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불과 빛으로도 그려지는 2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탁자에 놓인 작은 생수병에 눈길을 주었다.
물?
아, 그래. 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
나는 생수병 안에 푸른색 물감을 소량 넣어서 푸른색 물로 만들었다.
생수병을 흔들어 색을 잘 섞어준 다음.
종이 위에 있던 모래들을 털어 다시 그릇에 도로 담았다.
새하얀 백지.
여기에 어떤 그림을 그려볼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전에 그렸던 황금 나무를 떠올렸다.
섬세한 가지와 잎사귀가 촘촘하게 그려졌던 금빛의 나무.
탁자 위에 펼쳐진 커다란 종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림을 그리려 시도하자 종이에 또다시 빛으로 된 점이 나타났다.
이내, 빛이 머무는 곳에 푸른빛 물방울 하나가 머물렀다.
새하얀 종이가 푸른색으로 젖으며 번지려 한다.
나는 물이 한곳에 머물지 않도록 빠르게 나무의 선을 그렸다.
푸른 물방울이 백지 위에서 스스로 움직여가며 빠르게 선을 만들었다.
물은 종이를 연한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내가 봐도 신기한 광경.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이처럼 어떤 도구도 필요 없이 그림 작업이 가능하다.
그림 재료를 통제하고 제어하는 것도 가능하다.
푸른 물로 만들어지는 선은 계속 빠른 속도로 뻗어 나가서 나무줄기와 무수한 가지들, 잎사귀를 그려냈다.
종이에 푸른 색상을 물들였다.
워낙 작업 속도가 빠르다 보니 금세 나무 그림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그림, 나름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대강 그린 것 치고는, 이대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보였다.
나는 밖에 나가서도 시험을 해봐야겠다고 여겨져서 작업실을 나섰다.
작업실에서 가까운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생수 2병을 샀다.
늦여름의 늦은 오후.
아직은 햇살이 강하고 눈부신 편이지만 일몰이 가까워지는 때라.
생각보다 덥진 않다.
공원의 산책로는 나무로 그늘이 드리워져서 가끔 사람들이 이곳으로 산책을 나오곤 한다.
오늘도 마을주민이 공원에 제법 나와 있다.
나는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적당한 곳의 벤치에 앉았다.
무성한 나무 잎사귀의 그림자가 산책로 위로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렸다.
이곳 산책로는 흰색 포장 블록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물 그림을 그리기 좋을 듯하다.
젖은 부분이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생수병 마개를 열고 어떤 그림을 그릴까 하는데.
젊은 여자 둘이서 남자아이를 데리고 지나다가 옆 벤치에 앉는다.
여자 둘은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서 홀로 심심해진 아이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방해될 것 같아서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서려는데.
내가 앉은 곳으로 아이가 다가왔다.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다.
“삼촌, 머해요오?”
아이가 귀여웠던 나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림을 그리려고.”
“그림이요?”
호기심 가득한 눈빛, 초롱초롱하다.
아이를 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나중에 수호가 태어나면 저 아이만큼 귀엽겠지.
“응. 내가 그림을 아주 잘 그리거든.”
“오아, 징짜요?”
“보여줄까?”
“네!”
“음, 어떤 그림을 그려줄까?”
“겨운 토끼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토끼. 저길 봐봐. 저기에 토끼가 생겨날 거야.”
아이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산책로에 물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전처럼 빛의 점이 산책로 위에 생겨났다.
아이의 눈에는 빛의 점이 보이지 않는지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토끼, 엄써요.”
“이제 나타날 거야.”
내 의지와 생각을 따라 투명한 눈방울들이 산책로를 적시기 시작했다.
내가 들고 있던 생수병 안의 물이 찰랑거렸다.
“오아!”
아이의 눈이 금세 동그래졌다.
그리고 토끼 모양의 물 그림도 금방 완성되었다.
왠지 내가 마법이라도 부리는 기분이다.
아이는 바닥에 저절로 토끼 모양으로 물이 적셔졌던 게 몹시 신기했는지.
