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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77화 (77/153)

결혼식, 그리고 작은 징조 3

“애플 수 그림요? 아, 예예. 당연히 좋아하지요.”

이 시점에 수호가 애플 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강민철은 의아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애플 수 그림은 그가 한때 열렬히 좋아했던 미술품이라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애플 수 그림은 정말 좋아했습니다. 아포칼립스가 닥친 후, 그는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긴 하더군요. 아마 그의 그림을 다시 볼 수는 없겠지요.”

“그의 그림,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예?”

수호는 화제를 바꾸었다.

“전투 돌입하기 전, 이제 35분 남았군요.”

“예. 준비는 다 맞췄습니다. 전투 인원들은 전부 대기 중입니다. 언제든 명령이 떨어지면 전투 가능합니다.”

“네. 그럼 준비된 사항을 점검하며 잠시 기다리십시오.”

“예.”

강민철과 젊은 남자가 각자 자리로 가서 앉자 수호는 2050에게 말했다.

“준, 타블렛 창 띄워줘.”

“네, 알겠습니다.”

“D 구역의 탑은 지금 사진 찍을 수 있겠지? 준비해둔 푸른 불꽃 사진과 합성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2050이 답하자마자 내 앞에 2개의 디스플레이가 나타났다.

하나는 자료 사진이다.

“자료 사진이 준비되었습니다.”

수호는 내게 눈길을 줬다.

“고수, 우리가 곧 전투할 D 구역은 이제껏 전투 중에 가장 대규모 전투가 될 겁니다.”

“응.”

“지금 보이는 자료에서 청색 불길만 그려주었으면 합니다. 지금 고수의 속도라면 금세 완성될 수 있을 겁니다. 다소 급하게 그린다 해도 이전과는 다른 창조력과 기교 능력이 많은 걸 커버할 겁니다.”

“내가 아바타 모습으로 접속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할까?”

“가능할 겁니다. 그 재능은 언제 어디서든 고수에게 머물고 있으니까요. 설령 꿈속이라고 해도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점은 저에게 있는 실물 전환 능력과는 다릅니다.”

나는 자료 사진을 바라보았다.

꽤 흉측해 보이는 것이 거대한 탑 같은 건물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탑에 청색 불길이 붙어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게 뭐지?”

“D 구역 중심에 있는 탑입니다. 저 탑을 파괴해야 D 구역을 괴멸하는 게 수월해집니다. 저 탑이 건재하는 한, D 구역은 극한으로 얼어붙어 있게 되며 동시에 상급 적들에게 나타나는 잿빛 오라가 강력해집니다. 저 탑을 파괴하는 건 2000도 가까이 되는 불길로 태우는 것뿐입니다. 불길 전체가 푸른빛으로 타올라야 그 정도 온도가 될 듯합니다.”

“그래서 청색 불길을 그리라는 거구나.”

“저 탑 자체를 푸른 불꽃으로 뒤덮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서 고수에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알았어. 지금 그림을 그릴게.”

“35분, 아니 40분 안에 그림 완성 가능하겠습니까? 저 탑의 형태가 수시로 변하는 탓에, 가장 최근 사진을 찍기 위해 불가피하게 그림 작업 시간이 촉박해졌습니다.”

“아마도. 그림 완성이 가능할 것 같아.”

나는 3D 디스플레이에 입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난 펜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그 펜은 내 손을 인식했다.

“아, 이런 방법으로 아바타가 된 내가 여기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

2050이 내게 설명해주었다.

“이런 상황이 있을 거로 짐작했던 수호님이 2022년도의 유하준 박사님에게 미래형 타블렛 개발을 부탁했었습니다. 박사님에게 부탁하는 일은 테이님이 대신 해주셨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유하준과 정테이의 역할은 이처럼 두드러졌다.

나는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펜을 잡았다.

내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없어서 낯설었지만, 탁월해진 내 기교 능력 탓인지 금세 익숙해질 듯하다.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자료 사진의 탑만을 그대로 가져와서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곳에서 아바타의 모습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스케치를 해 나갔다.

본래 그림 작업 속도보다 12배속으로 빠른 속도.

이런 속도를 손으로 직접 그리게 되면, 팔과 어깨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실제 육신이 아닌 아바타 몸체라서 상관없다.

가상의 상태에서 그림을 그려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고 기분이 묘했다.

