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87화 (87/153)

물과 불과 빛으로도 그려지는 3

나는 작은 사이즈의 캔버스를 나무 이젤에 세워놓았다.

잠시 작업실 밖을 나가 편의점으로 가서 양초와 라이터를 사 왔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초에 불을 붙여두고 놓아두었다.

혹시 불길이 번지게 될까 염려되어 물도 조금 준비해두었다.

불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과연 될까 싶다.

일단, 사과 한 알을 그려볼까.

나는 캔버스를 응시했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부분에 새하얗게 명멸하는 점이 나타나더니.

이윽고 탄 냄새가 나며 콩알만 한 불꽃이 붙었다.

그 불꽃이 빠르게 이동하며 동그란 선을 그렸다.

불꽃이 옆으로 번지거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건 아닐까 여겼지만.

다행히, 불꽃은 커다랗게 번지거나 하진 않았다.

워낙 불꽃이 빠르게 움직여서 미처 다른 곳으로 번지지 못한 건 아닌가 했으나.

그림 재료가 된 불꽃은 내 능력의 제어를 받는 듯했다.

내가 원하면 불꽃은 사그라들기도 했고 꺼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불꽃이 다시 일기도 하는 걸 보면서...

“신기하네.”

나는 홀로 감탄했다.

정말 마법처럼 보인다.

금세 새카맣게 그려진 사과.

불로 그린 불 사과다.

이런 식으로 무엇이든 그림 재료가 될 수 있다면...

그동안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도 충분히 그림 재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시선을 들어 작업실의 조명을 바라보았다.

이를테면, 빛이라던가...

* * *

북부 노르웨이의 어느 지역.

자작나무 숲이 보이고 그곳에 외딴 저택이 있다.

고적하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오래된 저택.

19세기의 시골 귀족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집이다.

잿빛 머리의 소년이 저택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소년은 홀로 숲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걷던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소년의 잿빛 눈동자가 어느 순간 붉게 물들었다.

일반인의 시력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그는 보고 있다.

아니, 느끼고 있다.

저 멀리 우주로부터 날아오고 있는 작은 유성.

붉은빛의 암석으로 보이지만 다이아몬드보다 강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때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소년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바람은 옅은 회색 입자를 머금고 있다.

주변에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뿌옇다.

소년은 메말라 보이는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앞당긴다. 위험해. 뭔가... 달라진다.”

그 순간, 소년의 눈동자가 진한 핏빛으로 짙어졌다.

우주에서 날아오던 붉은 유성이 조금 커지는 듯하더니 날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숲에 드리워진 스모그가 더 짙어졌다.

소년은 근처에 서 있던 자작나무에 가만히 손을 댔다.

그러자 그 나무는 빠르게 시들며 메말라갔다.

마치 생명력이 급속도로 사그라드는 듯하다.

이제 10살 남짓으로 보이던 소년은 어느 순간 조금 성장한... 15세 정도의 소년으로 외향이 바뀌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어느 방향으로 물끄러미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가야겠다. 가서 확인한다. 서울.”

* * *

나는 작업실에서 AI 2050에게 10개째 방어 탑 그림을 완성해서 보내주었다.

유도 레이저 빔 방어 탑 그림을 다 그렸으니.

블랙카드 30레벨 그림에서 그리지 못했던 ‘산’ 그림을 그려야겠다.

까톡!

그때 2050으로부터 까톡이 왔다.

- 2050 : 고수님, 앞으로 1시간 후에 아바타 접속이 가능하십니까? 아바타 접속 시간은 3시간 정도.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낮 2시.

저녁 6시까지는 충분히 시간이 있다.

이곳 작업실에서 방해받지 않고 접속이 가능한 거다.

- 고수 : 가능해. 혹시 전투가 있는 건가?

- 2050 : 네, 그렇습니다.

- 고수 : 저번처럼 비행선으로 전투하는 건가? 방어 탑 그림을 실물 전환하는 건 어떻게 할 예정인데?

- 2050 : 오늘 할 예정입니다. 고수님이 아바타로 2051년으로 접속하시면 수호님이 방어 탑 그림을 실물 전환하실 겁니다.

- 고수 : 그래, 알았어.

- 2050 : 접속 시간 5분 전까지 모든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3D 디스플레이를 터치해서 AI 기능을 활성화했다.

그러고는 작업실에 있는 작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점심을 아직 먹지 않아서 간단한 음식이라도 먹어두려는 거다.

아바타 접속하는 동안, 의외로 두뇌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어서 영양 보충을 조금 해두는 게 좋다.

샌드위치 한쪽과 생수를 꺼내 나는 대강 식사를 마쳤다.

