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불과 빛으로도 그려지는
다시 며칠이 흘러갔다.
8월도 거의 다 지나갔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잠시 쉴 겸, 의자에 앉아 나흘 전에 AI 2050이 보냈던 톡을 다시 확인했다.
- 2050 : 고수님, 2027년도에 유하준 박사님이 그려놓으셨던 설계를 바탕으로 실사 이미지를 만들어 자료로 보내드립니다.
- 2050 : 지금 보낸 사진을 10장만 그려주십시오.
- 고수 : 같은 걸 10장. 그래, 알았어.
유도 레이저 빔 방어 탑 사진이다.
이 방어 탑은 제거해야 할 적을 저장해두면 적이 접근할 시 자동으로 감지하여 적을 제거하는 기능이 있었다.
유도 레이저 빔이 자동으로 발사되는 거다.
현재 나는 방어 탑 그림을 5개째 그리는 중이다.
까톡!
그때 2050에게서 다시 톡이 왔다.
- 2050 : 고수님, 오늘 아침에 블랙카드 29레벨로 그렸던 작은 도시 그림을 실물 전환했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 고수 : 응. 보내줘. 참, 오늘 아침에 갑자기 보상 같은 게 들어왔었거든.
오늘 아침에 갑자기 보상이 들어온 것처럼 코인이 조금 불어나고 스탯이 올라 있었다.
『명화 작가 38레벨
명화 시간 : 16
명화 기교 제어 : 15
실행 창조력 : 4
그랜드 코인 : 160.』
그래서 2050에게 물었다.
- 고수 : 도시 그림을 실물 전환한다고 보상이 들어오기도 하나?
- 2050 : 도시 그림을 직접 본 사람들 덕분에 명성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코인이 생겼을 겁니다.
- 2050 : 그리고 보상은 적을 제거해도 얻을 수 있지만. 적의 영역이었던 곳이 우군의 영역으로 바뀌면, 이에 대한 보상도 주어지는 거로 여겨집니다.
- 2050 : 그 외에 죽게 되었을 사람이 살게 되어도 코인이 들어옵니다.
- 고수 : 그렇군.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3D 디스플레이를 터치하여 이메일을 확인했다.
2050이 보낸 영상 파일이 있다.
영상을 열자 입체적인 어떤 풍경이 내 시야에 나타났다.
나는 화면을 터치해서 영상 크기를 더욱 확대했다.
작업실을 가득 채울 만큼 늘렸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영상을 바라보았다.
작업을 가득 메운 생생한 영상과 음향.
폐허가 된 서울 풍경이 배경으로 보인다.
저 멀리 부서진 빌딩과 도로 사이로 잔뜩 자라난 기괴한 식물이 흉물스럽다.
공중에 비행선이 나타나더니 적당한 지점에 착륙한다.
착륙한 지점은 도심이었던 곳에서 조금 벗어난 곳인 것 같다.
건물보단 식물들만 무성한 곳이라 비행선이 그 위에 무턱대고 착륙하자...
우지끈.
나무와 넝쿨 식물들이 이리저리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비행선의 출구가 열리고 무수한 사람들이 비행선에서 나왔다.
마치 피난민처럼 다들 커다란 짐을 들고 있다.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오자 짐을 실은 차량이 차례로 비행선을 빠져나왔다.
이미, 비행선이 착륙한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다.
생존자 쉘터마다 비행선이 가서 이주할 사람들을 수송했던 모양이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들은 을씨년스러운 도심을 보며 의구심 어린 얼굴을 했다.
“한때 마수가 우글거리던 곳이라 꺼림칙하군요.”
“이젠 괴수들이 없다고 해도 이곳은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아요.”
“굳이 이곳으로 이주해서 모여 지내야 할까요? 다른 쉘터민들과 부딪힘도 있을 텐데.”
“이곳에 오니 2024년 1월. 그때 서울에서 겪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생지옥이었죠. 이곳에서 살게 되면, 그 당시의 기억이 나를 계속 괴롭힐 것 같아요.”
“저도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어요! 누구 마음대로 우리가 살 곳을 정해버리는 거죠?”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아 보이지 않다.
그때 하늘을 날던 드론 하나가 허공에서 대형 3D 디스플레이를 띄웠다.
