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차드 팬 미팅 3
2050이 내게 전투 영상을 보내왔다.
수호가 대규모 전투를 벌일 때면, 내가 아바타 접속을 통해 함께 했었다.
그 외 한반도에 남은 적을 쓸어버리는 자잘한 전투를 할 때는, 2050에게서 전투 진행 상황만 전해 들었었다.
작업실에서 그림 작업을 하다 말고.
3D 디스플레이로 2050이 보낸 영상을 확인했다.
디스플레이를 크게 확대해서 작업실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한 영상이 흘러나왔다.
이내 생생한 음향과 입체적인 풍경이 내 감각을 사로잡았다.
2051년도의 하늘은 옅은 붉은 빛이다.
쉘터 근처엔 비행선이 착륙해 있고.
쉘터 방어벽 위나 외부엔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수호는 가장 높은 파수탑 위에 서 있었으며, 주변으로 드론들이 어지러이 날고 있다.
웅성거리는 쉘터민의 말소리.
“정말 꿈만 같아요. 작은 쉘터였던 우리의 주도로 한반도를 점령하는 날이 오다니.”
“믿기지 않아요. 30년 동안 숨죽여 지내왔던 날들이 이제야 위로를 받네요.”
“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믿었어요. 언젠가 우리 모두를 구원해줄 이가 나타날 거로 여겼는데. 그가 우리의 리더였네요.”
“수호의 능력이 빛을 발했던 것은 고수의 그림이 있어서였죠. 나는 고수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늘 궁금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방심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 밖의 강한 적이 우리를 노린다지 않습니까?”
그때 주변을 날던 드론에서 대형 3D 디스플레이가 나타났다.
모두 3개의 대형 디스플레이가 허공에 떠 있다.
수호는 사람들을 향해 언성을 높여 외쳤다.
“모두 지금 흘러나오는 영상에 주목해주십시오!”
그의 외침에 어수선했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조용해지며 그들의 이목이 영상으로 향했다.
3개의 디스플레이에선 각자 다른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다.
“지금 보시는 3개의 영상은 우리 쉘터에서 조종하는 무인 전투기가 보내는 영상입니다. 무인 전투기는 현재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적을 추적해 왔습니다. 이제, 무인 전투기가 한반도에 마지막 남은 적을 제거하는 걸 앞두고 있습니다!”
와아아아!
마지막 남은 적을 제거하는 걸 앞두고 있다는 말에, 쉘터민들은 흥분하여 환성을 내질렀다.
수호는 영상을 보면서 사람들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그러다 첫 번째 영상에서 무인 전투기들이 적을 온전히 제거하고서 하늘 높이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모조리 쓸어버려!”
“내 부모와 아이의 원수! 오늘에서야 원통함을 풉니다!”
사람들의 함성이 다시 커졌다.
흥분으로 가득해진 모습.
두 번째와 세 번째 영상에선 여전히 전투하는 광경이다.
라이브로 전송되는 영상을 사람들이 보고 있는 거다.
얼마 안 있어 두 번째 영상에서도 전투가 끝이 나자, 수호가 목소리를 냈다.
“세 번째 영상에서도 무인 전투기로 적의 섬멸이 마무리되면, 한반도에 남은 적은 없게 됩니다. 잠시뿐이라 해도, 한반도는 아포칼립스 이후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청정 지역이 되는 것입니다!”
와아아!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들 중에는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다.
아포칼립스가 된 이후, 그들은 커다란 공포와 불안을 겪으며 거의 30년의 세월을 보내왔었다.
그러는 동안, 말 못 할 고초를 겪었을 거고.
온갖 참담하고 비극적인 일들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같은 일이 어찌 감격스럽지 아니하랴!
연달아 세 번째 영상에서도 전투가 마무리되자 무인 전투기는 하늘 위로 솟구쳤다.
한반도의 마지막 적이 제거된 거다.
그걸 목도한 사람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와아아!”
“만세!”
격하게 터져나오는 기쁨의 함성.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함성은 노래로 바뀌었다.
나이 든 사람부터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이내 모두가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오래전, 대한민국의 국가였던 노래.
애국가였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몇몇만 눈물을 보였는데, 이제는 다들 눈물 바람이다.
3개의 디스플레이 중에서 두 번째.
거기선 수호가 머무는 쉘터의 풍경이 영상에 담겼다.
