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84화 (84/153)

올차드 팬 미팅 4

나는 수호에게 톡을 보냈다.

최근에 찍은 태아 초음파 사진을 그에게 보내주면서 그에게 물었다.

- 고수 : 네 사진, 예쁘다며 계속 들여다봐. 넌 뵌 적 없겠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네 외할머니도 네 사진 보고 기뻐하셨어.

- 2050 :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던 풍경이군요. 조부모님 모두가 계시고 그분들의 관심을 받는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 고수 : 그 모든 걸, 너는 빼앗기지 않을 거야.

- 2050 :

- 고수 : 네게 있는 기억들. 네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 고통스럽던 과거까지.

- 고수 : 그건 확정된 게 아니야. 네가 그 모든 걸 이미 겪었다고 해도 너와 내가 시공을 초월해서 만난 순간, 우리에겐 다시 기회가 주어진 거지.

- 고수 :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수호는 조금 침묵하다가 내게 말했다.

- 2050 : 제가 겪은 시간의 세상은 아포칼립스가 되고서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 2050 : 그것만으로 아포칼립스의 원흉은 인류를 짓밟고 승리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 2050 :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미 새겨진 상처와 흉터는 지워지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습니다.

- 2050 : 아포칼립스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했던 막연한 믿음은 당신의 유언 같은 거라서 간신히 붙들긴 했었지만.

- 2050 : 당장 보이는 건 암울하고 절망적인 세상과 환경뿐이었으니까요.

- 2050 : 하지만 최근 와서 겨우 생각되는 게 있습니다.

나는 수호가 적은 글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 고수 : 그게 뭔데?

- 2050 : 아버지의 선택.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2026년의 그때, 스스로 생명을 불사르는 선택을 하지 않았었다면...

- 2050 : 당장 나는 아버지가 있는 삶을 얻었을 겁니다.

- 2050 :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어두웠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 2050 : 당신은 하나뿐이었던 생명을 심었고, 지금 이 순간 무수한 생명으로 열매를 거두고 있는 셈입니다.

- 2050 : 우리 모두는 그렇게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불행을 막을 기회를. 함께 살 수 있는 기회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최근에 내가 그렸던 그림이 떠올랐다.

‘생명의 나무’라는 제목의 그림.

내가 3D 타블렛으로 그린 그림은 수호가 실물 전환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껏 그려왔던 유화 그림도 상징적인 의미로 내 삶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호에게 다시 톡을 적어 보냈다.

- 고수 : 수호야, 한반도 밖의 적과 맞닥뜨리는 전쟁을 준비한다고 들었어.

- 고수 : 전투가 임박하면 알려줘. 아바타 접속하게.

- 2050 : 네, 그러죠.

- 고수 : 맞붙게 될 적에 관해선 파악해뒀어?

- 2050 : 비행이 가능한 A급 개체가 중국 지역에서 집결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고수 : 하늘이 붉어지기를 기다리는 건가?

- 2050 : 그런 것 같습니다. 중국 지역의 요새와 연합해서 전투할 예정입니다만. 그곳 전투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 2050 : 지금은 일본에서 다가올 적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 고수 : 내 도움,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얘기해.

- 2050 : 네.

나는 그와 대화를 마친 후, 핸드폰에 저장해둔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봤다.

임신 6개월째라 루나는 태동이 느껴진다고 했었다.

이제 태아의 머리카락에 머리카락도 생기고, 뇌에 주름도 잡혀가는 시기라 들었는데.

참 신기할 따름이다.

초음파 사진에 발바닥 사진이 찍힌 걸 보고서 혼자 웃음을 지었다.

* * *

나는 여름 정장을 입고서 진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H 호텔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진구는 특별 제작된 가면을 내게 건넸다.

“이번엔 블랙이 아니라 네이비와 은색이 섞인 디자인이야.”

나는 가면을 받으면서 말했다.