디스플레이에 내가 그렸던 도시 그림이 나타났다.
그림을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저건 뭐죠? 사진?”
“사진 같은데요?”
“사진을 왜?”
타지역 생존자들은 내 그림을 사진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대번에 내가 그린 그림을 알아봤다.
“저건 사진이 아니라 그림입니다!”
“그림이요?”
“저건 고수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이에요.”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저게 그림이라면 대단하군요. 마치 애플 수의 그림을 보는 듯합니다.”
“아, 맞아. 아포칼립스 전까지, 애플 수라는 화가가 대단히 인기였었지.”
“고수가 애플 수라고 하던데요? 얼마 전의 비행선으로 했던 전투에서 푸른 불꽃 회오리 그림이 저절로 그려졌는데. 그 그림이 애플 수의 그림이었다고 했어요. 수호라는 사람이 그 그림을 실제 불 회오리로 바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김수호 지휘관의 실물 전환 능력은 아주 유명해요.”
“그렇다면 애플 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거요? 나 젊었을 적, 애플 수 팬이었던 때가 생각나는구먼.”
수호가 사람들 앞에 우뚝 섰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목청을 높여 외쳤다.
“나는 이제 곧 세워질 한반도의 도시. 군사 지휘관 김수호라 합니다.”
이제껏 불리고 알려졌던 이름이 김수호라서 수호는 그대로 사용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와 부자지간이라는 건 굳이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
모인 군중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술렁였다.
수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입체 화면에 나타난 건 사진이 아니라 그림입니다. ‘고수’라는 이름의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림이었어.”
“그렇다면 애플 수 그림이라고 했던 게 사실인가 봐요.”
비행하던 드론이 조금 아래로 고도를 낮추었다.
드론이 띄운 3D 디스플레이는 지면과 가까워지면서 크기가 더욱 커졌다.
6층 빌딩만큼 화면이 커졌지만, 놀랍게도 화질은 여전히 섬세하고 선명했다.
영상 속 풍경은 마치 실물처럼 보였다.
수호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보시는 그림은 사진에 그림을 덧칠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그림을 복사하는 방법도 쓰지 않았습니다. 건물의 창 하나를 그릴지라도 고수는 일일이 세밀한 펜 터치로 완성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횟수의 펜 터치를 했었을지. 저는 가늠하지 못합니다.
지금 보시는 모든 그림에 고수라는 인물의 재능과 수고와 마음이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실물 전환을 하고 나면 영영 사라집니다. 여러 날 잠 못 들며 수고했던 결과물과 결실을,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무수한 이들, 당신들을 위해 이제껏 내어주어 왔었습니다.
마치, 희망이라는 불꽃이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이제까지 그는 그림을 장작 삼아 영영 사라질 재로 불살라왔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높이에 가까워지자 좀 더 그림을 면밀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말도 안 돼. 이게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요?”
“그림에서 은연히 풍기는 분위기에서 고급스러움과 격이 느껴져서. 사진 같다는 말조차 부족하게 여겨지는군요.”
“아, 내가 애플 수 그림을 다시 보게 되다니!”
내가 그렸던 건물과 도로와 가로등, 가로수, 그 외에 들판과 언덕.
그 모든 게 사람들 사이에서 근접하게 보였다.
나는 도로와 주차장, 인도를 제외하고는 노면을 흙으로 그려 넣었다.
생존자 무리는 홀린 듯이 내 그림을 보며 감탄했다.
그러다 3D 디스플레이가 다시 위로 떠오르더니.
생존자 무리에서 제법 떨어진, 수호가 지정한 장소로 옮겨졌다.
그곳은 도시가 세워질 곳이었다.
“이제 나는 고수의 그림을 실물 전환할 것입니다! 이 정도 규모를 실물 전환하는 건 처음이지만. 이번에도 성공할 것입니다.”
수호와 그의 능력을 아는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수호! 수호!”
“수호는 이번에도 성공할 것입니다!”
“애플 수! 당신의 명작이 이런 식으로 영영 사라지는 건 마음 아프지만. 당신의 위대한 그림은 우리 안식처를 위한 씨앗이 될 겁니다아!”
“고수! 애플 수!”
“아, 나는 왜 이제껏 고수의 그림을 보면서도 애플 수의 그림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었지?”