흥분하며 옆 벤치에 앉은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 엄마! 토끼 있어. 저기 토끼!”
“시후야, 여기 토끼가 어디 있어. 여긴 토끼 안 살아.”
“아냐, 엄마. 징짜 토끼 있어! 겨운 토끼.”
“엄마, 얘기 중이잖아. 조금만 있다 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곳을 벗어났다.
내가 그렸던 토끼 그림은 금방 말라서 사라질 것이었다.
* * *
나는 작업실에서 더 작업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도착해서 루나를 태우고 강남에 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블랙카드가 생긴 이후, 이런저런 일로 많은 돈을 쓰긴 했었지만.
쇼핑은 별로 즐기지 않았었다.
꼭 필요한 물건만 인터넷으로 구매하던 게 허다했다.
그게 아니면, 루나가 가끔 내 옷을 사오거나.
루나는 아기 용품에는 내 신용카드를 쓰는 것을 아끼지 않겠다더니.
막상 카드를 쓰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직접 블랙카드를 제대로 써볼 생각이었다.
이제 임신 7개월째로 접어든 루나.
제법 배가 불렀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백화점 명품관, 버버리 매장에 들렀다.
그곳에서 유아 옷을 구경했다.
남자 아기가 입을 상의가 47만 원이다.
아기 점프수트가 40만 원.
가을 코트는 72만 원.
루나는 눈이 반짝반짝해져서 아기 옷을 보다가, 직원이 듣지 않도록 내게 소곤거렸다.
“오빠, 옷이 귀여워요. 근데 여긴 너무 비싸. 나갈까요?”
그런 그녀에게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오늘 나온 김에 이것저것 다 사자. 네 것도 사고.”
나는 매장에 있는 남자 아기의 옷과 신발까지 싹쓸이하듯 고른 다음.
내가 입을 셔츠도 2장 골랐다.
셔츠 한 장에 70만 원이나 했다.
70만 원이라면 월세를 제외한 내 한 달 생활비였던 적도 있었는데.
이젠 셔츠 한 장 값이 되다니.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나는 사이, 내 인생이 널을 뛰는 것 같다.
나는 루나가 입을 베이지 색상의 원피스와 구두도 하나 골랐다.
매장을 옮겨 다니며 옷을 고르는 건 번거롭게 여겨져서, 그냥 매장 한 곳을 거의 털 듯이 구매하는 나였다.
“전부 계산할게요.”
“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블랙카드를 계산하는 직원에게 내밀자, 루나는 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오빠 덕분에 이런 체험도 해보네요. 블랙카드 내밀면서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하는 거요.”
“그래?”
“정말 부자가 된 기분이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짧게 웃었다.
“우리 완구 매장 가자. 아기 장난감도 미리 사놓으면 좋겠어.”
“나중에 이사 가면 아이에게 장난감 방도 만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얼른 가요.”
루나는 조금 전보다 눈빛이 더 빛나며 신이 난 것처럼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우리는 백화점의 10층에 있는 완구 매장으로 발길을 향했다.
이윽고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신기한 시선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어릴 적 이후로 장난감 가게에 와보는 건 처음.
내가 어릴 때는 가난해서 이런 곳에서 장난감을 살 형편이 되지 못했었다.
한번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 정도로 큰 장난감 매장에 갔었는데.
그곳은 내게 별천지와 같았다.
온갖 장난감이 다 모여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장난감을 얻지 못했었다.
장난감의 가격이 너무 비쌌던 탓.
어렸던 그때는 어찌나 슬프고 서러웠는지.
진열된 로봇 장난감을 보다 보니 그때의 감정이 더 짙게 살아난다.
나도 모르게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었나 보다.
루나는 장난감을 구경하다가 이런 나를 보더니.
조용히 다가와 뒤꿈치를 들어 내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오빠, 그런 표정은 1초 이상 금지. 방금, 벌로 뺨에 내가 도장 찍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루나.