“이걸 쓰고 가려니 왠지 민망하네.”

“이젠 그게 네 컨셉이 되었으니 감수해야지. 수연이와 주혜 씨는 먼저 가 있을 거야.”

“응.”

“루나 씨도 와?”

“아마 루나는 따로 조용히 참석했다가 갈 것 같아.”

나는 가면을 쓰고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진구와 함께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호텔 로비를 지나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서 뭔가 싶어 힐끗거렸지만.

이곳에서 애플 수 팬 미팅이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 있던 호텔 직원들은 내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들은 일하는 중이라 함부로 내게 다가오진 못하고 다만 눈을 반짝이며 시선을 줄 뿐이었다.

잠시 후, 소형 연회 홀에 마련된 팬 미팅 장소.

그곳에 들어섰다.

5성급 호텔의 연회 홀이라 그런지 꽤 럭셔리했다.

호텔의 높은 층이라서 창밖으로 한강이 보이기도 했다.

드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와 화려한 조명.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의자.

카펫이 깔린 바닥.

팬 미팅이라기보다는 연회나 파티에 초대되어 온 기분이다.

팬 미팅은 최고급으로 꾸몄다.

주혜가 장소를 협찬했지만, 그 외에...

호텔의 코스 요리로 마련된 음식과 음료.

연회 홀의 장식.

그리고 팬들에게 줄 선물들.

악기 연주자, 팬 미팅 사회자 섭외까지.

그 모든 건 내 수중의 돈으로 해결했다.

팬 미팅 시간은 2시간.

길지 않게 계획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다들 엄청난 환호와 박수로 나를 반겼다.

나는 단상 위를 걸어 마이크 앞에 서서 테이블 지정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구석에 자리한 루나도 보였다.

이런 자리는 난생처음이라 조금 긴장되긴 한다.

나는 사람들을 보며 입술을 뗐다.

“오늘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 * *

루나는 학교 친구와 함께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괜히 그녀가 긴장되고 떨렸다.

처음 고수가 애플 수라는 사실을 그의 입으로 듣게 되었을 때.

루나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애플 수에 대해 학교 친구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듣긴 했어도.

페라리 광고를 보거나 너튜브 영상을 통해 보긴 했어도.

애플 수는 그녀가 만날 일이 없는, 연예인과 같은 존재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런 애플 수가 그녀의 남편이라니!

루나는 믿기지 않았다.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고수가 그린 그림을 보고나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고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애플 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섬세한 그의 얼굴선, 풍기는 분위기는 애플 수처럼 매력적이었으니까.

집에서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여기서 멀찍이 가면을 쓴 고수를 보니.

루나는 아이돌을 본 여고생 팬이 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함께 왔던 루나의 학교 친구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애플 수 직접 보니까 너무 멋있다. 기럭지랑 분위기, 예술인데?”

“흐흫, 그치? 너무 멋있지?”

“아닌 척하더니, 너도 팬 되었나 봐. 하긴 우리 또래에 애플 수 팬 아닌 사람 찾기 힘들지. 암튼 너 덕분에 애플 수도 직접 보고 고맙다.”

올차드 팬클럽 회장인 강민철이 단상에 올라 몇 마디 말을 하고 내려갔다.

그러고서 시작된 팬 미팅.

루나가 연회 홀을 둘러보니, 재단 사무실에서 한 번 마주친 적 있던 김주혜 기자의 얼굴도 보였다.

팬 미팅이 반쯤 진행되었을 즈음, 사회자가 Q&A 시간을 갖겠다고 말했다.

평소 애플 수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애플 수에게 평소 궁금했던 점 있으면 지금 손을 들어주십시오. 오늘 여기서 물어보지 않으면 오늘 집에 가서 잠을 못 잔다 싶으신 분,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주십시오!”

사회자의 질문에 루나는 힘차게 오른손을 위로 뻗었다.