그리고 첫 번째와 세 번째.
그 영상에선 다른 지역의 쉘터 모습이 흘러나왔다.
무인 전투기가 하늘을 날아 가까운 곳에 있던 쉘터에 이르러 그곳의 풍경을 촬영하고 있는 거다.
타 지역의 쉘터에서도 수호가 일찍이 보냈던 드론들이 비행하고 있다.
쉘터 주민들이 나와서 드론을 통해 이곳처럼 영상을 보고 있는 거다.
아마도 그들은 적이 섬멸되는 광경을 지켜본 후에, 수호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는 모양이다.
그곳 쉘터민들도 눈물 흘리며 환호하다가 애국가를 따라불렀다.
일제 강점기였던 36년의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던 그 옛날의 순간처럼.
때로 만세를 부르기도 하며.
적을 섬멸하고 한반도를 탈환한 기쁨을 만끽했다.
드론 영상을 통해 각 지역 쉘터가 이어져 있고 생중계가 되고 있는 터라.
이날 모든 곳에서 애국가가 수십 년 만에 울려 퍼졌을 것이다.
괜히 보는 나까지 마음이 뭉클하며 울컥해진다.
수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든 생존자 쉘터에 디스플레이 기능이 있는 드론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목격했습니다. 오늘의 전투는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쟁취가 승리를 계속 지키기 위해선 다시 싸워야 합니다!”
우와아아아!
또 한 번 함성이 울려 퍼지고 곳곳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영상은 그 부분에서 끝이 났다.
* * *
한반도의 마지막 적을 멸했던 그 날.
수호는 오랜만에 쉘터 내부의 침실에서 잠들었었다.
하지만 이날 따라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평소 꿈을 꾸지 않는 그였는데.
이날은 지독한 악몽이 그를 찾아왔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생생했다.
그가 침실에서 누워 잠들어 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그의 침실을 침입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잿빛 머리카락에 잿빛 눈동자를 지녔고 생김새는 유럽인처럼 보인다.
수호는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그를 경계하려 했으나, 그가 더 빨랐다.
잿빛의 남자는 수호를 덮치듯 다가오더니 목을 움켜쥐고 거세게 졸랐다.
“큭!”
수호는 잿빛의 남자를 떼어내려 했으나, 비정상적으로 힘이 강했다.
잿빛의 남자는 어느새 눈이 핏빛으로 물들더니 섬뜩하게 말했다.
“너였어. 감히 반기를 들고 내 힘을 꺾으려는 인간이. 전부터 이곳 조그만 땅이 불쾌하다 했는데. 너 같은 인간이 태어났을 줄이야.”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가 수호의 정신을 지배하며 잠식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걸, 수호는 알아챘다.
목이 졸려서 숨통이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수호는 이를 악물며 얼음장 같은 어조로 말했다.
“나야말로 찾았다! 아포칼립스 원흉.”
수호 역시 두 손을 뻗어 잿빛 남자의 목덜미를 콱 움켰다.
결코 그 숨통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 순간, 수호는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에서 있었던 일이 마치 현실이었던 것처럼.
그의 목덜미에 억눌린 통증이 느껴졌다.
자신의 목을 만져보며 몸을 일으키니 식은땀으로 온통 젖어 있다.
수호는 홀로 중얼거렸다.
“유럽. 유럽이 시작인가?”
* * *
어느새 7월이 지나가고 8월.
루나는 임신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건축 설계를 그리느라 바쁘던 그녀였지만.
이젠 설계를 그리는 일도 끝이 났고.
대신 과수원 땅에 건축되어가는 저택의 인테리어에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테리어라는 것도 의외로 돈이 많이 들어갔다.
벽지나 조명, 그런 것을 질 좋은 거로 하려면 가격이 제법 비싸지는 거다.
루나가 이런 저런 일에 돈을 쓰기는 했지만.
블랙카드의 레벨마다 긁어야 할 금액에 비하면 하찮은 소비였다.
나는 그동안 돈을 얼마나 썼는지 가늠해보았다.
언젠가부터 블랙카드 레벨마다 1310억 7200만 원을 긁을 수 있었는데.
현재 블랙카드 26레벨의 돈까지 소진한 상태다.
지하 벙커 쉘터 기능이 있는 연구 센터 2곳과 아프리카에 병원 2곳을 짓느라 돈이 꽤 소모되었었고.