금세 스케치가 끝나고 채색에 들어갔다.

내 펜이 빠르게 슥슥 스쳐 지나갈 때마다 푸른빛의 불길이 살아나며 타오르는 듯했다.

한창 그림 작업에 몰입하는 도중, 2050의 목소리와 수호의 말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D 구역 전투 돌입 10분 전입니다. 비행선이 D 구역에 접근합니다.”

“적의 상황은?”

“주변의 모든 구역에서 D 구역으로 대부분 몰려와 있는 상태입니다. AA급 괴수 20마리, A급 괴수 100마리. 비행하는 B급 괴수가 40마리입니다. 그 외에 군대가 2만 마리에 달합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지역에는 적이 둥지를 들고 거점을 둔 구역이 있다는 것을.

생존자들은 그 구역을 대부분 알파벳으로 구분한다고 했다.

평상시에는 자기 영역을 빠져나오지 않다가, 하늘이 핏빛으로 붉어지고 무르익으면...

일부 적들은 사냥하기 위해 생존자들을 위협한다고 했다.

적들은 하늘이 핏빛으로 붉어지곤 하는 주기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하늘이 붉어지는 이유는 어느 순간 나타난 정체불명의 별들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별들은 낮이고 밤이고 모든 곳에 항상 떠 있다고 들었다.

그 별들은 2023년도 즈음에 나타나는 아포칼립스의 본격적인 징조가 되었었다.

지금은 하늘의 붉은 기운이 옅어진 상태.

그러니까, 적들이 자기 영역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은 시기라는 거다.

덕분에 수호의 비행선이 꽤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적들은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거고.

수호는 이 시기에 적의 영역을 기습하는 거다.

물론, 비행선이 적의 영역 안에 들어서면 총공격을 받게 될 터다.

“준, D 구역 중앙 탑에 미사일 조준한다.”

“조준 완료입니다.”

“강 지휘관님, 지금 전투기 출격해서 비행선을 호위합니다.”

“예, 전투기 출격하겠습니다.”

“송지환 씨, 드론 조종팀 출격할 준비 하라고 이르십시오. AI가 조종하는 전격 드론이 먼저 나서고, 공중전이 끝나고 나면 착륙하기 전에 투입합니다.”

나는 제법 두꺼운 금속 유리를 통해 보이는 바깥 풍경에 눈길을 힐끗 주었다가, 다시 그림 작업에 집중했다.

전투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있던 강민철은 앉았던 자리에서 내 쪽에 시선을 주었는지.

그가 수호에게 묻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김 지휘관님, 저 그림은 무엇입니까? 그림이 저절로 빠르게 그려지고 있군요. 설마 AI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가요?”

지금 강민철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겠다.

내 아바타 모습은 스마트 전용 안경을 써야만 보이고, 내 말소리도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쉘터의 AI가 뛰어나긴 해도, 저런 수준의 예술적인 능력까지 갖추고 있진 않았습니다.”

“그럼, 저 그림은 무엇입니까? 조금 전에도 AI와 대화를 하는 거로 여겼는데. 그게 아닌 것 같군요.”

“강 지휘관님,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누구의 그림인지.”

“저런 그림은 애플 수만이 가능하겠지만, 그의 그림일 리는...

그때 2050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D 구역에 들어서기 전 5분 전. 전투 돌입하기 전 2분 전입니다. 2분 후에, D 구역 중앙 탑에 소형 미사일 8발 발사합니다. 공중 B급 괴수 40마리에 초소형 유도 미사일 40발 조준 완료입니다.”

2050의 말소리에 통제실의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는 잠시 그림 그리는 걸 멈추고 통제실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내 눈이 절로 커졌다.

저 멀리 공중에는 흉측하고 커다란 공중 괴수들이 날갯짓하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들도 전투 대기 중인 것 같다.

나는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마음이 심히 동요했지만 그걸 내색할 수가 없었다.

긴박한 와중에도, 수호가 나를 의식한 듯 눈길을 주었던 탓이다.

동요하는 마음을 다스리며, 나는 그를 격려하듯 작은 미소를 보냈다.

수호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내게 뭐라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내 미소에 조금은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나는 다시 그림 작업에 집중했다.

이내 미사일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왔어도, 그림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회색 오라에 막혀 적의 피해가 상쇄되고 있습니다. 초소형 유도 미사일 재조준하고 발사합니다.”

