넣어 냉장고에 두고 나니, 작업실에 켜놓은 3D 디스플레이에서 2050이 적은 메시지가 나타났다.
<고수님, 비행선의 훼손된 부분을 찍은 사진과 무인 전투기, 드론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나는 2050에게 답했다.
“그래. 내일까지 해서 보내줄게.”
* * *
그날 늦은 밤.
저녁을 작업실로 배달해서 먹었다.
작업 속도가 높아진 만큼 에너지도 많이 소모되어서 요즘은 3, 4인분은 거뜬하게 먹어치우곤 했다.
비행선의 훼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그림을 완성했을 즈음.
진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수야.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네 그림을 구매하고 싶대. 너 명성 중요시하니까 이번엔 수락하고 그림을 그려주는 게 좋겠지 않냐?>
“음, 그렇겠네.”
<아마도 네가 그림을 그려주면 청와대 내부에 장식될 거야. 그 그림을 그릴 때, 너튜브 영상으로 작업 과정을 올리면 좋을 듯해.>
“그림을 그린다면 한국 전통적인 내용으로 그림을 그려야겠지?”
<그렇겠지.>
“생각해볼게.”
<그리고 수연이가 그러는데. 애플 수 재단에 사람을 더 뽑겠대. 워낙 일을 벌인 게 많아서.>
“음, 그러라고 해. 재단 일은 요즘 어떤 것 같아?”
<공원 조성 사업도 마무리되었고. 마을 벽화 그리는 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그림 작가들이 좋은 조건으로 참여할 수 있으니까 호평하더라고. 그 외에 네가 짓는다는 병원으로 의약품과 의료 설비 지원했잖냐. 애플 수라는 이름을 강조해서 그 일을 전부 처리했어.>
다행히 아프리카에서 병원 짓는 일은 순조로웠었다.
그곳은 과수원 땅에서 짓는 건물만큼 정교한 시설을 하는 게 아니라서.
건축 기간이 더 짧다.
지금은 거의 완공을 앞둔 상태.
가난한 이들에게 의료 혜택이 갈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덕분에 애플 수라는 이름의 명성이 올라서 내게 꾸준히 코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통화를 끝내고 작업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이 늦어서 거리는 어둡고 조용하다.
낮에는 조금 덥더니 지금은 꽤 서늘해졌다.
조금씩 불어오는 가을 밤바람.
내년의 가을에도 이처럼 평화로울 수 있을 테지.
바깥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작업실의 조명에 눈길을 주었다.
빛을 그림 재료로 삼는 것.
가능할까?
한 번 시도해봐야겠다.
나는 밤하늘이 보이는 창밖의 허공을 응시했다.
작업실 안의 환한 빛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시도했더니.
시선이 머문 곳에 빛의 점이 나타났다.
그림을 그릴 때면 항상 나타나는 명멸하는 빛의 점이다.
스마일 그림을 그려보려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환한 빛이 어두운 허공에 머무는 듯하더니 빛의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 된다!
신비하면서도 예쁜 느낌.
하지만 빛의 동그라미는 이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이번에는 빠른 속도로 스마일 그림을 빛으로 그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빛으로 물든 스마일 그림이 나타났다가 이내 희미해졌다.
“하하, 이게 되네.”
신기하고 놀라워서 웃음이 다 난다.
빛으로도 그림 재료로 삼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이런 점이 아포칼립스를 막는 데 과연 도움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