나는 그녀를 따라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벌이라면 오히려 매번 받고 싶은데?”
“벌보다 칭찬이 더 좋을 텐데요?”
“칭찬? 그건 그러네. 루나가 해주는 칭찬은 아마도 달달하겠지?”
“흫, 아마도 그럴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우리 아기 장난감은 모빌이나 딸랑이 정도로만 사야겠죠?”
나는 시선을 옮겨 장난감을 훑다가 토끼 인형을 발견했다.
아까 꼬마에게 토끼를 그려주다가 수호를 생각했던 일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음, 토끼 인형도 살까?”
“토끼 인형요? 네, 좋아요!”
여름의 아침, 한강 변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루나는 해사한 얼굴로 환히 웃으며 답했다.
* * *
다음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강민철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네, 강 회장님.”
<화가님,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화가님과 유 박사님의 연구실에 다녀온 후로 저희 회사에서 계속 회색 스모그를 체크하고 붉은 유성을 관측할 준비를 해왔었습니다.>
“아, 네.”
<북유럽은 평소 대기 질이 나쁘지 않은 편인데, 오늘 새벽 즈음에 노르웨이 북부 지역에서 회색 스모그가 나타났더군요. 다른 지역은 관측이 되지 않은데 그곳만 좁은 범위로 스모그가 나타났었습니다.>
“노르웨이 북부인가요?”
<예, 저번과 위치는 동일합니다. 평소보다 그 지역의 온도가 낮게 관측되었고요. 이번에도 그 지역 식물이 시드는 현상이 나타났었다고 확인이 되었습니다. 저번보다 더 심하다네요.>
“그렇군요.”
나는 중얼거리듯 대꾸하며 이전에 보았었던 흉측한 탑을 떠올렸다.
푸른 불길로 태웠어야 했던 적의 탑.
그 탑이 있는 한, 그곳 영역의 적들은 강한 힘을 공급받으며 그 일대가 냉혹한 추위가 있게 된다고 했었다.
추운 기후도 적의 활동에 연관이 있는 듯하다.
“노르웨이 북부에 붉은 유성이 나타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곳을 먼저 관측해봐야 할 것 같네요.”
<회색 스모그와 붉은 유성이 관련이 있는 건가요? 붉은 유성이 가까워지면 전 세계에 회색 스모그가 짙어지고, 온 세계 식물이 시드는 환경으로 지구가 변하는 겁니까? 지금으로선 그렇게 유추되는군요.>
“네, 맞습니다. 회색 스모그와 붉은 유성이 관련이 있어요. 그 붉은 유성이 전 세계에 나타나면 지구의 환경이 바뀔 수 있어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모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변화한 환경에 적응한 새로운 개체의 생명체가 나타날 수도 있겠군요.>
“네.”
<그렇다면 회색 스모그는 중대한 문제라서 전 세계가 같이 고민할 문제인데...>
강민철이 말끝을 흐렸다.
“회색 스모그와 붉은 유성은 섣불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언젠가 수호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2024년도에 있었던 일들.
당시 아포칼립스의 원인이 붉은 유성이 진화한 멸망의 별에 있다고 판단하고서.
별을 파괴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었다고 했다.
미사일을 사용하기도 했고 드론과 폭약을 사용하기도 했고.
하지만 멸망의 별은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고 했었다.
멸망의 별을 제거할 방법은 진화의 끝에 이른 실행 창조력뿐인 것이다.
강민철에게 2051년의 일을 슬슬 얘기해줘야겠다.
그래야 긴밀한 협력이 필요해지면 수월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선 조만간 강 회장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강민철과 통화를 끝낸 후,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탁자 위에 놓인 생수병을 바라보았다.
어제, 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저 생수병을 샀었다.
모래와 물로 그림을 그려보았으니, 오늘은 다른 재료를 사용해볼까?
무엇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불을 떠올렸다.
“불.”
불은 제어하기 어려운 거라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위험하기도 한 부분이라서 조심스럽지만.
일단 시험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