“오, 이런. 여기 계신 분들 전부가 손을 든 것 같군요. 이러면 애플 수 작가님이 질문자를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

사회자는 고수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고수는 사람을 훑으며 보더니 루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끝에 연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연회 홀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자, 루나는 뽀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사회자가 그녀에게 마이크를 가져다주었다.

루나는 마이크를 들고 고수에게 질문했다.

“애플 수 작가님의 이상형이 궁금합니다. 상세하게 듣고 싶어요.”

사회자가 한마디 했다.

“역시 여성 팬이라 그런지. 이상형에 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애플 수 작가님? 상세하게 답해주셔야 합니다.”

고수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전에도 어떤 기자님의 질문에 답변해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제 이상형은 맑고 순수한 분입니다. 늘 맑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는 모습이 예뻐 보이더군요. 그 미소는 제게 비타민 같습니다.”

루나의 친구는 멍한 표정으로 고수의 말을 듣더니 루나에게 말했다.

“대박. 맑은 미소래. 촉이 온다. 저거 분명 특정 대상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야.”

고수와 루나의 모습을 연회 홀에서 지켜보던 주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이상형 질문을 했던 기자는 주혜였기 때문이었다.

주혜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나는 아니었다는 거였네.”

* * *

팬 미팅이 끝나고 강민철과 둘만 남은 자리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화가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오늘 다들 식사하며 즐거운 시간이 되었을 겁니다. 준비하셨던 선물도 꽤 비싼 물건이었을 텐데.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오셨던 분들 외에도 올차드 회원들 전부 선물을 받으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나는 선물로 애플 수와 올차드 이름을 새긴 백금 팔찌를 준비했었다.

물론 팔찌는 남녀 디자인이 다른 모양이었고, 선물 준비는 진구가 했었다.

“다들 기뻐하겠군요.”

“근데 제가 제안했던 내용은 오늘 계약서를 쓰시겠다고 하셨죠?”

내가 묻자 강민철은 빙긋 웃었다.

“물론입니다. 계약서는 준비되었습니다.”

강민철이 곁에 선 비서에게 손짓을 하자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투자 계약서다.

나는 계약서를 받아 읽어보며 말했다.

“저는 사업적인 부분에 관해서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원하는 건 한 가지뿐입니다.”

“예. 붉은 유성이 대기권에 이르기 전에 미리 관측해내는 거죠.”

“네, 그것만 해주시면 됩니다.”

“근데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예.”

“그 붉은 유성에 관한 건 어디서 알게 된 정보인지. 붉은 유성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더군요. 만일, 화가님 말씀대로 붉은 유성이 전 세계에 나타나 인류에게 재앙을 끼친다면, 보통 일이 아니잖습니까?”

“네, 그렇죠.”

“붉은 유성에 관한 건 혹시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부분인가요?”

“당분간 외부로는 비밀을 유지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 건, 이후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죠.”

아포칼립스를 가져온 원흉은 인간을 압도할 만한 지능이 있다고 했었다.

붉은 유성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고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분명, 적을 자극하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붉은 유성의 출현을 앞당겨지기도 할지도 모를 일이기도 하다.

나는 펜을 들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더불어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강 회장님은 전 세계 날씨를 예측하는 서비스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 북유럽에 회색 스모그가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요? 그 지역의 식물이 시들었다고 뉴스에 나온 적이 있는데.”

“네, 알고 있습니다.”

“그 회색 스모그나 회색 폭풍도 예측 가능할까요?”

“그러잖아도 회색 스모그에 관해 알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건 미세먼지와 다르더군요. 예측은 할 수 없지만 관측은 가능합니다. 이에 관한 정보가 있으면 즉시 화가님에게 연락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붉은 유성에 관한 구체적인 데이터가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그건 내일이나 모레, 제가 아는 박사님의 연구소에서 보여드릴까 하는데. 시간이 어떻게 되시는지?”

“모레 됩니다. 모레 아침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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