그 외에 훗날 전투 차량으로도 쓸 수 있는 차량 5억 원짜리 2대도 구매했었던 터다.
내 부모님께는 신차를 하나 사드렸는데.
국산 차를 원해서 7900만 원짜리 제너시스였다.
이래저래 재단 사무실로도 돈이 들어가고 해서.
현재 블랙카드 27레벨도 꽤 긁은 것 같다.
나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집에 있는 루나와 통화를 했다.
“루나야, 아파트는 계약하기로 했어?”
<네, 언니랑 엄마가 지낼 아파트는 여기서 가까운 곳이 좋을 것 같아서요. 어제 봤던 근처 작은 아파트로 계약하려고요. 언니가 있는 라멘 가게하고도 가깝기도 하고.>
“그래.”
<오빠, 고마워요. 아파트 선물까지 받게 될 줄 몰랐어요. 언니와 엄마가 많이 고마워해요.>
“응.”
미국에 있는 루나의 어머니가 서울에 와있었다.
한나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나는 아파트를 사드리기로 했던 것이다.
20억 원의 아파트.
<언니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놓았대요. 오늘 맛있는 거 많이 가져와서 재단 사무실에도 가져가 나눠줄 거예요.>
“다들 좋아하겠네.”
<내일은 양평에 가려고요. 어머니와 과수원 땅 정원 꾸미는 일에 관해 함께 의논하기로 했어요.>
“루나 엄청 바쁘네.”
<치, 오빠만큼 바쁠까 봐요.>
“고맙고 미안해. 그래도 네가 있어서 삭막하던 내 삶에 단비가 내리고 있어.”
<저야말로 고마워요. 오빠가 바빠서 쬐금 서운하긴 하지만. 오빠에게 받는 게 많아요.>
나는 한동안 루나와 통화를 하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작업실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3D 디스플레이를 응시했다.
입체적인 화면에 극사실적인 그림을 그려놓은 탓에, 작업실은 마치 숲속처럼 보였다.
나는 그림을 터치해서 실물 크기까지 확대했다.
그러고는 내가 그려놓은 나무들 사이를 조금 걸었다.
내가 그린 그림이지만 놀랍다.
정말 숲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섬세하고도 생생해 보이는 나무줄기.
곳곳에 자란 초록빛 들풀과 바위.
나는 손을 뻗어 나무줄기를 만져보려 했다.
하지만 그게 만져질 리는 만무하다.
시선을 위로 향했다.
무수하게 뻗은 나뭇가지들.
무성하게 자란 초록 잎사귀.
이곳에 있으면 싱그러운 풀 내음이 날 것 같고 숲의 피톤치드가 느껴질 듯하다.
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올 것 같지만.
내 그림에선 동물들 그림은 없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오염이 안 된 자연 그대로의 흙과 풀이 보였다.
이 모든 걸 그리는 건 노가다였고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지만.
기교과 창조력 스탯이 탁월해져서 그런가.
그림 작업 효율이 더 높아졌다.
퀄이 많은 요소를 커버하는 탓에 속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나는 그림을 터치해서 크기를 줄였다.
그러자 나무들이 작아져서 내가 그렸던 숲은 내 시선 아래로 머물게 되었다.
그림 크기를 더 줄이자 드넓은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쉘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채소밭이 있고 과수원도 있다.
저 멀리 넓게 펼쳐진 들판도 보인다.
비행선이 이착륙하고 전투 차량이 움직이기 편하도록 넓은 아스팔트 도로도 그려 넣었다.
그 도로는 서울 지역까지 이어졌다.
산도 그려 넣을 생각이지만.
역시 금방 완성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산을 제외한 몇 군데 자연 풍경을 완성한 후에 AI 2050에게 보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6일이 소요됩니다.
날짜가 지나는 동안, 내 코인도 쌓여서 한 번 더 속도 스탯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랜드 코인 1024가 소모되었다.
『명화 작가 38레벨
명화 시간 : 16
명화 기교 제어 : 14
실행 창조력 : 3
그랜드 코인 : 0.』
창조력을 올리고 싶었지만, 워낙 방대한 그림을 그려야 해서 속도를 먼저 올렸었다.
이틀 후면 올차드 팬 미팅이 있는 날.
H 호텔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