그런 후, 화장실을 다녀오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그림 작업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3시 5분 전이 되자, 3D 디스플레이에 2050이 쓴 글자가 나타났다.

<고수님, 이제 캡슐에 들어가십시오.>

“그래.”

<드론이 상시 경계 중이니 무슨 일 있으면 고수님을 깨울 겁니다.>

“응.”

<이루나님과 유하준 박사님이 계신 곳도 드론이 여전히 보이지 않은 곳에서 살피고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2050이 조종하는 드론 5대가 작업실 안에서 날아다녔다.

나는 아바타 기계 캡슐에 누웠다.

그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내 시야와 모든 감각은 작업실이 아니라 다른 곳의 풍경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비행선 지휘 통제실 내부.

비행선 통제실에는 수호와 강민철이 안경을 쓴 채 머물고 있었다.

나는 선 자리에서 강민철을 보았다.

그가 나를 보더니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애플 수 화가님!”

“아, 강 회장님.”

“하하. 이렇게 뵈니 반갑습니다. 저번에 뵈었을 때는 화가님을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이젠 2022년도에서 화가님을 뵈었던 기억이 제게 고스란히 있네요.”

“그렇습니까?”

나는 답하며 비행선 창밖에 눈길을 주었다가 수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수호,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이야?”

수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일본입니다.”

“일본? 쉘터와 도시는 어쩌고?”

“대부분 지상 병력은 그곳에 남겨둔 상태입니다. 저는 비행선과 공중 병력만 끌고 일본의 큐슈 지방이었던 곳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도착까지 35분 정도 남은 상황입니다.”

“뭐?”

나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너, 비행선만으로 일본을 기습 공격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한반도 밖 괴수들은 더 강하다지 않았어?”

“비행선을 호위할 무인 전투기와 전투 드론들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의 말에 나는 통제실 벽면에 부착된 디스플레이에 시선을 주었다.

비행선 양옆으로 무인 전투기들이 호위하듯 비행하는 게 보였다.

“일본에서 한반도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던 적들은?”

“조금 전, 한반도 남쪽 지역에서 한 차례 전투를 치렀습니다. 우리는 일본 지역을 단숨에 정복할 건 아니고. 규슈 지방이었던 곳의 한 영역만 쓸어버릴 작정입니다.”

“규슈 지방. 거기서 방어 탑 그림을 실물 전환할 생각이군. 한반도 도시를 방어할 목적으로 그림을 요청한 줄 알았는데.”

“고수가 그려준 그림 10장은 이번 전투에서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래. 그럼 이번에도 푸른 불꽃 그림 그려줄까?”

내가 묻자 수호는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 그래 주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수호는 그렇게 답하고는 AI 2050에게 물었다.

“준, 규슈지방의 I 구역. 탑이나 중심 건물이 있는지 찾았나?”

이내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네. I 구역에도 탑이 존재합니다. 위치는 I 구역 깊숙이 들어가야 있으며 한반도에 있던 탑과 비교하면 3배 정도 큽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만큼 더 강하다는 거겠군.”

“실물 전환에 성공하기만 하면 승산이 있을 겁니다. 방어 탑을 소모하며 I 구역을 쓸어버릴 생각입니다. 이곳을 멸하면 우리가 얻게 될 보상은 꽤 클 겁니다.”

“그래, 보상.”

쓴 표정으로 대꾸하자 수호는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위험하긴 해도 우리는 이대로 안주할 수 없습니다. 2022년도에서 적이 진화하는 것보다 우리의 능력이 더 빠르게 진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코인과 보상이 필요합니다.”

2050이 우리에게 보고했다.

“초소형 드론을 보내 높은 상공에서 탑의 사진을 찍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촬영한 드론은 적에게 발각되어 사진만 전송하고 파괴되었습니다.”

나는 2050에게 말했다.

“타블렛 창에 탑 사진을 넣어서 띄워줘. 푸른 불길을 따로 합성 안 해도 돼.”

“네, 알겠습니다.”

이내, 내 시야 앞에서 3D 디스플레이가 나타났다.

타블렛 디스플레이다.

2050이 방금 찍은 I 구역 중심 탑 사진이 있다.

나는 곧바로 탑 사진 위에 불길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푸른 불길을 그리는 데는 따로 자료 사진이 필요 없다.

창의력 수치 덕분인지, 이 정도는 자료 사진이 없더라도 퀄리티 좋은 그림을 완성해낼 수 있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 그림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그림 작업이 이루어지자.

강민철은 신기하고 경이롭다는 듯 힐끗거리며 보곤 했다.

수호가 2050에게 물었다.