쿠구구구궁-

피유웅-

콰광!

전투기 소리와 미사일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왔고.

우리가 탄 비행선에서 어떤 충격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해서 두려움이 일었지만.

나는 그림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중앙 탑을 향해 더 접근한다!”

“김 지휘관님!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공중의 적도 제거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탑을 먼저 파괴해야 우리의 무기가 제대로 먹힐 겁니다.”

그러다 수호가 내게 외쳤다.

“고수! 그림 완성은 아직입니까?”

나는 겨우 채색의 마지막 터치를 하고선 수호에게 답했다.

“다 되었어.”

수호가 내게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내 그림에 향했다.

탑 전체를 휘감고 삼키는 거대한 푸른빛 불꽃.

그림이지만 실제 불길이 타오르는 사진처럼 보였다.

아니, 불길이 매섭게 활활 타오르는 영상처럼 보였다.

보통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이지만.

내가 그린 그림은 순수하게 푸른빛 불길이라서 신비하고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수호는 그림을 보더니 거침없이 말했다.

“이걸 실물 전환하겠습니다.”

AI 2050이 그림 퀄리티와 싱크로율 분석할 시간은 당연히 없다.

이대로 그림을 사용해야만 했다.

강민철과 송지환이라 불렸던 젊은 남자는 긴박한 상황 중에서도 홀린 듯 그림에 시선을 빼앗겼다.

강민철이 중얼거렸다.

“정말 애플 수가 재림해서 그린 그림 같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뭘, 재림 씩이나...

2050이 계속 현 상황을 경고하듯 알려왔다.

“비행선을 호위하던 무인 전투기 5대가 파괴되었습니다. 비행선 방어막이 손상되어 해제될 수 있습니다.”

비행선에선 계속 커다란 충격과 거친 진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호는 타블렛 창을 손으로 터치해서 정면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날이 선 시선으로 통제실 유리 금속 창밖을 응시했다.

그림을 워낙 급하게 그렸던 터라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호가 내 그림만 믿고 비행선을 D 구역 중앙 지점까지 몰고 왔는데.

만일 그림이 실물 전환되지 않는다면 엄청난 낭패다.

전방 아래로 흉측한 탑이 보였다.

비행선은 제법 탑에 근접한 상황이었다.

수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강 지휘관님, 보십시오! 방금 완성된 이 그림은 애플 수라 불렸던 고수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보십시오! 그의 그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호의 눈동자에 섬광처럼 빛이 반짝인다 싶더니.

내가 그렸던 그림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빛의 거대한 불꽃은 적의 탑에 그대로 실현이 되었다.

수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는 리더로서의 장악력에 새삼 감탄했다.

D 구역 탑에 푸른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2050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수호님의 실물 전환 능력이 발현에 성공했습니다.”

와아아아!

지휘 통제실에 연결된 영상을 통해, 대기하고 있던 전투 인원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드론과 무인 전투기 전투 로봇 조종팀, 전투 차량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게 될 전투 인원들.

그들이 함성이 잇달아 일었다.

수호는 평소 감정 표현에 인색하던 녀석인데,

지금은 약간 고무된 표정으로 돌아섰다.

“전격 드론 700대 출격해서 후방에서 지원합니다!”

그러자 강 지휘관과 송지환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남아 있는 공중의 적들은 아이언 빔 공격으로 제거하겠습니다. 적의 잿빛 오라가 옅어졌습니다. 이내 사라질 것입니다.”

“대기하고 있던 전투 드론들 지상전에 투입하겠습니다.”

2050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적의 탑이 50% 파괴되었습니다. D 구역의 적을 보호하는 힘이 대폭 하락했습니다. 남아 있는 미사일을 발사해서 탑을 완전히 파괴하겠습니다. 5분 후에 지상전에 돌입하도록 착륙 준비하겠습니다.”

* * *

수호가 치르는 피 마르고 긴박하던 전투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하고 나서.

이틀이 흘렀다.

마침내 결혼식 날짜가 된 것이다.

나는 루나와 함께 아침부터 준비해서 메이크업 샵으로 향했다.

내 어머니와 루나의 어머니, 그리고 한나가 동행했다.

샵에서 메이크업 받는 모습을 사진 찍어주겠다고 진구도 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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