“맞아. 이제 생각났어! 아포칼립스가 오기 전까지,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던 그 천재 화가.”
수호는 마침내 실물 전환 능력을 발현하는 것 같았다.
기괴한 식물이 가득하고 폐허였던 장소에 어떤 변화와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호의 눈동자에 섬광처럼 강력한 빛이 일었다.
비록 크지는 않지만 하나의 도시를 실물 전환하는 일이었다.
이 정도 수준으로 창조력을 끌어올리려면 수호는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호를 보며 부디 능력 발현이 성공하길 바랐다.
때로 능력 발현자가 능력을 감당하지 못하면 실물 전환이 실패하기도 한다고 들었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의 수고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일 테다.
내가 그렸던 그림은 일회성으로 소멸하고 말 테니.
웅성거리던 군중 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처럼 그들도 초조한 것이다.
츠, 츠츠-
그림이 있던 장소에 거대한 뭔가가 들어서려 한다.
흐릿하게 도시 풍경이 나타났다.
이에 사람들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맙소사! 그림으로 도시를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할 줄이야.”
흐릿하게 나타났다가 진해지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무수한 이들의 눈앞에 도시 하나가 홀연히 나타났다.
내가 그렸던 그림이 사라지고 실물 도시가 나타난 거다.
수호의 능력 발현은 이번에도 성공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 잠시간 침묵하다가.
이윽고 둑이 터지듯 그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조금 전까지 불만을 표하며 투덜대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격한 기쁨을 표출했다.
기괴한 식물이 여전히 자라나고 있는 폐허의 땅.
온통 파괴와 어둠만 있을 뿐인 그곳에, 기적처럼 작은 도시가 단숨에 세워졌다.
놀라움과 기쁨으로 환호하던 군중은 도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잿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하늘에 뜬 창백한 태양.
도시 위로 미약한 빛을 뿌리고 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너져버린 한반도.
백골이 된 지 숱한 세월이 지나가 버려서 이젠 희망은 다시 꿈꿀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땅에...
다시 도시가 세워지고 문명이 기동하기 시작했다.
아포칼립스가 된 세계에서 한반도가 첫 시작이었다.
나는 영상으로 그 광경을 보며 홀로 미소를 지었다.
* * *
그날, 늦은 오후.
나는 작은 사과 하나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리고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실행 창조력을 발현했다.
곧, 내 앞에 그림과 똑같은 사과 한 알이 놓여 있게 되었다.
내가 그렸던 그림은 물론 사라졌다.
나는 사과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
상큼한 과즙이 내 입안에 가득 머금어졌다.
당도 높은 싱싱한 사과의 맛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먹던 사과를 내려놓고.
다시 내 능력을 시험해보려 커다란 종이를 탁자에 펼쳤다.
그리고 종이 옆에는 고운 모래를 그릇에 담아 가져다 놓았다.
기교 능력이 진화한 이후, 나는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었다.
캔버스와 연필을 준비해두고 그림을 스케치하고자 하면.
연필심이 절로 닳아지면서 캔버스에 스케치가 되곤 했었다.
캔버스에 빛으로 된 점이 생겨나면서 내 생각과 의지대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유화 물감을 준비해두면 물감이 절로 배합하고 소모되면서 채색이 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물감이나 연필, 그 외의 미술 재료도 이런 식으로 그림 작업이 가능하니.
다른 여러 재료로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래를 가져다 놓고 그림 작업을 시도했다.
종이 위에 새하얀 빛으로 된 점이 나타나더니 모래가 뿌려지는 소리가 났다.
차라락.
종이 위에 모래가 원하는 만큼 생겨나 형태를 이뤄나가고 있다.
모래가 움직이는 건가 싶어서 모래를 담아둔 그릇을 흘끗 봤지만.
모래 알갱이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거나 하진 않다.
나는 다시 모래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집중했다.
슥슥-
모래 알갱이들이 이리저리 쓸려 다녔다.
내 작업 속도가 빨라서 모래알의 움직임이 엄청 빨랐다.
참으로 기묘하고도 신기한 광경.
조금 있으니 모래가 담겨 있던 그릇은 텅 비었고.
종이 위에는 모래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나는 완성된 모래 그림을 보다가 다른 재료를 또 생각해보았다.
또 무엇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