“아까 탑 사진을 찍으면서 I 구역을 대략 찍은 사진들 있지?”

“네. I 구역의 전체 사진을 띄워 드리겠습니다.”

통제실 내부에 커다란 디스플레이가 나타나자 수호와 강민철은 함께 논의했다.

“이전 지도를 통해 대략 방어 탑을 실물 전환할 위치를 생각해두긴 했는데. 현재 사진을 보니 이곳에 괴수들이 몰려 있군요.”

“네. 이곳과 조금 떨어진 이 위치에 방어 탑을 생성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I 구역의 중심 탑 주변에도 방어 탑을 3개 정도 두는 게 좋을 것 같고요.”

내가 불꽃 회오리를 거의 완성해갈 무렵.

2050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I 구역에 도착하기 2분 전입니다. 공중전 1분 전입니다. I 구역의 AA급 공중 괴수들 50마리가 공중에 집결해 있습니다. 현재 K 구역의 공중 괴수들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K 구역 공중 괴수는 AAA급으로 이곳까지 이르는 데 40분 정도 걸립니다.”

“그럼 속전속결 해야겠군. K 구역 적은 우리가 전투를 끝내고 빠지면 쫓아오진 못할 거다. 전투 돌입하겠다. 무인 전투기는 그대로 좌우에서 비행선 호위하며 전투하고, 전투 드론 300대는 후방에서 지원 출격한다.”

잠잠하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긴장감이 돌았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주변 상황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내 의지를 따라 타블렛 디스플레이에 빠른 속도로 푸른 불꽃 회오리가 완성되어 갔다.

수호가 내게 빠른 어투로 물었다.

“고수! 그림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4분만 버텨!”

쿠쿵!

쿠구구구궁-

비행선이 진동하며 울리는 게 느껴졌다.

이런 느낌은 몇 번을 경험해봐도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는다.

2050의 음성이 계속 들려와서 어떤 상황인지 대략 짐작이 되었다.

“초소형 유도 미사일 10대를 발사했습니다. 공격력이 상쇄되어 50마리 중, 3마리만 격추했습니다.”

“무인 전투기 한 대가 손상을 입고 추락했습니다. 전투 드론 6대가 파손되었습니다.”

“I 구역 중심 탑 방향으로 비행선이 계속 이동 중입니다. 47마리 중 2마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중심 탑에 푸른 불꽃 회오리를 실물 전환할 수 있는 사정거리. 2분 후에 도달합니다.”

“비행선 방어막 80%가 손상을 입었습니다.”

다급한 상황이다.

덩달아 내 마음도 급해졌다.

비행선은 내내 충격을 흡수하고 있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한 내가 소리쳤다.

“그림 다 되었어!”

나는 3D 디스플레이를 손으로 터치하여 약간 축소한 다음, 수호가 선 곳으로 힘껏 밀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입체적인 디스플레이가 수호를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수호는 내 그림을 받아서 금속 유리 바깥으로 내다보이는 전방을, 날 선 시선으로 응시했다.

비행선에서 레이저 빔이 쉬지 않고 출력되고 있는 중이다.

수호는 숨돌릴 틈도 없이 바로 실행 창조력을 발현하는 모양이었다.

츠츠-

그 와중에 2050의 말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무인 전투기 3대가 격추되었습니다. 비행선 방어막 95%가 손상되었습니다.”

수호는 마치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소극적으로 대응하니 우스워 보였나? 이제는 우리가 밟을 차례다!”

저 멀리 육안으로도 보이는 흉측하면서도 거대한 중심 탑에 푸른 불꽃 회오리가 붙었다.

불 회오리가 일듯 이내 거세게 타오른다.

쿠에에에엑!

괴수들이 동시에 괴성을 질러댄다.

소름 끼치는 광경.

"AA급 공중 괴수들의 방어력이 C급으로 급하락했습니다. 하지만 적의 파괴력은 A급입니다."

강민철이 외쳤다.

“유도 미사일 7발, 중심 탑에 발사! 초소형 유도 미사일 전부 공중 괴수에 쏘겠습니다.”

2050이 답했다.

“유도 미사일 7발, 발사합니다. 소형 유도 미사일 50발 조준, 발사합니다.”

이제껏 움츠렸던 우리 병력.

푸른 불꽃 회오리가 붙어 활활 타오르자, 그것을 신호로 I 구역의 적들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잠잠했던 미사일이 한꺼번에 발사되고.

후방에서 소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던 드론들이 반경을 넓혔다.

번쩍!

치지지직-

낙뢰가 번쩍거리는 것처럼 은빛 섬광이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금세 공중 괴수들이 제거되어 갔다.

동시에, 내게 코인이 실시간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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